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만주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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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고대
2.1.2. 고구려
2.2. 중세
2.2.1. 발해와 위구르 제국
2.2.2. 요나라와 하서회골
2.2.3. 금나라와 서요
2.3. 근세
2.4. 근대
3. 문화 교류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만주와 중앙아시아 일대 지역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역사적으로 만주와 내몽골에 이르는 유목민들은 중국 내 여러 침투왕조, 정복왕조들을 건설한 바 있으며, 한국 고대사에 속하는 고조선과 고구려 그리고 남북국시대 발해 역시 문헌 자료로는 자세한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고고학적 연구 결과 중앙아시아와 적지 않은 교류가 있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또한 근대 만주족준가르 정벌은 중앙아시아 역사에 분수령이 되기도 했다.

2. 역사적 관계[편집]



2.1. 고대[편집]


고대 원시 인도유럽어족캅카스에서 중앙아시아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청동기 및 기마술이 중국과 만주를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도 전해졌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같은 사료에는 동예의 특산물로 과하마가 유명했다는 언급이 간략하게 나오는데, 원래 청동기 시대 초기에 동양으로 전파된 말은 오늘날의 일반적인 말에 비해 다소 크기가 작았다.[1] 해당 사료를 통해 유라시아 대륙 극동에 위치한 만주와 한반도에서 말의 종자 개량이나 혹은 도입이 다소 늦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중국 사료에 나오는) 주몽이 탔다고 하는 ‘삼척마’는 직접 그 등에 탄 것이 아니라 그 말들이 끄는 수레에 탄 것으로 보이며, 한편으로 ‘삼척’이라는 표현은 이미 서역에서 훤칠한 말을 구비하고 있었던 중국말에 비해 상대적이고 상징적인 수사로 판단된다.[2]

'과일나무 아래(果下)도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키가 작은 말 즉 과하마(果下馬)' 라는 표현은 배송지[3]가 자신의 지역에서 나는 ‘果下’라는 이름이 붙은 동물들에 비교하여 동북방의 말들을 설명한데서 나온 것이며, 중국 남방의 방언이나 지명에서 비롯한것으로 추정된다.

(중략)

중국 측의 한대 이전의 자료에 나타난 조랑말(과하마)의 용도는 수레를 끄는 용이었다. 그러므로 주몽이 3척의 과하마가 끄는 수레를 탔다고 하거나 아니면 주몽이 탄 말과 그의 위상을 폄하하기 위해 여인들이나 타고 다니는 작은 말을 탔다는 비아냥거림으로 해석할 수도있을 것이다. 한편 여기에서 ‘三尺’이란 상대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서역에서 들여온 중원의 훤칠한 말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게 보였기 때문에 ‘三’이란 상징적인 숫자를 들어 표현한 것일 것이다. 이는 파지릭 쿠르간(Pazyryk Kurgans)에서 발견된 말들의 평균키가 128∼150cm에 속하는 작은 말들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2.1.1. 선비족[편집]


대흥안령 산맥 일대에서 발흥한 선비족은 북중국으로 침투한 이후 당대 이미 중국 화북지방 각지에 진출해있던 중앙아시아 출신 상인들이나 불교 승려들의 영향으로 중앙아시아 문화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중앙아시아나 중동, 유럽에서는 당시 중국이 타브가치(Tabgach)라는 이름으로 알려지는데, 이는 북위를 세운 탁발부 선비족을 일컫는 명칭이 전해진 것이다.

파일:Xianbei_tomb_mural.jpg
  • 선비족을 묘사한 그림. 왼쪽에서 세 번째 서 있는 인물의 이목구비가 다른 인물들과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다.

북위태무제 시기 왕은생(王恩生)․허강(許綱)과 동완(董琬)․고명(高明)을 각각 서역으로 보냈다. 왕은생과 허강은 유연(蠕蠕)에 억류되었지만 동완과 고명은 선선(鄯善)을 출발하여 9국을 거쳐 북쪽으로 오손국(烏孫國)에 이르렀다. 이후 파락나(破洛那)와 자설(者舌)을 방문한 후 오손․ 파락나 등의 사신과 함께 귀국하였다. 파락나는 페르가나(Ferghana), 자설은 타슈켄트의 음차로 추정된다. (중략) 북위 사신들은 소그디아나의 오아시스 도시를 거치지 않았다. 따라서 소그디아나에 대한 정보는 간접적인 정보에 불과했기 때문에 부정확했을 것이다.

