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페 메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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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페 메아차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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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파일: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엠블럼(2014~2021).svg

19대, 26대, 29대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역대 주장
레오폴도 콘티
(1922~1931)

주세페 메아차
(1931~1940)

아틸리오 데마리아
(1940~1943)

AC 밀란 역대 주장
브루노 아르카리
(1940~1941)

주세페 메아차
(1941~1942)

주세페 안토니니
(1942~1944)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루이지 알레만디
(1935~1936)

주세페 메아차
(1937~1939)


실비오 피올라
(1940~1947)


주세페 메아차의 수상 이력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주세페 메아차의 기타 정보





이탈리아의 前 축구인


파일:external/cdn.bleacherreport.net/Giuseppe_meazza_1937_display_image.jpg

이름
주세페 메아차
Giuseppe Meazza
출생
1910년 8월 23일 /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롬바르디아주 밀라노광역시
사망
1979년 8월 21일 (향년 68세) /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 몬차에브리안차현 리소네
국적
[[이탈리아|

이탈리아
display: none; display: 이탈리아"
행정구
]]

신체
169cm | 체중 73kg
직업
축구선수 (공격수[1] / 은퇴)
축구감독 은퇴
소속
선수
인테르나치오날레 (1927~1940)
AC 밀란 (1940~1942)
유벤투스 FC (1942~1943)
AS 바레세 (1943~1944)
아탈란타 BC (1944~1946)
인테르나치오날레 (1946~1947)
감독
아탈란타 BC (1945~1946 / 선수 겸 감독)
인테르나치오날레 (1946~1948 / 선수 겸 감독)
베식타스 JK (1949)
프로 파르티아 (1949~1951)
이탈리아 올림픽 대표팀 (1952~1953)
인테르나치오날레 (1955~1956)
인테르나치오날레 (1957)
국가대표
파일: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53경기 33골[2] (이탈리아 / 1930~1939)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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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1]


1. 개요
2. 생애
3. 플레이 스타일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5. 메아차에 대한 말말말
6. 여담



1. 개요[편집]




내 트릭을 이해 못하는 골키퍼들에게 페널티킥을 막히는 것이 최악의 수치이다.

이탈리아의 前 축구선수 출신 축구감독. 1957년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감독을 맡았다.

1930년대 이탈리아 축구계에서 인테르 소속으로 수많은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 국가대표팀에서도 팀의 중심으로 활약하며 1934년, 1938년 월드컵에서 2연패를 이끈 선수이다.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주세페 메아차는 1910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가 1917년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하였고, 어머니는 시장에서 과일을 팔며 어린 메아차를 키웠다. 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좋아했지만 메아차가 축구하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던 메아차의 어머니는 그의 축구화를 매일 감췄다. 그러자 메아차는 길거리에 나가 맨발로 축구하는 게 일이었다고 한다.

처음 어린 메아차가 동경하던 클럽은 AC 밀란이었다. 그리고 13살 되던 해 메아차는 AC 밀란에서 뛰고 싶다고 찾아갔지만 AC 밀란은 제 발로 찾아온 메아차를 말랐다는 이유로 내쳤다. 그 이후에도 계속 맨발로 볼을 다루던 그를 같은 연고지를 두던 인테르나치오날레가 주목했다. 길거리에서 맨발로 공을 다루던 그의 기술에 꽂힌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스카우트는 구단에 그를 영입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구단 측에서 그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렇게 인테르나치오날레 소속의 선수가 되었다.


2.2. 선수 경력[편집]



2.2.1. 클럽 경력[편집]


메아차는 곧바로 재능을 보였고 17살에 처음으로 인테르나치오날레의 1군팀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런 그를 팀에서는 썩 내켜하지 않았었고, 이 때 그의 별명인 발릴라[3]가 붙었다. 이 별명을 붙인 사람은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선배였던 레오폴도 콘티.[4] 콘티는 어린 메아차가 마음에 안 들었고 "이제 우리 팀이 유치원이 되는군."이라는 식으로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당시 이탈리아 정부에서 파시스트 선전용으로 밀어주던 발릴라란 오페라가 있었는데 그것은 8살에서 14살의 소년들이 공연하던 것이었던 터라 콘티는 그것을 이용해서 비아냥거렸고, 그의 별명이 되었다.[5]

하지만 메아차는 데뷔 시즌에만 12골을 넣음으로서 실력으로 의문부호를 떼었고, 세리에 A의 창설 시즌인 1929년[6]에는 33경기에 출전 31골을 넣어 세리에 A 최연소 득점왕의 기록을 세웠다. 이 때 메아차의 나이 19살.[7] 베네치아와의 경기에서 10대2로 이길 때에는 6골을 집어넣기도 하였고, AS 로마와의 경기에서는 3분 만에 해트 트릭을 달성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8] 이 활약으로 메아차는 이탈리아 대표팀의 파란 유니폼을 입게 되었고 국가대표 팀에서도 전설을 써내려갔다.

