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국민당/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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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북벌
3. 국민정부
4. 국공내전의 재발과 3당 훈정의 출범


1. 신해혁명[편집]


일단 쑨원이 만든 흥중회(1894)부터를 중국 국민당의 전신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국민당 스스로도 해당 단체를 전신으로 간주하고 있지는 않다. 쑨원을 제외하고 계승하는 인적,물적 자원이 전무하기 때문. 신해혁명 이후 위안스카이를 토벌하기위해 비밀결사단체 중화혁명당(1914)이창당되었으며, 5.4운동 이후 쑨원을 중심으로 중화혁명당을 근대형 정당으로 개편한 것이 중국 국민당으로 1919년 10월 10에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쑨원 사후 국민당은 분열되었지만 장제스를 중심으로 한 국민당 우파가 좌파를 숙청하였고 이후 중국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였고 국공내전에서 패배하여 타이완 섬으로 천도한 지금까지도 여전히 무시못하는 세력을 가지고 있다. 즉 오늘날 존재하는 중화민국은 사실상 국민당이 만든 국가인 셈이다.[1] 뒤에 보면 알겠지만 중화민국 내에도 국민당 외의 다른 정당이 존재하긴 했으나 꽤나 오랫동안 유명무실한 형태였다.

한편 1911년에 결성된 ('중국'은 빠진) '국민당'도 있는데, 이 정당은 중국 동맹회의 회원이었던 쑹자오런이 주도해 결성한 정당으로 중국 국민당은 해당 단체를 자신들의 전신으로 간주한다. 1913년 위안스카이가 쑹자오런 암살 사건선후대차관 사건을 일으키자 계축전쟁으로 맞섰으나 진압당했다. 위안스카이는 국민당을 반역정당으로 규정하여 1913년 해산하고 1914년 중화민국 국회 해산을 단행했다. 쑨원은 일본에서 중화혁명당을 조직했고 황싱도 구사연구회를 조직, 중화혁명당과 합작하여 위안스카이에게 저항했다. 이후 위안스카이가 1915년 홍헌제제로 황제에 오르자 진보당, 차이어를 비롯한 서남의 실력자들과 함께 호국전쟁에 참여해 토원에 나섰다. 이후 국회가 복구되었으나 장훈복벽으로 국회와 약법은 다시 파괴되었으며 돤치루이가 복벽은 진압하였으되 국회와 약법을 부활시키지 않고 독재를 하자 쑨원은 1차 호법운동을 전개했고 돤치루이가 이를 무력으로 토벌하려 하면서 호법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쑨원은 대원수에 추대되었지만 천춘쉬안 등 정학회 정객 및 전계군벌, 계계군벌들의 음모로 축출되었다.

1920년 혁명가 출신의 진보적인 군벌 천중밍이 광동을 장악하고 쑨원을 초청하여 2차 호법운동이 시작되고 2차 군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쑨원의 무리한 북벌로 인하여 양자의 충돌이 심화되어 1922년 천중밍이 영풍함 사건을 이르켜 쑨원을 축출했고 2차 호법운동과 북벌도 실패로 돌아갔다.


2. 북벌[편집]


쑨원은 토역군을 조직, 양시민, 유진환 등의 군벌과 연합하여 천중밍을 토벌한 후 1923년 광저우에 기반을 마련하였고 1924년 1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었다. 1924년 광저우 상단 사건으로 정부에 저항하는 상인 세력을 제압했고 1925년 국민당의 1차 동정으로 광저우를 탈환하려는 군벌 천중밍을 격퇴했으며 군민재정 통일선언을 발표, 탕지야오, 우페이푸, 천중밍과 결탁하여 말을 듣지 않는 양시민, 유진환에게 복종을 요구했으나 이들이 1925년 객군 반란을 일으키자 장제스의 교군과 쉬충즈의 월군을 동원하여 이를 토벌해 군사력을 정리했다.

1925년 쑨원이 사망한 이후 왕징웨이, 후한민, 랴오중카이 등의 연합 체제가 형성되었으나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이후 왕징웨이가 쉬충즈와 후한민을 숙청하고 장제스, 미하일 보로딘과 공조하여 국민당의 대권을 차지했다.[2] 1925년 10월 국민당의 2차 동정을 감행하여 광동을 완전히 석권했다. 하지만 1926년 중산함 사건이 발생하면서 왕징웨이는 외유를 떠났고 장제스가 국민당을 영도하게 되었다. 1926년 장제스는 국민당의 1차 북벌을 감행했고 1927년 상하이, 난징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쑨원 사망 이전부터 골이 깊었던 국공갈등이 폭발하게 되고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라는 형태로 폭발하게 된다.

