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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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
中国共产党第二十次全国代表大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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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9차 대회

2022년
20차 대회

2027년[1]
21차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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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 예고
2022년 8월 30일
개막
2022년 10월 16일
폐막
2022년 10월 22일
장소
인민대회당 (베이징시 시청구)
정치 보고자
시진핑 (총서기)
대표 인원
2,296명
주요 의제
당 중앙위원회 보고 채택 및 차기 지도부 선출
중국공산당 규약 개정
(시진핑 집권 연장 및 지위 공고화)

1. 개요
2. 경과
2.1. 개막 이전
2.2. 개막 예고
2.3. 개막 준비 (19기 7중전회 : 10월 9일 - 10월 12일)
2.4. 대회 중
2.5. 폐막 이후
2.5.1. 20기 1중전회(10월 23일)
2.5.2. 제20기 중공중앙정치국 제1차 회의(10월 26일)
2.5.3. 제20기 정치국 상무위원단 옌안 방문(10월 27일)
3. 평가
4. 여담





1. 개요[편집]


2022년 10월 16일부터 동년 10월 22일까지 진행된 중국공산당의 20번째 전국대표대회(전당대회). 중화권에선 보통 二十大라고 한다.


2. 경과[편집]



2.1. 개막 이전[편집]



2022년 10월에 개최 예정[2]중국 공산당의 20차 당대회에서 시진핑 주석이 세 번째 연임을 선언할 것으로 보인다. 2018년 중국 공산당이 국가주석 3연임을 금지한 헌법 규정을 삭제하면서 3연임을 막는 법적 장애물이 사라졌으며, 후진타오 때와는 달리[3] 사전에 후계자를 뽑지도 않았다. 이미 공산당 총서기중앙군위 주석 직은 연임 제한이 없다. 즉 국가주석직의 연임 제한까지 없앴다는 것은 시진핑이 권력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선언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중국 내외의 주요 관찰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시진핑이 3연임에 도전할 것으로 본다.[4]

2021년 11월 중국 공산당이 시진핑의 업적을 칭송하는 역사결의를 채택하는 등 시진핑은 장기집권을 위한 준비를 모두 마쳤다. 중공은 마오쩌둥 집권 시기인 1945년과 덩샤오핑 집권 시기인 1981년 두 번의 역사결의를 채택한 바 있다. 이번이 세 번째다. 시진핑은 마오쩌둥, 덩샤오핑과 같은 반열에 서기를 시도하고 있다. 마오쩌둥은 신중국을 탄생시켰고 덩샤오핑은 가난에 시달리던 중국을 번영의 길로 이끌었다. 장기집권을 겨냥한 시진핑이 내건 목표는 중국의 초강대국화다.

시진핑은 2013년 3월 권력을 잡은 후 두 개의 100년을 이정표로 제시했다. 2021년은 공산당 창당 100주년이었고, 2049년은 신중국 성립 100주년이다. 여기에서 목표는 중국의 초강대화다. 덩샤오핑의 ‘도광양회[韜光養晦]'가 아니라 이미 일어섰다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을 내세웠다. 2021년은 샤오캉 사회(중진국) 달성이 목표였다. 이제 시진핑의 목표는 2049년까지 미국에 맞먹는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중국이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경제가 성장해야 했고 사회가 안정돼야 했고 덩달아 권력도 강해야 했다. 주기적 권력 교체는 권력 자체를 불안정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의 의중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른 파장도 만만치 않다. 우선 최고지도자의 인적 리스크를 막기 위해 덩샤오핑의 유지인 집단지도체제 및 10년 임기 시스템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같은 재난이 재발되는 걸 막고자 구축한 집단영도체제가 무너진다는 것이다. 또 장쩌민이 만든 암묵의 룰인 칠상팔하[七上八下]도 유명무실화될 전망이다. 시진핑 주석은 2022년 이미 69세다.