메아차는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 이후 부상 때문에 제대로 활약을 하지 못했고, 1940년 11월 28일, AC 밀란으로 이적했다. 그리고 AC 밀란 소속으로 뛰던 첫 밀란 더비 당시 메아차는 라커룸에서 울었다고.. 그리고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와 AC 밀란의 앙금을 희석시키려 노력한 거의 유일한 선수라고 알려져 있다. 2년간의 평범한 활약을 뒤로 하고 유벤투스 FC로 이적한[9] 그는 이후 바레세, 아탈란타 등을 떠돌다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 플레잉 코치로 은퇴했다. 그는 마지막 시즌에 17경기에 출전하여 2골을 넣었는데 이 두 골이 아니었으면 인테르나치오날레는 강등당했을 것이다.[10]
그는 인테르에서 총 284골을 넣었는데 이 기록은 70년이 넘는 시간동안 깨지지 않고 있는 인테르의 역대 최다 득점자 기록이다.


2.2.2. 국가대표 경력[편집]



2.2.2.1.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편집]

1930년 2월 국가대표팀에 데뷔한 메아차는 스위스와의 데뷔전에서 2골을 넣어버렸고, 3달 후의 헝가리 원정에서는 아예 해트 트릭을 기록하여 유럽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월드컵 직전에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기세에 눌려 유럽 최강의 칭호는 받지 못하고 있었다. 1934년 2월에 토리노에서 있었던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서 에이스 공격수 마티아스 신델라가 빠진 오스트리아에게 4대2로 패함으로써 월드컵 우승도전에 찬물이 제대로 끼얹어진 상황이었다. 반면 이탈리아는 주세페 메아차, 잔피에로 콤비, 움베르토 칼리가리스, 루이스 몬티, 비르지니오 로세타 등을 내세워 총력전을 펼쳤지만 패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상당히 해결된 문제기는 하지만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유벤투스 FC 선수들 사이의 지역감정 문제도 있었다. 처음 메아차는 자신을 은근히 깔보던 골키퍼 잔피에로 콤비와 사이가 안 좋았는데 콤비와의 내기[11]를 통해 사이를 회복시켰다. 처음에는 메아차를 무시하던 콤비도 차츰 메아차를 인정했고 이렇게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출신의 주전 공격수와 유벤투스 FC 출신의 주전 골키퍼의 사이가 좋아지니 팀의 지역감정 문제는 자연스럽게 완화되었다.

하지만 첫 경기에서 만난 미국은 이탈리아가 7대1로 압살했다[12]. 다음 상대는 스페인. 브라질을 이기고 올라온 스페인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1차전에서는 리카르도 사모라의 신들린 선방으로 조반니 페라리의 한 골[13]에 그쳐 1대1로 비겼고, 2차전에서야 메아차의 결승골로 1대0으로 승리를 거두어 4강에 올라가게 되었다.

다음 4강전의 상대는 오스트리아. 월드컵이 열리기 3달전에 이탈리아에게 공개 망신을 주었던 그 팀이었다. 이번에는 신델라까지 참가하여 이탈리아를 확실히 보내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이탈리아도 망신당했던 기억을 갚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결과는 이탈리아의 승리. 아르헨티나에서 건너온 엔리코 구아이타의 골로 1대0 승리를 거두어 3달전의 망신을 갚는데 성공했다.

마지막 결승전의 상대는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키아 역시 공수 밸런스가 좋은 팀으로 콤비, 사모라 등과 함께 유럽 최고의 골키퍼 자리를 놓고 다투던 프란티셰크 플라니치카를 축으로 한 수비진과 올드르지흐 네예들리가 버티고 있는 공격진 역시 유럽 최고 수준이었다.

경기 자체는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메아차가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서 부상을 당했었기 때문에[14] 이탈리아의 공격에는 다소 날카로움이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결승전 후반에 체코슬로바키아의 푸치에게 선제골을 내주자 이탈리아의 관중들은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응원구호였던 "이탈리아를 위해 죽어라"는 아예 "죽어라"로 바뀌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라이문도 오르시의 기적 같은 동점골이 터져 연장전에 들어갔고 메아차->구아이타-> 스키아비오의 결승골로 이어지는 기점도르 역할을 했고 이탈리아는 우승을 차지했다.

