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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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中庸)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저술한 책이다. 논어, 맹자, 대학과 더불어 사서에 속하며, 유교의 기초가 되는 책이다. 원래는 대학과 마찬가지로 예기 제31편 중용편에 속한 글이었으나, 남송 시대 정자와 주자 등의 성리학자들에 의해 독립하여 출간되었다.
예전에는 중용에서 다루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내용이 자사의 시절에 존재하였을 것이라 보기 힘들었기 때문에, 중용을 송대에 만들어진 글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최근에 중국의 한나라와 전국 시대 고대 무덤에서 중용의 글귀가 쓰여져 있는 죽간[1] 과 백서[2] 가 발굴되면서, 중용의 글귀가 적어도 자사가 활동하던 시절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따라서 중용이 자사의 저서일 가능성도 매우 높은 편이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판본은 대체로 남송 주자의 수정을 거친 중용장구를 따른다. 그는 중용 전체를 33장으로 나누었으며, 각 장의 이름은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다.[3]
중용이라는 말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내가 남에게 베푸는 말과 행동 또는 감정표현[4] 에 부족함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지나친 것인지를 살펴서, 상황에 맞는 적절함(中[5] )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庸=用=施 이다. 즉, 상대방에게 베푸는 말과 행동에서 적절함을 지켜라는 것이 중용이다. 남에게 베푸는 말과 행동이 부족하면 상대는 원망하게 되고, 남에게 베푸는 말과 행동이 지나치면 상대는 부담스러워 한다. 그 과(過)와 불급(不及)의 중간이 중용인 셈. 이는 오륜인 부부관계, 부자관계, 군신관계, 형제관계, 친구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관계에서 내가 받기 싫어하는 감정표현을 남에게 베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중용의 가장 큰 원칙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의 눈치만 보며 남의 기분을 맞춰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만약에 인간관계에서 그 상대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면, 그것에 대해 정중하게 지적해 줄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 중용이다. 이럴 때는, 남의 비위만 맞추며 맞장구를 치는 것은 도리어 편향된 것이며, 만약 오랫동안 생각한 결과 그것이 옳다고 생각된다면 상대의 잘못에 '자신의 주관'을 정중하게 말할 줄도 아는 것이 중용이다.
즉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자신의 마음 속 원대한 뜻은 흔들리지 않고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감정은 상황에 맞게 잘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자신의 이익이나 남들의 소문에 따라 계산적으로 살지 말고, 자신이 스스로 세운 올바른 원칙만은 지키겠다는 마음을 가지되,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세련되게 표현할 줄 아는 것이다.
중용은 상황에 따라서 말과 행동(감정표현)을 해야 되는지, 해선 안되는지를 아는 판단력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상황에서 그 말과 행동이 지나친 것인지 모자른 것인지 그 적절함을 판단하는 것이 중용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중용은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성인들이 미리 그 기준을 만든 것이 예(禮)인 것이다.[6] 보통은 예(禮)를 따르면 그 적절함을 얻는다.
하지만 성인이 정해 놓은 예(禮)라 할지라도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 또한 중용이다. 이러할 때에는 형식보다 본질과 감정이 우선하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에[7] 의해서 윗사람을 존경하고 아랫사람을 아끼는 그 형식에 부족함이 생길지라도, 그 마음이 충분히 전해진다면, 그것 또한 예(禮)라고 하기에 충분하다고 공자[8] 는 말한다.
중(中)이란 갑골문에서 깃대를 뜻한다. 깃대에 달린 깃발은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휘날리지만 그 중심에 있는 깃대는 굳건히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중용도 마찬가지다. 옳은 신념은 깃대처럼 중심을 잡고 있어야 되며, 바람이 사방에서 몰아쳐도 기울어지지 않고 상황에 맞게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 중용이다.[9]
여기서 '자신의 중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를 들자면, 감정표현을 상황에 맞게 잘하여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면서도, 상대의 큰 잘못에 대해서 충고(忠告)를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이 또한 중용이라는 것. [10] 즉, 중용은 '상대방에게 맞추라'고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용이란, 자신이 살아오면서 심사숙고 끝에 '옳다'고 생각한 것들을, 상황에 맞춰서 남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세련되게' 말할 줄 아는 것이다. (또는 그러한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동할 줄 아는 것.)
공자는 '지나친 것은 모자른 것과 같다(과유불급)'이라 말했는데, 중용의 뜻을 잘 말해주고 있다. 누군가에게 말을 할 때 지나치게 공격적이거나 설득하려고만 한다면 제대로 된 말과 행동이 아닐 것이다. 반대로, 상대의 기분이 상할까봐 남에게 너무 무르게만 얘기한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제대로 표현한 것이 아닐 것이다. 또한 남의 불행 앞에서 상대에게 충고를 해주려고 한다면 그것 역시 제대로된 말과 행동이 아닐 것이다. 반대로, 남의 분명한 잘못 앞에서 상대에게 충고해주지 않는다면 자신의 생각이 전달되지 않을 뿐더러 똑같은 잘못을 또 행할 것이다.
