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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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 제5대 국왕
주제 1세
José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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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조제 프란시스쿠 안토니우 이나시우 노르베르투 아고스티뉴
(José Francisco António Inácio Norberto Agostinho)
출생
1714년 6월 6일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히베이라 궁전
사망
1777년 2월 24일 (62세)
포르투갈 왕국 신트라 신트라 궁전
재위
포르투갈 왕국의 왕
1750년 7월 31일 ~ 1777년 2월 24일
배우자
스페인의 마리아나 빅토리아 (1729년 결혼)
자녀
마리아 1세, 마리아 아나, 도로테이아, 베네디타
아버지
주앙 5세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
형제
마리아 바르바라, 페드루, 카를루스, 페드루 3세, 알레산드르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주제 1세 서명.svg
1. 개요
2. 생애
3. 자녀



1. 개요[편집]


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 제5대 국왕. 별명은 "개혁왕(O Reformador)"이다.


2. 생애[편집]


1714년 6월 6일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리스본의 히베이라 궁전에서 포르투갈 국왕 주앙 5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의 딸인 마리아 안나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마리아 바르바라, 페드루, 카를루스, 페드루 3세, 알레산드르가 있었다. 형 페드루가 1714년 10월에 요절했기 때문에, 그는 일찌감치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어 브라간사 공작 겸 브라질 공에 선임되었다. 어린 시절 예수회 수도사 안토니오 스티에프로부터 신학라틴어를 배웠고, 이후 여러 우수한 교사들로부터 정치학, 군사학, 수학, 과학 등 다방면의 교육을 받았다. 당대의 저명한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였던 도메니코 스카랄티의 열성팬이었던 누이 마리아 바르바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 그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감상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1727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남미 식민지인들간의 분쟁으로 인한 양국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이중 결혼을 맺기로 합의했다. 즉, 스페인 왕세자 페르난도와 포르투갈 공주 마리아 바르바라를 결혼시키고, 포르투갈 왕세자 주제와 스페인 공주 마리아나 빅토리아를 결혼시키기로 했다. 주제와 마리아나의 결혼식은 2년 후인 1729년 1월 19일에 포르투갈 알렌테호의 엘바스와 스페인 엑스트레마두라의 바다호스 사이의 경계선인 카이아 강 한 가운데에 임시로 지어진 목조 궁전에서 거행되었다.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주제처럼 음악과 사냥을 좋아했기에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네 딸 마리아 1세, 마리아 아나, 도로테이아, 베네디타를 낳았다. 그러나 아들은 끝내 낳지 못했고, 주제는 성격이 다혈질인 아내와 여러 차례 충돌한 끝에 1746년 베네디타를 낳은 이후로 별거 생활을 하면서 애인을 여러 명 두었다.

1750년 7월 31일 아버지 주앙 5세가 사망한 뒤 왕위에 오른 주제 1세는 열병에 줄곧 시달리면서도 정무에 전념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국정을 신하들에게 떠맡기고 음악과 사냥을 즐기거나 사랑하는 딸들과 함께 피크닉을 떠나곤 했다. 특히 평소 총애하던 세바스티앙 주제 드 카르발류를 즉위 직후 외무부 장관으로 선임한 뒤 1755년에 총리로 승진시키고 통치권을 위임했다. 세바스티앙은 주제 1세의 치세 내내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기에, 주제 1세 시기의 공과는 온전히 세바스티앙의 책임이었다.

주앙 5세 치세 말기인 1750년 1월 13일,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남미 식민지의 경계를 확정짓는 마드리드 협정을 체결했다. 포르투갈은 협정에 따라 로니아 델 사크라멘토를 스페인에 양도하고 그 대가로 세븐 타운스 오브 미션스를 받았다. 그러나 스페인 관료들이 조약에 따라 로니아 델 사크라멘토를 접수하러 왔을 때, 현지의 과나리 부족민들과 예수회 수도사들은 이 땅을 스페인에게 넘겨줄 수 없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주제 1세는 스페인 당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브라질 총독에게 스페인 측과 협력해 과라니 족을 토벌하게 했다. 이리하여 1753년부터 벌어진 과라니 전쟁은 1756년까지 3년간 이어지며 과라니 족 1,500여 명이 피살되었다. 1756년 과라니 지도자 낭기루(Ñanguirú)가 전사하고 과라니족이 항복하면서 전쟁이 종식되었고,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우루과이 서쪽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1755년 11월 1일 리스본 대지진이 발발해 3만에서 10만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건물 1만 채 이상이 파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국왕 본인은 대지진 당시 가족과 함께 피크닉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화를 피했고, 세바스티앙에게 사태를 수습할 전권을 맡겼다. 세바스티앙은 자신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달성해 리스본의 재건이 빠른 속도로 이뤄지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지진 대비를 위한 재난 대책도 충실하게 집행되었다. 그러나 주제 1세는 대지진 이후 심각한 폐소공포증에 시달려 벽으로 둘러싸인 건물 안에서 생활하는 걸 극도로 기피하고 왕궁에서 벗어나 아주다 언덕에서 텐트를 치고 사는 걸 선호했다.