덩샤오핑의 유지에 따르면 시진핑도 올해 2022년 가을 예정인 20차 당대회에서 물러나야 한다. 모든 논란은 시진핑이 그러지 않을 듯하면서 발생하고 있다. 새로운 임기가 5년일지, 아니면 더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5] 중국 역사에서 분기점이 될 수 있다. 물론 시진핑의 목표가 실현될지 단정하는 건 아직 이르다. 시진핑이 이끄는 중국이 어디로 갈지, 그리고 시진핑이 언제까지 중국을 이끌지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서울경제머니투데이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주석의 강경한 자세는 국내 정치를 고려한 부분도 존재한다. 시진핑 주석은 10월 20차 당대회까지는 긴장된 미중 관계를 끌고 가면서 강한 지도자이미지를 유지하는 전략이 불리할 게 없다. 하지만 긴장관계가 너무 오래 지속되는 것 역시 부담이다.

시진핑 중국 주석이 20차 당대회를 통해 3연임(15년)을 확정지은 후에는 미중관계 개선에 나설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2021년 6월 29일 인천대에서 개최된 '중국 공산당 100년 특별 춘계학술대회'에서 중국 정치 권위자인 조영남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도 10월 20차 당대회 이후 중국의 대미정책이 유연해질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2022년 10월과 11월 중국의 20차 당대회와 미국 중간선거가 끝나면 미중 관계도 방향전환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가능성이 크다. 미 중간선거까지 이어지는 올해의 세계 선거 랠리가 끝나면 국제정세도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전문가들은 각국의 정권교체가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 개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하고 있다. 머니투데이주간경향

중국은 중남미의 핑크타이드가 강화되면 자신들과의 우호관계가 확대될 것이라며 벌써부터 기대 섞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과거 ‘미국의 뒷마당’으로 불린 중남미에서 자국의 영향력이 한층 강해질 것이란 기대다. 지난해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던 호주의 선거결과도 관심 대상이다. 중국 관영매체 글로벌타임스는 최근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호주는 다가오는 선거에서 어느 정당이 이기든 중국과의 관계를 보다 합리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간경향

중국은 시진핑 국가주석의 3연임을 확정할 20차 당대회를 앞두고 각종 부양책을 동원해 5%대 경제 성장률을 찍는 데 주력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의 경제 성장률은 지난해 1분기 코로나19 충격에 따른 기저효과로 18.3%까지 치솟았다가 2분기 7.9%, 3분기 4.9%, 4분기 4.0%로 떨어졌다. 중국이 2030년을 전후로 미국을 앞서는 경제 대국이 되려면 매년 5%대 성장을 기록해야 하며, 올해는 시 주석의 장기 집권을 확정할 20차 당대회가 열리는 만큼 경기 부양 필요성이 그 어느때보다 크다는 평가다. 국민일보

시장에서는 중국 정부가 경제 성장 둔화 우려 속에서 더욱 강력한 경기부양책을 꺼낼 것이라 보는 시각도 많다. 중국 정부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장기 집권을 공식 확정할 20차 당대회를 앞두고 올해 경제 성적표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추가 금리 인하 가능성도 나온다. 1월 20일, 2020년 4월 이후 21개월 만에 처음으로 5년 만기 금리를 낮췄다. 인민은행이 금리를 인하했음에도 주식시장은 오히려 엇갈린 모습을 보였다는 것도 이를 방증한다. 상하이종합지수는 이날 오전 중에는 반짝 상승하더니 결국 0.09% 하락했고, 선전성분지수도 0.06% 약보합에 거래를 마쳤다. 반면 홍콩 항셍지수는 3.4% 올랐다. 이데일리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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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개막 예고[편집]



파일:중공20차대회예고.jpg

중공중앙정치국회의가 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를 2022년 10월 16일 베이징에서 소집할 것을 제의했다.
(CCTV 뉴스)

2022년 8월 30일 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의 동년 10월 16일 개회가 중국 관영매체들을 통해 발표되었다.

