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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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Religion[1]

1. 개요
2. 어원
3. 종교의 정의
3.1. 중세 유럽의 정의
3.2. 근대 유럽에 나타난 정의
3.3. 경건이나 영성 중심의 정의
3.4. 실재 인식 중심의 정의
3.5. 초자연적 믿음 중심의 정의
3.6. '의식 참여에 대한 문화적 소속감' 중심의 정의
3.7. 신화 중심의 정의
3.8. 쟁점 사례: 유교는 종교인가
4. 종교의 기원
6. 종교의 사회적 기능
6.1. 정치적 구심점
6.2. 도덕, 윤리, 관습법 제공
6.3. 학문의 발전, 교육
6.4. 고전적 사회보장제도(복지제도)
6.5. 극한 상황의 극복
6.6. 사회불안 요소
6.7. 헤르만 뤼베의 이론
7. 종교의 심리적 효용 및 신앙심의 발생원인
7.1. 행복과 종교
7.2. 소속감과 정체성 형성
7.3. 이타성과 종교
7.4. 동기와 통제감
7.4.1. 통제의 소재(LOC; Locus of Control) 이론
7.4.2. 보상적 통제 이론(CCT; Compensatory Control Theory)
7.4.3. 정부에 의한 종교 대체
7.4.4. 위험 직군의 종교
8. 종교의 현재와 미래
9. 종교에 대한 비판들
9.1. 헤겔 좌파의 종교 비판
9.2. 프리드리히 니체의 종교 비판
10. 각종 오해와 통념들
10.1. 소수종교 관련
11. 종교의 계통/목록
12.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절대자나 초자연적 질서에 관한 관행, 도덕, 신념, 믿음 기타 등등의 문화 체계. 일반적으로 절대적 진리의 추구와 에 대한 숭배,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거나 삶의 궁극적인 의미와 깨달음을 추구하는 결사로 풀이된다.

2. 어원[편집]


한자 문화권에서의 어휘 '종교'(宗敎)는 불교에서 유래했으며, 전통적으로는 '으뜸되는 가르침'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유럽 언어의 "religion"은 라틴어의 "religio"에서 나온 말로, 근대 일본 학자들이 "religion"을 "宗敎"로 번역한 것에 영향을 받아 근현대 한국 및 중국 등에서도 "宗敎"라는 어휘를 "religion"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다.

키케로는 religio를 '다시 읽다', '정확히 주목하다'를 뜻하는 relegere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신들을 숭배하는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기도 하고 다시 읽기 때문이다. 키케로에 반대하여, 신학자 락탄티우스는 religio를 '뒤로 묶다'를 뜻하는 religare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히브리계 종교는 인간을 신에게 뭔가 빚진 것이 있는 노예 정도로 취급하는데, 이에 그는 하느님께 복종하고 인정하는 조건에서 태어난 인간은 경외의 밧줄에 의해 하느님을 향한 의무를 가져 당겨져 묶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어원에 기초하여 '종교'를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가 갖는 한계로는 한자어 "宗敎"건 라틴어 "religio"건 현대의 "종교(religion)"이라는 말과는 의미가 다르다는 점이 있다. 이를테면 한자어 "宗敎"는 '으뜸되는 가르침'이라는 명백히 가치판단을 담은 표현이며, 키케로 또한 현대에는 '종교'라는 말로 통칭할 현상을 "religio"와 "superstitio"라는 별개의 표현으로 쪼개서 분류한 바 있다.[2] 이처럼 현대의 '종교'라는 말은 그 어원과는 의미가 상당 부분 달라졌다.

3. 종교의 정의[편집]


종교학, 신학,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등 여러 학문에서 종교를 정의하고자 시도했다. 여러 쟁점이 남아있지만,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로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있다:

  • 일반인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해낼만한 '종교'에 대한 간단명료한 정의는 대부분 각각 다양한 반례에 부딪힌다.
  • '종교'의 정의는 그 자체로 종종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쟁점에 얽혀 있고는 하다.

앤서니 기든스는 《현대사회학》에서 종교가 아닌 네 가지를 설명했다:
  • 종교는 일신론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 종교는 도덕적 규범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 종교가 반드시 세계를 해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 종교는 초자연적인 것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3.1. 중세 유럽의 정의[편집]


중세 유럽에서 종교는 인간과 신의 관계 속 여러가지의 상위 또는 집합 개념이 아니었다. 종교는 신에 대한 개별적인 생각과 행위—경건이나 기도, 숭배 등—를 의미했다.

3.2. 근대 유럽에 나타난 정의[편집]


유럽에서 벌어진 종교 분쟁 이후, 종파화에 의해 다양해진 숭배 방식들을 극복하고자 그리고 종교 간의 몰이해로 인한 분쟁을 반성하고자 사람들은 종교 간의 차이 속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인간과 신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형태들은 이렇게 근대에 등장한 종교 정의로, 모든 사람에 통용되는 자연 종교와 사회적/문화적 상황에 놓여진 초자연적 계시로 분리되었다.

자연 종교는 모든 사람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보편적 종교라는 개념이다. 점차 초자연적 계시가 문제시되면서, 영국에서는 자연 종교를 중시한 이신론이 발흥하게 되었다. 제1대 체버리의 허버트 남작 에드워드 허버트는 참된 종교의 5가지 보편 원칙을 주장했다. 랠프 커드워스는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윤리적 일신론에 기초한다고 주장했다. 존 로크는 이성이 덕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계시를 자연 종교의 적합한 이해를 위해 있는 촉매제라고 주장했다. 그에 반대하여 매튜 틴들은 자연 종교가 이미 모든 윤리적 의무를 포괄하며, 계시와 자연 종교는 각각 다른 방식의 동일한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틴들은 모든 초자연적 계시는 이성적으로 원리를 밝혀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존 트렌차드는 인간의 타고난 '경신성'을 주장해, 이러한 경신성으로 자연적 일신론이 다양한 종교 전통들로 타락했다고 주장했다.

요한 잘로모 젬러는 자신의 성경과 계시의 구분을 종교에 각각 대입해, 두 가지의 종교 형태를 주장했다:
  1. 공적-역사적 종교는 역사적으로 전래된 성경, 교의, 신앙고백에 근거한 종교이다.
  2. 사적-윤리적 종교는 각 개인의 종교적 확신에 근거하여, 보편적 윤리적-정신적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이다.
젬러는 윤리적 종교인이 더 성숙한 종교인이라고 보았으나, 이것이 역사적 종교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후,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신이나 윤리와 분리하며 종교 개념에 혁명을 일으켰다. 자세한 것은 §3.5 참고.

또한,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카를 마르크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세속주의적 종교 비판은 종교에서 멀어지는 경향을 대중화시키는데 기여했다.

3.3. 경건이나 영성 중심의 정의[편집]


임마누엘 칸트에 의해 행해진 신 존재 증명 비판 이후,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당대 지식인들로부터 종교를 변호했다.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의 본질을 형이상학이나 윤리와 구별해, 직관과 감정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무한한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 또는 감각과 호기심이 바로 종교이며, 무한한 우주와 달리 종교인은 유한하기 때문에 종교는 필연적으로 다원적 성격을 가졌다. 또한 슐라이어마허가 종교 개념을 신 개념과 구분하면서 종교에 대한 새로운 재이해의 가능성이 열렸고, 자연 종교를 형이상학과 윤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비판했다.

울리히 바르트는 슐라이어마허의 종교 이해를 계승해; 종교적 자기 및 세계 해석의 발전, 명료화, 및 표현을 네 가지 과정으로 구분했다: 문화적 "전통" (또는 자기 거리두기), "경건의 주체"와의 관계 (또는 수집), "내적 정신적 전유" (또는 자기 초월), 및 "헌신" (또는 관상).

종교심리학자들은 종교에 대해서 "영성을 증진하도록 설계된, 잘 확립된 제도의 맥락 속에서 발생하는 유의미성에 대한 탐색"(the search for significance that occurs within the context of established institutions that are designed to facilitate spirituality)이라고 정의하고 있다.[3] 즉 이에 따르면 소위 영성에 관련하여 확립된 제도와 규율, 교리가 존재할 때 그것을 종교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서 영성(spirituality)이란 초월적이고 성스러운 것의 추구로 이해될 수 있는데, 흔한 생각처럼 꼭 "영성은 좋고 종교는 나쁘다" 같은 극단적인 주장은 학술적 근거가 미약하지만, 영성은 외적인 고정점이 없다 보니 종교보다 더욱 유연하고 역동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다. 더불어 종교는 대인관계적, 영성은 개인적 같은 대조방식도 있으나 영성의 경우도 카페동호회, 수련기관 등을 많이 찾아볼 수 있음을 감안한다면 항상 들어맞는 설명이 아니다.

3.4. 실재 인식 중심의 정의[편집]


막스 뮐러는 종교를 "다양한 이름과 모습으로 나타나는 무한한 존재를 인식하는 인간의 능력,"으로 정의했다.

3.5. 초자연적 믿음 중심의 정의[편집]


세계의 많은 종교는 , 정령, 영혼 같은 초자연적 존재나 저승 같은 초자연적 장소 등에 대한 믿음을 포함한다. 이런 상식에 입각하여 '종교'를 정의하는 한 가지 방식은 곧 '종교'를 초자연적 믿음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토마스 루크만은 종교를 "초자연적이거나 초경험적인 지시체가 없는 믿음들"로서 정의했다.

이러한 접근법의 한계로는 초자연적 믿음을 중심으로 삼지 않는 종교가 관찰된다는 점이 있다. 하술하다시피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유교. '무신론 교회'의 등장, 초자연적 믿음을 배격하는 세속적 인본주의(secular humanism)를 '종교(religion)'로 규정한 미국 연방대법원 판례(Torcaso v. Watkins) 등이 쟁점적 사례. 이는 "종교"라는 명칭 자체가 현대의 문화적/정치적/사회적 맥락과 떼어서 볼 수 없음을 방증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3.6. '의식 참여에 대한 문화적 소속감' 중심의 정의[편집]


개인의 믿음을 중심으로 '종교'를 정의하는 것 자체가 종교학적으로 협소하다는 견해도 제기된다. 구체적으로는 '개인적 믿음'을 종교 유무의 기준으로 삼는 것 자체가 정교분리, 개신교 같은 영미권의 특수한 문화적/사회적 배경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믿음'을 중심으로 한 종교관의 한계로는 '의식 참여' 및 '소속감' 등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간과한다는 점이 지적되고는 한다. 이를테면 '종교가 없다'고 대답하는 많은 일본인들이 여전히 신사를 방문하여 의식에 참여하고는 하는 사례, 예배 같은 의식 참여를 잘 안함은 물론 신앙심조차 희박한 많은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여전히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소속감'을 이유로 교회에서 관혼상제를 하고 국교회 신자로 남아있는 사례 등이 대표적.[4]

3.7. 신화 중심의 정의[편집]


루돌프 오토의 영향을 받은,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사회적 산물이자 경험자의 역사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성스러움"을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이해했다. 그는 또한, 성스러움의 계시가 될 수 있는 "신화"—그에 의하면, 과학은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답한다면, 신화는 그것이 "왜" 존재하는가에 답하는 것이다—를 진리와 실재의 문제를 다루는 특별한 이야기로 규명했다. 따라서 성스러움은 인간 본성의 보편적 특성이며, 신화를 제거하려는 모든 노력(근대 신학자들)은 진리를 파괴하는 것이 된다.

J. R. R. 톨킨은 종교를 기원과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인간의 열망에서 비롯된 상상력의 포착과 정보의 전달이 이루어지는 서사로 이해했다.

톨킨과 많은 교류를 했던, C. S. 루이스는 톨킨의 종교 이해를 통해 그리스도교를 모든 신화의 성취인 "진정한 신화"로서 이해했다.

3.8. 쟁점 사례: 유교는 종교인가[편집]


이처럼 '종교'의 정의가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가 바로 유교다. 유교에서는 제사 등 '종교적 요소'로 볼만한 요소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동시에 괴력난신에 대한 논의에서 나오듯 초자연적 믿음을 상대적으로 도외시하는 등 '종교가 아닌 철학'이라고 보일 요소 또한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유교가 대부분의 종교학 교과서에서 종교의 일종으로 다뤄짐에도 불구하고 "유교는 종교가 아닌 학문이므로 '유학'으로 부르는게 맞다" 같은 논쟁이 일반인들 사이에서 종종 벌어지는 이유 중 하나. 상술했다시피 유학자들 본인이 전통적인 의미에서 유교야말로 '으뜸가는 가르침(宗敎)'으로 칭한 것을 고려하면 아이러니.