(중략)

북위 후기 수도 낙양에 서역인 1만 호가 거주했는데, 이는 낙양 인구의 9.1%에 해당한다. 이처럼 서역인들이 낙양에 대거 거주하면서 북위 황실 일족을 비롯한 지배층이 서역인의 문화와 상품을 선호하면서 서역문화가 유행하였다. 심지어 호태후와 효명제를 비롯한 북위 황실과 지배층이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던 증거가 위서와 출토유물을 통해 밝혀졌다

북위시대 서역과 소그디아나 이해 -『위서』 「서역전」의 분석과 서역상인의 국적 표기 중심으로-#


2.1.2. 고구려[편집]


파일:각저총 씨름.gif
  • 각저총 씨름 그림. 한 명은 서역인으로 보인다.

파일:고구려 벽화 월금 연주자.png
  • 고구려 벽화 월금 연주자. 중앙아시아 불교가 동아시아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중앙아시아의 여러 악기와 음악도 함께 고구려로 전파되었다.

파일:afrosiabpainting.jpg

2.2. 중세[편집]



2.2.1. 발해와 위구르 제국[편집]


발해 고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소련의 고고학자 샵쿠노프(1930~2001)는 1960년에 우수리스크 근처 고려인 마을이었던 ‘차피고우’ 일대에서 발해 유적을 조사했다. 그가 선택한 발굴지는 아브리코스라고 불리는 언덕 위의 발해 절터였다. 끊임없이 나오는 기왓장 사이에서 자그마한 진흙 조각을 발견했다. 그냥 흙덩이로 착각할 만한 진흙 조각을 자세히 살펴보니 십자가였다. 그것도 보통 십자가가 아닌 끝으로 갈수록 벌어지는 특이한 형태였다. 바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발해로 유입된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의 십자가였다. 흔히 ‘시리아식 십자가’라고도 하는, 끝이 넓어지는 십자가는 주로 아시아 기독교도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네스토리우스교를 대표한다. 샵쿠노프의 놀라운 발견은 1968년에 발간된 그의 박사 논문을 통해서 처음 소련 학계에서 공개되었다. 하지만 냉전의 시대에 그의 발견은 널리 주목받지 못했다. 다만 최근 발해 유적에서 다양한 실크로드의 흔적이 확인되며 재조명받고 있다.

경교가 당나라에서 탄압받던 시기에 한반도 일대에서는 발해와 통일신라가 번성하며 사방과 교역하던 시기였다. 당시 발해는 몽골의 위구르 제국, 중앙아시아의 소그드 상인들이 살면서 많은 교역활동을 하던 때였다. 경교를 믿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소그드인들이었다. 소그드 상인들은 발해에서도 활동했으니, 그들의 일파와 함께 경교가 흘러들어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발해 아브리코스 유적은 불교 사원이고, 유물도 자그마한 진흙으로 만든 십자가에 불과하다. 이 십자가 말고도 중국 훈춘에서 경교의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발해 시기의 불상 장식에서 십자가가 발견된 적도 있다. 그래도 경교의 흔적이라고 보기엔 많이 미약해 보인다. 그런데 당시 경교인들의 풍습을 보면 이런 상황은 이해된다. 경교인들은 수백년간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성상을 만들지 않았고, 자그마한 십자가만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동아시아에 토착화해서 유교와 불교의 풍습을 널리 받아들이면서 별도의 사원을 세우지 않고 불교나 유교 사원처럼 자신들의 사원을 꾸몄다. 둔황이나 신장에서 발견된 경교 예수상도 불화의 한 장면에 십자가를 새겨넣은 것처럼 보인다. 경교인의 무덤에도 돌로 만든 십자가를 새겨넣었을 뿐이었다. 경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해뿐 아니라 통일신라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불국사 출토의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이다. 하지만 불국사 출토품은 경교 십자가의 형태와 많이 다르며 경교 신도들은 성모상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논란이다.