종종 '중간만 가라'는 말이 중용으로 쓰이는데, 이것은 중용이 아니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똑같이 따라하는 것은 분위기에 휩쓸리는 자의 판단이지 중용이라고 할 수 없다. 서로 다른 가치판단의 중간에 있으면서 회색분자처럼 아무 생각없이 중도를 지키는 것 역시 중용이 아니다. 상황이 계속 변한다고 지나치게 신중해져서 시간이 지나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그 상황을 회피하고 판단을 미루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서로 다른 판단을 지켜보고 있다가 최후에 유리한 쪽을 "적절하게" 선택하는 것도 기회주의자이지, 중용이 아니다. 즉, 중용은 중립을 지켜라는 말도 아니고 확실해질 때까지 판단을 미뤄라는 말도 아니라, 판단을 하되 그 판단을 상황에 맞게 하라는 것이다.
공자의 사상이 여자를 부정적으로 인식한다고 생각할 수 있어도[11] , 적어도 중용의 사상 앞에서는 여자를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 기본 개념 자체가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마라."[12] 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남자는 여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 받기 싫은 말과 행동들을 여자에게 하면 안되고, 여자는 남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 받기 싫은 말과 행동들을 남자에게 하면 안된다. 이렇게 양쪽의 두 관점을 전체적으로 살핀다면 남녀의 문제 뿐아니라 빈부, 인종, 이념, 종교 등에서 대립되는 현대적 문제들에 있어서도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현대의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중용의 필요성이 다시금 강조되고 있기도 하다.
'신독'이란, 혼자 있을 때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고 스스로를 반성하는 것을 말한다.
남이 안 본다고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남이 안 볼 때도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것이다. 전자와 후자는 외부적으로 보이는 평가가 비슷해 보일지는 몰라도, 자신의 마음가짐에 따른 실제 '삶'에서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중용의 제일 처음에서 「 "군자는 그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경계하고 삼가며, 그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두려워하고 염려한다. 감추는 것보다 더 잘 보이는 것은 없으며, 작은 것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은 없다." 」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삶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남이 안 볼 때 마음대로 해버린다면 결국 남이 볼 때에도 무의식적으로 그 행동이 드러날 것이다. 언제까지 숨기고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또한,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위해서이다. 상황에 따라 다른 사람과 사물에 함부로 대한다는 것의 결론은, 결국 자신 스스로의 삶과 행동에 대해서도 그렇게 함부로 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용 20장에서 "그러한 사람이 있어야 그러한 정치가 일어나고 그러한 사람이 없으면 그러한 정치는 그치게 된다."라고 말하면서 정치에 있어서 '방법과 시스템'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공자는 강조한다. 그렇다면 '사람'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길지만 요약하자면, 자신을 닦아야 그러한 '사람'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자신을 닦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것이 바로 '지인용'이다.
즉, '(도덕적 삶을) 배움', '말과 행동의 일치', '자신의 부족한 점을 부끄럽다고 생각할 수 있는 용기'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은 바로 뒤에 설명할 '성(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중용을 이루는 방법. 정성스러움. 성실해야함을 말한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말과 행동'(중용)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될까? 오로지 훌륭함(善)을 선택하여 그것에 정성스럽게 한마음으로, 될 때까지 하는 것이다. 남들이 한번에 해내면 자신은 10번을 하고, 남들이 10번만에 해내면 자신은 100번을 해서, 결국 그것을 해내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정성스러우면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의 이치에 통달하게 되는데, 이러한 이치는 점점 확장되어, 세상 돌아가는 이치까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사과나무를 갖은 정성을 들여 키우기를 수십년을 하게 된다면, 사과가 자라나는 이치에 대해서 능통하게 될 것이며, 그 사과가 자라고 병드는 이치와 비교해서, 다른 사회생활이나 연애 등의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게 되어, 해보지 않고도 그 적절한 정도를 잘 해낼 수 있다는 것.
중용은 사서 중에서도 제일 마지막에 배우는 것이다. 이는 유교에서 가장 어렵고 핵심적이라는 얘기다. 수천년의 유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말이 "성실" 이라니... 얼마나 맥이 빠지는 결론인가? 하지만 그렇기에 더 대단한 것이다. 성실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알 수 없다. 자신을 알 수 없으면 사물의 이치도 알 수 없다. 사물의 이치를 알 수 없으면 세상의 이치를 알 수 없다. 자신의 행복, 가족과 재산, 사회생활, 연애와 부부관계, 권력과 명예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람이든 성실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누리며 살 수 없는 것이다.
1. 개요[편집]
중용(中庸)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저술한 책이다. 논어, 맹자, 대학과 더불어 사서에 속하며, 유교의 기초가 되는 책이다. 원래는 대학과 마찬가지로 예기 제31편 중용편에 속한 글이었으나, 남송 시대 정자와 주자 등의 성리학자들에 의해 독립하여 출간되었다.