이후 마일사변, 경제위기, 펑위샹의 분공 요구, 코민테른의 5월 지시 등이 겹치면서 왕징웨이가 영도하는 우한 국민정부도 분공을 결정하면서 1927년 영한합작이 이루어지고 우한과의 통합을 위해 하야했던 장제스가 복귀하면서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시작되었다. 장쭤린은 대원수에 올라 맞섰으나 결국 패해 만주로 퇴각하다 황고둔 사건으로 암살당했고 그 뒤를 이은 장쉐량은 동북역치를 결정함으로 중국 대륙은 통일되었다.


3. 국민정부[편집]


장제스의 주도로 북벌이 성공을 거두면서, 국민당의 주도로 '국민정부'(國民政府)가 수립되었다. 1928년 편견회의가 열려 수백만에 달하는 군벌군을 감축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반발한 군벌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반장전쟁이 발생했다. 1929년 2월 리쭝런1차 장계전쟁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했고 5월 펑위샹1차 장풍전쟁을 일으켰지만 역시 진압당했다. 9월에는 장파쿠이가 반란을 일으켰고 10월에 옌시산의 부추김을 받은 펑위샹이 2차 장풍전쟁을 일으켰지만 또 진압당했다. 장파쿠이는 광서로 남하하면서 장파쿠이의 반란은 2차 장계전쟁으로 번졌고 12월 탕성즈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장당전쟁이 벌어졌지만 또 진압당했다. 1930년에는 옌시산이 모든 반장 군벌들과 왕징웨이의 개조파, 서산회의파까지 규합하여 중원대전을 일으켰지만 장제스는 장쉐량의 도움을 받아 이들을 모두 분쇄하고 중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어 1931년 2월 후한민과의 충돌로 장제스가 후한민을 감금하는 탕산 사건이 발생하여 분노한 광동파, 광서파, 개조파가 힘을 합쳐 1차 양광사변을 일으키지만 만주사변의 발생으로 장제스 하야를 조건으로 통합했다. 이후 쑨커가 국민당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답이 없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한달 만에 하야함으로 1932년 장제스가 복귀하여 군사위원장에 취임했고 왕징웨이가 행정원장에 취임함[3]으로 장왕합작 체제가 열렸다.

이후로도 일본의 침입은 계속되어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생했으며 1933년에는 열하사변으로 열하성이 침탈되었다. 장제스는 국제사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허약한 국제연맹은 도움은 쥐뿔도 주지 못했고 장제스는 이를 갈면서 후일을 도모해야만 했다. 일본은 만주국 건국을 선포하였고 이에 항일 분위기가 끓어올랐으나 장제스는 국가 내부를 안정시키고 경제를 발전시켜 군사력을 확충한 다음에 일본에 맞섰다는 전략을 세우고 경제개발과 국방건설에 나섰다. 이 시기 중화민국독일과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국민혁명군은 독일의 군사고문단의 지원과 함께 상당수의 독일제, 체코제 무기를 도입 무장하였다.

1929년에는 경제 대공황과 황하 대홍수를 비롯한 초대형 자연재해가 발생하면서 상당한 경제적 타격을 입었으나 합작사 운동, 상품작물 보급, 농협 설립, 감조정책 등을 통해 농촌 부흥이 시도되었고 도로 및 철도 건설, 공업화 정책도 시행되었으며 기술 혁신이 이루어져 비행기, 기차, 장갑차 등의 시험적인 생산이 이루어질 정도였다. 1935년에는 법폐개혁으로 화폐가 통일되어 재정 안정성이 획기적으로 향상되었다. 1936년 중화민국 농업 생산량은 건국 이래 최대 수치를 기록했고 전 세계가 입을 모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칭찬했다. 이 때문에 1927년부터 1937년까지를 황금 10년이라고도 부른다.

한편 분쇄된 줄 알았던 중국 공산당은 중국 각지에 숨어들어서 해방구를 건설하고 국민정부를 상대로 한 유격전을 전개했다. 제일 규모가 큰 것이 정강산 투쟁으로 시작하여 루이진으로 근거지를 이동한 후 건설된 마오쩌둥의 강서성 중앙 소비에트였다. 장제스는 이를 토벌하기 위해 초공작전을 실시했으나 잇달아 패했고 3차 초공작전은 만주사변 때문에, 제4차 초공작전열하사변 때문에 중단되었다. 하지만 장제스는 포기하지 않고 1933년 한스 폰 젝트 장군의 조언을 얻어 제5차 초공작전을 실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멸망시켰다. 공산당은 대장정의 길에 올라 섬서성 연안까지 도주했고 이를 소탕하기 위한 6차 초공작전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 와중에 1933년 복건에서 복건사변이, 1936년 광동과 광서에서 2차 양광사변이 일어나 반장파들의 최후의 저항이 있었으나 모두 박살났다.