발해 ‘십자가’ 유물은 개방과 공존의 상징이었다#


발해는 왜 많은 에너지와 인력을 소모하면서까지 확장했을까를 생각해보자. 니콜라예프카, 콕샤로프카 등 발해의 한카호 이북의 성지는 공통적으로 1) 동물뼈가 대량으로 출토되는 등 복합생계경제(특히 유목 및 수렵)의 비중이 높음, 2) 중앙아시아 및 초원 지역과의 관계 밀접, 3) 모피, 산삼 채취도구 등 이 지역 특산품개발 등의 흔적이 보인다. 바로 영토의 확장이 아니라, 특산품의 채취 및 교역 거점의 확보를 통한 경제적인 이득이 더 중요했음을 의미한다. 콕샤로프카의 위구르 계통 토기로 볼 때 발해가 한카호 일대로 확장한 것은 적어도 8세기 중후반대까지 소급될 수 있다. 즉, 발해가 건국하자마자 적극적으로 북쪽으로 자신의 세력을 확장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1) 당나라와 신라의 팽창으로 자신의 영역을 동, 남, 서쪽으로 쉽게 확장할 수 없었던 점, 2) 중앙아시아 등 초원 지역의 교역로를 개발하여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함 등이었다. 8세기경에는 이후 발해의 주적인 여진이나 거란이 아직 득세한 시기가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북방지역으로의 확장이 아주 어려웠을 것 같지는 않다. 사실 더 중요한 문제는 왜 북쪽으로 확장했으며, 어떠한 방식으로 북변을 지배했는가 이다. 콕샤로프카 성지의 6년간 발굴성과는 이 문제에 대한 좋은 답을 제공한다. 당-발해와의 관계와는 별도로 당시 몽골초원에서 강성했던 위구르 제국실위를 사이에 두고 발해와 접했다. 신당서에 따르면 위구르의 영토는 동쪽은 실위, 서쪽은 알타이, 남쪽은 고비 사막 등 흉노의 옛 영토에 걸쳤다. 이러한 판도에서 실위가 특별히 적대적이지 않다면 발해와 위구르는 큰 무리 없이 교역할 수 있다.

더욱이 위구르 제국의 교역은 소그드인들이 담당했었기 때문에 두 제국 사이의 교역은 더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발해가 북방의 험한 지역으로 성지를건설하며 그 영역을 확장하는 배경에는 중앙아시아 지역과의 교역도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고고학 자료로 본 발해와 위구르 제국#


2.2.2. 요나라와 하서회골[편집]


거란은 5세기 이후로 만주 지역의 강자로 군림해 왔으며 당나라 동북지방의 절도사들을 상대로 몇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마침내 907년에 이르러 야율아보기가 요나라를 건국하고 몽골과 북만주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중세 아르슬란 칸국(카라한 칸국)이나 사만 왕조 출신 무슬림들은 북방 초원길을 이용해 서하를 거쳐 내몽골과 만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요나라와 교류했다. 요나라는 지금의 베이징에 이슬람 사원을 지어주기도 했으며, 이 사원은 청나라 때 재건축이 되어 지금도 있다.#

2.2.3. 금나라와 서요[편집]


여진족을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기마궁수로 싸웠다. 전통적인 한국 사료나 중국 사료에서는 이들을 야만인으로 폄하하고 있으나, 여진족들은 요나라의 지배를 벗어나기 전부터 발해의 제도는 상당부분 계승하면서 이미 국가체제를 이루기 시작했다.

요나라 유민들은 야율대석의 지휘 하에 중앙아시아 동부에 이주하여 서요를 건설하며 이웃 국가들에게 자신들이 지배자가 중국의 황제(타그바치 )라고 과장하면서 권위를 내세웠다.[4] 연경을 오가던 위구르 상인들은 여진족의 금나라가 건국된 이후에도 무역을 지속하였다.