이러한 논쟁이 문제가 되었던 대표적인 사례가 16세기17세기를 걸쳐 가톨릭에서 벌어진 이른바 '전례 논쟁'. 마테오 리치를 위시하여 중국 현지 문화에 밀착한 선교 방침을 추진했던 예수회에서는 '유교는 종교가 아닌 철학이며, 곧 그리스도교 신앙과 양립가능하다'는 입장을 옹호했으나, 조상 제사 등의 문제로 인하여 끝내 교황청에서는 예수회와 다른 노선을 취했다. 결국 조상 제사 금지로 인해 강희제, 옹정제 등은 그리스도교 선교를 금지하는데 이르렀다.

이러한 사례는 '종교'의 정의 자체가 정치적/문화적 사안 등과 불가분이라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나아가 현대의 서구적 '종교' 개념이 중국으로 유입된 이후, 강유위가 전통적 유학을 서구적 의미에서의 '공교(孔敎)'로 재편하고자 했던 시도, 그리고 공식적으로 무신론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공자학원 등 유교를 적극적으로 선전하는 것 또한 그 현대적 사례.

4. 종교의 기원[편집]


종교의 기원은 명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종교라는 분류 자체가 칼로 자르듯 나눌 수 있는 명확한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선사 시대부터 매장의식 등의 흔적이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굉장히 오래전부터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볼 뿐이다.[5] 물론 초기의 이러한 흔적들이 현대적 의미의 종교와는 거리가 멀긴 하지만, 종교가 어떠한 경로를 통해 만들어지고 발전되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신앙이나 믿음은 인류가 모르는 것을 설명하고 도덕규범을 정하기 위해 존재해 왔다. 자연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경험을 문자의 형태로 보관할 수 없었던 시절엔 번개화산 폭발 같은 자연 활동은 인간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범주에 있었다. 또한 짐승들의 습격이나 외적의 침략도 한정된 정보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으며, 이는 불확실한 미래로 인한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화물 신앙에서 보이듯 신기하고 새로운 문명을 만나게 되면 그것이 신앙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류는 최초의 종교 형태라 여겨지는 토테미즘, 샤머니즘, 애니미즘 등의 형태로 자연 현상을 이해하고, 여기에 구전으로 내려오는 유용한 경험 등을 접목시키고 도덕 규범을 만들어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지식을 전승시키는 방법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종교의 본격적인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히 밝혀진 게 없으며, 사람만 종교를 가진 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대체로 오늘날의 추세는 크게 3가지로 나뉜다. 1)종교를 가진 집단이 없는 집단보다 유리해서, 2)집단의 생존에 유리한 특성이 종교를 만들게 해서, 3) 바이러스가 퍼지듯이 그 개념이 부모-자식으로 연결돼서. 물론 3가지 중 어느 것도 아직 결정적이지는 못하다.

한편 동물들도 무리지어 생활하는 종들은 유행가 같은 그들만의 문화가 있는 경우가 있고, 일례로 벌허스 프레더릭 스키너의 비둘기 실험에서 원시적인 형태의 미신이라고 생각 할 수 있을만한 일이 발견된 적도 있다. 다만 기억할 것은, 그런 상관관계의 착각이 원시적인 미신과 동일한 메커니즘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복잡한 종교로 발전되는 과정은 아직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내용이며 미지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대략적인 실험내용은 이곳에서 확인가능하다. 영문으로 된 원문.

5. 종교의 분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종교/인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종교의 사회적 기능[편집]



6.1. 정치적 구심점[편집]


종교는 정치적으로 사람을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수행한다. 단군신화, 박혁거세 등 고대의 왕조는 스스로를 신의 자식으로 칭했고, 현대에서도 한인타운의 교회 커뮤니티나 한국의 서울중앙성원도 해당 사회의 사람들을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수행한다.

에밀 뒤르켐은 《종교 생활의 원초적 형태》에서, 이 형태가 토테미즘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한 사회의 핵심 가치들을 대변하는 토템들은 집단의 상징이 되며, 사실상 집단 자체와 그 가치들에 대한 숭배의 대상이다. 그는 문화적으로 생성된 의식과 제의의 사회적 기능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뒷받침해 준다고 생각했다. 그는"사회적 결속"이라는 기능에 의해 종교가 미래에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으리라 추측했다.

그동안 학계의 인식은 인구와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게 되고, 농경시대로 변환되면서 종교가 생겼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터키에서 12,000년전의 종교시설물이 발견되면서 가설이 깨지게 되었다. 수렵시대에 생존에 직결되는 것도 아니고, 수많은 돈과 인력이 필요한 것임에도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만큼 종교라는 것이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데, 큰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교의 영향력은 전세계의 거대 건축물로도 알 수가 있는데, 고대의 스톤헨지부터 모아이, 피라미드, 하기아 소피아, 블루 모스크, 성 베드로 대성당, 불국사 등등 종교 건물들은 항상 당대의 최고의 기술력이 총집합된 결과물이였다.

6.2. 도덕, 윤리, 관습법 제공[편집]



전통적으로 종교는 사회에 도덕과 윤리, 관습법을 제공해왔다. 이를 통해 사람들의 이기심을 억눌러 사회를 통합하는데 기여하였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살인, 도둑질 등의 강력범죄를 규탄하고 신도들로 하여금 이를 저지르지 말도록 교육한다.

6.3. 학문의 발전, 교육[편집]


고대사회의 주술사, 중세의 성직자들은 모두 고도로 교육받은 엘리트들이었다. 수많은 학문들이 이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문자의 발명으로 지식의 축적이 가능해지자 종교는 성서를 중심으로 여러 학술서적을 편찬했다.[6] 이렇게 축적된 지식은 성직자가 사회의 지식인으로서 지도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만들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대 그리스를 중심으로 과학지식이 발달했지만, 여전히 자연현상을 설명할 만한 충분한 기반 지식이 부족하고, 이를 연구할 인재를 기를 교육적 기반이 부족하여 과학에 대한 개념이 본격적으로 성립하는 근대까지는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으로서 종교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렇게 만들어진 학문들을 어린 학생들에게 상술한 윤리와 함께 교육하였다.

6.4. 고전적 사회보장제도(복지제도)[편집]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종교는 사회체제의 보호장치로서, 혹은 사회체제의 강제장치로서 어느 정도의 권능과 사회적인 책임이 생기게 되었다.

고대 로마인들은 빈민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빈민구제가 빈민을 더욱 타락시킨다고 보았다. 로마인들은 부양해야 할 사람들을 특별히 자신들이 베푼 서비스를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사람들만을 돌보았다. 정부에 의해 실시된 무료급식은 고도의 정치성을 띤 것이었고, 개인적으로 실시한 구제도 과시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다. 하지만 로마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서며 국가가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장기간 복지 정책을 행하기 시작했고, 로마가 멸망한 이후에도 천년 가까이 종교 활동은 봉사에 상당히 기여하며, 20세기에 와서야 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 등의 형태로 다시 국가가 복지 정책을 행하는 주체로 돌아오게 되었다. 비록, 봉사 자체는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교세 확장에는 효과가 별로 없기는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 종교의 이미지를 좋게 포장할 수 있으므로 도움을 받는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고 반대로 보람이나 자기만족등이 이유인 경우도 많다. 이는 일본의 종교 선교, 봉사의 예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6.5. 극한 상황의 극복[편집]


종교는 인간을 선행으로 이끌고, 삶의 고통을 줄여주며,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주도록 하며, 나아가 인간이 하나의 종교적 집단을 이루어 상호 부조하고 사회집단 내에서의 선과 정의를 추구하며 집단이 오래토록 유지되도록 돕는다. 종교가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에 관하여는 사람마다 조금씩의 견해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대체로 위와 같은 생각에 수렴한다.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종교를 인간이 역사의 폭압(Terror of history)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정의한다. 즉,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극복해낼 수 없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종교라는 것이다.

토끼호랑이를 만났다고 생각해보자. 토끼와 같은 작은 동물이 거대한 호랑이를 만나면 오히려 뻣뻣하게 굳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픽 쓰러지는 현상을 보인다. 도망을 친다면 조금이나마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는데도 말이다. 반면 인간은 토끼와는 다르게 종교를 만들어낼 줄 아는 동물이다. 내 뒤에 호랑이보다 더 큰 영험한 신이 있다고 믿어서, 그 신이 도와줄 것을 믿고서 있는 힘껏 도망친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도망친 인간은 생존할 확률이 높을 것이고, 그렇게 도망친 인간은 더 많은 자손을 남길 것이다.

마을에 경찰서를 찾아보기 힘든 먼 과거에 태어났다고 생각해보자. 치안유지에 투입되는 인원은 턱없이 부족하고 인구밀도도 낮아서, 어떤 사람을 죽여서 감쪽같이 숨겨버릴 수도 있다. 인류는 대부분의 시간을 지문도, 사진도, 녹음도 없는 전근대사회에 살았다. 모든 사람들이 남몰래 죄를 짓고 이를 평생 숨겨둔 채 살아가고는 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사회에 죄와 부도덕이 판치고 사람들이 서로 불신하게 되어 집단이 붕괴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세상 모든 종교는 '누가 지켜보지 않더라도 선행을 할 것'을 요구하며, 악한 자는 결국 벌을 받을 것이라 경고한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길거리에 CCTV를 심어놓을 수는 없지만 마음 속에 종교를 심어놓는다면, 개인의 일탈행위를 완벽하지는 못하더라도 조금이나마 줄여줄 수 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종교가 강하게 심어진 집단은 더 오래 상호간의 신뢰를 유지했고, 그렇지 못한 집단은 더 쉽게 붕괴했을 것이다.

마을이나 국가에 감당하기 힘든 재해가 닥쳤다고 생각해보자. 강력한 타국의 침공일 수도 있고 자연재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미래의 이상향을 제시한다. 지금은 힘들더라도 나중에는 분명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종교는 그런 희망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뭉치게 한다.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끼리는 어려울 와중에도 돕는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보다 집단을 이루었을 때 훨씬 강한 능력을 발휘하는 동물이다. 종교가 있는 인간집단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서로 똘똘 뭉쳐서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종교는 그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가지는 기능, 발휘하는 효과가 있다. 어려울 때 힘을 주고, 선을 권하고, 상부상조의 장을 마련해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6.6. 사회불안 요소[편집]


한편, 사회 체제의 일부로서 자리 잡게 된 종교는 여타 사회제도가 그렇듯 순기능만이 아니라 악기능도 많이 가지고 있다.[7] 종교 간의 분쟁과 그로 인한 피비린내나는 전쟁, 학살, 테러리즘유럽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했을 정도이며, 현대에 와서도 1990년 냉전이 끝난 이후부터 본격적인 분쟁의 원인으로 부각되고 있다. 특히 2001년에 터진 9.11 테러는 종교분쟁이 본격적으로 부각된 특이점으로서 매우 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종교가 민중의 편에서 지배계급의 탄압에 맞서 싸울 때도 있었으나,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는 순간부터는 종교가 지배자의 편을 들어 그들의 지배를 정당화시키는 도구가 되기도 했고, 혹은 직접 지배권을 행사할 때도 있었기에 과거보다는 종교 자체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

실제로 선진국일수록 종교에 대한 열망이 줄어들고 개발도상국일수록 종교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영향이 강하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게 선진국 사람들은 비교적 오랜 기간동안 먹고사는 데 큰 걱정이 없으며 교육수준이 높으니 종교의 가르침에 의존할 필요도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종교를 사용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단, 이것이 선진국이라고 해서 무조건 비종교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래된 기성종교들이 수직적인 명령구조로 인해 종교가 현대사회에 맞춰 변하는 것을 방해받는 사이, 신흥종교가 이 틈을 타 현대 문명에 더 밀접한 신앙과 규범을 내세우며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고, 그 중엔 사이비 종교도 급속히 퍼져서 사회 불안의 요인이 되고 있다.

