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페 마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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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페 마치니
Giuseppe Mazzini


파일:Giuseppe_Mazzini.jpg

출생
1805년 6월 22일
리구레 공화국[1] 제노바
사망
1872년 3월 10일 (향년 66세)
이탈리아 왕국 피사
국적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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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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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혁명가, 정치인, 언론인
학파
낭만주의, 섭리주의
주 분야
역사, 신학, 정치
성향
이탈리아 내셔널리즘, 낭만주의
고전적 자유주의 (급진주의)
군주국의 공화주의
정당
카르보나리당 (1829~1831)
청년 이탈리아당 (1831~1848)
이탈리아 국민협회 (1848~1853)
행동당 (1853~1867)
서명
파일:Giuseppe_Mazzini_Signature.png

1. 개요
2. 생애
3. 사상
4. 여담
5. 참고문헌



1. 개요[편집]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혁명가다.


2. 생애[편집]


1829년 비밀 결사 카르보나리[2][3]에 가입해 오스트리아와 맞서 싸웠고 당의 지하활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마르세유로 망명하였다. 이때 마치니는 카르보나리를 탈당하여 1831년에는 청년 이탈리아당을 만들어 자유, 독립, 통일을 표방했다. 그의 이탈리아 건국 이념은 전제군주정이 아닌 공화국이었고 이 때문에 대부분이 왕국이었던 이탈리아에서 그의 생애는 투옥, 추방, 망명의 연속이었다. 이후 제네바에서 청년 이탈리아당을 토대로 세력을 넓혀 청년 유럽당을 1834년에 창당한다. 전 유럽의 민족주의 운동을 호소하였으나 스위스에서 추방되어 런던으로 다시 망명하였다. 1849년 로마 공화국을 세웠으나 실패하였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주도하는 이탈리아 통일을 반대하고 공화정을 주장했으나 실패했다.[4] 1872년 피사에서 사망한다.

이후 그의 이념은 1895년 창당된 이탈리아 공화당에 계승되었고, 20세기 중반 이탈리아의 공화국 전환에 큰 공을 세웠다.


3. 사상[편집]


주세페 마치니는 카르보나리로 대표되는 초기 리소르지멘토 사상, 낭만주의 문학 사조, 헤르더 등의 영향을 받은 공화주의, 민족주의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마치니는 당시 자유주의 사상가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던 공리주의와 개인의 권리 이념을 거부하고 도덕성과 공동체에의 의무를 강조했다. 그는 권리 이념이 물질주의와 탐욕스러운 이기주의를 조장하고 국가 공동체 유지를 저해한다고 여겼고 이를 대신해 인간을 이기심으로부터 정화시켜줄 요소인 종교를 강조했다.[5] 마치니는 마르크스주의 역시 물질주의적이고 개인을 계급으로 갈라쳐 공동체를 파편화시킨다고 여겨 거부했다.

이탈리아 통일 삼걸 중 하나로 평가받는 마치니는 민족성과 민족국가의 성립을 중시했다. 그는 민족주의자였지만 민족의 이권 주장 역시 거부하고 대신 세계와 인류에 지는 의무를 강조했다. 마치니에 따르면, 이탈리아가 지닌 의무는 통일을 완수해 민족국가를 수립하고 프랑스가 가지고 있던 혁명과 투쟁 사상의 주도권을 가져와 의무와 도덕을 강조하는 혁명을 완수해 세계를 화합시키는 것이었다.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를 통해 정치적으로 한번, 교황을 통해 종교적으로 또 한번 세계를 화합시킨 바 있으며 이번에는 공화주의와 민족자결 사상을 통해 다시 한번 세계를 화합시킬 차례란 말 또한 덧붙였다.

그에게 민족국가란 정치적 이상과 종교적 사명감을 통해 만들어진 평등하고 끈끈한 공동체였으며 동일한 헌법과 이런저런 정치 제도, 공동체에의 의무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각 민족국가는 각각의 차별화된 민족성으로서 세계와 인류에 기여했고 그 중 이탈리아가 지닌 민족적 사명으로는 전술한 세계 통합을 지목했다. 마치니는 또한 공화주의자로서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지지했으며 영토적 통일에 급급하기보단[6] 민족 국가 수립을 통해 개인의 자유와 사회 개혁[7],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어내기를 기원했다. 마치니에게 혈통적 민족은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단에 가까웠으며 이보단 정치적 민족을 강조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과 민주주의를 통해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어내고 부르주아 엘리트 중심의 사상에서 벗어나 하층민의 정치 참여를 중시했다. 다만 마치니의 평등은 사회주의적 평등보단 정치적, 법적 평등에 가까웠고 마르크스주의에 비판적이었던 만큼 재산 재분배보단 협동조합적인 방법론을 지지했다.


