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앙 3세

덤프버전 :



포르투갈 왕국 아비스 왕조 제8대 국왕
주앙 3세
João III

파일:D._João_III_-_Cristóvão_Lopes_(attrib).png}}}
출생
1502년 6월 7일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알카코바궁
사망
1557년 6월 11일 (55세)
포르투갈 왕국 히베이라 궁전
재위
포르투갈 왕국의 왕
1521년 12월 13일 ~ 1557년 6월 11일
배우자
오스트리아의 카탈리나[1] (1525년 결혼)
자녀
아폰수, 마리아 마누엘라, 마누엘, 필리프, 주앙 마누엘 등
아버지
마누엘 1세
어머니
아라곤의 마리아
형제
이사벨, 베아트리스, 루이스, 페르난두, 아폰수, 엔히크 1세, 두아르트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주앙 3세 서명.svg
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
4. 여담



1. 개요[편집]


포르투갈 왕국 아비스 왕조 8대 국왕. 별칭은 '경건왕(o Piedoso)'이다.


2. 생애[편집]


1502년 6월 7일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인 리스본의 알카코바궁에서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와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의 공동 국왕 페르난도 2세이사벨 1세의 세번째 딸인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로 이자벨, 베아트리스, 루이스, 페르난두, 아폰수, 엔히크 1세, 두아르트가 있었다. 마누엘 1세는 아들이 태어난 지 2달이 지난 8월 15일에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그를 왕위 후계자로 지명했다. 포르투갈의 저명한 학자인 디오고 오르티스 데 빌헤가스와 루이스 테세이라로부터 궁정 예법과 라틴어, 고전 문학을 익혔고, 토마스 데 토레스로부터 수학, 천문학, 지리학을 교육받았으며, 주앙 데 메넬라우로부터 그리스어를 배웠다. 이후 궁정에서 아버지의 통치를 돕다가 1521년 12월 13일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포르투갈 왕위에 올랐다.

포르투갈 왕국은 주앙 3세의 치세 동안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으로 뻗어나갔는데, 특히 아시아에서 샬레, 디우, 뭄바이, 바사이, 마카오를 새로운 식민지로 확보했다. 또한 브라질의 식민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안토니오 모타, 프란치스코 제이모토, 안토니오 페이소토 등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일본에 방문해 가톨릭 교리를 설파했고 1550년 나가사키에 포르투갈 상인들의 거점이 설치되었다. 여기에 여러 원정대가 아프리카 해안지대를 넘어 내륙 깊숙이 진출하면서 흑인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팔았다.

그러나 150만의 인구를 가진 포르투갈이 이 광범위한 식민지들을 관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수많은 식민지로부터 막대한 재원이 들어왔지만 이를 훨씬 능가하는 관리 비용이 소모되었으며, 무슬림과 현지인들의 반격이 갈수록 거세지면서 전쟁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 결과, 포르투갈 왕실은 막대한 빚을 짊어져야 했다. 여기에 본국 주민들이 식민지 각지에 대거 이주하면서, 인구 유출이 갈수록 심해졌다. 결국 주앙 3세는 사피, 아자모르, 아르질라, 아구즈, 크사르 엘케비르 등 모코로의 여러 해안 도시들을 포기하기로 했다. 다만 탕헤르, 카사블랑카, 세우타 만큼은 막대한 재정 소모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요충지라는 이유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한편, 주앙 3세는 이웃의 강대한 국가인 스페인 왕국과 가급적 친하게 지내려 노력했다. 1525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군주 펠리페 1세와 스페인 여왕 후아나의 딸인 카탈리나와 결혼했으며, 자신의 여동생인 포르투갈의 이자벨을 스페인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 5세와 결혼시켰으며, 딸 마리아 마누엘라를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와 결혼시켰다. 이렇듯 스페인 왕실과의 결혼을 잇따라 성사시킴으로써, 스페인과의 우호 관계는 굳건해졌다. 1524년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세계 일주 이후 스페인 측이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서 포르투갈의 영역으로 설정된 범위 내에 있는 말루쿠가 자국의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한 때 갈등이 일어났지만, 1529년 포르투갈 측이 스페인에 350,000 골드 두카트를 지불하고 말루쿠 제도를 사들인다는 내용의 사라고사 조약이 체결되면서 문제가 해결되었다.