또한 종교가 비록 자연에 대한 설명은 과학에게 그 권위를 넘겨주었지만 윤리적인 영역에 있어서는 아직도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현대 도덕 역시도 거슬러 올라가면 종교의 영향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에[8] 선진국이라고 무조건 비종교적인 것은 아니다. 사실 국가 단위가 아니라 개인 단위로 하더라도, 무신론자마저도 부모님의 산소는 정성스럽게 돌보는 등 어느 정도는 종교적인 행동이 관찰된다. 현대 한국의 그리스도교나 불교 같은 메이저 종교는 단순히 신앙생활 뿐 아니라 친목과 모임 공유 그리고 여러 방면 정보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역할의 기능을 하고 있고, 아직 이 두 종교가 한국의 정치와 사회 등에 미치는 영향력이 꽤 크다. 서울 강남3구의 대형교회와 사찰들이 괜히 SKY Church 혹은 SKY Temple이라고 불리는게 아니다.

종교학자 찰스 킴볼(Charles Kimball)은 종교의 타락을 경고하는 다섯 가지 징후로 다음과 같이 꼽았다.
1) 절대적인 진리 주장
2) 맹목적인 복종
3) 이상적인 시대 확립
4) 목적을 위한 수단의 정당화
5) 성전(聖戰) 선포

전근대의 상당수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종파들, 또 현대의 맹목적 과격신자들이나 사이비 종교 신자들 상당수,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 알 카에다, 무슬림 형제단 등의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들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또 현대에 세력을 확장 중인 힌두교 근본주의 집단[9]이나 미얀마의 아신 위라투, 969운동 같은 불교의 급진과격파들도 다섯 가지 전부는 아니라도 상당수 요소를 겸한다.

종교와 지능 간 관계에 대해 메타분석을 한 연구에 의하면, 지능과 종교는 부적(負的) 상관관계(Negative Correlation)[10]를 가진다. <The Relation Between Intelligence and Religiosity: A Meta-Analysis and Some Proposed Explanations> 해당 문헌에 따르면, 지능이 높은 사람은 종교 도그마에 대해 저항적(Resistive)이며, 분석적인(Analytic) 사고 스타일을 가지고 있고, 종교가 가지는 기능(자기조절 등)을 지능이 담당하여 종교에 대한 필요성이 줄어든다고 말한다.

또 다른 문헌인 <Average intelligence predicts atheism rates across 137 nations>에 의하면 지능과 종교는 부적 상관관계(Negative Correlation)를 가진다.

6.7. 헤르만 뤼베의 이론[편집]


헤르만 뤼베는 계몽주의 이후에도 여전히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 기인해, 종교로부터 독립한 삶의 영역과 관계 없는 삶의 영역은 종교적 실재와 관계를 맺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뤼베에 의하면, 종교는 인간이 일으키거나 변경시킬 수 없는 삶의 사건의 종합이다. 뤼베는 자신의 이러한 입장에서 종교의 기능을 정의했다. 즉, 종교는 삶의 사건에서의 우연성 또는 절대적 의존성을 능숙하게 다루고 해결해가는 경험이라고 보았다.

7. 종교의 심리적 효용 및 신앙심의 발생원인[편집]



7.1. 행복과 종교[편집]


실제로 종교성은 행복 문제를 다루는 분야인 긍정심리학에서 매우 강조하고 있는 개념이다. 심지어 어떤 연구자[11]들은 "성공적 노화의 필연적인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종교성이다" 라고까지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흐름에 있어서 비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인터넷의 일부 반종교주의자들이 이런 트렌드에 당혹스러워하듯이 "어딜 감히 종교 따위가 인간의 행복을 논해?!" 같은 유치한 공격은 하지 않는다. (특히 노인들의 경우에)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은 논문 한두 편 쓴다고 쉽사리 반박될 수 있는 주장이 "이미" 아니다.[12][13] 가장 주된 비판은 역시 용어의 정의 문제. 종교성(religiosity)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협소한 개념이고, 그보다는 영성(spirituality)이나 초월성(transcendence) 같은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14]

이렇게 종교는 행복에 있어 여러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만 위에서 나온 것처럼 종교가 행복의 필수조건이진 않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편안함을 제외하면 종교인과 비종교인 사이에서 행복감에 차이가 발견되지 않았고[15] 편안함에서도 차이는 단지 0.6%밖에 되지 않았다. 국제적으로 30년간의 연구를 종합한 메타연구에서도 종교의 영향력은 작았다.[16][17] 즉 종교가 행복에 좋은 영향을 주긴 하지만 그 영향은 다른 사회적 요인들처럼 작다.

또한 인간은 그들에게 행복감을 준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이지는 않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종교가 행복감을 주는 데에 있어서 강력한 성능을 발휘한다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 종교가 앞으로도 무조건 쇠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유럽사회에서는 그러한 종교의 이점에도 불구하고 쇠락하거나 세속화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18]

7.2. 소속감과 정체성 형성[편집]


외현적 종교성에 한정되기는 하지만, 종교는 또한 그 신자들을 사회적으로 결속시키고 자조집단을 형성하게 함으로써 소속감을 느끼게 한다. 이를 통해 신자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집단에 근거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 혹은 강화하고, 자신이 외톨이가 아니라 어딘가에 소속되어 서로 돕고 도움 받는 관계임을 실감할 수 있다. 개인의 행복이나 인격의 도야, 수양등도 중요한 순기능이지만, 사회의 일부로서 소속되어 관계성(relatedness)을 유지하며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자 하는, 가장 기본적인 측면의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점도 분명 간과하기 어렵다. 특히나 이는 사회적 연결망이 붕괴하기 시작하는 중장년~노년기 개인들에게 매우 반가운 소식이다.[19]

7.3. 이타성과 종교[편집]


대부분의 종교는 공통적으로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하게 살면서 다른 사람을 위하라고 가르친다. 물론 교리부터가 개판 5분 전인 종교도 역사상에 존재하지만, 그런 종교는 일반 사회의 배척을 받기 때문에 성장하지 못해 교세가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유사 이래 종교는 넓게는 세계구전쟁부터 시작해서 좁게는 키배를 유발하는 떡밥 자리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다. 때문에 종교가 갈등의 선동자로 여겨지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인류학자 스캇 에트란의 연구에 따르면# 3,500년 동안의 주요한 충돌 중 60%가 종교적인 동기 없이 이루어졌으며, 종교적인 동기에 의해 야기된 전쟁은 7%에 불과한 소수라고 한다. 종교적 동기와 전쟁 사이의 연관 관계를 0~5 단계로 나누어서, 그 중 3단계 이상의 것이 7%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의 저서 만들어진 신에서 설령 전쟁의 동기가 종교가 아니더라도 종교가 전쟁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쓰이는 예는 수도 없이 많으며 그것만으로도 종교의 역기능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종교적인 것과 이타적이거나 많이 베푸는 행동 사이의 관계(Religiosity and Generosity)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아직까진 단일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어떤 연구들[20]독재자 게임(dictator game)과 같은 다양한 가상적 상황에서 종교인들이 비종교인들보다 더 이기적인 선택을 보임을 발견했다. 게다가 이들은 실제 사회적 상황에서의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자기 자신이 굉장히 이타적이며 활수한 사람이라면서 스스로의 친사회성을 과대평가하는 경향[21]을 보인다고 한다. 한편 진화심리학자 아라 노렌자얀(A.Norenzayan)[22]은 종교의 친사회적 가치를 역설했는데, 한 논문에서[23] 그는 십자가 등의 신적인 심상으로 점화(priming)된 개인은 자원배분 게임에서 유의미하게 후하게 베풀어주는 모습을 보였다고 보고했다. 이유인즉슨, "은연중에 신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만들어서" 더욱 친사회적으로 나누어주고 베푸는 행동으로 유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24] 그 외에도 다른 진화심리학 논문에서도[25] 종교의 친사회성을 강조했는데, 여기서의 설명은 "초자연적 실재처벌에 대한 공포가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 이익만을 무절제하게 추구하지 못하도록 붙잡아 줄 수 있다" 는 것이다.

이렇듯 종교와 도덕성의 상관관계는 아직 미궁 속에 있으며 다른 주제들이 그렇듯 단순한 관계가 아닐 확률이 높다. 이러한 종류의 연구에서는 내집단/외집단 변인[26]이나 사회경제적 지위(SES) 및 참가자 교육년수 변인[27]의 통제 문제, 내적 종교성과 외적 종교성 여부[28]가 굉장히 중요하다. 그리고 연구자(들)의 종교적 배경이 무엇인지도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한편 종교인들은 유의하게 더 불의(injustice)에 대한 민감성이 높고, 타인의 잘못에 대해 관용보다는 엄정한 처벌을 원하며, 때때로 이것은 엄벌주의로 연결되곤 한다는 연구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꼭 사적 제재와 같은 수단에 대한 지지를 의미하진 않는다. 어떤 연구자들은 이에 대해 심지어 "하느님에게 처벌을 아웃소싱한다" 고까지 했을 정도였다.[29] 그러나 이런 지각된 정의(perceived justice)의 측면에 대해서는 무조건 나쁘다기보다는 상황과 맥락에 따라 얼마든지 적응적이고 친사회적인 측면도 있으니만큼, 이를 근거로 "그러니까 종교는 좋다/나쁘다" 같은 식의 초보적인 이분법적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비록 현대 법학의 흐름이 회복적 정의에 초점을 두고 있긴 하지만, 개인이 종교가 있든 없든 우리 사회에서 응보적 정의(retributive justice)의 가치는 분명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더 자세한 내용은 도덕과 종교의 관계 문서도 같이 볼 것.

7.4. 동기와 통제감[편집]


동기(motive)를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에게 통제감이라는 주제는 20세기 중엽부터 종종 종교성과 함께 엮여서 논의되어 왔다.

7.4.1. 통제의 소재(LOC; Locus of Control) 이론[편집]


초창기의 통제감에 대한 연구는 통제의 소재(LOC; Locus of Control)라는 개념에서부터 시작했는데, 자기 자신에게 통제의 능력이 있다고 믿는 내적 통제소재(I-LOC), 자기 외부의 다른 무언가에게 통제의 능력이 있다고 믿는 외적 통제소재(E-LOC)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외적 통제소재가 문제가 되었는데, 초기 심리학자들은 이런 사람들은 매사에 무기력하고 숙명론적(fatalistic)이며 운과 우연 및 기회에 의존하는, 한 마디로 의지박약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쉽게 말해 이 통제소재 이야기는 굉장히 가치 개입적인 것이었다.[30] 여기서 문제는 종교는 외적 통제소재의 일부이고, 따라서 종교인들은 전부 나약하고 한심한 의지박약자라는 결론이 나온다.

