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대전(축록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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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대전
中原大戰
Great War of Zhongyuan

시기
기원전 358년
장소
중국 중원 지방
원인
위(魏)의 중원 패권에 대한 제(齊)의 도전
교전국
제齊
한韓
조선朝鮮
진秦[1]
위魏
지휘관
범군 전인제
중앙군 원수 전기

한군 지휘관 미상(未詳)[2]

태자 기토
승상 겸 대사마대장군 기라
후장군 악조

진공 영거량
태자 위신
상장군 방연
공자 위앙†
장평성주
병력
제군 18만
한군 3만 2천
조선군 15만[3]
진군 2만 5천

총 병력 35만 7천
위 동부군 11만 1천
서하주둔군 4만 5천
기현+중도 수비군 1만 7천
열+동제 수비군 1만
둔류 수비군 9천
장자수비군 1만
장평 주둔군 4만
섭 주둔군 8천
추가 징병 7만 2천

총 병력 32만 2천
피해[4]
제한연합군 2만 7천 6백여 명
조선군 5천 5백여 명
진군 5백여 명

총 3만 3천 6백여명
위군 약 5만 5천 2백여 명
결과
위나라의 패배
영향
위나라의 패권상실, 제나라 중원패권을 취하고 패자에 오르다.

1. 개요
2. 배경
2.1. 제와 한의 사정
2.2. 조선의 사정
2.3. 위의 사정
3. 전쟁의 전개
3.1. 양릉 전투
3.2. 조선군 진격
3.3. 둔류성 공방전
3.4. 진의 서하진격과 위의 대응
3.5. 장자전투
3.6. 소량전투
3.7. 제군 별동대의 하내 동부 제압
3.8. 조가현 전투
3.9. 소황전투
4. 결말
4.1. 제조동맹
4.2. 위나라, 패권국에서 내려오다.
4.3. 제나라, 중원의 패권을 쥐다



1. 개요[편집]


AA작품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 상의 전쟁. 기원전 358년 일어난 전쟁으로 당시 중원의 패권을 두고 위와 제가 다투는 형국에서 제에 대항한 4국 동맹중 한 축이었던 한이 제와 모의하고 여기에 조선과 진이 끼어들어 벌어진 전쟁이다. 동맹들의 갑작스러운 이반으로 인해 위는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려 상당수의 영토를 빼앗기고 제가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


2. 배경[편집]



2.1. 제와 한의 사정[편집]


4국동맹의 한축이었던 한나라는 동맹 중 국력이 가장 약했기에 유형무형의 푸대접을 받아왔었다. 특히 새로 동부군 사령관이 된 상장군 방연이 대놓고 한나라를 깔보는 행동을 저지르게 되자 한후 한무는 위와의 동맹에 회의적인 감정을 품게 되어 결국 4국동맹에서 탈퇴하고 제와 손을 잡아서 위나라를 기습 공격할 것을 결의하게 된다.

제나라는 세후의 장례식[5]과 조선의 맥경 천도 때의 문제로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그러던중 위의 푸대접에 실망한 한이 접촉하게 되자, 한과 모의하여 위를 공격할것을 결의하였다. 남은 4국 동맹, 아니 3국 동맹 중 초는 월을 이용하여 화북에 시선을 둘 수 없게 공작하고 위(衛)는 너무 작아 견제할 필요조차 없었다.. 남은것은 북방의 조선이었고, 이미 제한연합군이 출발한 시점에서 조선에 순우곤을 사절로 보내 조선에게 제의 편을 들거나, 최소한 방관할 것을 요구한다.


2.2. 조선의 사정[편집]


사실 조선은 이미 한의 이반을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기원전 359년 한나라가 팽성과 상구에서 연달아 패전한것에 기이가 공손기를 사신으로 보내 위로의 말을 전하였다. 그런데 조선을 제외한 동맹국 어느 누구도 한에게 사신 한명 파견하지 않았는데 한후 한무는 괜찮다며 조선에게 제나라에게 복수할테니 도와달라고 답변한다. 동맹국들에게 무시당하는 형국에서 제나라에게 복수하겠다는 한후의 말에 공손기는 위화감을 느꼈지만, 한후의 측근이었던 신불해의 방해로 그 진의를 파악하는데는 실패했다. 그러난 본국으로 돌아온 공손기의 보고에 조선후 기이는 한의 이반을 예측하고 급히 대책회를 열었지만, 이미 그때 한과 제의 밀약은 크제 진전되어 조선이 대책을 세우기도 전에 제한연합군이 위나라령으로 쳐들어간 직후였고 동시에 제의 사신으로 순우곤이 와 선택을 강요하였다.

조선은 위나라와 단순한 동맹 사이가 아니라 혈맹이라 부를 정도로 매우 긴밀한 사이였다.[6] 그러나 조선과 동맹하여 제나라를 견제하고 있던 한나라가 먼저 조선과의 동맹 관계를 이탈하고 제나라에 붙어서 위나라 침공을 개시하자 조선 내부에서 격론이 오간 끝에[7] 역시 제나라와 적대하기보단 위나라를 공격하여 뜯어먹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기이는 15만 대군을 상당군 방면으로 진공시킨다.