예전에는 중용에서 다루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내용이 자사의 시절에 존재하였을 것이라 보기 힘들었기 때문에, 중용을 송대에 만들어진 글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최근에 중국의 한나라와 전국 시대 고대 무덤에서 중용의 글귀가 쓰여져 있는 죽간[1] 과 백서[2] 가 발굴되면서, 중용의 글귀가 적어도 자사가 활동하던 시절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따라서 중용이 자사의 저서일 가능성도 매우 높은 편이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판본은 대체로 남송 주자의 수정을 거친 중용장구를 따른다. 그는 중용 전체를 33장으로 나누었으며, 각 장의 이름은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다.[3]
중용이라는 말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내가 남에게 베푸는 말과 행동 또는 감정표현[4] 에 부족함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지나친 것인지를 살펴서, 상황에 맞는 적절함(中[5] )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庸=用=施 이다. 즉, 상대방에게 베푸는 말과 행동에서 적절함을 지켜라는 것이 중용이다. 남에게 베푸는 말과 행동이 부족하면 상대는 원망하게 되고, 남에게 베푸는 말과 행동이 지나치면 상대는 부담스러워 한다. 그 과(過)와 불급(不及)의 중간이 중용인 셈. 이는 오륜인 부부관계, 부자관계, 군신관계, 형제관계, 친구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관계에서 내가 받기 싫어하는 감정표현을 남에게 베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중용의 가장 큰 원칙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의 눈치만 보며 남의 기분을 맞춰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만약에 인간관계에서 그 상대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면, 그것에 대해 정중하게 지적해 줄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 중용이다. 이럴 때는, 남의 비위만 맞추며 맞장구를 치는 것은 도리어 편향된 것이며, 만약 오랫동안 생각한 결과 그것이 옳다고 생각된다면 상대의 잘못에 '자신의 주관'을 정중하게 말할 줄도 아는 것이 중용이다.
즉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자신의 마음 속 원대한 뜻은 흔들리지 않고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감정은 상황에 맞게 잘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자신의 이익이나 남들의 소문에 따라 계산적으로 살지 말고, 자신이 스스로 세운 올바른 원칙만은 지키겠다는 마음을 가지되,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세련되게 표현할 줄 아는 것이다.
2. 상세[편집]
2.1. 중용[편집]
중용은 상황에 따라서 말과 행동(감정표현)을 해야 되는지, 해선 안되는지를 아는 판단력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상황에서 그 말과 행동이 지나친 것인지 모자른 것인지 그 적절함을 판단하는 것이 중용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중용은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성인들이 미리 그 기준을 만든 것이 예(禮)인 것이다.[6] 보통은 예(禮)를 따르면 그 적절함을 얻는다.
하지만 성인이 정해 놓은 예(禮)라 할지라도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 또한 중용이다. 이러할 때에는 형식보다 본질과 감정이 우선하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에[7] 의해서 윗사람을 존경하고 아랫사람을 아끼는 그 형식에 부족함이 생길지라도, 그 마음이 충분히 전해진다면, 그것 또한 예(禮)라고 하기에 충분하다고 공자[8] 는 말한다.
중(中)이란 갑골문에서 깃대를 뜻한다. 깃대에 달린 깃발은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휘날리지만 그 중심에 있는 깃대는 굳건히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중용도 마찬가지다. 옳은 신념은 깃대처럼 중심을 잡고 있어야 되며, 바람이 사방에서 몰아쳐도 기울어지지 않고 상황에 맞게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 중용이다.[9]
여기서 '자신의 중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를 들자면, 감정표현을 상황에 맞게 잘하여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면서도, 상대의 큰 잘못에 대해서 충고(忠告)를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이 또한 중용이라는 것. [10] 즉, 중용은 '상대방에게 맞추라'고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용이란, 자신이 살아오면서 심사숙고 끝에 '옳다'고 생각한 것들을, 상황에 맞춰서 남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세련되게' 말할 줄 아는 것이다. (또는 그러한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동할 줄 아는 것.)
공자는 '지나친 것은 모자른 것과 같다(과유불급)'이라 말했는데, 중용의 뜻을 잘 말해주고 있다. 누군가에게 말을 할 때 지나치게 공격적이거나 설득하려고만 한다면 제대로 된 말과 행동이 아닐 것이다. 반대로, 상대의 기분이 상할까봐 남에게 너무 무르게만 얘기한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제대로 표현한 것이 아닐 것이다. 또한 남의 불행 앞에서 상대에게 충고를 해주려고 한다면 그것 역시 제대로된 말과 행동이 아닐 것이다. 반대로, 남의 분명한 잘못 앞에서 상대에게 충고해주지 않는다면 자신의 생각이 전달되지 않을 뿐더러 똑같은 잘못을 또 행할 것이다.