통제소재 이론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공격받았는데, 비서구권의 문화아프리카계아시아계들이 주로 높은 외적 통제소재를 보이기 때문에 자칫 자문화 중심주의인종차별에 악용될 수 있음이 인식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프레드 로스바움(F.Rothbaum) 등의 연구자들에 의해 제시된 1차-2차 통제 이론이 통제소재 이론을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롭게 제기된 이 이론은 멜빈 러너(M.J.Lerner)의 공정한 세상 가설(Just World Hypothesis)에 기초하고 있는데, "세상은 공정하고 균형잡혀 있다(The world is fair and balanced)" 는 언명으로 요약될 수 있는 세계관의 하나이다. 해당 문서로. 아무튼 새 이론에 따르면 종교는 2차 통제인 대리 통제[31]의 일부로서, 전지전능한 신을 상정함으로써 개인이 공정하고 공평한 세상을 인식하도록 돕는 적응적 기능을 담당한다. 또한 어째서 종교인들이 악의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든 세상이 결과론적으로는 공정하다고 강변하려 하는지도 설명할 수 있다.[32]

7.4.2. 보상적 통제 이론(CCT; Compensatory Control Theory)[편집]


이후 유명한 종교 연구자 아론 케이(A.Kay)는 보상적 통제 이론(CCT; Compensatory Control Theory)을 제안하면서, 내적이든 외적이든, 1차든 2차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모든 종류의 통제감은 결과적으로는 "질서 잡히고 예측 가능한 세상" 즉 지각된 질서(perceived order)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근원적인 동기에 봉사하며, 어느 하나가 사용불능이 되면 다른 하나로 재빨리 옮겨갈 수 있다고 보았다. 쉽게 말해서 "내가 통제하고 있다" 는 그 자체로 본질이 아니고, "상황이 잘 통제되고 있다" 의 한 하위 분류일 뿐이라는 것. 이러한 심리를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세상은 이 이유 때문에 질서 잡히고 잘 통제되어 있다. 뭐, 아니라고? ...그렇다면 저 이유 때문에!"[33] 로 요약할 수 있겠다.(…)

케이는 이에 따라 인간의 종교성에 대해 특이하면서도 흥미로운 발견들을 다수 보고하였다. 우선, 사람은 불안할수록 신을 찾게 된다.[34] 당연하잖아? 실험 상황에서 참가자에게 내적 통제감을 낮추었을 때, 불안해하는 참가자들에게서 종교성이 높아졌던 것. 이 때문에 미국 중부, 남부, 남동부가 "바이블 벨트" 라고 불리며 극성 종교인들로 들끓는 것은 특유의 대가족 문화에 더하여 토네이도, 허리케인 등 천재지변이 많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35] 당장 직관적으로 세속적이고 신무신론적인 사회들을 떠올려 보아도, 그 국가들이 자연재해에 취약하지 않거나 경제위기에 잘 흔들리지 않는 사회구조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36]

7.4.3. 정부에 의한 종교 대체[편집]


신에 대한 개인의 신앙심은 정부에 대한 신앙심으로 자유롭게 대체될 수 있다. 실제로 중요한 선거 이전에나 레임덕으로 정부가 고생하고 있을 때에는 사회 전반의 신앙심이 증가하며, 반대로 신임 정부수반이 당선되거나 강력한 공권력을 발휘할 때에는 신앙심이 역으로 감소한다는 보고가 있다.[37] 따라서 정부가 부패가 심각하거나 합법적이지 못한 내각이 구성되어 있거나, 혹은 여러 이유로 정치적 안정성이 낮다고 느껴질 때 개인은 그만큼 신에게 "질서 있는 예측 가능한 세상" 을 요청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반대로 캐나다에서 이루어진 한 실험에서는, 참가자들 절반에게는 "현대과학이 발견한 각종 물리학적 법칙과 이론들에 따르면, 모든 자연현상은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신은 필요하지 않다" 를 보여주고, 나머지 절반에게는 "비록 현대과학이 발견한 지식과 이해가 신의 존재를 확증하지는 않으나, 그것들은 신의 통치와 능력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를 보여주자, 전자의 집단이 후자의 집단보다 자국 정부의 역량을 더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38] 요약하자면, 정치가 불안하면 신을 찾게 되고, 신의 존재에 회의감이 들면 정치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된다는 것.

연구자들은 더 나아가서 종교뿐만 아니라 각종 음모론이나 망상, 착각적 상관, 징크스 등등이 개인적 통제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더 잘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39] 일부 다국적 기업들이 모든 환경 문제와 세계적인 경제 위기의 만악의 근원이라고 여기는 것, 일부 군산복합체가 전세계의 분쟁과 전쟁을 사주하고 있다고 믿는 것, 일부 유대계 자본과 소수의 가문이 전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한다고 믿는 것 등이 전부 세계에 대한 통제감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40] 심지어 사이언스 지에 실린 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TV의 백색 노이즈 화면에서조차 "뭔가 패턴이 보인다, 이미지가 보인다" 고 보고하기도 한다![41]

7.4.4. 위험 직군의 종교[편집]


이 통제감의 연장선상으로, 전 세계 어디를 가나 3D 직업 종사자들은 종교를 쉽게 믿는다. 공무원 직군 중에서도 경찰관, 소방관, 군인, 교도관, 우체부, 환경미화원 등 고위험직 공무원들은 행정/기술직 공무원에 비해 종교를 더 많이 믿는다.

8. 종교의 현재와 미래[편집]


기본적으로 종교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설명하고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많은 현상을 증명할 수 있게 된 현대에서는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극단적 원리주의자를 빼면 종교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은 적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도 종교가 사라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종교를 논리적으로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사람은 확실하게 이성적으로 증명된 것만 믿는 존재가 아니다. 이런 비이성적인 '마술적 사고' 는 사실 비종교인에게서 조차 나타난다고 한다. 연구자 매슈 허트슨에 의하면 사람은 이런 마법적, 마술적, 혹은 종교적인 사고를 갖고 있으며, 이것 없이 이성만 강조하다보면 건강한 정신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고 한다.[42] 현재에도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미신은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어 수능미역국을 먹으면 시험에서 떨어진다, 수능날 을 먹으면 시험에 붙는다는 것이[43] 이런 비과학적 믿음의 대표적인 예시이며, 이것이 교리를 갖추고 구체화된 것이 종교인 것. 단, 현대에 와서는 이런 풍습이 실제로 효과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응원'의 목적 혹은 '성의' 정도로 행해지기도 한다.[44]

  • 위에서 다루었던 내용과 반대되는 주장으로 종교가 사람의 본능적인 욕구를 채워주기에 티모시 윌슨과 쉬나 아이엔가는 복지, (특정 수준 이상의) 자본, 성생활 등 그 어떤 조건보다 종교를 믿느냐 안 믿느냐가 행복에 더 큰 영향을 끼치며, 종교가 없는 것이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쉬울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람은 이성 만으로 사는 것이 아닌, 관계, 감성, 삶의 이유 같은 것이 근본적으로 필요한데, 이런 욕구들을 종교가 효과적으로 충족시키는 것. 유럽같은 안정적인 복지를 건설한 나라들은 종교가 쇠락하거나 세속화되었으나 경제 공황이 찾아오자 교회가 다시 늘어나는 경우도 있었다.[45][46]

종교의 미래에 대해선 가타부타 설이 많지만 대부분 근미래에도 어떤 형태로든 존속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약화될 것이라 보는 것이 중론이며, 장기적으로 하나의 문화적 관습으로만 남을 가능성이 크다. 마치 한국에서 제사를 지내지만 거기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진 않는 것처럼. 물론 종교가 탄생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은 어떤 시대가 오더라도 해결하기가 곤란한 것이므로, 이 불안을 달래 줄 종교는 앞으로도 인류의 역사와 함께할 가능성이 있다.

선진국 중심의 이론적으로는 이렇긴 하지만 실상 종교학자들과 전문가들은 현재와 근미래에 세계 평균적[47]으로 '종교인의 인구와 종교의 영향력이 계속해서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는데, 이러한 현상의 주된 원인은 다음과 같다.[48]

  • 우선 비종교인이 많은 지역/국가의 사람들이 아이를 많이 낳지 않는다. 전 세계의 비종교인의 대다수(95%)가 몰려 있는 동아시아(78.7%)와 서구권(16.3%)이 가 대표적인 예다. 이들 지역은 세계적인 저출산 고령화 지역이며, 매우 종교적인 개발도상국 지역의 이민자들이 그들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상황이다. 기존 동아시아인들과 서구권 현지인들은 비종교적이며 아이를 많이 낳지 않으나, 종교적인 이민자 이슬람 가정은 아이를 매우 많이 낳고 있다. 지금의 추세대로라면 서구권 국가에서는 종교적인 이민자들이 비율을 점점 늘리다 굉장한 숫자를 차지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물론, 생활 수준이 낮을수록 종교를 가지는 비율이 높고 종교와는 별개로 역시 생활 수준이 낮을수록 출산율이 높으므로 종교와 출산율의 명확한 인과관계가 성립되지는 않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현재 출산율이 세계 최정상급인 문화권의 사람들은(대표적으로 이슬람권 및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다수는 종교성이 매우 짙은 인구가 대부분이다. 또한 이들은 아직 이민 문호를 개방하지 않은 동북아와는 달리 서구에선 이민오는 사람들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고, 장기적으로 볼때도 서구에서나 세계적으로나 인구증가율이 가장 높기도 하다.

  • 반면 매우 종교성이 높은 개발도상국 사람들의 출산율은 익히 알고 있듯이 매우 높은 편이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나 이슬람 국가들이나 남아시아 지역의 출산율도 꾸준히 높은 지역이다. 이들 지역에서는 종교인들이 매우 많으며, 종교의 힘이 현대화된 선진국 지역보다 훨씬 막강하다. 또한 이들 지역에서도 종교인이 비종교인들보다 훨씬 많은 자녀를 낳고 있다. 또 선진국에서 나타나는 경제적 성장과 사회 변화에 따른 탈종교화, 비종교인 증가도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이런 현상을 찾을 수 없으며, 종교성이 매우 높은 아프리카, 인도나 남아시아에선 급속한 경제사회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민 대부분의 종교성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 또한, 상당수의 국민들이 기존의 기득권 종파를 떠나기는 하되, 유럽처럼 세속화되지는 않고 개신교 같은 타 종파로 개종하는 브라질중남미 국가들의 경우나, 공산권 붕괴 이후 종파를 가리지 않고 종교인구 및 종교성이 대폭 증가한 카자흐스탄등의 중앙아시아, 친종교적인 국가정권의 지원 및 국민 정서나 종교의 국가 정체성화 때문에 종교인의 비율이 늘거나 여전히 압도적인 러시아, 발칸반도캅카스, 폴란드, 미얀마, 이슬람권 국가들 같은 경우도 있다. 종교인의 숫자가 줄거나, 또는 정교분리, 세속화 정도가 심한 서구권동아시아의 프레임으로 전 세계의 모든 종교권을 판단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 또, 출산율은 종교보다는 소득과 더 상관이 있다. 동아시아(정확히는 동아시아+일부 동남아 부유국)와 유럽은 잘 사는 선진국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경제적 여건이 풍족한 경우가 많고, 따라 피임약을 먹거나 콘돔을 살 돈이 충분히 있고 이는 출산율의 저하를 불러온다. 반면 개발도상국은 선진국만큼 풍족하지 않다. 즉, 아무리 종교성이 강하더라도 경제적으로 풍족해 진다면 출산율도 낮아질 것이다. 물론 종교가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모든 나라가 갑자기 선진국이 될리도 없으므로 종교인이 계속 늘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 종교의 영향과 종교인의 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종교 생활의 패턴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선진국들의 예에서 볼 수 있다. 미국, 캐나다, 영국 등의 인간 계발 지수가 높은 나라들에서는 전통적 종교 기관에 속해 있는 수는 줄어들지만, 자신을 영성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은(Spiritual But Not Religious) 사람으로 정의하는 인구가 늘고 있는 추세이다. 그리하여 일각에서는 종교의 미래가 도그마와 교리에 따른 중앙집권적 체제에서 영성에 따른 개인 중심주의로 옮겨갈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다만 이러한 예측은 서구 선진국 종교권 한정이다. 제3세계개발도상국 대다수 지역에서는 여전히 개인 영성보다 기성 제도권 종교의 힘이 압도적으로 막대하며, 이러한 추세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근미래에 세계 인구에서 종교의 영향력과 종교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현재보다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미국[49]서유럽 등의 선진국에서는 비종교인과 무신론자들이 증가하는 추세 역시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나 무종교인의 비율은 2010년 16%에서 2050년 13%로 줄어들 전망이다. 절대적인 숫자는 11억에서 12억으로 조금 늘어나지만,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큰 폭으로 줄어든다.

또한 미래에는 세계의 주요 종교 지형도 크게 바뀔 것으로 예측된다. 먼저 서구 선진국에서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힘이 약해지고 무종교, 이슬람 및 타종교의 세력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서구 등에서 세력을 잃은 그리스도교는 대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중남미, 중국남아시아동남아 일부 지역에서 강세를 보이거나 꾸준히 성장할 것이며, 이러한 개발도상국에서의 교세 성장에 힘입어 선진국의 신자수 이탈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는 계속해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50] 제3세계의 그리스도교 성장은 주로 개신교, 그중에서도 복음주의 종파, 은사주의 및 오순절교회가 주도하고 있다.[51] 또한 과거 1960~80년대 대한민국에서 그랬듯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개신교=미래지향적이며 첨단적인 종교'로 인식하고 산업화, 경제발전과 맞물려 교세도 성장하는 추세이다. 반면 서구권의 그리스도교, 특히 백인 그리스도인 신자는 아미시등 소규모 공동체, 민속촌 정도에서나 명맥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가톨릭 역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제3세계의 신자 증가 현상은 동일하며[52], 이를 통해 서구권의 신자 손실을 상쇄하고 소폭 증가세를 지속하고 있다. 이 때문에 미래에도 세계 그리스도교의 인구비율(32~34%)과 성장율은 세계의 인구 성장율에 약간 웃돌거나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될 것으로 예측된다.

