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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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어려움
2.1. 그리스도교에서의 해석
2.2. 죄질과 관점의 차이
3. 교화한 사람들을 향해
4. 여담



1. 개요[편집]


  • 라틴어: Cum dilectione hominum et odio vitiorum.
  • 영어: Hate the sin, not the sinner. / With love for mankind and hatred of sins.[1]

어떠한 이의 에 대해서 거론하거나 라는 것 자체에 대해 설파할 때에 주로 나오는 말이다. 상당히 오래된 말인데, 보통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서신의 한 구절에서 퍼진 것으로 본다.[2]

특히 의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루는 기독교와 연관이 깊은 말이기도 하다. 용서예수의 가르침 중에서도 많이 강조되는 요소 중 하나다. 죄가 있는 사람들도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식으로 단순히 생각해서 풀이하곤 하는데, 실제로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대상을 맞닥뜨리게 되면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다.

대체적으로 사람을 분리시켜서 공정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나, 사람의 견해에 따라 철학적, 종교적인 이유로 의미가 매우 달라지기 때문에 사용함에 따라 논란의 여지를 남기기도 한다.

기독교에서 이러한 관용의 태도를 설파하는 이유는, 교리상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존재 자체가 죄인으로 태어났고, 항상 알게 모르고 많은 죄를 지어 왔으므로,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은 제 얼굴에 침 뱉기라는 것이다.


2. 어려움[편집]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미울 때도 있습니다.

죄를 지은 게 사람인데... 사람을 어떻게 안 미워할 수가 있습니까~?

- 김상중[3]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좆같아하는 말이 뭔지 아냐?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거야. 정말 좆같은 말장난이지. 솔직히 죄가 무슨 죄가 있어? 그 죄를 저지르는 좆같은 새끼들이 나쁜 거지.

- 영화 '넘버 3'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와 달리 범죄자의 손에 잔혹하게 살해당한 피해자의 유족이나 대규모 절도 및 폭행에 의해 손해를 입은 피해자들은 범죄자 때문에 얻은 아픔과 괴로움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이를 이기고 범죄자를 용서하기 힘들다. 아픔과 슬픔을 극복하고 범죄자들을 용서하는 피해자도 물론 있긴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꼭 범죄나 악행의 피해를 입은 사람이 아닌 제3자라 할지라도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면서도 안타까운 현실이다. 아무리 악독한 죄라고 해도 죄는 어디까지나 개념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런 죄에 발을 달아주고 악행을 '직접' 저지르는 것은 명백하게 인간인데 그것을 미워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공감하기가 어렵다.

탄생 배경은 종교적 사랑과 용서가 근본이라지만 정작 실생활에선 이 문장이 그저 제 식구 감싸기, 내로남불에 오용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구절 하나만 믿고 마치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피해자의 면전에서 지껄이는 경우도 있으며, 이딴 소리를 눈 앞에서 들은 피해자 및 관련인들은 눈이 돌이가 용서는 커녕 뚝배기를 부수려고 드는 일이 잦다. 가해자와 피해자 관련인의 대면에선 거의 백이면 백 등장하는 구절이라 현대에는 본래의 의미와는 180도 뒤바뀐 뜻으로 이해되어, 이미지가 굉장히 나빠진 어구다.

2.1. 그리스도교에서의 해석[편집]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이 문장이 그리스도교의 교부에게서 나온 문장인 만큼,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 내에서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적용이 있어왔다. 현재 교파나 교인 개인에 따라 여러 해석이 있으나, 무난하게 받아들여지는 해석을 소개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하느님은 정의로우시며, 불의를 심판하신다. 만약 누군가가 불의하다면 틀림 없이 벌을 받을 것이다. 악행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에 대한 심판을 굳이 바랄 필요도 없고 그것을 위해 기도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인간인 우리의 입장에서는) 저절로 올 것이다. 절대자를 신앙하는 그리스도인 입장에서는 악행은 결국 미련한 짓이다. 따라서 죄인의 일시적인 형통에 부러워하거나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악에 대한 정의로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를 병들고 악하게 만드는) 증오심과 복수심으로부터 담담히 우리 자신을 지켜내야 한다.

따라서 누군가가 죄를 지었을 때, 우리는 그의 죄를 미워하되 죄인 자체를 미워할 필요 없이 단지 정의와 진리를 구하면 된다. 속히 벌하실지, 더 적절한 시기에 벌하실지는 절대자의 몫이다. 또한, 우리는 이웃의 죄인 여부보다는 그의 변화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아무리 악한 인간이라도 주님의 형상대로 회복될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믿음'의 중요한 측면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또한 노무현의 용서라는 개념의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용서가 성립하려면 죄를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사람을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하는 두 조건이 조합되는 경우에서 용서가 가능하려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단 하나의 경우밖에 없기 때문이다. 죄를 사랑할 경우 죄인을 용서해 줄 필요가 없다. 그것이 나쁜게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미워할 경우에도 용서는 불가능하다. 용서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 속에는 신자들에게 예수가 너희에게 행한 것처럼 이웃에게 행하라는 말씀이 많은데, 이처럼 신자들도 자신들이 용서받은 것처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그렇게 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듣는다.

그리고 절대자의 뜻이 다음 마태오 복음서의 구절과 같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둔 채 그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 양을 찾게 되면 그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18장 12-13절 중


2.2. 죄질과 관점의 차이[편집]


물론 살인이나 폭행 같은 극악무도한 범죄 라면 그 죄를 지은 사람을 나쁘게 볼 수도 있지만, 개인의 신념이나 종교적인 관점에서 죄라고 여겨지긴 하지만 타인에게 그다지 피해를 주지 않는 경우라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내치지 않는것이 타당할 수 있는 경우도 분명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동성애혼전순결 같은 경우이다.