2.3. 개막 준비 (19기 7중전회 : 10월 9일 - 10월 12일)[편집]


파일:7중전회.png
20차대회 개막 일주일 전 소집된 중국공산당 제19기 중앙위원회 7차 전원회의 (19기 7중전회)에서는 6중전회 이후 중앙정치국이 추진해온 업무를 평가함과 동시에 제19기 중앙위원회와 제19기 중앙기율검사위원회가 각각 제20차 당대회에 제출할 업무 보고서 및 '중국공산당 규약(수정안)'을 통과시키고, 이 3종의 문건에 대해 제20차 당대회에 심사·심의를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2.4. 대회 중[편집]



파일:20차 당대회 시진핑.jpg

3연임이 확정된 2022년 20차 당대회의 시진핑
시진핑 국가주석이 업무보고로 "중국식 현대화는 중국 공산당이 영도하는 사회주의 현대화이자 각국 현대화의 공통된 특징과 자신의 국가 상황에 기반한 중국 특색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국식 현대화는 거대한 인구 규모의 현대화이고, 전체 인민 공동부유의 현대화이자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이 상호 조화를 이루는 현대화이며 인민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생하는 현대화, 평화적 발전의 길을 걷는 현대화"라고 강조했다.(#)

대만에 대해 무력통일 선택지도 포기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미 기존에도 고수하던 입장이라 딱히 새삼스러운 사실은 아니다. 그리고 당헌에 대만 독립에 대한 단호한 반대 및 억제 의지를 넣다는 점이다.

18일. 공동부유 내실 있게 추진하겠다면서 구체적 시행 방법의 하나로 '재산 축적 메커니즘 규범화'라는 새로운 표현이 등장했다.(#) 당규에 ‘일부 지역과 일부 사람들을 먼저 부유하도록 장려해서 점진적으로 전체 인민의 공동부유를 실현한다’는 문구가 포함시킴으로써 공동부유의 점진적 추진 의지를 좀 더 명확히 부각했다.

시진핑의 당중앙 핵심 지위 및 전당 핵심 지위, 그리고 당중앙의 권위와 집중 통일 영도를 각각 결연히 수호한다는 의미의 두개의 수호(两个维护)가 당원들이 이행해야 할 의무로 당규에 명기됐다.

그러나 언론들의 예측과는 달리 시진핑 중국 주석이 당규에 마오쩌둥의 위상과 같은 지위를 인정받게 되는 ‘인민영수(領袖)’ 칭호를 넣는데 실패했다. 시진핑이 ‘인민영수’ 칭호를 얻으면 덩샤오핑(鄧小平)처럼 현직에서 물러나 공식 직책이 없는 상황에서도 최후 결정권을 갖게 될 수 있다. 중국공산당 역사상 실질적으로 공인된 ‘영수’는 마오쩌둥(毛澤東)뿐이다. 또 2017년 19차 당대회 때 당규에 삽입한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이번에 ‘시진핑 사상’ 다섯 자로 바꾸지도 못했다. 16자에 달하는 명칭을 ‘시진핑 사상’으로 압축하면 현재 당규에 들어 있는 ‘마오쩌둥 사상’과 같은 형식이 된다. 시진핑의 위상이 아직 마오쩌둥에 이르지는 못한 셈이다.(#) 불안정한 국내외 정치상황을 고려해 시진핑이 한 발 물러섰다는 추측이 많다.

2.4.1. 후진타오 강제 퇴장 논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후진타오 강제 퇴장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후진타오 전 중국 주석이 폐회식 도중에 퇴장한 사실이 알려졌다.(#) 경호원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나가는듯한 모습이 포착되었다. 해당 문서 참조.

2.5. 폐막 이후[편집]



2.5.1. 20기 1중전회(10월 23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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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순
1위
시진핑
(국가 주석)
2위
3위
4위
리창
(국무원 총리)
자오러지
(전인대 상무위원회 주석)
왕후닝
(정협 전국위원회 주석)
5위
6위
7위
차이치
(당 중앙서기처 제1서기)
딩쉐샹
(국무원 상무부총리)
리시
(당 기율검사위 서기)
←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상무위원 (제19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상무위원 (제21기) →




파일:1666531234940.png

시진핑(중앙)과 20기 정치국 상무위원단

당대회 폐막 이튿날인 10월 23일에 치른 중국공산당 제20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 (20기 1중전회)에서는 중앙위원회의 상무위원회 격인 중공중앙정치국 및 중국의 최고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구성했는데, 19기 중공중앙정치국 상무위원 7인 중 시진핑계리잔수와 비시진핑계인 리커창, 왕양, 한정이 퇴진하고 시진핑계인 리창, 리시, 차이치, 딩쉐샹이 신임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비시진핑계 대표주자로 상무위원회 진입이 기대되던 후춘화[6]는 정치국원 유임조차 실패하고 무계파로 분류되는 왕후닝을 제외한 정치국 상무위원 전원이 시진핑과 그의 측근들로 구성되면서 장쩌민 이래의 중국공산당내 집단지도체제는 형해화되고 시진핑의 집중통일영도체제가 구축되었다.