주앙 3세는 주앙 1세 이래 역대 포르투갈 국왕들처럼 문학과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길 비센테, 가르시아 데 레센데, 사 데 미란다, 베르나르딤 리베이로, 페르난도 멘데스 핀투, 주앙 데 바로스 등 저명한 학자들이 그의 두터운 지원을 받으며 여러 저서를 집필했고, 수학자 페드루 누녜스와 의사 가르시아 데 오르타도 왕의 신임을 받으며 연구 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주앙 3세는 파리 대학 등 여러 해외 대학에 포르투갈 학생들을 유학보내고 상당한 장학금을 수여했으며, 1542년 코임브라에 예술 대학을 설립하고 안드레 데 고베이아, 조지 뷰캐넌, 니콜라 드 그루시, 기욤 게랑트 등 저명한 포르투갈 및 유럽 학자들을 초빙했다.

그는 '경건왕(o Piedoso)'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1536년 종교재판소가 포르투갈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이래 리스본, 코임브라, 에보라 등 포르투갈 각 도시에 종교재판소를 잇따라 설립해 거짓으로 개종한 것으로 의심되는 자들을 심문하게 했으며, 나중에는 고아 등 해외 식민지에도 종교 재판소를 설립했다. 이로 인해 기독교로 개종했던 무슬림과 유대인들이 종교 재판소에 대거 회부되어 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고, 많은 유대인 가족이 포르투갈을 탈출해 브라질, 프랑스, 오스만 제국 등지로 망명했다. 이때 유대인들은 왕에게 "몸값"을 지불해야만 포르투갈을 떠날 수 있었기에, 재산을 버리고 가거나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에 팔고 짊어질 수 있는 짐만 가지고 떠나야 했다. 다만 1531년 리스본 지진으로 인해 1,000여 명이 목숨을 잃고 1/3 가량의 건물이 파괴된 뒤 "유대인들이 신의 형벌을 야기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유대힌 학살이 벌어질 기미가 보이자 이를 막고 유대인을 비난하는 수사들을 준엄하게 꾸짖는 등 유대인들을 무조건 적대하지는 않았다.

주앙 3세는 카탈리나 왕비와의 사이에서 9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그 중 유년기에 죽지 않은 주앙 마누엘 왕자가 1539년에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고 1552년 스페인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딸 후아나와 결혼했다. 그러나 주앙 마누엘은 아들 세바스티앙 1세가 태어나기 18일 전인 1554년 1월 2일에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1557년 6월 11일 주앙 3세가 히베이라 궁전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을 때 자식들이 모두 그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그의 손자인 세바스티앙 1세가 3살의 나이에 포르투갈 왕위에 올랐다.


3. 가족 관계[편집]


  • 오스트리아의 카탈리나(1507 ~ 1578):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군주 펠리페 1세와 스페인 여왕 후아나의 딸.
    • 아폰수(1526): 요절
    • 마리아 마누엘라(1527 ~ 1545):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아내.
    • 이사벨(1529): 요절
    • 베아트리스(1530): 요절
    • 마누엘(1531 ~ 1537): 1535년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으나 요절함.
    • 펠리페(1533 ~ 1539): 1537년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으나 요절함.
    • 디니스(1535 ~ 1537): 요절.
    • 주앙 마누엘(1537 ~ 1554): 1539년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고, 스페인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딸 후아나와 결혼했으나 아들 세바스티앙 1세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함.
    • 안토니오(1539 ~ 1540): 요절
  • 사생아
    • 두아르트(1529 ~ 1543): 브라가 대주교.


4. 여담[편집]


문명 6에서 포르투갈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7 10:06:35에 나무위키 주앙 3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