포르투갈 왕국은 페드루 2세 치세 말기에 브라질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시작된 골드 러시 덕분에 주앙 5세 시절에 막강한 부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브라질의 금광에 지나치게 의존해 국내 산업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고, 제조업 대부분을 영국에 의존해야 했다. 심지어 포르투갈의 수출 조차도 대부분 영국, 프랑스 등 외국 사업가들을 통해 이뤄질 정도로, 겉으로는 안정적으로 보이는 포르투갈 경제의 해외 의존도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러다 주제 1세 치세에 이르러 브라질의 금광이 고갈되었고, 설상가상으로 1755년 11월 리스본 대지진이 발발하면서 포르투갈 경제는 급격히 쇠락했다.

세바스티앙은 경제 부흥을 위한 여러 개혁을 실시했다. 우선 두에로 강 유역의 와인을 관리하는 두에로 와인 회사를 설립해, 해당 지역의 와인 품질을 보장하게 했다. 여기에 "알가르베 왕립 수산 종합 회사(Companhia Geral das Reais Pescarias do Reino do Algarve)"를 설립해 포르투갈 남부의 어업을 감독하게 했으며, 국내 제조업을 육성하기 위해 세금 혜택을 부여하고 국내로 들어오는 외국 상품에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수출을 최대한 늘리는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 결과 주제 1세의 치세 동안 수백 개의 소규모 제조업체가 세워졌고 사양길을 걷던 제조산업은 활력을 되찾았다.

또한 왕립 은행을 설치해 국가가 금융산업에 지속적으로 개입할 발판을 마련했고, 높은 귀족에서 가장 가난한 노동 계급에 이르기까지 포르투갈 사회의 모든 계층에 엄격한 법률을 부과했으며, 면세 혜택을 받던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가차없이 거둬들여 지진의 여파로 바닥을 드러낸 국고를 채웠다. 많은 귀족과 성직자들은 이에 반발했지만, 세바스티앙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정책을 가차없이 밀어붙였다.

한편 포트루갈과 포르투갈령 인도 내에서 흑인 노예의 수입을 금지했는데, 이는 인도주의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노동력이 절실히 필요한 브라질에 흑인 노예를 보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브라질에 흑인 노예 무역을 관장하는 회사를 설립해 흑인 노예들이 브라질에 정착하여 노동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감독하게 했다. 그 결과 1757년에서 1777년 사이에 총 25,365명의 흑인 노예가 서아프리카 항구에서 브라질의 파라와 마라냥 항구로 끌려왔다.

세바스티앙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뒤쳐진 제도 전반의 개혁을 꾀했다. 육군과 해군을 개편하고, 코임브라 대학 시스템을 영국 대학과 맞추게 했으며, 저명한 외국 교수를 고용하고, 현대 과학 장비를 갖추게 했다. 그리고 "새 기독교인"으로 간주된 자들에 대한 제도적 차별을 종식시키고 앞으로 "새 기독교인"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자들을 광장에서 채찍질하고 앙골라로 추방하게 했다. 여기에 프랑스 민법 체계를 포르투갈에 도입하고 왕권신수설을 대대적으로 홍보해 국왕의 권위를 드높이면서, 자연히 국왕의 총애를 받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주제 1세는 국가를 알아서 이끌어가는 세바스티앙을 무척 총애했고, 지진 2년 후인 1757년에 국가 평의회 의장 겸 군 사령관을 겸임하게 했다. 세바스티앙의 정책에 반감을 품은 귀족들은 주제 1세가 살아있는 한 세바스티앙을 어찌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주제 1세를 암살하기로 작정했다. 1758년 9월 3일, 주제 1세는 타보라 후작부인이자 자신의 정부인 테레사 레오노르와 함께 저녁을 먹고 마차를 타고 돌아가던 중 괴한 3명의 습격으로 팔에 총탄을 맞았다. 하지만 호위병들의 결사적인 경호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져 아주다에 돌아왔다. 세바스티앙은 즉시 조사를 신속하게 실시한 뒤 타보라 가문 구성원들이 이 사건의 배후에 있다고 몰아세웠다.

