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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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이름표기에 관한 논란
4. 미디어 매체


1. 개요[편집]


鍾離眜
? ~ 기원전 201년

전한초 시대, 즉 초한전쟁 시기 나라의 장수.

이름은 흔히 매(), 즉 종리매로 알려져 있었으나 사기, 한서 등의 사서 원문 등에는 말(眜)로 기술되어있다. 성은 복성으로 종리(鍾離).


2. 생애[편집]


중국어 위키백과에 의하면[1] 태어난 것은 장강 이남의 회계군 산음현(現 사오싱시)이었지만 실질적 고향은 강소성 롄윈강에 위치했던 이로(伊盧)에 살았다고 한다. 이곳은 한신의 고향인 회음에서도 가까운 곳이다.

항량회계에서 3천의 장정을 모아 거병할 때부터 그들을 따랐다. 원래는 전 회계 태수 은통 밑에서 계포와 같이 있었다. 후에 초회왕으로 앉혀지는 양치기 미심을 찾아내어 명성이 높아졌다.

장수로서의 능력 또한 뛰어났는데, 초한지에서는 주로 항우가 위기에 몰렸을때 구원군을 몰고와서 구해주는 역할이었고 실제로는 유방을 몇 번이나 사지로 몰아넣은 적이 있어 통일 후 그와 한신의 몰락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어쨌든 계포나 항장 등 여타 장수들과 비교하면 한 단계 윗급이다. 진평범증 이간질 계획에 같이 묶이기도 하였다. 나머지는 용저, 주은.[2] 종리말은 '세운 공은 많지만 지급된 영지가 없어 불만이 많다' 이런 식으로 헛소문이 돌아서 한때 항우의 의심을 사기도 했지만, 종리말의 충성심은 변함이 없어서 해하 전투까지 항우를 보필했다. 이런 면은 삼국지고순, 장임과 비슷하다. 그러나 종리말도 사면초가의 상황에선 살아남아서 도망치는 쪽을 택했다.

한신과 사이가 좋아서 초 멸망 후 한신에게 의탁하고 있었다.[3][4] 아무튼 한신은 옛정을 생각해서 종리말을 보호해주고 있었으나 위에서 말한 이유 때문에 유방은 종리말을 끝까지 찾아 죽이라는 포고령을 내린 상황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한 초나라인이[5] 유방에게 한신이 모반하려 한다고 고해버렸고, 한신이 발을 동동 구르던 중 어떤 사람이 '종리말을 죽여서 바치면 황제가 봐줄 것'이라고 말한 것에 혹해서 종리말에게 이 얘기를 꺼냈다. 종리말은 한신의 쪼잔함에 격분하여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구나! 너 같은 놈은 장자[6]가 아니다! 날 죽이면 너라고 성할 것 같냐?"라는 저주서린 유언을 남기며 한신이 보는 앞에서 칼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이후 한신의 말로를 보면 별로 틀린 말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7] 같은 동료이자 세트 취급 받는 계포는 한신이 아니라 하후영 눈에 띈 덕에 말년까지 발 쭉 펴고 살았다. 같은 항우 세력의 인물들이 대부분 한신을 과소평가하다 당한 반면 정작 종리말은 한신을 과대평가한 탓에 죽은 셈이다.

똑같이 목에 현상금 걸린 계포는 노나라 협객인 '주가'가 하후영을 설득하자, 하후영은 주가의 설득을 고대로 유방에게 전했고 유방은 계포의 사과를 받고서 이를 쿨하게 용서, 낭중으로 임명했다.

삼국지동오의 장수인 종리목과 노나라 상이자 고사성어 종리위주의 주인공인 종리의가 종리말의 후손이다.


3. 이름표기에 관한 논란[편집]


사기 원문과 주석, 한서 원문과 주석에는 昧가 아닌 眜로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또한 주석들에는 昩의 음은 末이라고 했다.[8] 그러나 한편으론 종리말보다는 종리매가 더 널리 알려지고 쓰이는 편이다. 본고장인 중국에서조차 종리말인가 종리매인가를 두고 논란이 있는 편이고 종리매가 바이두 등의 검색엔진에선 더 널리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昧와 眜 두 글자가 상당히 유사하게 생겼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시대, 지역에 따른 사서판본의 인쇄 차이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9] 또는 초한쟁패기를 널리 알린 초한지 또는 <서한연의>에서 종리말이 아닌 종리매로 기술된 탓일 수도 있다.