이 대회에서 골든볼을 받았다고 알려졌으나 정작 피파 공홈과 RSSSF에서는 1982년 이후 골든볼 기록만 인정되었지 그 이전은 나오지도 않았다. 다만 1998년 아르헨티나 최대 언론인 클라린에서 선정한 역대 월드컵 MVP에 1934년 수상자로 선정된 바는 있다. 자세한 내용은 월드컵/수상 문서 참고.

그리고 계속된 국가대표팀에서의 득점 행진으로 메아차는 국가대표팀에 데뷔한지 4년만인 1934년 12월. 25골로 아돌포 발론체리의 종전 득점 기록을 돌파하였다.


2.2.2.2. 1938년 프랑스 월드컵[편집]

1931년 이후로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주장이 된 메아차는 1938년 월드컵에서는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주장이 되어 팀을 이끌었다. 그리고 역시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단 한마디를 남겼다. "우승이 아니면 죽음을!!"

4강전에서 이탈리아는 브라질과 맞붙었고 브라질의 수비수 도밍구스 다기아의 파울로 페널티 킥을 얻은 이탈리아. 키커로는 메아차가 나섰다. 하지만 킥을 하려고 달려오는 순간 메아차의 바지 고무줄이 끊어져 버렸고 메아차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왼쪽으로 슈팅을 날렸다. 그리고 그 공은 마치 파넨카 킥처럼 천천히 날아갔고, 브라질 골키퍼 바우테르는 그것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15]
파일:1938 프랑스 월드컵 결승전에서 사로시와 악수하는 메아차.png
메아차 VS 사로시

결승전에서 샤로시 죄르지가 이끄는 헝가리를 만난 메아차는 실비오 피올라 등 신진 선수들을 잘 이끌고 이탈리아의 월드컵 2연패의 대기록에 기여했다. 메아차는 이탈리아에서 월드컵 2연패를 이룬 4명의 선수[16] 중 한 명이 되었다.


2.3. 죽음 그리고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편집]


1979년 메아차가 심장 혈관의 이상으로 사망하고 1980년에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측은 AC 밀란과 합의해 그의 이름을 자신의 홈구장에 붙여 그를 기리고 있다. 메아차가 AC 밀란에서 뛰긴 했지만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에서 남긴 족적이 비교도 안될 정도로 크다보니 AC 밀란 구단 측에서는 구장이 있는 거리 이름인 산 시로를 쓰는 것을 더 좋아한다. 현재 메아차의 무덤은 밀라노의 공동묘지에 있고 2004년에 지하로 이장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기술이 매우 빼어난 선수로 알려져 있다.

울퉁불퉁한 바닥에서 맨발로 축구를 연습하다보니 남들보다 순간적인 상황 판단력이 매우 빨랐다. 그가 주로 쓰던 기술이 바로 골키퍼 제끼기였으며[17] 예술적인 드리블로 상대 수비수들을 농락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하프라인 근처에서 드리블해 들어와서 수비수들 벗기고 골을 넣는 것. 훌륭한 슈터이면서 터닝 능력도 매우 좋았고 양발로 뿌려주는 패스도 일품인데다 키는 보통이었지만 탄력도 좋아서 공중 볼에도 강했다고.


4. 기록[편집]



4.1. 대회 기록[편집]





4.2. 개인 수상[편집]


  • 세리에 A 득점왕: 1929-30, 1935-36, 1937-38
  • 미트로파컵 득점왕: 1930, 1933, 1936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1
  • 이탈리아 스포츠 명예의 전당: 2015
  • 인터 밀란 명예의 전당: 2019


5. 메아차에 대한 말말말[편집]


저는 펠레가 축구하는 것 역시 보았습니다만 메아차만큼 아름다운 플레이를 하지는 못했어요. 하루는 저는 정말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는데 2미터 쯤 되는 높이[18]

에서 바이시클 킥 자세로 공을 받았죠. 그리고 그는 볼을 발에 붙인듯 착지했고, 놀라 자빠진 수비수를 드리블로 제낀 후 그의 특징적인 슈팅, 냉소적이고 정확한 슈팅으로 득점에 성공했습니다.

루이지 베로넬리(이탈리아미식가, 와인 평론가)[19]


브라질아르헨티나의 기술적인 선수들과 대등히 겨룰 수 있는 유일한 이탈리아인.