이로 인해 12월 한 달 동안 천 명 이상이 수감되었는데, 그 중엔 여자와 어린이들도 있었지만 전부 사형 판결을 받았다. 보다못한 마리아나 빅토리아 왕비와 왕위 계승자인 마리아 공주가 개입해 그들 대부분을 사면시켰지만, 아베이루 공작 호세 데 마스카렌하스 다 실바 에 렌카스트레, 타보라 후작 프란시스쿠 데 아시스, 테레사 레오노르 등 타보라 가문 일가 및 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 이들 수십 명이 산 채로 불태워졌고, 그들의 유골은 타구스 강에 던져졌다. 이후 타보라와 아베이루 가문의 문장은 폐기되었고, 타보라라는 이름은 언급조차 금지되었다.

귀족들이 잔혹한 사건 처리에 경악하여 자신에게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자, 세바스티앙은 예수회를 다음 타겟으로 정했다. 우선 예수회 소속 신부이며 타보라 가문의 고해신부였던 말라그라다가 반역 음모를 신고하지 않은 점을 빌미로 삼아 재판에 회부한 뒤 이단 혐의로 화형에 처했다. 그리고 주제 1세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진지 1년 후인 1759년 9월 3일, 그는 예수회가 포르투갈 내부에서 자치 세력으로 활동하며 왕실을 모해하려 했다며 예수회를 금지하고 예수회 수도사들을 대도시와 식민지에서 추방하고 그들의 자산을 몰수했으며, 예수회가 세웠던 에보라 대학을 허물었다. 여기에 형제인 파울루 안토니우 데 카르발류 멘돈사를 종교 재판소 대심문관으로 선임해 종교 인사들을 통제하게 했으며, 1768년 "레알 메사 켄소리아(Real Mesa Censoria)"를 설립해 정치적 성격을 지닌 책과 출판물을 검열하고 왕권신수설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작품을 소각시키고 작가를 박해하게 했다. 세바스티앙은 1770년 주제 1세에 의해 폼발 후작에 선임되었고, 주제 1세가 사망할 때까지 사실상 독재자로 군림했다.

주제 1세는 일찍이 포르투갈 왕위 계승녀로 지명된 장녀 마리아를 스페인 왕자 루이스 안토니오(1727 ~ 1785),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와 결혼시키려 했지만, 두 사람 모두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서 실패했다. 이후 대규모 전쟁이 벌어질 기미가 감돌면서 어느 한 국가의 왕자와 결혼시켰다가는 그 나라를 적대하는 국가들로부터 잠재적 적국으로 인식될 것을 우려해 결혼을 미루었다. 그러던 1760년, 마리아는 당시로선 늦은 나이인 26세에 결혼했는데, 신랑은 뜻밖에도 주제 1세의 동생인 페드루 왕자였다.