한편 상무위원회의 지명에 따라 제20기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들을 결정하였는데, 먀오화, 류전리, 린샹양, 리쭤청 등이 거론되던 부주석 자리에 장유샤가 유임되고 허웨이둥 전 동부전구 사령원이 오르는 이변이 일어났다. 그 결과 주석에 시진핑, 부주석에 장유샤, 허웨이둥. 위원에는 류전리, 리샹푸, 먀오화, 장성민이 결정되었다.

2.5.2. 제20기 중공중앙정치국 제1차 회의(10월 26일)[편집]


10월 26일 시진핑 총서기 주재하에 개막한 제20기 중공중앙정치국 첫 회의에서는 ‘시진핑 총서기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통치 체제’를 구축하기로 결정했다.

2.5.3. 제20기 정치국 상무위원단 옌안 방문(10월 27일)[편집]



파일:시진핑 옌안.png

옌안을 방문한 시진핑(左)과 20기 상무위원단
(2022년 10월 28일 인민일보 1면)

10월 27일 시진핑은 새로 구성된 제20기 중공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첫 일정으로 '혁명성지'로 일컫는 산시성 옌안을 방문했다. 옌안에서 시진핑은 '자력갱생'과 '고난분투'를 강조했는데 이는 차후 시진핑 3기 체제에서 핵심 노선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첫 방문지로 옌안을 택한 것도 의미심장한데[7]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이 중국공산당의 대장정 시기 옌안 해방구 건설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시중쉰·시진핑 부자의 본적도 옌안이 위치한 산시성이다[8]. 말하자면 시진핑이 홈그라운드에 정치국 상무위원단을 데려와 권력을 과시한 것이다.

아울러 옌안은 중공의 초대 영수(領袖)인 마오쩌둥정풍운동을 통해 본격적으로 당권 장악에 나선 지역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권력 강화에 대한 시진핑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3. 평가[편집]


2013년부터 집권한 시진핑 총서기의 3연임이 확정되었다. 이를 위해 시진핑의 핵심 지위와 당중앙권위와 집중 통일 영도를 각각 결연히 수호한다는 의미의 두개의 수호(两个维护)가 당원들이 이행해야 할 의무로 당규에 명기됐으며, 최고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단 전원이 시진핑 계파로 채워짐으로서[9] 시진핑의 당내 절대적인 입지가 확립되었다. 다만 당규에 시진핑 개인숭배와 관련한 내용은 반영되진 못하여 시진핑의 위상이 아직 마오쩌둥의 반열엔 이르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대만에 대한 무력통일의 의지를 내비치면서 앞으로 미-중 갈등은 더욱 고조될 것으로 예상된다.

경제적으로는 공동부유와 쌍순환(내수와 수출경제의 병행)을 강조하면서 이전보다 좌경화됐으며, 시장에서의 당의 통제 여지가 더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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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담[편집]


  • 개막을 3일 앞둔 10월 13일, 베이징에서 시진핑에 반대하는 현수막 시위가 벌어졌다. 중국 현지에서는 해당 시위자를 두고 새로운 탱크맨이라 부르고 있다. 해당 문서 참조.