반면 이슬람아랍, 북아프리카, 남아시아의 인구폭발에 힘입어 세계 인구성장률보다도 빠르게 증가하여, 21세기 중후반에는 그리스도교와 세계 1,2위를 다투는 거대종교가 될 것이며, 특히 유럽에서의 인구도 늘 것으로 전망된다. 21세기 말에는 그리스도교를 소폭 추월해 세계 1위의 종교가 될 전망이다. 단, 이슬람교 항목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이슬람교의 출산율 자체도 매우 서서히 감소하는 추세이기 때문에 21세기 끝 무렵에는 그리스도교와 세계 인구비율이 비등비등(35%)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21세기 말에는 세계 인구의 70퍼센트 가까이가 아브라함 계통의 유일신교(그중 절대 다수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를 믿게 될 것으로 보인다.

힌두교 역시 남아시아 지역의 계속되는 인구성장에 힘입어 여전히 인도 아대륙 한정으로 21세기에도 지속적으로 우위를 점할 것으로 예측된다. 단, 인도 내에서는 힌두교가 여전히 지배적인 위치에 있긴 하나, 무슬림 및 타종교인구 성장에 장기적으로는 살짝 밀릴 것으로 보인다. 세계적인 평균 증가 비율은 그리스도교와 엇비슷한 수준이다. 불교의 경우는 전통적 지역인 동아시아태국, 미얀마 등의 장기적인 저출산 여파 + 그리스도교처럼 세계적인 선교 및 타지역의 교세확장으로 전환하기 힘든 점[53] 때문에 정체 내지는 소폭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20세기 중반부터 서구권에서 불교를 믿거나 불교에 호의적인 사람들이 많아지는 추세라 서구권한정으로 불교가 확산될 가능성도 있다. 유대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유대인 인구비율은 소폭 줄어들고, 내부적으로도 이스라엘에서는 하레디 같은 정통파-극정통파 근본주의 성향 유대교인들이 늘어나고, 세계적으로는 세속적인 유대교인들이 갈수록 줄어들 것으로 예측된다. 거기다 유대인들의 제 2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도 무슬림 인구에게 추월당해 제 2의 종교 타이틀을 잃어버릴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토착 신앙과 전통 종교는 메이저한 종교들에 밀려 지속적으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한다.

세계 종교의 미래에 대한 허핑턴포스트 분석미국 퓨 리서치 센터의 조사결과(영어)에도 나온다.

9. 종교에 대한 비판들[편집]



9.1. 헤겔 좌파의 종교 비판[편집]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종교란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신이라는 창작된 관념에 투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종교를 만든 인간이 역으로 교리와 제의로부터 통제받는 소외 현상이 발생한다고 비판했다.

카를 마르크스는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계급구조와 사회경제적 소외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허위의식이 종교의 실상이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종교가 사회구조를 정당화하는 방식은 현실의 권력자나 부유층에 대한 찬양이 아니다. 오히려 '신의 뜻에 따라 더 신실하고 성실한 자가 부자가 된다'는 식의 사회적 통념을 형성하는 식으로 간접적인 정당화를 한다.[54]

9.2. 프리드리히 니체의 종교 비판[편집]


프리드리히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초인이 되어 기존의 종교적 믿음과 도덕적 가치를 초월하기를 촉구했다.[55]


10. 각종 오해와 통념들[편집]


  • 모든 종교의 본질은 사랑이다.
    • 종교와 종교인이 '변질'되었다며 비판하거나, 자신의 종교를 비판으로부터 옹호하려는 측에서 내세우는 명제이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틀린 말은 아니다. 넓은 의미의 사랑이나 황금률, 베품을 중요시 여기는것은 어느 종교던 기본적으로 강조하는 것 또한 맞다. 그리스도교를 예시로 들면 성경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며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강조하였고, 불교 역시 자비, 그리고 자비의 구체적 실천 방법으로 보시를 중시하는데 이는 사랑이라는 개념과도 교집합이 있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종교의 핵심 교리들 앞에서 무턱대고 '사랑'만을 본질로 삼아 접근했다가는 곤란해질 수 있다.[56] 대표적으로 불교의 무아와 자비는 사랑과 무관하지 않으나, 그리스도교와는 접근 방식부터 다르다. [57]

  • 종교는 한낱 비합리적이고 미신적인 한바탕의 뻘짓일 뿐이므로 진지하게 관심을 갖고 연구할 만한 하등의 가치가 없다.
    • 이와 관련해서는 종교학자 파스칼 보이어(Boyer, 2004)가 《Skeptics Inquiry》 저널에 기고한 글을 볼 것. Boyer(2003)나 레슬리 프란시스(L.J.Francis)의 다른 저작들에도 나온다.

  • 종교는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 종교는 대부분 사후세계등 증명 불가능 한게 많지만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완벽한 주장은 아니다.
    • 위와는 전제가 정반대지만 동일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주장. 이것도 마찬가지다. 종교가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것이라고 일단 가정하자. 하지만 세상에는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으면서 거의 아무도 그것에 자기 삶을 투신하지 않는 것들도 있는데, 종교는 21세기가 되도록 국제정세의 최대 핫 이슈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 이는 분명히 설명이 요청되는 것이며, 따라서 종교는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개인의 신념" 에 더하여 그 이상의 사회현상이 되어 버린 무언가인 것이다.
    • 두 번째 통념과도 이어지는 문제로, 종교에 대한 연구는 학계에 큰 족적을 남겨 왔다. 일례로 1992년, 달라이 라마는 뇌 활동 연구에 대한 협조요청을 받았다. 100명이 넘는 제자들과 fMRI 검사를 실시한 결과, 신경가소성은 물론 뇌의 외적인 형태변화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 등 타 종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회복탄력성 연구도 여러 번 이루어진 바 있다. 그들이 과학적 연구와 무관했다면, 이러한 연구를 쓸데없고 무가치한 행위라 여겼다면 이런 결과를 얻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 종교는 믿으면 믿을수록 좋지 않은 것이다.
    • 성장하는 신앙심의 도달점을 광신도로 상정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결론이다. 실제로는 종교를 믿어서 마음의 평안을 얻는 사람도 많다. 참고로, 이런 식의 신앙심을 가리켜 종교 연구자들은 "credo quia consolans" 라고 부른다. 즉 "그것이 내게 위안이 되기 때문에 믿는다" 라는 뜻.[58] 신앙주의 문서에도 나온다. 물론 종교에 지나치게 심취해서 자기 혼자 마음은 편하지만 자신의 생활과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지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결국 적당히 하느냐의 문제이다. 즉, 종교를 과하게 믿는 것이 안 좋다는 것이지, 종교를 믿는 행위 자체가 안 좋다는 것이 아니다. 비단 종교 뿐만이 아니라 어떠한 것도 과하면 좋지 않다.

  • 종교인들은 무식하며 아는 것이 별로 없다.
    • 예나 지금이나 지식은 종교와 무관하지 않다. 오히려 과학혁명 이전에는 종교인들이 사회의 지식인이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수많은 대학이 세워졌으며, 고려와 조선은 불자와 유학자들이 이끌어가던 나라였다. 과학혁명 이후의 역사만 논한다고 쳐도, 멀게는 마이클 패러데이에서부터 가깝게는 프랜시스 콜린스[59]까지 박식한 종교인들도 적지 않았으며, 이들은 무슨 맥스웰이나 에이브러햄 링컨의 사례처럼 반박할 여지조차 없는, 진짜배기 독실한 신앙심을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 이 편견을 가진 사람들은 "종교에 종사하는 사람"과 "종교를 가진 사람"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종교인이 목사, 신부, 승려, 랍비, 선지자, 기타 종교적 지위를 가진 사람인지, 해당 종교의 신도인지는 문맥을 볼 필요가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느 쪽을 의미하든 사람에 따라 다르다.

  • 종교적 몰입은 일부 무지하고 피암시성이 높은 저학력 하류층에서 나타나며, 교육을 통해 계몽되어 높은 식견과 안목을 갖게 된 지성인에게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 일부 극단적인 신합리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현대의 뇌신경과학자들은 브랜드 충성도[60]와 같은 다른 사회적 몰입 현상에 대해서도 종교적 몰입과 정확히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설명될 수 있음을 보였다. 이것은 단지 계몽이냐 반계몽이냐 같은 이분법적 차원이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뇌가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보편적인 현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가난한 사람일수록 종교에 많이 의지하지만, 부유한 사람들은 종교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다.
    • 현사회는 옛날의 강박적 종교와 다르게 반대양상을 보인다. 오히려 서유럽보다 동유럽의 무종교 비율이 높다. 대표적으로 독일의 경우 구 동독지역 무종교비율은 75~80%에 달하지만 서독의 경우 25% 내외이고 독일 평균은 33% 정도이다. 종교인 비율은 영국의 경우 51% 호주는 62% 미국은 77%이다. 반면 구 동구권의 경우 그 반대이다. 대표적으로 구소련 국가 에스토니아가 무종교 비율이 세계 1위이며[61] 1위부터 10위중에 일본과 북유럽국가를 제외하면 6개가 구공산권 과 중국 이다.
    • 위 편견에 대한 근거로 자주 미국의 바이블벨트가 가난하다는 것, 그리고 북유럽과 네덜란드[62]의 무종교인 비율이 높다는 것이 언급되나 되려 이 세 지역이 특이한 편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또한 북유럽과 네덜란드에서도 국지적으로 종교 인구가 전국 평균을 웃도는 지방들이 존재하는데, 결코 가난한 동네들이 아니다.
    • 한국에서도 2015년 수행된 여론조사를 기반으로 《서울사회학》 에 실린 통계 데이터에 따르면, 적어도 서울시 기준으로는 정반대의 추이가 관찰되었다. 가장 갑부 동네로 알려진 강남구서초구동남권은 종교인의 그것도 그리스도인 비율이 전국평균(개신교+가톨릭=28%) 보다 한참 비율도 높고(개신교 27%+가톨릭 16%= 43%), 개신교인 역시 가장 많았지만, 서울시의 대표적인 베드타운이라고 할 수 있는 은평구도봉구, 그리고 저소득층의 비율이 높은 관악구의 경우 오히려 무종교인의 비율이 시내에서 가장 높았다.[63] 특히 종교가 없다고 응답한 비율이 가장 높았던 은평구를 비롯하여, 마포&서대문 등의 서울 서북권은 개신교인의 비율이 강남&서초 지역에 비해서 10% 가량 낮게 나타났다. 이지역의 그리스도교 인구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유는 해외거주경력이 있는 인구가 다수 거주하는 점과 연관이 있다.
    • 이와 관련하여 변미리 서울연구원 글로벌미래연구센터장은 중앙일보 기사에서 "우리나라의 종교는 갈수록 중산층을 위한 종교가 되어 가고 있다" 고 분석했다. 다시 말해, 빈곤층은 경제적이고 시간적인 빈곤 역시 경험하게 되고, 제도화된 종교에서도 겉돌게 되며, 종교생활이 자신의 삶에서 우선순위가 밀려나게 된다는 것이다. #
    • 정확히 말하면 돈이나 교육은 정확히 말하자면 부수적 요소이고 사회 환경의 안정성이나 심리 상태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일례로 핀란드에서 노키아가 무너져 실업률이 올라가고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교회출석률이 갑자기 올라가는 상황을 보였다. 종교가 개인의 불안이나 사회의 불안에서 피난처 역할을 하니 사회가 안정적일수록 주는 것은 당연한 현상. 그리고 유럽과 미국 같은 경우는 종교를 접하기 좋고 호의적이며 구소련 국가들은 국가의 영향탓에 종교를 접하기 안 좋은 환경으로 변하였기 때문에 낮을 수 밖에 없다.
    • 다만 이 항목에 서술된 반론들은 선진국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선진국 반열에 들기 어려운 나라들과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까지 포함한다면, 종교의 지배가 강한 나라일수록 부유하지 못하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는 맞을 수도 있다.
    • 하지만 전세계 적으로 산유경제 의존비율이 낮은 선진국들의 무종교인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것은 명백한 사실이다.전통적 그리스도교 문화권이자 선진국이 다수 포진한 유럽의 경우 비종교인이 늘어가고 있고 되려 전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아프리카가 전세계에서 그리스도인 인구가 가장 많은 대륙이 되었다.
    • 물론 가난하기에 종교를 믿어서 마음의 평안을 얻거나 "저 좀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경우도 있지만 "내가 이렇게 힘든데 신이 어디있어" 라며 오히려 가난하고 힘들어서 종교를 싫어하는 경우도 있고, 부유하기 때문에 "신한테 의존할 필요 없어" 라고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신께서 나를 이렇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 종교에 의지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를 가졌는가/아닌가보다 그 종교에 얼마나 필사적으로 매달리는가, 즉 광신의 정도도 매우 중요한데 잘사는 나라일수록 종교적 광신도가 다수파를 차지하기 어렵다는 의미에서는 맞을 수도 있다.
  • 물론 위의 말은 이제 편견으로 보일수밖에 없는게 왠만한 선진국들은 종교색이 얕아졌기 때문이다. 선진국들 중 종교적이라는 미국은 2017년을 기준으로 무종교인이 30%로 많이 늘었으며 G7에 소속된 나라들을 보면 적어도 각 국가의 20%의 인구는 무종교인이다.