잔니 브레라(이탈리아 축구 저널리스트)


위대한 선수들은 이미 세상에 존재했다. 어쩌면 더 거칠고 그 이상의 선수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발명, 훌륭한 슈팅, 위압적인 드리블과 도리에 벗어나지 않는 것, 모든 시대의 그의 잃어버린 희생자(골키퍼)에게 외로운 탈출구의 면모에서 우리가 그 위에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잔니 브레라


그는 가끔 강렬한 성적 에너지와 지나친 게임에 대한 열정 때문에 심한 위기에 빠지기도 했지만 훌륭하고 막을 수 없는 선수였다. 그리고 필드를 지배하면서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페피노 프리스코(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前 부회장)


페피노는 전술에 대한 것을 절대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펠레와 비견될만한 기술로 페널티 박스 안에 들어가면 왕이 되는 단순한 사람이었다.

브루노 아르카리 Ⅳ[20]

(前 AC 밀란 선수, 코치)



6. 여담[편집]



  • 메아차가 터키의 베식타스 JK로 건너간 것은 역대 최초의 이탈리아 코치의 해외 부임이다.

  • 그가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코치로 있을 때 한 아이를 만났는데 그 아이는 7살 때 축구 선수였던 아버지를 비행기 사고로 잃었다. 그 아이는 메아차에서 아버지의 향기를 느꼈는지 메아차의 기술에 큰 흥미를 보였고, 그것을 연습했다. 결국 메아차는 그 아이를 자신이 가르쳤고 결국 인테르나치오날레와 사인시키는데 성공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60년대 그란드 인테르의 최고 핵심 선수, 산드로 마촐라이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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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사이드 라이트[2] 대표팀 역대 득점 2위.[3] 원래는 테이블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4]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소속으로 300경기나 출전한 스타 스트라이커였다. 1924년 올림픽에도 나간 경력이 있다.[5] 하지만 또 다른 별명인 페피노도 콘티가 붙인 것이다. 즉, 메아차의 유명한 2개 별명은 둘 다 콘티가 붙여준 것.[6] 이탈리아 정부의 정책에 의해 이 당시 인테르나치오날레는 암브로지아나 인테르로 이름이 바뀌었다.[7] 하지만 최연소 득점왕 기록은 3년 후 유벤투스의 신예 공격수 펠리체 보렐이 가져가 버렸다.[8] 해당 경기에서 메아차는 4골을 기록했다.[9] 세리에 A 3대 명문을 최초로 뛰어본 선수가 바로 메아차다.[10] 순위는 10위지만 강등 턱밑인 17위와의 승점차가 4점밖에 나지 않았다.[11] 자신의 기술이 통하는지의 여부로 내기를 했다.[12] 이 경기는 역대 월드컵 사상 최다 득점 개막전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2위는 84년 후 열린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개막전에서 개최국 러시아가 사우디아라비아를 5:0으로 압승했던 2018년 대회이다.[13] 하지만 이 골은 반칙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14] 구아이타가 결승골을 넣을 때 메아차가 오스트리아 골키퍼와 충돌하면서 공이 흘렀고 이것을 구아이타가 놓치지 않고 넣은 것이다. 메아차는 이 때 부상을 당했다.[15] 이 페널티킥이 메아차의 마지막 A매치 득점이다.[16] 메아차 외에는 조반니 페라리, 귀도 마제티, 에랄도 몬첼리오가 있다.[17] 앞에서 이야기한 잔피에로 콤비와의 내기도 이를 기초로 했다. 골키퍼가 각을 좁히기 위해서 메아차를 향해 나오면 그는 골키퍼를 피해 빈 골대로 유유히 달려가 골을 넣었다. 또는 골키퍼를 점프해서 뛰어넘는 기술을 이탈리아에서는 알라 메아차(alla Meazza) 또는 발명(a invito)이라고 부른다.[18] 원문에는 2미터 쯤 뛰어올랐다고 되어있다.[19] 출처는 이곳[20] 1934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동료였던 피에트로 아르카리의 동생.[21] 설명을 덧붙인다면 산드로의 아버지 발렌티노 마촐라토리노 FC세리에 A 4연패를 토리노에 안겨 준 전설적인 주장이었다. 그러나 5연패가 유력한 시점에서 수페르가의 비극이라 불리는 비행기 사고로 토리노의 성인팀 선수들이 전원 사망했고 마촐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산드로 마촐라가 라이벌 팀잔니 리베라와 더불어 60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공격수로 유럽에 명성을 떨쳤는데, 발렌티노가 무사히 커리어를 끝마쳤다면 아들보다 더 위대한 선수로 이름을 남겼으리라는 평도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