종종 '중간만 가라'는 말이 중용으로 쓰이는데, 이것은 중용이 아니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똑같이 따라하는 것은 분위기에 휩쓸리는 자의 판단이지 중용이라고 할 수 없다. 서로 다른 가치판단의 중간에 있으면서 회색분자처럼 아무 생각없이 중도를 지키는 것 역시 중용이 아니다. 상황이 계속 변한다고 지나치게 신중해져서 시간이 지나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그 상황을 회피하고 판단을 미루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서로 다른 판단을 지켜보고 있다가 최후에 유리한 쪽을 "적절하게" 선택하는 것도 기회주의자이지, 중용이 아니다. 즉, 중용은 중립을 지켜라는 말도 아니고 확실해질 때까지 판단을 미뤄라는 말도 아니라, 판단을 하되 그 판단을 상황에 맞게 하라는 것이다.
공자의 사상이 여자를 부정적으로 인식한다고 생각할 수 있어도[11] , 적어도 중용의 사상 앞에서는 여자를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 기본 개념 자체가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마라."[12] 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남자는 여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 받기 싫은 말과 행동들을 여자에게 하면 안되고, 여자는 남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 받기 싫은 말과 행동들을 남자에게 하면 안된다. 이렇게 양쪽의 두 관점을 전체적으로 살핀다면 남녀의 문제 뿐아니라 빈부, 인종, 이념, 종교 등에서 대립되는 현대적 문제들에 있어서도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현대의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중용의 필요성이 다시금 강조되고 있기도 하다.
2.2. 신독(愼獨)[편집]
'신독'이란, 혼자 있을 때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고 스스로를 반성하는 것을 말한다.
남이 안 본다고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남이 안 볼 때도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것이다. 전자와 후자는 외부적으로 보이는 평가가 비슷해 보일지는 몰라도, 자신의 마음가짐에 따른 실제 '삶'에서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중용의 제일 처음에서 「 "군자는 그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경계하고 삼가며, 그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두려워하고 염려한다. 감추는 것보다 더 잘 보이는 것은 없으며, 작은 것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은 없다." 」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삶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남이 안 볼 때 마음대로 해버린다면 결국 남이 볼 때에도 무의식적으로 그 행동이 드러날 것이다. 언제까지 숨기고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또한,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위해서이다. 상황에 따라 다른 사람과 사물에 함부로 대한다는 것의 결론은, 결국 자신 스스로의 삶과 행동에 대해서도 그렇게 함부로 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2.3. 지인용[편집]
중용 20장에서 "그러한 사람이 있어야 그러한 정치가 일어나고 그러한 사람이 없으면 그러한 정치는 그치게 된다."라고 말하면서 정치에 있어서 '방법과 시스템'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공자는 강조한다. 그렇다면 '사람'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길지만 요약하자면, 자신을 닦아야 그러한 '사람'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자신을 닦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것이 바로 '지인용'이다.
지인용이란, 배워서 지식을 쌓고, 쌓은 지식을 통해 실제로 도덕(仁)을 행하며, 이런 실천의 과정 중에서 자신의 부족한 점을 부끄럽게 여기는 용기를 가져야 된다고 공자는 말한다."배움을 좋아하는 것은 지(知)에 가깝고, 힘써 행하는 것은 인(仁)에 가깝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勇)에 가깝다.
이 세 가지를 알면 곧 자신을 닦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요, 자신을 닦는 방법을 알게 되면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게되고,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면 곧 천하의 국가를 다스리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즉, '(도덕적 삶을) 배움', '말과 행동의 일치', '자신의 부족한 점을 부끄럽다고 생각할 수 있는 용기'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은 바로 뒤에 설명할 '성(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2.4. 성(誠)[편집]
중용을 이루는 방법. 정성스러움. 성실해야함을 말한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말과 행동'(중용)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될까? 오로지 훌륭함(善)을 선택하여 그것에 정성스럽게 한마음으로, 될 때까지 하는 것이다. 남들이 한번에 해내면 자신은 10번을 하고, 남들이 10번만에 해내면 자신은 100번을 해서, 결국 그것을 해내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정성스러우면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의 이치에 통달하게 되는데, 이러한 이치는 점점 확장되어, 세상 돌아가는 이치까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사과나무를 갖은 정성을 들여 키우기를 수십년을 하게 된다면, 사과가 자라나는 이치에 대해서 능통하게 될 것이며, 그 사과가 자라고 병드는 이치와 비교해서, 다른 사회생활이나 연애 등의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게 되어, 해보지 않고도 그 적절한 정도를 잘 해낼 수 있다는 것.
