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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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스페인 내전 당시 로버트 카파가 촬영한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Spanish Loyalist at the Instant of Death)[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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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당시 사용했던 종군기자 휘장. -소장처 전쟁기념관
1. 개요
2. 명칭
3. 역사
4. 알려진 종군기자 목록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 war correspondent
종군 기자는 군대를 따라 전쟁터에 나가 전투 상황을 보도하는 신문, 잡지 기자이다. 이들은 목숨을 각오하고 취재를 해야 한다는 부담이 따른다. 실제로 취재 도중 사망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전쟁에서 군대를 따라 전투 상황을 신문 등 언론에 보도하는 기자를 일컫는다. 이들의 사진은 역사의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에 국제법상 의무병과 함께 이 사람에게 발포를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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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칭[편집]


국내에서는 일반적으로 '종군기자'라고 쓰지만, 한겨레21의 정문태는 '전선기자'라고 자칭한다. '종군'이란 표현은 곧 언론이 군에 종속되어서 나팔수 역할을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여기고, 대신 '전선기자'라는 용어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개인의 주장이므로 알아서 걸러 들으며 판단은 스스로 하자.


3.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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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전쟁 당시 러셀 사진.

최초의 종군기자는 런던 타임스에서 크림 전쟁을 취재한 윌리엄 하워드 러셀(1820~1907)로[3] 특히 그의 취재로 인해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종군하게 되었고 더불어서 그녀의 활약상이 크게 부각되었다. 또한 러셀은 훗날 미국 남북전쟁,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 전쟁 등에도 취재하고 이후 영국 기사에까지도 서임되었다. 또한 어니스트 헤밍웨이 역시 종군기자로 참전, 이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무기여 잘 있거라 같은 명작이 탄생하였으며 그의 세 번째 부인이었던 마사 엘리스 겔혼은 여성으로서 30년대의 스페인 내전부터 80년대까지 60여 년을 전장을 찾아다니며 취재하기도 했다. 윈스턴 처칠 역시 보어전쟁 등에 종군기자로 파견된 경험이 있었다.

국제법상 발포를 금하고 있지만 전쟁을 보도하고 전선에 있다는 특성상 매우 위험하여 종군기자들이 취재 도중 전쟁터에서 사망하는 경우는 매우 많았다. 굳이 국제법을 휴지조각으로 생각하는 막장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도 아군끼리도 적으로 오인해서 서로 싸우던 경우도 흔한데 적이나 아군이 쏜 눈 먼 포탄이나 총탄 등이 종군기자라고 피해갈 리 없기 때문이다. 6.25 전쟁 때에도 세계 각국의 많은 기자가 종군하였으며 17명이 순직하였다. 이들을 위해 파주시의 통일공원에는 순직 종군기자 추념비가 설립되어있다. 가장 많은 종군기자가 사망한 것은 1994년 르완다, 보스니아, 알제리 등에서 터진 내전으로 총 157명의 종군기자가 사망했다고...[4] 거기에 제2차 세계 대전 때 종군 카메라맨의 수는 미국만 1,500명에 달한다고 했으니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사망한 종군기자의 사망수는 그보다 더 많을 듯.

제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사진을 찍으러 간 종군기자들 중 살아서 돌아온 기자들은 1500명 중에 약 500여명 밖에 없었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사진을 찍은 종군기자들도 대단하다. 심지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에도 종군기자가 동원되었다! 사실 이건 미군이 뉴욕 타임스의 맨해튼 프로젝트를 들쑤시고 다니던 어느 기자를 핵기밀 멋대로 공개하지 말고 진짜 핵폭탄 떨어지는 거 실시간으로 사진 찍고 맨해튼 프로젝트 홍보 좀 해달라고 냅다 포섭한 것이다. 그래서 그 기자는 8월 9일에 우리가 버섯구름 하면 떠오르는 나가사키의 그 버섯구름을 찍었다.