4. 여담[편집]


  • 그는 유럽 내 단 11개의 민족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에 입각하여 그린 유럽 지도는 오늘날의 유럽지도와 생판 다르다. 이 지도에 입각하면 심지어 스위스는 독일에 병합된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19세기 중반까지도 민족주의 사상이 공화주의적 자유관과 연계되어서 "하나의 민족 → 혼자서도 충분히 자유로운 체제를 갖춘 국가로 성장할 만큼의 규모를 갖추어야함 → 그러니까 군소민족은 적당히 합쳐버려서 하나의 나라를 만들자"라는 공식으로 치환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가 가장 잘 구현된 사례가 바로 유고슬라비아. 그래서 자신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발칸 반도소수민족들에게는 "우리를 탄압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나 우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마치니나 똑같은 놈이다."라고 폭풍디스 당하기도 했다.

  • 《악마가 사랑한 여인》이라는 책[8]에선 프리메이슨의 수장이였다고 한다. [9] 프리메이슨에 가입만 해도 자동으로 파문시키는 가톨릭에서 그 탈퇴자를 수녀로 받아들일 리가 만무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으나 회개한 사람을 용서하고 받아주는 것이 기독교의 정신이니 꼭 그렇지만도 않다. 다만 그럼에도 저자의 주장은 신빙성이 높지 않은데 프리메이슨은 예나 지금이나 기혼 남성만 회원으로 받아왔기 때문에 여자가 프리메이슨에 가입할 순 없기 때문이다. 반계몽적 전통 가톨릭 근본주의, 반리소르지멘토[10] 입장에서 음모론을 뿌렸을 가능성이 높다.[11] 책 내용도 프리메이슨이 악마숭배자니 암살음모를 꾸몄니 하는 전형적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가톨릭이 견지한 음모론적 프리메이슨관에 가깝다.



5. 참고문헌[편집]


  • 《주세페 마치니와 애국심》, 장문석, 서양사론 제135호, 한국서양사학회.
  • 《리소르지멘또 시기의 마찌니의 정치사상》, 김영숙, 이탈리아어문학 제21권, 한국이탈리아어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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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설치한 괴뢰국이다.[2] 농민, 애국시민, 영세 기업인, 진보적 귀족, 학생들이 만든 비밀 결사로 이탈리아 통일운동을 이끌었다. 뜻은 굽는 사람이란 뜻으로, 결사대원이 숯 굽는 사람으로 위장해 나온 이름이다.[3] 여담으로 여기서 카르보나라 파스타에서 카르보나라의 의미와 같다.[4] 결국 통일 이탈리아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국체와 헌법, 왕조를 계승한 왕국이 되었다.[5] 마치니 사상에서 종교는 크리스트교의 특정 종파가 아니라 종교를 믿는다는 행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었으며 특정 종교보단 종교를 믿는다는 그 자체의 필요성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6] 카밀로 카보우르의 위로부터의 혁명과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중심의 통일 사상 비판과 맥이 닿아있다.[7] 하지만 실제 통일 운동 과정에서 농민들의 토지 재분배 주장을 수용하진 않았고 이로인해 마치니 세력은 지지자가 되었을 농민 세력을 잃고 주도권을 카보우르의 중도파에게 넘겨주어야만 했다. 토지 문제와 사회 개혁의 미비는 실제 통일 후 남부문제를 비롯한 사회문제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8] 한 여성이 프리메이슨을 탈퇴하고 수녀가 되어 집필한 책이다.[9] 예나 지금이나 프리메이슨은 럭셔리한 사교클럽으로, 18세기에서 19세기의 프리메이슨은 유명인의 사교클럽으로 여겨져서 조지 워싱턴을 포함한 미국 건국 초기의 인물들이 많이 가입해 있었다. 즉, 프리메이슨 회원이란 것 자체가 곧 당대의 유명인이라는 뜻으로 통했다. 다른 말로는 자세한 건 프리메이슨 항목 참조. 또한 프리메이슨은 당대 계몽주의와 근대 이념들의 요람이었으니 책의 주장과는 별개로 마치니가 프리메이슨 단원이었을 가능성이 결코 낮지는 않다.[10] 이탈리아 통일 운동은 당시 가톨릭이 경계한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계몽주의의 영향이 짙었던 데다가 교황령의 존재 때문에 필연적으로 가톨릭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라테라노 조약 전 까지 교황청은 통일 이탈리아를 인정하지 않았다.[11] 프리메이슨이 어떤 곳인지는 해당 문서를 참고하거나, 앞의 각주를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