중용은 사서 중에서도 제일 마지막에 배우는 것이다. 이는 유교에서 가장 어렵고 핵심적이라는 얘기다. 수천년의 유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말이 "성실" 이라니... 얼마나 맥이 빠지는 결론인가? 하지만 그렇기에 더 대단한 것이다. 성실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알 수 없다. 자신을 알 수 없으면 사물의 이치도 알 수 없다. 사물의 이치를 알 수 없으면 세상의 이치를 알 수 없다. 자신의 행복, 가족과 재산, 사회생활, 연애와 부부관계, 권력과 명예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람이든 성실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누리며 살 수 없는 것이다.
3. 원문 해석[편집]
4. 여담[편집]
- 숭례문의 '숭례'와 창덕궁 돈화문의 '돈화'가 바로 《중용》에서 나온 말이다.
- 박진영은 2010년부터 오디션에 합격한 연습생들에게 "진실, 성실, 겸손"을 강조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진실'을 설명하면서 '카메라 앞에서 할 수 없는 짓을 카메라 밖에서도 하지마라'고 하였는데, 이는 중용의 "신독"과 똑같은 말이다. 또한 박진영이 두번째 말한 '성실'도 중용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 '겸손'은 역시 유교(중용)를 관통하는 주제이기 때문에, 아마 2010년 무렵 중용을 읽고 감명을 받은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 영화 역린에서 《중용》 23장을 읊는 대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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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나무에 쓴 글.[2] 비단에 쓴 글.[3] 도올 김용옥은 자신의 책 《중용 인간의 맛》을 내면서 각 장에 이름을 붙였다. 1.천명, 2.시중 3.능구 4.지미 5.도기불행 6.순기대지 7.개왈여지 8.회지위인 9.백인가도 10.자로문강 11.색은행괴 12.부부지우 13.도불원인 14.불원불우 15.행원자이 16.귀신 17.순기대효 18.문왕무우 19.주공달효 20.애공문정 21.자성명장 22.천하지성 23.기차치곡 24.지성여신 25.성자자성 26.지성무식 27.존덕성장 28.오종주장 29.왕천하장 30.중니조술 31.총명예지 32.성지천덕 33.무성무취.[4] 주자는 性은 理이고, 情은 氣 라고 해서 독립된 2개로 구분지었지만, 고대 무덤에서 발견된 성자명출(性自命出)에 따르면 인간의 감정의 기운은 성(性)이다. 감정이 인간의 본성인 셈. 자사는 情=氣=性 이라고 말하였다. 성자명출에 따르면, 자사에 대한 주자의 해설은 한참을 틀리고도 틀렸던 셈.[5] 여기서 中은 '가운데 중'이 아니라, '적중(的中)시키다 중'으로 쓰였다. 상황에 맞게 자신의 태도를 잘 적중시키는 것을 말한다.[6] 사실, 인간관계의 애매한 상황에서 성인들이 미리 대략적으로 정해 놓은 기준이 예(禮)이다.[7]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많이 벌어진다는 것이 문제다. 살다보면 이렇게 하는 것이 진짜로 예의에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많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러한 상황을 말한다.[8] 수많은 일화에서 그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예를 버려두고 마음만을 중요시하자는 것도 아니다. 예와 마음, 그 두개가 중용을 이뤄야 한다.[9] 주자는 중용의 중(中)에 대해서 환중(還中), 적중(的中), 표준(表準)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보았다. 환중은 문의 지도리를 나타내며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모든걸 변화시키는 중(中)이고, 적중은 관계 속에서 가장 올바른 형태이며, 표준은 보편적인 도덕적 윤리를 나타낸다. 주자는 이 중 환중은 도가의 사상과 비슷하기 때문에, 환중을 중으로 받아들이는건 옳지 않다고 주장하여서, 적중과 표준을 중용의 중(中)으로 삼았다. 하지만 최근 여러 무덤이 발굴되는 가운데 유교의 사상에 도가와 비슷한 부분이 많이 발견되므로써, 주자의 주장은 무색해지게 되었다.[10] 충고의 충은 한자로 忠인데, 중용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충(忠)과 서(恕)에서의, 그 충(忠)이다.[11] 여자와 소인을 가르치기 어렵다고 하나로 묶어서 말한다던가, 삼종지도 칠거지악에서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이미지로 묘사한다던가.. 하지만 그러한 부분은 시대적 한계라고 봐야 한다. 저 두개의 문장 이외에 여자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거의 없다.(사람을 극도로 중시하던 공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점은 후대의 첨가로 의심되기도 한다.) 또한 공자가 개인 여성을 지칭할 때는 그렇게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이 드물다. 애초에 사람을 중요시 했던 사람이고, 중용의 사상도 사실 공자에게서 나왔기 때문.[12] 己所不欲勿施於人[13] 본성(性)이란 태어남(生)의 마음(忄)을 말한다. 나무는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이 그 타고난 이치이고, 가축은 자라서 달걀과 우유를 생산하는 것이 그 타고난 이치이며, 사람은 자라서 참된 사람이 되는 것이 그 타고난 이치(마음)이라는 것. 