  • 모든 종교인들은 정신적으로, 지적으로 뒤떨어지는 나약한 사람들이다.
    • 예를 들어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것(사후세계, 미신 등)에 의지하여 안심을 얻고자 한다면 어느 부분은 나약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건 꼭 종교인에 국한된다고 볼 수 없다.[64]
    • 도리어 종교생활에 충실한 노인들이 그만큼 연령에 결부된 인지적 감퇴(age-related cognitive decline)가 느려진다는 연구결과는 많이 있다.[65] 그러다 보니 영성(spirituality) 내지는 종교성(religiosity)을 성공적 노화의 조건으로 포함시킨 연구자들도 나타났다.[66] 또한 종교를 가진 개인들은 회복탄력성(resilience) 역시 더 크며,[67] HIV 환자들 중에서도 종교가 있는 사람들이 자기비난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더 적게 보고했으며 더 의연하고 성숙하게 죽음을 수용했다.[68]

  • 모든 종교인들이 사후세계를 동경하기 때문에 현재의 삶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다. 즉, 내가 지금 어떻게 살든지 간에 나는 무조건 사후에 좋은 곳에 가게 될 것이므로, 이승에서의 자기 삶에 별 의미(meaning)를 두지 않으며, 밀도 있는 건강한 삶을 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 무조건 사후세계를 동경해야 종교인으로 취급되는 것도 아닐 뿐더러, 실제로는 종교적 헌신이 높은 사람들은 항상 "삶의 의미가 충만하다" 고 보고했으며, 대조적으로 낮은 종교적 헌신 또는 비종교인 집단은 자기 기분이 좋을 때에만 높은 삶의 의미를 보고했다.[69] 참고로 삶의 의미는 현대 긍정심리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며, 이를 바탕으로 한 심리치료 기법도 있다.
    • 과거의 경우엔 현생을 전혀 중요하지 않게 보기도 해서 그런 경우가 있긴 했으나 본질적으로 본다면 윤회라던지 사후세계에 갈 때 현생을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 영향을 받는다는 교리가 있기도 하기에 제대로 된 신앙인이라면 사후세계를 동경하더라도 현생을 착실하게 살기 위해 애쓴다

  • 어린 자녀를 부모가 교회 등에 데려가서 주일학교(sunday school)와 같은 공동체에 소속시키거나, 가정에서 종교 교육을 시키는 것은 자라나는 어린이테러리스트 광신도 꿈나무로 만드는 세뇌 과정이다.
    • 이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적어도 이슬람 근본주의 문화권에서는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선진 서구사회라면 사춘기의 역할을 너무 간과한 주장이다. 즉 자녀는 사춘기에 부모의 기대대로 철두철미한 종교인이 되는 정체감 폐쇄(foreclosure)를 경험할 수도 있지만, 제도권 종교행사에 참여하기를 저항하면서 자신이 자신답기 위한 종교적 탐색을 하는 정체감 유예(moratorium)를 경험할 수도 있다. 그리고 부모의 가정교육이 세뇌 효과를 보일 거라는 생각 자체가 잘 쳐 봐야 30~50년대 서구 지식인들의 추측일 뿐이다.[70] 당연히 현대의 학계는 그 사회의 지배적 가치, 부모의 종교적 헌신의 정도, 신학적 보수성, 가정의 사회경제적 지위, 양육환경 등을 모두 고려한다.
    • 국내 한정으로, 현실적으로 자녀의 종교적 양육이 그렇게 쉬웠으면 한국 개신교계가 소위 "다음세대"(next generation) 담론으로 비상이 걸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해당 문서에서도 나오지만 모태신앙이 실은 "못 해 신앙"이라는 자학개그도 돌고 있는 형편이다.
    • 만약 종교적 양육을 세뇌라고 불러야 한다면 각종 전래동화백설공주, 신데렐라 등의 이야기, 다양한 사회화 과정 모두를 세뇌라는 메커니즘으로 부를 수 있어야 할 것이다.그러나 아동의 인지적 발달 외에도, 여러 분야에 걸쳐서 세뇌의 중요성은 오히려 많이 감소했다. 도리어 사이비 종교처럼 누가 봐도 저건 세뇌가 아닌가 싶은 현상조차도 수많은 (그리고 더 정교한) 대안적 설명들이 제시되어 있는 상태이다. 게다가 세뇌 문서에 서술된 것처럼, 세뇌는 독특한 환경 속에서 독특하게 나타나는 영향의 과정이며, 아무데나 무작정 세뇌라며 갖다붙이는 건 개념의 오용 가능성이 클 수 있다.[71] 더욱이 현실에서는 다양한 정보매체를 통해 아이들이 계속된 정보를 얻으며 당장 교회 내에서도 아이들이 서로 다른 이야기하고 접촉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얻는다

  • 부모의 종교적 양육은 "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너는 지옥불에 떨어져 영원히 불탈 거야!" 라고 윽박지르는 것이다.
    • 종교발달심리학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보통 자신의 어려움에 대해 신이 자신을 버린 것, 자신은 이제 지옥에 갈 것이라고 믿는 것을 학계에서는 "부정적인 종교적 대처" 라고 부른다. 당연히 긍정적인 종교적 대처 역시 존재하며 이 방향에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가능하다. 학자들은 근본주의자인 부모가 자녀양육을 신이 내린 임무라고 믿을 때 가장 부정적이지만, 신학적으로 진보적인 부모가 자녀양육을 신이 내린 임무라고 믿을 때 자녀에게 가장 "사랑의 신, 보호하는 신, 친밀한 신" 의 이미지로 양육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72]


  • 종교는 문명을 쇠퇴하게 한다. 또는, 종교는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백해무익한 현상이다.
    • 정 반대다. 실제로는 문명이 종교(적 관념이나 직관)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봐도 좋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불가사의나 유물, 건축물들만 보아도 종교의 손이 안 닿은 경우를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을 믿는 학자들 중에서는 종교적인 사상에서 영감을 받는 이들도 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 따르면 인류가 가상의 것을 실제로 인식하는 과정에서 사피엔스들이 타 인종들 보다 우월하게 됐다고 설명했고 그 중에 하나로 종교를 들었다. 실제 종교 사원이 생기고 그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고 종교가 멀리 있는 사람이라도 같은 종교내에 존재한다면 하나로 만드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당장 이집트의 피라미드 역시 파라오가 신의 화신이라는 종교적 믿음을 통해 사람들이 뭉쳐서 만들어 낸 산물이다. 더욱이 종교가 인류 태동부터 같이 있었으며 한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문명을 쇠퇴하게 하고 발전을 저해한다는 것을 마치 사실인 양 떠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 주장이 성립하려면 다른 조건은 모두 같은 전제 하에 종교가 있는 지역은 문명이 쇠퇴하고 사회발전이 저해되고 없는 지역은 발전을 거듭해야 하는 비교실험을 통한 명확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인류에게는 종교가 없었던 적은 거의 없었으며, 게다가 종교의 형태 역시 굉장히 다양했으며, 더욱이 현재의 사상의 밑바탕에는 종교적 사상이 깔려있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에서 저 논리는 검증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더욱이 종교가 사회발전을 저해했다면 여기까지 쌓아올 수도 없었을 것이며, 사회발전에 기여한 사람들 중에서도 종교인은 존재하면 안되게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보면 대표적으로 뉴턴은 신이 창조한 세계는 질서정련하다고 생각하여 기계론적인 세계관을 생각해내었고 서양철학의 기초중 한분인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은 신을 중심으로 전개 되었고, 그에게서 배운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그의 사상에 종교의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게다가 중국의 발전에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제외할 수 없으며,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사상이 합리적인 자본주의 출현에 기여했다고 보았으며, 인도는 힌두교의 영향을 제외할 수 없다. 그리고 각 국가의 신화들과 이 신화들이 문학에 미친 영향(능력, 등장인물의 이름, 클리셰 등등)들을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에 종교라는 존재가 빠진 적이 없었다. 이런 착오가 생기는 이유는 현대 기준으로 과거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발전속도는 굉장히 느렸다. 따지고 보면 과거의 발전 하나하나가 기적 수준이다. 당장 철기 사용만 보더라도 인간이 어떤 돌이 불에 녹고 이 돌이 굳으면 단단해진다는 사실에서 착안하여 철광석을 불에 집어넣고 두들기고 온도를 높일 수록 더욱 단단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제련소를 만들어 철기를 보급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이러한 발견과 발명 하나하나가 엄청난 것이다. 현재야 지식이 많이 쌓여 지식을 기반으로 빠른 발전을 할 수 있었지만 과거에는 그런 거 없었다. 또한 단순히 종교 때문에 쇠퇴한 것 보다 정치, 경제 때문에 나라가 쇠퇴한 경우가 더 많다.
    • 또한 음악과 미술 또한 종교로 인해 발달했다고 할 수 있다 단편적으로만 보더라도 고대 유물속 벽화들만 보더라도 피라미드의 벽화나 선사시대 동물 벽화는 파라오 신앙과 선사시대 원시신앙에 기원한 종교행위였고[73] 유럽지역에서는 그리스도교가 발달하면서 이콘을 그리는 것으로 미술이 발달되었고 음악 또한 예배음악을 만드는 것에서 부터 음악이 발달했다. 중세시대에 유명했던 음악가들도 가톨릭 미사에 사용되는 성가를 다수 작곡했다.

  • 모든 종교인들은 폭력적이게 될 수밖에 없다.
    • 그렇지 않다. 개신교 근본주의 일파인 재세례파(아미쉬 교도나 메노나이트)는 극도로 평화주의적이다. 단 이들도 내부적으로는 다양한 성범죄 문제가 만연해 있다는 문제가 있다.[74]
    • 일부 과격한 단체의 행위로 봐서는 그렇지만, 그런 과격한 단체는 전체 종교인들중에 극히 일부이다. 비종교인과 종교인의 범죄율을 비교해 봐도 오히려 일반인의 범죄율이 높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대부분 편향된 시각을 가진 언론을 통해서 소식을 듣기 때문에, 특히 종교인의 범죄행위는 일반적이기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아 보이는 것이다.
  • 과학기술과 종교는 공존할 수 없으며, 어느 한쪽이 필연적으로 사라질 수 밖에 없다.
    • 함부로 단정지을 수 없는 문제이다. 과학vs종교 문서로.