포르투갈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브라간사 왕조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결혼을 단행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복잡한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 타국의 왕자와 결혼하기 어려워진 시점에서 공주의 결혼 상대는 포르투갈 국내의 귀족이 유력했다. 그러나 귀족들을 모조리 찍어누르고 독재 정치를 펼치던 세바스티앙은 장차 여왕이 될 마리아가 귀족 집안의 자제와 결혼한다면 자신의 입지가 급격히 위태로워질 것이라 여겼고, 정치에 별 관심 없이 빈둥거리며 지내던 페드루 왕자라면 위험하지 않을 거라 여기고 마리아와 짝지어주기로 했다. 삼촌과 조카의 결혼은 친족간의 결혼이 흔했던 유럽 왕실에서도 매우 비정상적인 일이었고 교회법에도 어긋났지만, 어느 누구도 독재 권력을 펼치는 세바스티앙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1758년 프로이센 왕국-영국 연합과 프랑스 왕국-합스부르크 제국-러시아 제국 동맹국이 맞붙은 7년 전쟁이 발발했을 때, 포르투갈은 영국과 오랜 동맹 관계를 맺었지만 리스본 대지진의 참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중립을 선포했다. 1759년 8월 18일, 영국 제독 에드워드 보스카웬이 포르투갈 남쪽의 라구스 해안에서 프랑스 해군을 요격하면서 라구스 해전이 벌어지자, 세바스티앙은 영국에 사절을 보내 자국의 바다에서 전투를 벌인 것에 항의해 사과를 받아낸 뒤 라구스 항구로 피신한 프랑스 병사들을 보살핀 후 본국으로 보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는 프랑스 선원들에게 주어진 모든 지원에 대해 주제 1세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간의 분쟁이 포르투갈에까지 미치면서, 포르투갈은 중립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한 번은 파로의 영국 영사가 영국 호위함에게 파로 항구에 진입하여 프랑스 전함이 하역하는 것을 막으라고 지시했다가 포르투갈 해군에게 저지되었다. 또 한 번은 비아나두카스텔루에서 활동하던 영국 사업가들이 스스로 무장한 채 보트에 올라타 프랑스 해적에게 포획된 영국 상선을 탈환했다. 여기에 프랑스 측에서 지지부진한 전세를 뒤집기 위해 스페인에게 자국과 연합하여 영국을 대적하라고 압력을 행사했고, 스페인은 같은 부르봉 가문 끼리 힘을 합치기로 하고 1762년 영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1762년 4월 1일 두 부르봉 국가들은 포르투갈에게 다음과 같은 최후 통첩을 보냈다.

1. 영국-포르투갈 동맹을 파기하고 프랑스 및 스페인과 새로운 동맹을 맺는다.

2. 영국 선박을 항구에 들이지 말고 영국과의 모든 무역을 중단한다.

3. 영국에 선전포고한다.

4. 스페인군의 포르투갈 항구 점령을 수락한다.

5. 위의 사항을 준수한다면 영국의 압제로부터 보호해주겠지만, 끝내 듣지 않는다면 부득이 침공하겠다.


당시 포르투갈군은 세바스티앙의 군제 개혁에도 불구하고 리스본 대지진으로 입은 참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부분의 포르투갈 요새가 손상되었고, 브라질의 금광 채굴량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육군과 해군을 유지하기 어려워서 군대 규모를 대폭 축소해야 했다. 병사들은 1761년 11월까지 1년 반 동안 급여를 받지 못하다가 1762년 3월 말이 되어서야 6개월 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생명줄이 영국과의 무역 및 군사적 보호에 달려 있었기에, 세바스티앙은 최후 통첩을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스페인군이 포르투갈 북쪽 국경 지대에 집결하기 시작하자, 포르투갈은 1762년 4월 18일 스페인과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고 영국에 재정 및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1762년 4월 30일 사리아 후작 니콜라스 데 카르바할이 이끄는 스페인군 22,000명이 트라스오스몬테스 지방을 통해 포르투갈에 쳐들어왔다. 그들은 <포르투갈에 들어온 이유>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반포했는데, 그 내용은 "영국의 무거운 족쇄", "바다의 폭군"으로부터 포르투갈 국민을 해방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트라스오스몬테스 지방의 유일하게 요새화된 요새인 미란다는 그해 5월 6일 포위된 뒤 갑작스런 화약 폭발로 인해 400명이 사망하고 성벽에 2개의 돌파구가 생겨버리자 5월 9일에 항복했으며, 그 외의 다른 도시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점령되었다. 사리아 후작은 포르투갈군이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자 다음과 같은 농담을 부관에게 건넸다.

"이 곤충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군."


그러나 스페인 정부는 치명적인 실책을 저질렀다. 그들은 단순한 힘의 과시만으로도 포르투갈이 굴복하도록 유도하기에 충분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식량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진격했다. 스페인군은 처음에는 현지인들과 잘 지내려 노력했지만, 포르투갈이 항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사이 식량이 금새 바닥나자 주민들로부터 식량을 징발했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트라스오스몬테스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봉기하여 민병대를 결성해 산악 지형을 이용하여 스페인군을 상대로 게릴라 전술을 구사했다. 여기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4,000명 이상의 병사들이 질병으로 사망했다. 스페인군은 이를 보복하고자 각 마을을 돌며 학살과 파괴를 자행했지만 주민들이 더욱 거세게 저항하는 역효과만 야기했다. 결국 스페인군은 1762년 6월 차베스 시를 제외한 모든 점령지에서 철수했다.