허나 당시 군인들은 종군기자를 썩 좋아한 편은 아니었다. 당시 폭격기 승무원들은 함께 탑승하던 종군 카메라맨들을 폭격기 내에 사람만 한 명 더 차지하고 전투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라 달갑지 않게 보았다고 한다. 심지어 폭격기에 고사포의 공격 모습의 촬영이 잘 안 나온다고 폭격기 기장에게 고사포 공격에 좀 더 접근해달라는 부탁까지 하고 이착륙 시 바퀴의 모습을 찍겠다고 하부 총좌에 들어가서 촬영하기도 했다고 하니 여러모로 골 아팠을 듯하다. 특전 U보트에도 크릭스마리네U보트에 동승한 정훈 장교에게 승조원들이 어뢰 정비할 때 쓰는 걸레를 집어 던지는 등 대놓고 짜증을 낸다.

하지만 전쟁 말기 미군은 육군의 경우 통신 병과 예하에 사진 특기를, 해군의 경우 항공 병과 예하 사진 직별을 창설해 교육 및 촬영 장비 지급 후 각종 기록 사진과 영상을 찍게 하기도 했다.[5] 일종의 정훈병인 셈이다. 이들 중에선 미국 할리우드에서 일하다 온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고 이들 역시 교육 후 각 부대에서 수많은 사진과 영상들을 촬영했다. 또한, 민간인 종군기자들도 육해군으로부터 군복을 지급받고 장교 대우를 받았다.

베트남 전쟁부터는 종군기자들이 보내온 사진 때문에 반전 바람이 불어 군인들은 학살자나 아동 살해자 같은 불명예스러운 욕설을 듣는 일이 생겼고, 보안 문제도 커졌다. 이는 2차대전 때와 달리 언론 자체가 반정부적인 성향이 강해진 것이 크다. 특히 걸프 전쟁부터는 아예 작정하고 프로파간다에 써먹는 바람에 전쟁을 스포츠 게임처럼 보도한다며 군인들에게 욕을 먹었다. 바그다드에 상주하던 CNN 기자들이 송출용으로 쓰던 안테나가 공습에 박살났다는 소식을 듣고 다국적군 장병들이 꼴좋다고 신나게 씹어댔을 정도이다. 그리고 그 후로는 기자 하나 뜨면 수송 차량 몇 대가 달라붙어서 호위를 해줘야 하는데다, 툭하면 플래시 터뜨리거나 좋은 사진 찍는다고 기어 나오는 짓 등을 해서 아군을 위험에 노출시키기까지 하니 귀찮은 존재로, 예나 지금이나 군인들에겐 진탕 욕먹는 직업이다.

이라크 전쟁을 다룬 제너레이션 킬에서는 이색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출정 직전 주인공들이 속한 미합중국 해병대 제1해병사단 제1수색대대 브라보중대 2소대에 소대장의 추천으로(본래는 대대본부로 가기로 했으나 직접 병사들과 어울려봐야 좋은 취재거리가 나온다고 픽중위의 설득으로 야전으로 지원했다.) 롤링스톤지 기자 에반 라이트가 배속되는데, 롤링스톤이 반전메시지가 가득한 좌파 성향 잡지에다가 자기들이 보기에 땡보직같은 종군기자 샌님이 오자 병사들이 환영은커녕 비꼬거나 없는 사람 취급하며 본체만체한다. 그러나 에반이 과거 포르노잡지 허슬러의 전 편집자 경력이 있음을 밝히자 갑자기 병사들의 태도가 아무 것도 모르는 샌님에서 뭘 좀 아시는 선생님으로 바뀌는게 일품. 드라마는 그래도 점잖게 생긴 배우가 맡았지만 실제 에반은 훈련받은 군인들을 압도할 거구의 소유자였고, 상남자 군인들이 득시글한 해병대들이 좋아할만한 남자답고 시원시원한 성격에 전직 포르노 잡지 경력썰(..)도 잘 풀어서 병사들과 사이가 원만했다.