  • 모든 전쟁의 원인은 종교다.
    • 알다시피 전쟁의 원인은 다양하다. 멀리 안가도 종교가 뭔지도 모르던 선사시대나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전의 중남미 문명국에서는 전쟁이 없었는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인간 사회라면 반드시 전쟁이 있기 마련이며, 그것이 종교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태반이다.
    • 반종교주의자들이 종종 하는 말이다. 탈레반, IS처럼 현대사회에 합당한 논리 없이 일어난 세계인들의 뇌리에 박힌 커다란 사건들과 전쟁의 원인중에 종교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 전쟁들도 순수 100% 종교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곤란하고, 멀리 갈것도 없이 임진왜란6.25 전쟁같이 한국에서 일어난 전쟁의 대부분은 종교와 관련이 없다. 또 1, 2차 세계대전이라든가 걸프전, 미국-멕시코 전쟁, 베트남 전쟁 등 원인이 종교와는 한참 먼 전쟁도 많다. 한마디로 모든 전쟁의 원인이 종교란 건 섣부른 결론이다. 관련 자료
    • 사회심리학자들은 대규모 집단 사이의 갈등과 공격성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다양한 연구들을 수행해 왔다. 셰리프(M.Sherif)의 저 유명한 로버스 케이브(Robbers Cave experiment) 실험과 같은 현실적 집단갈등 이론도 있고, 이외에도 T.Wildschut의 불연속 효과 연구, Hovland와 Sears의 희생양(scapegoat) 연구 등등 매우 많다. 이 분야도 의외로 수많은 연구자들이 갈아넣어지고 있는 주제다! 물론 종교도 (용어의 엄밀함은 차치하고라도) 하나의 변인으로 간주할 수는 있겠지만, 이걸로 백 퍼센트 모든 걸 설명한다는 건 결국 스스로의 지적 게으름을 보여주는 것밖에는 안 된다.(…)
    • 조금 극단적인 반례지만, 인류학자 섀그넌(N.Chagnon)은 브라질의 야노마미(Yanomami) 족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일견 흉포하고 공격적이며 전쟁을 밥 먹듯이 하는 이들의 호전적 성향은 단지 여자 문제(…)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심각한 성비 격차로 인해 마을의 생존이 위협을 받자 이웃 마을로부터 여성을 납치해오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전쟁으로 인해 남아 선호 사상이 촉발되어서 곧 다시 성비가 악화된다는 것. 여기서 "종교 문제" 내지는 "종교적인[75] 동기"는 단 1g 도 관여하지 않았음에 주목해 보라.

  • 사회주의 국가들은 종교의 자유가 없다.
    • 반정도는 사실이지만 완전히 사실은 아니다. 국가 무신론 문서로.

  • 종교인들이 베푸는 선행은 모두 그들이 믿는 신에게 잘보이기 위한 행위다.
    • 이는 ‘연예인이나 정치인이 베푸는 선행은 다 그들의 이미지를 더 좋게 보이게 하려는 것이다’만큼이나 잘못된 편견으로, 단순히 선행을 베푸는게 좋아서인 경우도 꽤 있다. 이런 문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런 자선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것일 뿐이다. 물론 이런활동외에 대부분의 종교가와 연예인들은 직접 찾아가 봉사를 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 계통 천주교 개신교 정교회를 막론하고 개인의 선행으로 내세에 구원받는다는 주장은 초기교부시절부터 이단선언 되었다.
    • 일부 종교, 특히나 그리스도교 계통은 오히려 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선행을 하는 것을 외식이자 위선이라며 극도로 혐오하는 경향을 보인다.

  •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는 것은 인맥을 형성하고 사회생활을 유지하기 위함일 뿐이다.
    • 일부 진실. 특히 재외교포들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 사실인데. 해외에 나가면 제일 먼저 한인교회(혹은 성당)부터 찾아가서 도움을 받으라는 조언도 있을 정도이다. 또한 대한민국의 부유층들 역시 몇몇 대형교회 내에서의 네트워크를 통해 기득권을 다지려는 경향 역시 없지 않다.
    • 그러나 명심할 것은, 전체 종교인들을 대상으로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상당히 실례다. 종교성을 간혹 I&E 종교성이라는 개념으로 분류하는 학자들이 있는데,[76] 위의 편견은 어디까지나 E 종교성, 즉 ‘외현적 종교성’일 뿐이다. 실제로 I 종교성, 즉 '정말로 그 교리를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고 신념과 가치관에 따라 평생을 헌신하고자 하는' 진지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참고삼아 연구 하나를 인용하자면, 심리학자 고든 올포트(G.Allport)는 I 종교성을 가진 사람들이 E 종교성을 가진 사람들에 비해 편견 및 고정관념이 현저히 낮고 타 인종에게도 더 많은 환영과 호의를 보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반대로 사회생활과 인맥관리를 위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편견과 아집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다고. 해당 연구는 Allport & Ross(1967).

  • 종교는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지배하기 위해 만든 도구다.
    • 종교는 계급사회가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 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옛날에 이렇게 주장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종교가 제도적으로 말하는 정치보다 더 빠르게 나왔다. 물론 이것도 정치를 좁은 의미의 정치(한마디로 의회나 지배방식)으로 본다 면이다. 넓은 의미로 보면 일상생활에서 분배과정이 정치니 정치가 좀 더 빠르다 할 수 있어도 둘 다 인류 최초의 산물들이다. 이런 말이 나오는 이유는 아마 토마스 f. 오데아의 이론처럼 종교가 권위적 가르침을 통해 사회의 규범과 제도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는 측면을 집중해서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지배층이 규범 유지를 위해 종교를 활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종교가 정치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것은 백퍼센트 거짓이다.[77] 오히려 종교가 대중을 모아서 정치를 유발시키기도 한다. 인류 초기의 신전인 괴베클리 테페 통해 보았을 때 먼저 종교가 있었고, 종교적 제단을 만들기 위해 사람이 모일 수밖에 없었고 그 인력을 먹여살리기 위해 농업이 발달한 게 아니냐는 가설도 제기된다.

10.1. 소수종교 관련[편집]


  • 몰몬교도들은 일부다처제를 선호한다.
    • 1890년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사실 과거 몰몬교의 일부다처제라는 것은 모진 박해로 인하여 가장을 잃은 가족들을 위한 대안가족의 성격이 더 강했다..고 주장한다[78]. 하지만 아직도 억지로 일부다처제를 주장하는 극단주의자들도 있는데 주류교회 사람들은 당연히 싫어한다.

  • 몰몬교는 흑인성소수자를 싫어한다.
    • 흑인의 경우 2대 교주가 인종차별적이었기 때문에 생긴 편견. 지금은 딱히 다른 교파에 비해 차별하지 않는다.




  • 저학력자들이나 점집에 가는 거지, 고학력자들은 (아무래도 합리적 이성과 비판적 사고력이 있으니) 사주팔자부적 같은 건 안 믿을 것이다.
    • 한 학위논문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실제로는 고학력자일수록 점집에 많이 가고, 사주나 부적도 더 많이 신뢰한다[79]. 구체적으로는 대학원 이상의 학력인 사람들이, 남성보다는 여성들이, 주로 삶의 위기가 닥쳤을 때 점집을 찾는다고 한다. 이는 교육수준이나 경제수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 고도화되고 복잡하며 리스크가 큰 과업을 처리해야 할 가능성이 높은 것과도 연관이 있다. 언제나 그렇듯 인간 만사는 흔한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11. 종교의 계통/목록[편집]



12. 관련 문서[편집]


