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농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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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사(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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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한계점
4. 의의
5. 기타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 Physiocracy

중상주의에 대한 반박을 위해 18세기부터 대두된, 토지와 노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산출물을 국부(국가의 부)의 이상(理想)으로 여기는 경제사상 / 경제정책이다. 사상적으로는 농본주의의 일종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중농주의의 주요 개념 중 일부를 들면 다음과 같다.
  • 유일한 생산계층인 농업 주체들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다 보면 사회적으로 이익이 되는 국부의 극대화를 유발 가능.
  • 농산물의 가치에 해당하는 임금, 이윤 등의 소득을 수반하기 때문에 수요 부족으로 인한 불황은 있을 수 없음.
  • 생산 계급인 농민의 보호 및 자유시장 활성화.
  • 경제를 생산, 소비, 비생산 계급으로 분류.


2. 상세[편집]


18세기 중엽에 케네, 미라보, 튀르고 등 프랑스 고전경제학자들에 의해 주장된 사상으로서 쉽게 말해서 중상주의와는 다르게 부의 원천은 오직 토지에서만 발생하며 그렇기 때문에 농업만이 생산적인 노동이라는 생각을 중심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농부들의 세금을 경감시켜 농업 생산의 촉진시켜야 그 당시 잦은 전쟁으로 인한 세금 부족을 매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거래에서 부가 창출된다고 했던 중상주의 반대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보호무역, 국가 개입 위주의 정책으로 부를 축적하려 했던 중상주의와는 달리 농업의 생산 촉진을 위해 자유방임주의를 주장하였다.

대표적인 이론서는 프랑수아 케네의 저서 《경제표》인데 여기서 그는 국민을 생산(농민), 소비(귀족), 비생산계급(시민)으로 나누어 농산물이 세 계급사이에서 어떻게 순환하는지 밝혀내는 작업을 하였는데 이는 최초로 경제의 순환을 모델화한 시도로 평가된다. 또한 이 책에서 그는 프랑스 혁명 직전(앙시앵 레짐)의 경제적 곤궁과 인구문제 해결을 시도하였는데 그 핵심은 '부는 오직 토지에서만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토지의 주인인 지주들에게 많은 세금을 걷자!'는 것이었다. 물론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그의 주장은 실현되지 못했고 결국 프랑스는 세수부족으로 삼부회를 소집한 후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3. 한계점[편집]


지금까지 인류에게 무해했고, 앞으로도 무해할 학문체계의 오류를 길게 검토할 가치는 없을 것이다.

-

애덤 스미스


중농주의는 그 당시에도 개혁층의 지지를 받았고 후대의 경제학에 영향을 줬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경제학사는 농업 이외의 생산을 인정하지 않는 자체적으론 극복 불가능한 오류가 있었다. 이 시기에도 토지와 상관관계가 매우 약한 공업 및 상업을 통해서도 부가 창출되고 있었음에도 중농주의는 이 모든 것을 비생산적인 요소로 취급했었고, 자본가의 이윤이란 농업 생산이 이루어지는 농지의 지주가 걷는 지대뿐이었다. 그나마 중농주의가 논의되던 시점의 경제는 거의 전적으로 농업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에 큰 문제가 없었다...어디까지나 산업혁명시대가 열리기 전 까진..

토지와 농민의 노동이 직접 투입되던 가내수공업 단계를 넘어 기계와 동력의 힘을 입어 전 세계로 시장이 확대된 산업혁명기로 접어들자 중농주의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는 건 명백해졌다. 중농주의 입장에선 유일한 생산계층인 농업은 소외 당하는데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비생산계급의 활동만 활발히 감지되고 있음에도 전체적인 경제규모는 눈더미처럼 불어나는 이상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국가의 부는 오직 농업을 통해서만 생산된다는 대명제를 벗어날 수 없는 중농주의로선 이러한 '기형적인' 경제현상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게 불가능했다.