국제적인 대규모 전쟁은 줄었지만 내전이나 크고 작은 시위, 폭동 등의 소요사태는 오히려 많아진 현재엔 각종 과격한 시위대나 내전 현장에 뛰어들어 취재하는 쪽으로 방향을 살짝 틀어서 명맥을 잇고 있다. 대표적으로 홍콩 민주화 시위, BLM 시위 당시 큼지막하게 ‘PRESS’를 표시한 헬멧이나 방탄조끼를 사용하고 최루가스를 막기 위해 방독면까지 쓴 상태로 카메라를 주렁주렁 들고 시위대 틈에 껴서 취재하는 기자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군인이 고의로 종군기자를 공격하지는 않는다고는 하지만 군인이 종군 기자를 전장 상황에 따라 짐덩이로 여길 가능성이 있는건 변하지 않으며, 종군기자가 사망하는 경우는 단순하게 눈먼 탄에 맞아죽는 급의 운이 매우 없는 경우라는 의미다. 만약 군인이 공격한다면 피아식별 조차 못할정도로 개판 5분전인 위험지대까지 접근해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의미로도 해석 될수 있다.

간혹 종군기자 따위 총탄이 난무하는 전장에선 총쏘는 군인 한명이 더 급한데 무력하게 카메라만 들고다니는 쓸모없는 직업이며, 전쟁기록 같은건 이젠 군인에게 바디캠 줘서 해결하면 되지않냐는 말도 있는데, 국제사회의 지지 및 지원이나 민간인들이 전쟁에 경각심을 가질수있는건 긴박한 전장의 모습보단 파괴된 도시와 굶주린 피난민들을 촬영한 사진, 영상이나 소강상태나 전후에 현장을 담은 인터뷰다. 이런걸 군인에게 시킬수도 없는 노릇이니[6] 종군기자는 계속 무력충돌이 일어나는 이상 반드시 필요하다.

현재까지 대한민국 국적으로 순직한 종군기자는 1958년 금문도 사건에서 취재 도중 조난, 순직한 최병우 기자가 유일하다.


4. 알려진 종군기자 목록[편집]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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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버트 카파의 문서에서도 볼수 있듯이 이 사진은 연출된 사진이다. 그런데 하필 이 사진을 찍은 직후 진짜 총격전이 벌어져서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고 한다.[2] 사실 전쟁통에서 적군과 종군기자랑 의무병의 구분이 쉽지 않을 뿐더러 종군기자와 의무병임을 알아도 죽이는 경우가 대다수다. 물론 이 경우 당연히 전쟁범죄지만 이를 일일이 찾아내 처벌하기도 어려운데다 높으신 분들 역시 암암리에 묵인하므로 국제법상 금지되어 있다 한들 목숨을 보장 받는 건 불가능하다. 자신의 감과 천운에 맡겨야 한다.[3] 최초로 전쟁을 보도한 기자는 1807년 엘베강 전투를 보도한 타임스의 헨리 로빈슨으로 보고 있지만 직접 전쟁 현장을 취재하진 않았기에 최초의 종군기자로 보진 않는다.[4] 르완다와 보스니아는 서로 5,000km나 떨어져 있지만 1994년 두 나라 모두 내전으로 인하여 제노사이드를 겪은 나라다. 영화 노 맨스 랜드 에선 보스니아 병사가 르완다를 언급하고 호텔 르완다 에선 초반에 보스니아 내전 이야기가 나온다.[5] 이 사진 촬영 담당 병사중 Leo Stautsenberger라는 병사에 관련된 일화가 있다. B-24 extrajoker라는 별명을 가진 B-24에 탑승하여 사진을 촬영했었는데 하루는 해당 기체에 동승한 동료들이 다음에는 우리 기체도 좀 찍어달라고 해서 다른 기체에 탑승하여 출격했는데 그 출격에서 B-24 extrajoker가 격추되고 생사를 함께했던 동료들이 전원 전사하는 장면을 촬영하게 된다.[6] 실제로 긴박한 바디캠 영상의 반응을 보면 단순히 촬영한 군인의 생사를 궁금해하거나 알고있는 장비나 용어를 듣고 한껏 흥분한 밀덕등 전쟁상황 자체에 몰입하는 사람은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