[1] 다윗의 별을 기준으로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바하이, 힌두교, 도교, 불교, 시크교, 스바로그의 손, 켈트 신앙, 노르드 신앙, 함사(혹은 Natib Qadish), 위카(신이교), 케메티즘, 헬레니즘, 로마 다신교를 거치며 돌아온다.[2] Gothóni, R. (1994). Religio and Superstitio Reconsidered. Archiv Für Religionspsychologie / Archive for the Psychology of Religion, 21(1), 37–46.[3] Hill et al., 2002; Pargament, 1997.[4] Isabella Kasselstrand, Nonbelievers in the Church: A Study of Cultural Religion in Sweden, Sociology of Religion, Volume 76, Issue 3, AUTUMN 2015, Pages 275–294, https://doi.org/10.1093/socrel/srv026[5] 실제로 70만 년 전에 지구에 있었던 네안데르탈인들에게서도 이따금 매장의식이 나타나곤 했다. # [6] 인쇄기로 만든 최초의 책도 성서이다.[7] 특히 비교적 역사가 짧은 종교일수록, 교리가 엄격하여 유연성이 부족할수록 그런 경향이 강한 편이다.[8] 물론 이 말은 "무신론자는 비도덕적이다"라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9] RSS, 시브 세나 등의 힌두교 극단주의 단체들[10] 수학적 내삽(Mathematical Interpolation)을 거치면 반비례 곡선이 된다.[11] Crowther, Parker, Achenbaum, Larimore, & Koenig(2002)[12] 자립심이 결여된 행복이 제대로 된 행복이냐고 비판할 수 있을 텐데, 의미추구적 행복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 "신으로부터의 이성의 자립" 을 강조한 행복심리학자가 혹시 있는지 확인 바란다. SWB 계통 연구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13] Glass, de Leon, Marottoli, & Berkman, 1999; Ell, Nishimoto, Morvay, Mantell, & Hamovitch, 1989; Vahia et al., 2011; Koenig et al., 1998; Hill, Burdette, Angel, & Angel, 2006. 노인심리학 관련된 주요 연구성과만 모아봐도 벌써 이만큼 나온다.[14] 여담이지만, 종교를 싫어한다고 알려진 유명 무신론자 중 하나인 샘 해리스(S.Harris)의 경우에도 영성이나 명상 같은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15] 구재선, & 서은국. (2011). 한국인, 누가 언제 행복한가?. 한국심리학회지: 사회 및 성격, 25(2), 143-166.[16] 종교의 영향은 주관적 건강이나 돈이 차지하는 비중과 비슷했다. 참고로 행복에 가장 중요한 요인은 개인간 행복의 차이의 50%를 설명하는 유전이다.[17] Diener, E., Suh, E. M., Lucas, R. E., & Smith, H. L. (1999). Subjective well-being: Three decades of progress. Psychological bulletin, 125(2), 276.[18] 유럽사회의 경우는 근대의 합리주의와 자발적 사고, 선진적인 사회, 비종교적 가치관의 보편화를 통해 종교를 통한 행복보다는 종교를 벗어나서도 안정된 사회제도와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종교 자체의 여러 문제점을 수용하면서까지 종교가 주는 행복감을 굳이 추구할 필요가 사라졌다는 점이 크다. 또한 유럽 현지의 그리스도교 전통은 반사회적이거나 역기능적인 측면이 상대적으로 덜하며, 그래서인지 반종교적 레퍼토리도 그만큼 찾아보기 쉽지 않다. 애초에 유럽권 지식인들이 영미권 반종교주의자들을 까는 주된 소재 중 하나가 "너네들은 아직도 계몽주의 시대에 살고 있냐" 하는 거다.[19] 그러다 보니 중노년층은 코로나19 시국에서 복지관, 경로당 등 공공기관이 운영을 중단하자 교회에서의 대면모임을 더욱 고집하게 되었고, 결국 극우 정치집단으로 변질된 사랑제일교회에서 역대급 재앙을 불러일으켰다.[20] 관련 논문을 찾고 싶다면 다음에 나온다. Applegate, Cullen, Fisher, & Ven, 2000; Galen, 2012; McKay & Whitehouse, 2014; Sablosky, 2014; Shariff, Piazza, & Kramer, 2014; Decety, Cowell, Lee, Mahasneh, Malcolm-Smith, Selcuk, & Zhou, 2015.[21] 학문적으로는 moral self-enhancement라고 하며, 사회적 바람직성 편향의 한 종류로 보고 있다.[22] 얼핏 생소한 이름처럼 보이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진화심리학계의 잘 나가는 중진 학자 중 하나다. 2008년에는 《사이언스》 지에 종교적 친사회성의 기원과 진화에 대한 논문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고, 연구방법론 상으로도 학계에 처음으로 WEIRD 문제로 통칭되는 표본편향(sampling bias) 문제를 제기한 인물이기도 하다.[23] Sheriff & Norenzayan, 2007.[24] 이는 실제로 그리스도교 계통에서 말하는 "코람 데오"(Coram Deo) 정신과도 통한다. 이 라틴어의 뜻은 대략 "신 앞에서"로, 종교개혁가들의 슬로건이기도 했다.[25] Johnson & Bering, 2006.[26] 즉 위에서 화이트가 말한 "자기 종교 구성원에게 한정된 선행과 이타성" 을 말한다.[27] 보통 종교인들의 문제점이라고 거론되는 것들은 저소득층+ 저학력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즉, 종교인의 어떤 특성에 대해 연구할 때에는 부유한 종교인 대 부유한 비종교인, 가난한 종교인 대 가난한 비종교인 식으로 비교해야 하지, 그냥 싸잡아서 종교인 대 비종교인 식으로 연구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28] 예컨대 한 고전적인 연구에서는(Allport & Ross, 1967) 독실하게 종교적 교리를 따르고 자기 자신을 갈고 닦는 사람들은 이타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단지 외적으로 인간관계를 맺고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 "교회만 왔다갔다하는" 사람들은 심각한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있더라는 보고도 있었다.[29] 예를 들어 큰 죄를 짓고도 벌을 받지 않은 사람을 보고 종교인이 '저거 나중에 지옥갈거다.', '다음 생에 편히 못 살거다.' 라고 하며 체념 아닌 체념을 하는 것이 이런 측면을 보여준다. 사실상 신분제가 존재하는 인도에서 전생에 대한 믿음이 특히 강한 것도 관련이 있어보인다. '내가 지금 핍박 받고 살지만 다음 생에는 좋은 신분으로 태어나겠지', 내가 못사는건 전생에 죄를 지어서겠지.'라는 생각했다. 이를 통해 종교가 개인이 저항할 수 없는 불의에 대한 심리적 도피처, 나쁘게 말하면 정신승리의 빌미를 제공한다는 의견도 있으며 이는 사회적으로 보면 불의에 대한 방치로 이어지게 된다. 괜히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불리는게 아니다.[30] 물론 영향력 자체는 막대했으므로 교과서에는 종종 실린다. 그러나 오늘날의 심리학자들 중에 이것을 "고스란히" 긍정하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31] 대리 통제(vicarious control)는 비단 전능한 유일신뿐만 아니라 강력한 중앙정부, 권위주의적 가부장, 카리스마 있는 리더 등에 대하여 그들의 강력한 통제권에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통제력을 발휘하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런 대상들에게 극성 종교인들이 광적으로 찬동하는 것도 심리학적으로 보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닌 것이다.[32]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에 나온다. Anderson, Kay, & Fitzsimons, 2010; Jost & Kay, 2005; Kay & Jost, 2003.[33] 세상을 보는 이러한 태도는 기존의 "세상은 공정하다" 에서 벗어나서, 심지어는 현실의 부조리와 문제점에 순응하게 만드는 "세상은 원래 불공정하다, 그래도 질서는 잡혀 있으니 괜찮다" 에까지 개인이 수긍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를 정치심리학자 존 조스트(J.T.Jost)는 자신의 체제 정당화 이론(System Justification Theory)에서 잘 정리하였다.[34] Kay, Gaucher, Napier, Callan, & Laurin, 2008; Kay, Moscovitch, & Laurin, 2010; Laurin, Kay, & Moscovitch, 2008.[35] Sims & Baumann, 1972; Vandello & Cohen, 1999.[36] Sales, 1972; Norris & Inglehart, 2004.[37] Kay, Shepherd, Blatz, & Chua, 2010.[38] Kay, Shepherd et al., 2010.[39] Whitson & Galinsky, 2008.[40] 이처럼 가히 세기말적으로 공포스러운 메시지라고 할지라도, 개인은 자신이 예측할 수 있고 확실한 선악의 구도를 그려낼 수 있다면 그것을 망설임 없이 환영하고 수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 본성에 대해 굉장히 의미심장한 함의를 갖고 있다. Heine, Proulx, & Vohs, 2006; Rothschild, Landau, Sullivan, & Keefer, 2012.[41] Whitson & Galinsky, 2006.[42] 매슈 허트슨의 《왜 우리는 미신에 빠져드는가》 서적에 나온다.[43] 다만 당분을 섭취할 경우 일시적으로 집중력이 높아지기는 한다.[44] 대표적인 예로 제사에 대한 실용주의적 관점이 있다. 죽은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는 정도로만 하면 된다는 것. 물론 제사 자체가 사라져 가며 이마저 다른 형태의 추모로 대체되고 있다.[45] 티모시 윌슨, 《Story》, 강유리 역, 웅진지식하우스, 2012; 쉬나 아이엔가, 《선택의 심리학》, 오혜경 역, 21세기북스, 2012[46] 종교와 행복 간의 관계를 고찰한 논문으로는 Diener, Suh, Lucas, & Smith(1999)에 나온다. (여기서 Suh란 다름아닌 연세대의 서은국 교수다) 세속화된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을 고찰한 종교심리학자들의 저서로는 《Sacred and Secular》 도 함께 찾아볼 것. 위에도 인용된 Norris & Inglehart, 2004 가 이 책.[47] '보편적'이 아니라 '평균적'이라고 규정하는 이유는, 미래에도 비종교인과 종교인의 분포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많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48] 미래의 종교 예측 통계는 종교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반드시 해당 종교를 유지할 경우를 가정해서 일반적으로 예측한 것이다. 현재 종교인/비종교인이 많은 지역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며 꾸준히 바뀌어 온 것으므로, 현재 종교인이 많거나 적더라도 해당 국가/문명권의 추후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비종교인이 늘어날 수도, 종교인들의 수가 늘어날 수도 있다.[49] 특히 불가지론자의 증가세가 크다.[50] 현대 그리스도교는 인구증가세나 선교율이 높은 비서구 지역들을 중심으로 선진국에서의 영향력 및 신자수 감소를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종교다. 그리고 종교학자들은 개발도상국 지역 그리스도교 성장의 대부분이 20세기 식민지 시대 종식 직후부터 폭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도 주목한다.[51] 국민일보 2013-08-11 《“기독인 2020년엔 세계 종교인구 1/3 오순절·은사주의 교단 성장 가장 빨라”》[52] 단 전통적인 가톨릭 강세 지역인 중남미에서는 개신교로 이탈하는 신자들이 많아 교세가 움츠러드는 중이다.[53] 비아시아 지역에서 아프리카 등 대표적인 종교적 지역에선 이미 이슬람/그리스도교가 뿌리깊게 선점하고 있어 불교 인구가 미미하고, 서구권에서는 20세기 중후반부터 불교에 대한 호의적인 관점이 크게 늘었으나, 그것이 비종교적인 분위기를 누르고 불교로의 광범위한 개종으로 이어지지 못한 점이 크다.[54] 따라서 종교가 사회구조를 '정당화'한다는 표현보다는 '자연화'한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55] 여담으로, 기존의 도덕적 가치를 맹목적으로 답습하는 것을 거부하는 니체적 도덕관은 영화 <쓰리 빌보드>를 보면 잘 느껴진다. 다만 해당 영화에 반영된 철학적 의식은 니체보다는 니체의 영향을 받은 들뢰즈에 더 가깝다.[56]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는 신과 이웃에 대한 아가페적 사랑을 통해 경건을 갖추고, 죄악을 몰아냄으로서 얻을 수 있는 구원론이 핵심이다. 불교의 핵심 교리는 사성제로, 삶은 고통스러우며(고성제/dukkha), 고통에 매여 방황하고(집성제/samudaya), 깨우침으로 길을 찾을 수 있으니(멸성제/nirodha), 앎으로 체득한다(도성제/Marga-satya). 단순하게 비교해봐도 '모든 종교의 본질은 사랑'이라는 사실은 상식선에서 잘 와닿지 않는다.[57] 요약하자면 모든 종교가 근본이 사랑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교 만큼은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 그리고 이웃 또한 사랑으로 섬기라는 가르침을 강조하기에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가 맞다[58] 종교가 마약과 같은 업/다운 효과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종교를 믿어서 마음의 위안을 얻은 사람들의 사회적 생산성은 마약 중독자들의 사회적 생산성과 같지 않다.[59] 현 미국 국립보건원 원장이자 진화론자, 생화학자이며 인간게놈 프로젝트 총책임자.[60] 한 연구에서는 fMRI와 같은 측정장비 속에 누워있는 애플 社 팬들에게 새로 나온 애플 전자기기 광고를 보여주자, 그들의 뇌의 특정 영역이 강렬하게 활성화됨을 발견했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 활성화된 영역은 독실한 종교인들이 신(神)적인 심상이나 종교적 상징을 접했을 때 활성화되는 영역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었다. 영국 BBC 다큐멘터리 《슈퍼 브랜드의 비밀》 에서도 방영된 바 있는 내용.[61] 다만 에스토니아는 IT강국이며 발트 3국의 국가들 중에서 제일 잘사는 나라다.[62] 1970년대부터 무종교율이 30%을 기록했다. 이게 먼나라 이웃나라를 통해 알려지면서 부유한 국가나 지역은 종교에 무관심하다는 편견도 같이 소개되었다.[63] 그러나 실제로는 무속신앙이거나, 불교도인데 제대로 응답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당장 저런 동네로 가면 자가 붙은 점집, 무당집, 포교원들이 꽤 많이 보인다.[64] 예를 들면 징크스[65] van Ness & Kasl, 2003; Hill, Burdette, Angel, & Angel, 2006.[66] Crowther, Parker, Achenbaum, Larimore, & Koenig, 2002.[67] Vahia et al., 2011.[68] Siegel & Schrimshaw, 2002.[69] King et al., 2006. 이는 사회적 연결과 관계성이 개인의 삶의 의미에 미치는 영향과도 유사한 상관관계이다. 이에 대해서는 Hicks, Schlegel, & King(2010)에 나온다.[70] 이 시기에는 심리전, 이념 갈등 등으로 인해 타인에 의해 주입된 세뇌가 개인의 주체성을 상실하게 할 거라는 불안이 지식인들 사이에 퍼져 있었으며 (명확치는 않으나 인지부조화 같은 개념도 이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이 시기의 사회과학 자체가 커뮤니케이션 연구의 여명에 가까웠던지라 어느 한쪽의 일방적 영향력을 강조하는 선에서 머물러 있었다.[71] 세뇌를 넓게 본다면 맞는 말 일수도 있다. 근데 넓게 보는 순간 학교 교육이나 사회화과정 도덕 교육 영상매체 마케팅 역시 세뇌라고 봐야 한다. 근데 우리들이 세뇌라고 보는 것은 사람 잡아다가 특정사상을 주입시키는 과정을 생각하기 때문에 세뇌라고 하기 힘들다.[72] Gershoff, Miller, & Hoden, 1999; Bartkowski & Xu, 2000; Murrat-Swank, Mahoney, & Pargament, 2006; Volling, Mahoney, & Rauner, 2009; Dumas & Nissley-Tsiopinis, 2006.[73] 원시 신앙에서는 그림에 혼이 깃든다고 여겼기 때문에 사냥하고 싶은 동물을 벽화로 그려 돌을 던지기도 했고 수월한 사냥을 기원하기 위해 사냥하는 벽화를 드리는 등 원시 신앙으로서 벽화를 그렸다[74] 그런데 이것은 이들의 가치관이나 도덕관이 과거에서 멈춰버린 통에 그런 것도 있다.[75] 일부 극단적인 인본주의자들이 떠들듯이 "반계몽적"이고 "반지성적"이며 "비합리적"인 모든 인간 행태들을 전부 "종교적"이라는 표현으로 싸잡아 포괄한다 치더라도[76] 출처는 『성숙한 성격과 신앙』, 한신대학교 출판부.[77] 단, 같은 종교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회에선 다른 모습으로 받아들여지거나 토착화하는 경우가 잦다는 점, 고대 시대부터 정치인들이 종교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사용해왔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종교의 기원은 정치에 의한 것이 아니더라도 종교의 발전 과정엔 정치와의 긴밀한 상호작용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78]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인게, 처음 등장했을 시부터 연방 정부로부터 합법적인 종교 단체로 공인받을 때까지, 몰몬교 신자들은 툭하면 연방군에게 토벌당해서 대대적으로 학살당하거나, 인근의 원주민 부족들과 층돌을 빚어서 신도들이 죽어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신자들 머릿수를 늘리기 위해서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거나, 묵인하는 경향이 컸다. 세계사적으로 이런 사례는 꽤 있는데, 여몽전쟁으로 많은 인구를 잃은 고려에서 고위층들 한정으로 향처와 경처를 따로 두는 것을 허용하거나, 삼국동맹전쟁의 패전으로 인해 성비가 붕괴되어버린 파라과이에서 일시적으로 일부다처제를 허용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79] 물론 고학력자들의 적지않은 수가 중산층 이상의 경제 수준을 지녔음을 간과한 것일 수도 있다. 상대적으로 부유할수록 종교에 의지하는 경향이 큰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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