결국 중농주의자들은 산업혁명에 따른 폭발적인 경제성장은 일종의 버블에 불과하며, 중상주의라는 잘못된 논리를 추앙하는 상인과 정부의 담합하에 이루어진 농민계층에 대한 일방적인 약탈의 결과물이라고 해석하는 게 최선이었다. 중상주의의 폐단은 부정할 수 없기에 이런 비판은 적절했으나, 애시당초 문제의 원인을 잘못 파악해 버렸으니 제대로 된 해결책이 나올 수 없었다. 결국 중농주의 경제학자들은 이런 장애를 부추기는 도시의 인공적인 삶을 저주하고 자연스러운 농민의 삶을 추앙했으며, 한발 더 나아가 유교도교와 합쳐지며 중국의 명청시기 토지제도를 적용한 농업사회적 유토피아를 꿈꾸기에 이르렀다. 그러니깐 현대 경제학자로선 해괴망측하기까지 한 "애당초 경제 그 자체가 잘못됐으니, 더 이상의 산업화와 무역을 멈춘 뒤 모든 것이 완벽했던 근대 이전의 농경사회로 돌아가자"라는 결론에 도달한 셈이었다.

이 시점에서 중농주의는 더 이상 현실의 경제현상을 분석하는 학문=경제학이 아닌, 복고지향 혁명가들의 정치철학의 영역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고전파 경제학이 대두되기도 이전에 중농주의는 18세기 유럽경제의 양 축을 이끌던 상인정부의 외면을 동시에 받으며 그대로 묻혀버리고 만다.

4. 의의[편집]


농업생산물에 대한 '자유방임주의'라는 말에서도 알수 있듯이 이 이론은 고전 경제학 성립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특히 토지가 부의 원천이라는 부분은 고전파에서 노동이 부의 원천이라는 것으로 수정되어 받아 들여졌다. 실제로 애덤 스미스는 프랑스를 여행하는 도중에 케네 등 중농주의자들과 만나 교류했다는 기록이 있고 《국부론》에서 케네를 언급하기도 한다. 특히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사정없이 까버린 중상주의와 달리 중농주의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서술을 하기도 했다(물론 그렇다고 중농주의가 무조건 옳다고 한 건 아니지만).


5. 기타[편집]


흔히 실학자라고 불리는 조선 후기의 비주류 성리학자들 역시 이런 주장과 유사한 이론을 전개해 나갔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으나, 실학 내에서의 중농학파중상학파는 실학 안에서의 설명을 위한 편의상의 도구에 가까울 뿐 유럽 내에서의 구도와 비교하기에는 곤란하다. 이들은 전통적인 성리학적 경세학의 틀 안에서 재정과 토지 제도 등의 개혁을 꾀한 이들로, 근대 경제학의 가치론 등과 비교할 이론은 마련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흔히 이러한 경우에 언급하는 '중농주의'는 균전제, 한전제, 정전제 등을 다룬 학자를 언급하지만 이들은 모두 당나라 시대까지의 토지 제도로 이미 등장했던 예들이며, 국가 주도 하의 재분배라는 동아시아의 고전적인 관념에 입각해 있다. 균전제는 국가의 토지 분급, 한전제는 토지 소유 규모의 제한 또는 균전제와 유사한 생활 기초 토지의 유지, 정전제는 공동 농장 제도를 말하는데 이들 중 어떤 것도 근대 유럽 중농주의에서 기조로 삼은 자유방임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즉 실학자의 중농주의는 기존 중상주의에 의한 반발로 일어난 유럽 중농주의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정치&행정적인 목적으로 행해진 농업 진흥 및 대민 복지 정책에 가깝다. 거기다가 비교 대상인 유럽 중농주의 또한 말기에 들어선 동양의 균전제&정전제를 도입하며 경제학사로서의 가치를 상실했기에 구분이 좀 더 애매해졌기도 하다.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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