이를 합쳐서 말하길 생명(生命)이라고 하는 것이다.[14] 쉽게 설명하자면, 성(性)이란 태어날 때 타고나는 DNA(설계도)를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DNA대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바꿀 수 없으므로 '천명 天命'이라고 하는 것. 이러한 타고난 성질(性)에 솔직한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길(道)인 것이며, 이러한 길은 계속 다니지 않으면 수풀에 덮혀 없어지므로 계속 그 길을 밟아 닦는 것이 교육인 셈. 여기서 교육이란 사람이 타고난 그 본성(性)이, 그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세련되게 표현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닦아주는 것을 말한다.[15] 후한시대 '성자명출'에 따르면 성(性)은 감정이다. 후대의 주자는 성(性)을 '이성(理性)'이라고 보았지만, 무덤에서 나온 과거의 증거들은 '성(性)이 감정'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증명해주고 있다. 따라서 주자학은 애초부터 잘못된 길을 갔던 셈. 주자의 이기론 등은 자사나 공자 시대에 발표했으면 헛된 소리라고 치부되었을 것이다.[16] 사람의 타고난 성질(본성)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이 되어라'는 것이다. '사람이 되어라'는 말은, 짐승이 되지 말고 사람이 되어라는 이야기. '사람답게 살아라'는 뜻. 즉, (올바른) 사람이 되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자사의 사상을 계승한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게 되는데 제대로 자사를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17] 감정이 드러나기 전 상태를 중(中)이라 하는데, 자신의 중심을 잡고 있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중심을 자신이 잡고 있기 때문에, 뜬소문이나 남들의 행동에도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기쁘고 슬픈 감정을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을 화(和)라고 하는데, 적절하게 감정을 드러내기 때문에 사람들과 뜻을 맞춰 어울릴 수 있게 된다. (和: 서로 뜻을 맞춰 어울리다.)[18] 즉, 이랬다저랬다 하지말고 자신이 세운 스스로의 원칙은 지키되, 자신의 감정을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19] 庸=用=施이다. 적절한 말과 행동을 남에게 베푸는 것을 말한다.[20] 군자의 중용이란, 자신의 중심(中)을 잡은 상태에서, 상황에 맞게 대처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상황에 맞게 하면서도 그 상황에 휩쓸리지 않는 것은 자신의 중심을 자신이 꽉 잡고 있기 때문이다. 소인의 중용이란, 상황도 살피지 않고 무턱대고 자신의 생각대로만 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중심을 잡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남의 말이나 행동에 쉽게 휩쓸려서 함부로 행동하고 후회한다.[21] 주자는 "사람들이 능한 이가 적은 지가 오래되었다"로 해석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能久'를 하나로 묶어 '오래할 수 있기'로 해석하는 편이다. 잠깐 동안 중용을 지키는 것은 쉬워도, 오랫동안 중용을 지킨다는 것은 어렵다는 뜻. 矣는 추측을 나타낸다.[22] 음식에 소금이 과하면 짜서 맛이 없고, 소금이 적으면 밍밍해서 맛이 없다. 소금을 적절하게 넣는 것이 중용인데, 사람들이 이러한 맛을 아는 것도 드물지만, 정도(正道)를 행하는 것에 이렇게 상황에 따라 적절한 중용을 지키는 자도 드물다는 것.[23] 執中이 아닌, 執其兩端인 셈. '집중'한다는 것이 중요한 하나에 정신을 쏟는 것을 말한다면, '집기양단'은 양극단의 모든 것에 정신을 쏟는 것을 말한다. 직역하면 '양 끝을 잡고'[24] 유행이나 시대에 뒤쳐진다고, 주목을 받기 위해 중용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며, 남이 주목하지 않는다고 해서 후회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다짐이다. 여기서 성인(聖人)은, 한자를 파자(破字)로 해석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는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25] 부부가 서로 바보같이 사랑하고 연애하는 것을 말한다.[26] 不肖: 서로 닮지 아니한 것. 남녀간의 서로 다른 역할을 말한다.[27] 하늘 아래 모든 사람 또는 하늘 아래 모든 생명을 뜻한다.[28] 군자의 큰 도는, 천하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벅찰 것이라는 것.[29] 세상의 커다란 이치를 가지고 부부에게 적용하면, 큰 담론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이해되지 않을 것이며, 작은 이야기는 천하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구체적으로 쪼개어 말해주기에 부족함이 있다.[30] 1. 