  • 장쩌민 전 주석이 불참했다.# 물론 이미 96세의 나이니 특별한 정치적 이유가 없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10] 장쩌민 임기에 총리로 함께 했던 주룽지도 이번 전대에는 불참했다. 반면 시진핑의 전임자였던 후진타오 전 주석(79세)은 참석했으며 무려 105세의 전 당중앙위원회 조직부장, 정치국 상무위원인 쑹핑도 참석했다. 후진타오 전 주석은 폐막식 도중에 퇴장했다.# 한편 후진타오가 퇴장할 때 마치 경호원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나가는듯한 모습이 포착되었는데 퇴장이 거수투표 이전에 진행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만장일치에 변수가 될 수 있는 인물을 사전에 강제퇴장시켰다는 추측이 있다.

  • 대회 직후, 시장에서는 홍콩 증시가 6% 이상 폭락하는 등 중화권 증시가 급락했다. 중국 위안화 가치도 2008년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축전을 보냈다. 사실 이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국교단절이나 그에 준하는 긴장상황이 아닌 이상, 중국에서 우리의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총선거, 지방선거를 합친 것보다 중요한 행사[11]인 당대회 때 축전을 보내는 것은 당연히 수행해야 하는 외교적 관례에 가깝다. 당장에 시진핑도 윤석열 대통령에게 당선 축전을 보낸 바가 있었다.# 과거 사례를 보면 이명박 대통령은 18차 당대회, 박근혜 대통령은 12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 문재인 대통령은 공산당 100주년 때 축하 메세지를 보냈다. 이후 윤석열 대통령도 시진핑의 총서기 재선출에 축전을 보냈다는 사실이 중국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 20기 중앙위원 205명 가운데 약 65%인 133명이 신규 선출된 인물이다.#

  • 중국 관영 언론들은 시진핑의 3연임 소식을 알리면서, 시진핑의 사진 한장으로 거의 1면을 도배했다. #

  •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는 본 절차가 규정에 따라 진행되어 정당하게 시진핑이 3연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 당대회 이후 장쯔이, 견자단 등 중화권 주요 연예인들이 시진핑의 '사회주의 문화강국' 프로파간다에 공개 지지를 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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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규상 5년 주기로 개회한다.[2] 머니투데이, SBS, 매일경제[3] 기존 덩샤오핑식 집단영도 시스템에서는 후계자를 2018년 시진핑이 한 차례 5년 임기를 마쳤을 때에 미리 결정해야 했다.[4] 서울경제, 머니투데이[韜光養晦] 자세를 낮추고 기회를 기다린다.[七上八下] 67세는 최고 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할 수 있지만, 68세는 안 된다는 룰이다.[5] 현재로서는 더 할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3연임이 끝이라면 이번 당대회에서 후계자가 지정되어야 하는데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당대회, 늦어도 1중전회까지 후계자가 발표되지 않으면 종신집권의 길로 갈 확률이 매우 높다.[6] 격대지정 원리에 따라 후진타오 전 주석으로부터 시진핑의 후임으로 지정되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7] 중공중앙 19기 출범시엔 중국공산당이 창당한 지역이자 개혁개방의 중심지인 상하이와 그 인근인 시진핑이 본격적으로 세력을 형성한 지역인 저장성을 방문했다. 둘 다 시진핑이 당 서기를 역임한 지역이다.[8] 다만 시진핑은 베이핑 태생이다.[9] 왕후닝이 무계파로 분류되긴하나 정치력이 약해 큰 의미가 없다. [10] 굳이 정치적 이유를 부여하자면, 이미 오래전부터 시진핑과 대립을 벌였으나 사실상 시진핑의 3연임이 기정사실화됨에 따라 자신은 시진핑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회 후 불과 1개월이 조금 지나서 장쩌민이 병사했으므로 건강 상태가 안좋았을 거라는 주장에 무게가 실린다.[11] 국가주석, 총서기, 국무원 총리와 부총리 등 국가 요인, 국무원 각 부의 부장(장관), 각지의 서기와 성장(시장), 전인대와 정협의 대표자, 법원과 검찰의 책임자 등 앞으로 5년간 정부와 당의 모든 주요 보직을 맡을 사람이 결정되는 . 한국으로 치면 행정부와 입법부의 모든 구성원에 더해 사법부와 주요 공기업, 학술단체, 대학 등의 책임자가 전부 결정되는 만큼 오히려 한국에서 치러지는 모든 선거를 합쳐놓은 것보다 더 파급력이 큰 행사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