2.3. 근세[편집]


청나라 때에는 육로 무역 비중보다는 해상 무역 비중이 증가하여 세계사 교과서나 중국사 개론서에는 무시되는 경우도 있지만, 육로 무역 자체는 쇠퇴하지 않고 이어졌다. 신장성은 비단길에서 유명했던 장소였던만큼 신장성을 통해 사파비 왕조, 카자르 왕조페르시아 왕조들과 인도 반도의 무굴 제국(무굴 제국과는 벵골과 히말라야를 넘어 티베트를 통해 무역을 하기도 했음)[5], 그리고 러시아와의 교류도 있었으며, 코칸트 칸국과도 국경에서 분쟁이 있었던 동시에 장사를 했다.

또한 신장성을 개척했을 때 위구르인, 한족, 후이족 뿐 아니라 일부 다우르족만주족, 오이라트계 몽골족, 시버족들도 이곳에 징용되거나 강제이주되었으며, 신장에 정착한 시버족들은 지금도 시버어만주어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만주에서 만주족 기인, 시버족, 다우르족이 신장으로 이주했다면 신장의 키르기스인 일부는 중가르 홍타이지국 멸망 이후 18세기 말 만주로 이주하여 오늘날 푸위 키르기스인이 되었다.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인들이 이슬람교를 믿는 것과 다르게 푸위 키르기스인들은 대개 티베트 불교를 믿는다고 한다.

2.4. 근대[편집]


청나라에서는 만주의 봉금령이 풀린 후 수많은 한족들이 이주했으며 한족 뿐 아니라 후이족들도 이주하게 되었으며 후이족들의 영향으로 무슬림이 된 퉁구스계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후이족 뿐 아니라 오스만 제국, 러시아의 타타르족을 통해 이슬람을 믿게 된 사람들도 있었으며 만주에도 타타르계 러시아인들이 있었다. 오스만 제국과 교류를 하기도 했었으며, 신장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킨 야쿱 벡 정권을 도운 적도 있었고, 신장성의 위구르인들과 많은 교류들도 있었으며, 일부 터키인들 선교사들도 위구르인 거주 지역을 방문하기도 했었다.

3. 문화 교류[편집]


오호십육국 시대부터 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혹은 서아시아[6] 출신 불교 승려(호승)들이 만주 지역에도 종종 방문하였고 이들 중 한반도로 들어온 경우도 있었다. 만주에서 기원한 선비족 탁발부 등 유목 정복 왕조들은 북중국을 정복한 이후 한족과의 갈등을 줄이고자 고대 중앙아시아에서 유입된 불교를 적극 후원하였고, 특히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 과정에서 중국 불교의 기틀이 다져진다.# 중앙아시아 불교가 동아시아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중앙아시아식 불교 음악을 포함한 중앙아시아 음악도 동아시아로 유입되었고, 이는 당대 중국을 비롯한 고구려 등 동아시아 전통 음악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다른 한 편 연개소문의 도교 지원 정책으로 타격을 받았던 고구려 불교는 발해 불교가 융성하면서 부활하는데, 발해의 불교 문화는 후대 요나라 그리고 금나라의 불교 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4. 관련 문서[편집]



[1] 이 때문에 중국은 상나라에서 춘추시대까지 전쟁에서 기병 대신 이륜전차를 주로 활용하였다.[2] 삼척은 93cm 정도에 해당한다.[3] 택배 배송지 말고 중국 역사가 이름(裴松之)이다.[4] 또한 서요의 지배자들은 "구르칸"으로 칭해졌는데 이는 우주의 지배자라는 뜻이다. 이 칭호가 중국의 천자가 천하를 지배한다는 컨셉을 모방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5] 훗날 벵골을 비롯한 인도 동부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영국의 점령으로 동인도를 접수하며, 벵골과 아삼 지역을 아편을 재배하는 곳으로 만들어, 아편을 밀무역했으며, 청의 지나친 은화 요구는 아편으로 밀무역으로 변하고 이 소식이 청에 적발되면서 아편전쟁의 원인이 된다.[6] 고대 파르티아 동부 지역은 불교가 우세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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