부부 사이에 사랑을 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2. 각각 남녀간의 서로 다른 역할을 아는 것은, 함께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미묘하고 지극한 부분에 있어서는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며, 성인도 그 남녀관계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힘든 것이다. 또한 군자의 도는 부부관계를 살피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며, 남녀 부부간의 미묘하고도 적절한 처신, 즉, 남녀 사이에서의 중용은 '솔개가 하늘을 거스르고, 고기가 물에서 튀어 오르는 것'처럼, 위 아래에서 각각 서로의 세계를 살펴보려는 노력을 통해 겨우 알 수 있는 것이다.[31] 군자의 도는 부부관계에서 시작하고, 부부관계의 지극함은 하늘과 땅에 비추어 보았지만, 그 밖의 인간관계는 사람에 비추어 봐서 사람을 고친다. 이는 나의 싫어하는 바를 비추어 봐서 남의 싫어하는 바를 이해하는 것이다. 즉, 부자관계, 군신관계, 형제관계, 친구관계에 있어서,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것. 또한 이런 관계에서 상대방에게 덕을 베풀되 말을 삼가고, 부족한 부분은 힘쓰고 여유로운 부분을 억지로 더하지 않으며, 말을 하면 그것을 행했는지 돌아보고 행동을 하면 자신의 말과 틀린게 있는지 돌아본다.[32] 여기서 명(命)은 1장에 나오는 '천명(天命)'을 말한다. 즉, '하늘(운명)이 정해주는 시기나 기회'를 의미한다.[33] 군자는 부귀와 빈천, 오랑캐와 환난에서도 그 속에 들어가 스스로 얻는 것이 있다. 마찬가지로 아랫사람이 되면 아랫사람의 역할을 잘 수행하여 거기서 얻을 것을 얻고, 윗사람이 되면 윗사람의 역할을 잘 수행하여 거기서 얻을 것을 얻기 때문에, 윗사람이 되면 아랫사람을 업신여기지 않고 아랫사람이 되면 윗사람에게 매달리지 않는다. 이렇게 잘못됨의 원인을 남에게 구하지 않고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서 구하기 때문에,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사람을 탓하지도 않는 것이다.[34] 順: 가르치다.[35] 부모가 순리를 따르도록 했을 것이다.(其~矣乎: ~할 것이다. 추측을 뜻함.)[36] 군자의 도는 화목한 집안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관계의 시작은 화목한 집안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37] 귀신은 보이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삼가게 하고 공손하고 신중하게 만들어 상대를 기리게 한다. 제사라는 작은 공경에서부터 그 성실함이 보인다면, 산 사람을 공경하는 것에 있어서는 얼마나 더 잘하겠는가.[38] 사해(四海)之內[39] 순 임금이 큰효자였기 때문에, 하늘이 그것을 북돋아주고 키워줘서, 순이 천자가 되었다는 뜻.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멀리 있는 곳에 도달한다는 내용과 비슷하다. 다만 하늘이 그 재질을 미리 알고 그 선함을 적극적으로 도와줬다는 게 다른 점이다. 하지만 착하다고 하늘이 실제로 도와줬을리 만무하기 때문에, 현대의 시각으로 재해석하자면, '선한 사람을 높여주고 길러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된다'는 선언으로 봐야 할 것이다.[40] 사해(四海)之內[41] 장례와 제사는 다르다. 장례는 죽은자를 슬퍼하기 때문에 지내는 것이 3년동안 슬퍼하는 것이다. 제사는 그렇게 죽은 이를 기리는 것이니, 장례의 3년상을 지내고 나서 부터 제사를 지내는 것이고 매년하는 그 시일에 그 사람을 기리는 것이다.[42] 멀리 있는 친척의 장례를 지내게 될 때는 1년상을 하는데 이를 기년상이라고 한다.[43] 신주를 배열하는 방식.[44] 旅酬: 제사 술을 마시는 것. 아랫사람이 윗사람보다 술을 먼저 마신다.[45] 燕毛: 머리 색깔에 따라 잔치상의 순서를 정하는 것. 머리가 하얗게 될 수록 앞에서 먹는다.[46] 郊社: 성 밖으로 나와서 지내는 큰 제사를 말한다.[47] 上帝: 옥황상제[48] 《禮記》 〈祭義〉‧〈郊特牲〉에서 ‘春禘秋嘗’이라고 하였다. 禘는 ‘봄 제사', 嘗은 '가을 제사'를 말한다. 禘는 한 해가 시작할 때에 한해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하기 위해 고대의 제왕들(수인, 복희, 신농을 말한다. 특히 농사의 신인 신농)을 모시는 제사였고, 嘗은 가을 곡식이 거둬지면 수확을 축하하여 수확한 곡식들을 맛보고 즐기는 제사였다.[49] 바람의 방향에 따라 부들과 갈대가 이리저리 흔들리듯이, 정치도 사람들의 생각에 민감하게 움직인다는 뜻.[50]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으며 남들에게도 잘 베푸는 그런 사람이 된다면, 주변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보고 그 '선함'을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가 거짓말이나 폭력 등으로 남의 등 쳐먹는 사람이라면,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사람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끼리 끼리끼리 모이므로 먼저 자신을 갈고 닦아야 된다는 것.[51] 결국 하나로 귀결되니 성실해야 된다. 誠은 성실한 것을 말한다. 誠이란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려는 마음이다.[52] 化育: 만물을 길러서 바꿈. 나무를 길러서 열매를 맺거나, 병아리를 길러서 닭이 되어 달걀을 낳거나..