한편, 영국은 포르투갈의 구원 요청에 응해 1762년 5월 리스본에 제 83, 91 보병 연대와 16개 용기병 분대를 상륙시켰다. 여기에 제3, 67, 75, 85 보병 연대가 2개의 왕립 포병 중대와 함께 1762년 7월 벨 아일에 상륙했다. 포르투갈에 파견된 영국군의 총 병력은 7,104명이었다. 또한 영국은 포르투갈에 식량, 탄약 및 20만 파운드의 대출금을 보냈다. 여기에 7,000~8,000명의 포르투갈 병력이 합세해 총 15,000명의 병력이 구성된 연합군은 샴부르크-리페 백작 빌헬름 프리드리히 에른스트의 지휘를 받았다.

빌헬름은 아브란테스 근처의 훈련 숙영지에 포르투갈군을 집결시킨 후 철저한 훈련을 실시했다. 당시 포르투갈군의 가장 큰 문제는 대부분의 고위 장교들이 문맹이었고 탈영자가 너무 많았으며 규율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빌헬름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대로 포르투갈군을 재편성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전쟁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엘바스 근처에 노사 세노라 다 가르카 요새를 세웠다. 이 요새는 훗날 '리페 요새'로 개칭되었다.

1762년 7월, 이베리아 반도에 진입한 프랑스군과 합류한 스페인군은 재공세를 준비했다. 그들은 병력을 3개 사단으로 나눴다. 갈리시아의 동부 사단은 포르투를 최종 목표로 정하고 포르투갈 북동부인 트라스오스몬테스와 미뉴를 침공했다. 중앙 사단은 트란스온스몬테스에서 큰 피해를 입은 사리아 후작의 군대와 합세한 뒤 포르투갈의 중앙 지역을 돌파하여 리스본으로 진격했고, 남부 사단은 아렌테호 지방 등 포르투갈 남부 지역을 공략하기로 했다. 빌헬름은 상황을 살피다가 아렌테호의 발렌시아 데 알칸타라 지역에서 재정비하고 있는 남부 사단 선두부대를 먼저 쳐부수기로 했다.

1762년 8월 27일, 존 버고인 소장이 이끄는 2,800명의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이 발렌시아 데 알칸타라를 기습 공격하여 그곳에 주둔한 스페인의 최고 연대 중 하나인 세비야 연대를 섬멸하고 3개의 군기를 탈취했다. 여기에 전날 발렌시아 데 알칸타라에 도착했던 남부 사단장 미겔 데 이루니베니도 생포되었다. 버고인은 이 공적으로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고, 주제 1세로부터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를 수여받았다.

한편, 사리아 후작을 대신하여 군대 지휘권을 맡은 아란다 백작 페드로 파블로 아바르카가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중앙 군단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포르투갈 중심부를 횡단한 끝에 1762년 8월 25일 알메이다 요새를 공략했다. 그러나 그들은 산악 지형이 많은 포르투갈 내륙으로 너무 깊숙이 침투했다가 게릴라 부대의 연이은 습격으로 인해 보급로가 끊겼다. 여기에 빌헬름이 강력한 전투력을 갖춘 적과의 전투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면서 그들의 진군로 주변의 모든 마을을 불사르고 밭을 갈아엎는 청야 전술을 구사하면서, 현지조달 역시 매우 힘들어졌다.

아바르카는 이런 상황에서도 리스본만 공략하면 모든 게 끝나리라 기대하며 진군을 이어갔으나, 타구스 강변에 도착했을 때 포르투갈군이 배를 모조리 없애버린 데다 장대비가 내려서 강이 범람하는 바람에 건널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바르카는 강을 건너는 대신 산악로를 통해 리스본으로 진군하기로 했지만, 빌헬름이 사전에 리스본으로 들어가는 주요 산악로가 위치한 아브란테스 고지에 강력한 수비대를 배치하는 바람에 이마저도 어려워졌다. 스페인군은 강행돌파를 꾀했지만, 1762년 10월 3일부터 10월 5일까지 이어진 아브란테스 전역에서 적 방위선을 뚫지 못하고 막대한 손실만 입었다.