물론 근래에 들어서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죄가 아니라고 보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기독교와 같은 일부 종교의 윤리적인 관점에서는 죄가 되는 경우도 있기에 신께서 지으신 자연질서에 위배된다고 보기에 동성애와 혼인 이전의 성적인 문제는 종교에선 죄가 되지만, 그렇다해서 일반적인 사람들의 입장 처럼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를 딱히 끼치지는 않기에, 무작정 배척하거나 내치는 것 또한 옳지 않다고 보는 입장도 분명히 있다.

물론 극단주의적인 종파들에서는 그마저도 혐오하는 경우가 있기에 종교에서 그런것들은 죄로 본다는거 자체가 그것을 혐오한다는 것으로 일반화 할 수는 있지만 그또한 옳지는 않다. 분명 동성애와 혼전 성문제는 죄지만 그럼에도 그들도 사람이기에 이미 혼인전 성적인 문제가 있거나[4] 인해 아이가 생겼다 해도 그것만으로 무작정 구원의 가능성을 상실한 것이 아니기에 이미 지난것은 어쩔수 없고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혼인 전에 생긴 아이라도 그조차도 소중한 생명이고 신의 축복윽 받기에 충분한 한명의 인격체임을 당연히 인정하고 있으며, 동성애 성향이 있는 사람 또한 동성애가 종교적인 관점에 따라 죄가 될 수 있다이지, 동성애 성향이 있는 사람을 혐오하고 배척하자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정상적인 종교단체라면 그런사람들을 무작정 정죄하지 않고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포용해야 한다는 관점으로 내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가 죄있는 사람을 위해 왔다며, 당시 이스라엘에선 죄인이라며 배척하고 상종 못할 종자 취급 받던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3. 교화한 사람들을 향해[편집]


죄를 저지르는 것이 사람이긴 하지만, 이 말이 지금까지도 유효하게 전해오는 것은 결국 죄를 실현시키는게 사람인 것 처럼, 반대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마음을 고쳐먹는 것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죄를 저지르는 사람들 중에서는, 끝까지 죄의 길만 택하는 사람들 이상으로 죄를 뉘우치고 고치는 사람들이 많다.

단순히 사람을 살해하거나 범하는 것, 혹은 금품을 갈취하는 것만이 죄는 아니다. 쓰레기를 길가에 버리는 것도 법에 명시된 죄고, 불법 다운로드를 하는 것 또한 법적으로 처벌하지 않을 뿐이지[5] 저작권자에게 합당한 대가가 돌아가지 않는 죄가 맞다. 게다가 이것들 이상으로 사람들이 많이 저지르는 게 죄인 줄 몰랐는데 나중에 돌아봤더니 죄였던 일이다. 결국 세상에 죄 안 짓고 사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존재할 수가 없다.

사람이 죄만 짓고 살았다면 세상은 진즉에 멸망했을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은 죄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죄를 뉘우치기도 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도 이해해줄 법한 곤궁한 상황에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옳은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사람이 죄를 뉘우치는 것뿐 아니라 좋은 일을 하기 위한 의지 또한 같이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물론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지금까지도 역사 시간에 배우는 이유이기도 하고, 죄인을 용서한 사람을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칭송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의 진정한 존재 의의는, 그 죄를 진심으로 뉘우칠 가능성도 인간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지은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는 일은 고쳐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뉘우치지 않고 또 죄를 저질렀다? 그 죄에 대한 대가를 또 치르게 하고, 다시 뉘우칠 기회를 주면 된다. 한결같이 죄만 저지르는, 이미 반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모르는 악인이다? 어차피 미래에 어떻게 될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그냥 지은 죄에 대한 대가만 꼬박꼬박 치르게 하고 뒤의 일은 묻지 않는 것이 낫다. 지은 죄가 너무 커서 용서할 수가 없다? 그 죄의 경중을 가리고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 이 존재하는 것이다. 저지른 죄를 그냥 묵살하는 것은 죄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며, 한 번 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그 사람을 영원히 매도해버리는 것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다.


4. 여담[편집]


한국 사회에서 어떠한 사고가 일어나면 사고의 책임자를 묻어버릴 생각으로 과거를 파헤치는 건 이것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것이 정말로 최선의 선택이냐고 물을 수도 있다. 놀랍게도 이것이 맞다고 증언하는 학술적 연구 결과가 있다. 자세한 사항은 팃포탯 문서를 참조.

어쨌든 논쟁의 여지가 많은 말이기는 해도 기독교가 보편적인 인간 사회에 퍼뜨린 말 중에서는 손꼽을만큼 유익한 말이다. 그러나 목사나 개신교 신자들이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기 위해 악용해서 그 가치를 더럽히는, 안타까우면서도 공분을 사기 좋은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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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통은 간결한 전자의 표현이 많이 쓰인다. 후자는 위의 라틴어 구절을 직역한 것으로 보이는데, "인간을 사랑함으로써 죄를 미워하라"라는 뉘앙스에 가깝다.[2] 여러 설이 나오는데, 채근담에 나온다는 이야기, 공자, 소크라테스 등이 주장했다는 이야기도 있다.[3] 첫 번째 문단은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최신종을 다룬 회차의 엔딩 코멘트, 두 번째 문단은 드라마 나쁜 녀석들에서 오구탁의 역할로 연기하며 한 대사다.[4] 여기서의 성적인 문제란 범죄 이외의 것을 말함[5] 토렌트처럼 업로드가 수반된다면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다. 일방적으로 다운로드만 받고 업로드는 하지 않을 때 잡아내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