[53] 앞의 22장은 성인의 도(道)이고, 지금 23장은 성인이 아닌 사람의 도(道)이다. 성인처럼 태어날 때부터 알지 못하더라도(生而知之) 그 부족한 부분을 정성스럽게 배워서라도(困而學之) 발전해 나가야 된다는 것. 20장 말미에 '하늘의 도', '사람의 도'를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54] 도리에 맞지 않는 것, 또는 편벽된 것까지 살피는 것이다. 굽어진 곳 뒤에는 사각이 생기므로, 그러한 사각까지 꼼꼼하게 확인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자세하게 살펴본다는 것.[55] 變은 서서히 변해가는 것을 말한다. 化는 변하다가 어느 순간에 이르러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56] 사람이 지극히 정성스러우면, 일의 모양이 갖춰지고, 해야할 일이 뚜렷해지며, 그 일에 밝아져서, 주변을 움직인다. 주변의 세상을 움직일 정도가 되면, 그 움직임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점차점차 커지게 되고, 결국엔 사람이나 사회가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57] 풀이나 나뭇가지로 치는 점.[58] 사람다움을 뜻한다.[59] 정성이란 자신 스스로가 그 방법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자신의 삶은 누군가를 참고할 수는 있어도, 남의 삶을 똑같이 카피해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벌어지는 사태를 잘 살펴서 스스로의 판단으로 필요한 대책을 세워 행하는 것이다.[60] 不貳: 두 마음을 품지 않다.[61] 지극한 정성이 한가지로 충실하다면, 거기서 태어나는 것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62] 지극한 정성으로 사물을 하나로 대하면 사물의 이치를 이해할 수 있는데, 이 때 여기서 창조되고 만들어지는 것은 너무나 많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하늘의 별빛, 한 줌의 흙, 한 주먹의 돌, 한 국자의 물 같은 작은 것에서 시작하여도, 거대한 하늘과 땅, 산과 바다 등의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63] 자라다. 생장하다.[64] 예절과 법(권위)도 '사람'이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덕이 높고, 아는 것이 많으며, 적절하게 지금의 상황에 적용할 줄도 알고, 옛것을 무시하지 않고 거기서 발전하며, 예의를 지키는 사람이어야 한다. 만약 나라가 잘되려고 하려면,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자유롭게 내뱉을 것이고, 나라가 망하려고 하려면, 이런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고 세상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65] 도덕과 윤리와 법과 문자 등은, 그 공동체에서 합의한 게임의 규칙같은 것이니, 심판이 아니라면 굳이 바꾸어서 혼란스럽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물의 이치는 하나만 지극한 정성으로 밝혀도, 수많가지의 생각으로 만들어지고 응용하고 적용할 수 있지만,(26장) 예의와 윤리와 법과 문자 등은 '수만가지로 만들어내고 용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이 28장의 중요점이다.[66] 焉은 '어디에'라는 뜻. 따라서 上焉者는 '윗쪽 어디에 있는 것'을 말한다.[67] 천하를 다스림에 중요한 세 가지는, '1. 군자 자신이 모범이 되어야 한다. 2. 주나라 세 명의 왕(왕계, 문왕, 무왕)에 살펴보아 틀린 것이 없어야 된다. 3. 이것을 세상에 내어놓아도 세상과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68] 혹자는 '상언, 하언, 군자지도'가 중요한 3가지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굳이 '군자지도'에 해당되는 문장에서 다시 과거에 해당되는 세 명의 왕을 살펴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언과 겹치기 때문이다.[69] 큰 도와 작은 도는 각각의 사람들에 의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펼쳐져도 서로 함께 어울린다. 큰 도를 행하는 사람에게 그게 너무 이상적이다고 할 필요는 없으며, 작은 도를 하는 사람에게 그것이 작은 것이 아니냐고 핀잔줄 필요도 없다. 각각의 자리에서 그 선함을 다르게 펼쳐도, 세상에 각기 기여하는 바가 된다.[70] 받아들임은 仁, 잡아냄은 義, 공경함은 禮, 구별함은 智 에 해당한다. 제일 앞의 '임함(臨)'을 信(또는 聖)이라고 보아, 다 합쳐 인의예지신의 五行으로 보기도 한다.[71] 화를 내서 큰소리를 치고 얼굴을 붉힌다고 백성들이 달라진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72] "德輶如毛"는 《시경》의 대아 증민편에 나온다. 여기서 가볍다는 말은, '덕을 행하기는 쉬우나 실제로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뜻으로 쓰였다. "上天之載 無聲無臭"는 《시경》의 대아 문왕편에 나온다. '하늘이 하는 일(덕을 말함)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으나, 만 가지 법이 일어나고 나라가 만들어지는 근거가 된다'는 뜻으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