현재 이에 대해선 학계나 연구자 사이에서의 논의는 보이지 않는다. 추후 더욱 연구하여 보강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4. 미디어 매체[편집]


시바 료타로항우와 유방에서도 등장한다. 항량군의 북상을 촉구하기 위해 진승의 사신을 가장해 찾아온 소평에 대한 연회에서 첫 등장한다. 여인으로 생각될 만큼 여리고 아름다운 생김새지만 눈빛이 실로 비범한 인물로 지용을 두루 갖춰 3군을 통솔한 명장으로 평가받는다. 용저와 함께 초군 2대 명장으로 온갖 잡스런 어중이 떠중이 무장으로 채워진 한군에는 한신 빼고는 가히 따를 자가 없다고도 서술된다. 하지만 진평의 반간계 여파로 행동에 제약이 따르게 된다. 작 중에는 거의 비중은 없지만 소소히 초군의 중역으로 기술된다.

드라마 초한전기에선 11회부터 출연. 배우는 엽붕[10] 한국 더빙판 성우는 박영재. 계포와는 단짝 친구로 나온다. 계포가 좀 다혈질적이라면 종리매는 차분한 성격으로 나온다.

회계군의 관헌으로 계포가 항우와 시비가 붙어 싸운 뒤 항우와 호형호제하게 된다. 한신과의 인연은 항량이 대패하고 죽은 후 살아남은 한신이 몇몇 패잔병들과 함께 귀환했다가 도망병으로 오해받을 뻔한 걸 보고, 어떻게 진군 진영을 지나왔는지 들은 후 한신의 능력을 범상치 않게 여겨 가까워진 것으로 나온다.

한고제의 양성 함락 후 항우는 종리매에게 포로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명을 내리는데, 이 포로들 중에 종리매와 알던 사이인 사람이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아는 체를 하자 멘붕한 종리매는 부하들에게 포로들을 죽이라고 명한 뒤 도망치듯 떠나려 하고, 이에 지인은 "이 비겁한 놈아! 천벌을 받을 것이다!" 하고 종리매를 저주하며 죽는다. 종리매는 결국 입을 틀어막고 울음을 터뜨린다. 실제 그의 말로를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대목... 다만 이 작품에선 토사구팽 과정이 축약되어서, 종리매 또한 한신과의 접점은 나왔지만 해하 전투 이후의 행적은 생략돼서 말로가 나오지 않는다.

또 다른 드라마 초한쟁웅에서는 잘생긴 꽃미남으로 등장. 처음에는 유명한 도둑으로서 항우오추마를 노려 항우에게 싸움을 걸지만 곧 패하고 항우의 용맹과 대우에 감격하여 그의 부하가 된다. 전쟁 때는 가면이 붙어있는 투구를 쓰고 나와 싸운다. 기록에서 한신과 친분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인지 무시당하고 모욕을 겪는 한신을 나름대로 챙겨주고 감싸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대장군 한신(한국 방영명은 천하의 명장 한신)에서는 한신이 주인공이다 보니 종리매의 저주서린 유언은 없이 한신을 보호하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나온다.

고우영 초한지에서는 침착하고 문무를 겸비한 유능한 장수로 나온다. 항우가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신뢰하는 몇 안되는 부하 중 하나. 실제 역사처럼 전쟁이 끝난 뒤 한신에게 몸을 의탁했다가 적발당하자 자결한다.

문정후 초한지에서도 유능한 장수로 나온다. 해하 전투까지 항우를 끝까지 따랐지만, 사면초가인 상황에서 항백, 계포처럼 이탈해버려서 항우가 아쉬워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했다. 이후 계포와 종리매를 잡아들이라는 한고제의 포고령으로 초왕 한신에게 의탁했으나,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위험해질 수 없다며 자결한다.

[1] #[2] 범증이야 말할것도 없는 초나라의 두뇌였고, 용저는 항우 최고의 총신이며 주은은 초의 본거지를 관장하던 인물 최중요 인물이였다. 종리말도 그들만큼 급이 높은 인물이였다는 것이다.[3] 둘의 고향은 진나라 말기에 동해군(東海郡)에 속한 지역들이라 안면이 있을 수도 있다.[4] 물론 고향이 가까운 것도 있겠지만 한신은 항우 부하시절 좋지 않은 취급을 받았고 종리말도 겉도는 처지였기에 친했을 수도 있다.[5] 한서 한신전에선 한신의 병사라고 한다.[6] 長者. 현명한 이라는 뜻이다.[7] 한신은 과거 신세지던 정장이 자신의 밥을 챙겨주다 지원을 끊은 일로 출세한 후 불러다 소인이라고 비난한 적이 있는데, 정작 자신은 목숨을 보호해준다고 받아줘 놓고서 자기 처지가 안 좋아지자 버리는 더 심한 짓을 했다. 어떻게 보면 이쪽이 원조 토사구팽이다.[8] 漢書義曰:'昩音末'(한서에서 뜻이르기를 : 昩의 음은 말(末)이다.(즉 말(末)과 같다.))[9] 이런 판본버전에 따른 차이는 충분히 표기의 수정은 물론 역사해석과 이해 수정을 불러오기도 한다. 가까운 예로 백제 고이왕 시기 기리영 전투에 관한 재해석같은 일이 있다.[10] 삼국에서 강유를 맡았던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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