그런데 만주사변과 열하사변 이후 영토를 모두 잃고 낭인 신세로 전락한 장쉐량이 장제스를 감금하고 국공합작을 요구하는 서안 사건이 발생했다. 장제스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고 완강히 저항했으나 저우언라이쑹메이링의 중재로 결국 공산당과 휴전을 맺는데 합의하게 되었다.


4. 국공내전의 재발과 3당 훈정의 출범[편집]


전후에는 중국 공산당 및 중국 민주 동맹과 함께 논의한 협상이 결렬되고 국민혁명군을 동원해 총공세에 나서면서 국공내전이 재발한다. 중국 국민당은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을 초청하면서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여당/무소속/직업단체의 직선으로 선출한 '제헌' 국민대회를 1946년에 소집했으며, 중화민국 헌법을 반포하면서 다당제 헌정으로 전환했는데, 1947년에 여당/야당/무소속/직업단체의 직선으로 선출해 소집한 '행헌' 국민대회/'행헌' 입법원/'행헌' 감찰원에서는 중국 공산당이 참정을 거부하면서 중국 국민당(大)/중국 청년당(中)/중국 민주 사회당(小)의 여대야소를 자연스럽게 연출했으니, 장제스의 책략으로 '3당 훈정'을 형성했다. 여기서 '3당 훈정'은 강력한 총통제와 3개 정당의 연립내각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형식적인 헌정(憲政)과 실질적인 훈정(訓政)을을 동시에 추구하는 1946년 체제를 가리키는 낱말이다.

1946년에 장제스는 3당 훈정의 막후 공작을 추진하면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을 차례로 초청하여 최고위급 관직에 등용을 약속했고, 곧이어 3당 훈정의 여당으로 변신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은 연립내각의 여당으로서 중앙정부의 장차관으로 출세했지만, 그들의 표밭은 어디까지나 중국대륙의 대도시에 한정되어 있었다. 결국 1949년부터 1950년까지 국공내전의 패전으로 중화민국이 중국대륙의 99%를 상실하면서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은 지지세력의 99%를 잃어버렸다. 중화민국의 중앙정부가 타이베이로 천도하면서 3대 정당들의 본부도 타이완 섬으로 이전했다.


5. 국부천대[편집]


국공내전에서 패배하여 타이완 섬으로 본거지를 옮겼으며, 이후에는 중화민국의 형식적인 연립여당이자 실질적인 독재정당으로 군림했다. 본토수복을 목적으로 38년간 계엄령을 유지하고 야당도 없는 현실로[4] 많은 것이 설명된다. 타이완 섬으로 건너간 직후에 패배의 원인을 부정부패로 몰면서 "부패 완전 박멸"에 나서, 상당부분 개선되었고, 장씨 가족/측근의 횡포도 점차 줄었다. 그러나 대만 본토에서 살던 이들에 대한 차별은 사회문화적으로 여전했다. 또한 그 후 여러 차례 중원 회복을(?) 노리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1970년대 들어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민국 대신 UN 상임이사국이 되고, 리처드 닉슨 이후로 서방세계도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는 등 점차 고립되어 결국 현실은 시궁창이 되었다. 그래도 일당독재치하에서 고도경세정장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 공산당이나 싱가포르 독립 이후의 싱가포르 인민행동당과의 유사성도 보이기는 했다.

아무튼 중국 국민당이 3당 훈정을 포기하고 국민대회 대표선거(國民大會代表選舉)에 야당 참여를 허용한 것이 1991년이었고, 첫 직선 총통선거를 치른 것은 1996년이었다. 그 이후로도 천수이볜(陳水扁) 집권기인 2000~2008년, 그리고 차이잉원 2016~2024년에 야당이 되었다.

2020년 4월 29일부로 중국 민주 사회당이 공식적으로 해산에 따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 중화민국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에도 들어있는 '청천백일기'는 바로 국민당의 당기이며, 중화민국 국가는 동시에 국민당의 당가이기도 하다.[2] 이에 반발한 국민당 원로들은 서산회의를 개최하고 독자적인 상하이 당중앙을 설치했다.[3] 1933년 열하사변으로 외교부장 나문간이 사퇴하면서 외교부장도 겸임했다.[4]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은 3당 훈정의 여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