이후 폭우와 질병, 굶주림, 수많은 탈영병에 시달린 아바르카는 1762년 11월 본국으로 퇴각하면서 후방에 28개 대대를 남겨뒀다. 빌헬름은 이들을 추격하려 했지만 전력 손실을 회피하고 싶었던 포르투갈군의 비협조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발렌시아로 철수한 아바르카는 바디호스 근처에서 돌파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겨울 숙영지를 마련하기 위해 에스트라마두라 지역으로 돌아갔다. 이때 아바르카는 본부로 삼았던 카스트렐로 브랑코에 수많은 부상병들을 남겨뒀고, 이들은 곧 포르투갈군에게 투항했다. 프랑스-스페인 중앙 사단이 입은 손실이 어느 정도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학자들은 대략 20,000~30,000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1762년 11월 3일, 프랑스와 영국이 퐁텐블로 예비 협약을 체결해 평화 협상을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이에 포르투갈인들은 전쟁이 곧 끝나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에스트라마두라로 철수한 아바르카는 적이 방심하고 있으리라 짐작하고 1762년 11월 포르투갈의 아렌테호 지방을 기습 공격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포르투갈 민병대의 게릴라 전술에 휘말린데다, 마르방과 우구엘라에서 포르투갈 수비대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는 바람에 큰 손실만 볼 뿐 요새 하나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여기에 빌헬름이 연합군을 총동원해 아렌테호로 진군하자, 아바르카는 어쩔 수 없이 11월 15일에 퇴각했다. 이후 스페인군과 포르투갈-영국 연합군은 국경을 사이에 두고 소규모 접전을 벌였지만, 더 이상 대규모 공세를 가하지 않았다.

한편,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남미에서도 충돌했다. 포르투갈인들은 상 호세 데 마라비타나스, 상 가브리엘에서 스페인군을 몰아냈고, 아마존 유역에 있는 리오 네그로 계곡 대부분을 차지했다. 한편 산타 크루스 데 라 시에라(볼리비아)에서 파견된 스페인군은 한 때 금이 여전히 나오던 마토그로소 주를 장악했지만, 롤림 모우라가 지휘하는 포르투갈군에게 구아포라 강둑에서 격파당하고 질병, 기아, 탈영으로 인해 병력이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참상을 겪어야 했다. 한편, 또다른 스페인군은 콜로니아 두 사크라멘토 와 리오 그란데 두 술 등 브라질 남부 지역을 공략했다.

1763년 2월 10일, 프랑스-스페인 연합과 영국-포르투갈 동맹의 전쟁을 종식하는 파리 협약이 체결되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전쟁 중에 상대로부터 빼앗은 영토를 돌려주고 전쟁 포로를 교환하기로 했다. 남미 현지의 포르투갈인들이 장악한 리오 네그로 계곡은 포르투갈이 그대로 점유했지만, 스페인군의 지속적인 압박 끝에 1777년 포르투갈인들이 물러나면서 스페인의 영역으로 돌아갔다.

1774년, 주제 1세는 아버지 주앙 5세가 말년에 그랬던 것처럼 심각한 발작에 시달렸다. 이에 마리아나 빅토리아 왕비가 남편이 죽을 때까지 섭정을 맡기로 했다. 그 후 의사소통 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독방에 갇혀 지내던 주제 1세는 1777년 2월 24일 신트라 궁전에서 사망했다. 사후 상 비센트 드 포라 성당에 안장되었다. 사후 딸 마리아 1세와 동생이자 사위인 페드루 3세가 포르투갈의 공동 국왕으로 등극했다.


3.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녀
마리아 1세
(Maria I)
1734년 12월 17일
1816년 3월 20일
페드루 3세[1]
슬하 2남 1녀[2]
2녀
마리아 아나 공주
(Infanta Maria Ana)
1736년 10월 7일
1813년 5월 16일

3녀
도로테이아 공주
(Infanta Doroteia)
1739년 9월 21일
1771년 1월 14일

4녀
브라질 공비 베네디타
(Benedita, Princess of Brazil)
1746년 7월 25일
1829년 8월 18일
브라질 공 주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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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제 1세의 동생이다. 즉, 삼촌과 조카 사이.[2] 주앙 6세[3] 마리아 1세의 장남. 죽어가는 주제 1세가 간절히 원했기에 이모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