2.3. 위의 사정[편집]


당시 위후 위앵은 공숙좌 사후 쓸만한 인재가 없었다. 특히 위앵은 내정은 잘 돌보아도 군사능력은 상당히 부족했고, 공숙좌의 사례처럼 일종의 정치적 파트너를 기용해서 정치를 하던 시점이였기에 더더욱 문제는 심각했다. 공숙좌가 추천한 공손앙[8]은 후견인 겸 추천인에 여태껏 위를 지탱해온 중신이었던 공숙좌보다도 자신의 재주가 훨씬 낫다며 오만한 태도를 보이자[9] 정나미가 떨어진다며 등용하지 않았고,[10] 그나마 군사 방면에서 유능한 방연을 전적으로 중용하였다. 그러나 방연이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위(衛)와 공모해 동맹 간 외교적 결례나 마찰 등을 일으키고 이것이 한이 위를 배신하고 제와 손잡는 결과를 초래하였다.[11] 또한 조선과의 관계도 조선이 한나라를 핑계로 전쟁 참여를 거부하면서 조금 냉각되었다.

게다가 얼마전 10만 대군을 일으켜서 일으킨 서하대전에서 사실상 패배해 위나라의 국력은 크게 줄어든 반면 제나라는 산동 일대를 통일한 잠재력을 내보이기 시작하면서 국력이 크게 신장되는 상황을 맞아 위나라는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봉착했다.

3. 전쟁의 전개[편집]



3.1. 양릉 전투[편집]


제한연합군 12만이 위나라령으로 진입하자 이에 위 동부군 사령관 상장군 방연 또한 동부군 8만 7천[12]을 이끌고 위군이 유리한 양릉에서 적을 맞아 전투를 벌였다. 양릉전투의 초반 전개는 방연의 맹공에 의하여 위가 가져갔으나 전기 역시 당하지만 않고 위쪽으로 향하던 승세를 끊고 정비하였다. 양군은 팽팽하게 맞섰고 전투는 장기전으로 흘러갔다. 이후에도 양군은 팽팽하게 싸웠으나 이내 지형에 익숙해진 제한연합군쪽에 추가 넘어가기 시작했고, 이를 감지한 방연은 양릉에서 군을 물려 대량에서 군을 보충하여 다시 싸우기로 마음먹는다.

전기 또한 방연의 위군이 만만치 않음을 깨닫고 본국에 지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제후 전오는 지원군을 보내는 대신, 조선이 제나라 편에 서서 상당군을 공격하기로 한 점, 덕분에 조선 방면에 대비하던 제북 방면군을 자신의 아들인 범군 전인제에게 돌려 하내로 진격하였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3.2. 조선군 진격[편집]


한편 양릉에서 전투가 벌여져 이목이 집중되는 사이 조선군은 진격을 시작했다. 조선은 군을 1대와 2대로 나누어 1대는 후장군 악조가 지휘하여 기현과 중도 방면으로 진격, 2대는 태자 기토가 지휘하여 둔류로 진격하였다. 먼저 1대는 갑작스러운 조선의 이반에 당황한 기현과 중도를 점령한 이후 열현마저 점령에 성공한다.

이때 위나라는 조선군의 진공 소식을 듣고 급히 서하 주둔군 절반을 호출하여 태자 위신의 지휘 하에 방어에 나서게 하였다. 둔류에 들어온 위신은 조선군 1대의 정보만을 듣고 자신이 데려온 지원군만으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 그 이상의 지원군은 요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군 2대가 둔류 외곽에 도착하고 뒤이어 1대가 도착하여 합류, 총 12만의 대군을 맞게 되었다. 뒤늦게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알게된 위신은 둔류를 버리고 장자에서 새로이 방어선을 펼치려 하였으나 한발 앞서 조선군 기병대가 성을 포위해 공성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3.3. 둔류성 공방전[편집]


조선군은 태자 기토의 지휘 아래 둔류성에 맹공을 가하였다. 숫자에서도 질에서도 밀리는 위군이 피폐해져가는 사이 위신은 7천의 정예병을 이끌고 틈을 보아 성을 탈출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그러한 위신의 생각은 이미 조선군이 예상하고 있었고 위신의 탈출경로에 기토가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맞이하였다. 7천의 위군은 어떻게든 위신을 탈출시키기 위해 분전하였으나 끝내 위신이 사로잡히고, 사로잡힌 위신의 중재하에 둔류성은 항복하였다.

이때 조선군이 장평까지 진출할 것을 알게 된 위신은 동맹을 배신한 조선에 저주섞인 악담[13]을 보냈다. 한편 장평에서는 둔류가 공격받고 있다는 소식에 성주 스스로 4만의 군사를 모아 북상을 개시하였다.


3.4. 진의 서하진격과 위의 대응[편집]


원래 진은 이번 전쟁과 관련이 없었으나 조선을 막기 위하여 서하주둔군 절반이 빠져나간것을 감지하고 급히 군을 소집하여 서하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물론 급히 소집한 탓에 병력 자체는 2만 5천 뿐이었지만, 영거량이 내정에 집중하면서도 남은 여력을 군의 정예화에 아낌없이 투입하였기에 매우 숙련된 정예군이었다. 한편 위앵은 하동에서 각 전선에 보낼 지원군을 징병하다가 진군이 소량으로 진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징병중인 5만을 서하 방면으로 보냈다.


3.5. 장자전투[편집]


새로이 서하전선이 열리려는 시기 둔류를 지원하기 위해 북상하던 장평성주의 4만 위군은 이를 감지하고 대기하던 조선군을 장자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원래는 둔류에 일부 병력을 남기고 남하를 해야 했으나 장평의 병력이 스스로 북상하였기에 조선군은 가용병력 12만을 전부 투입하였다. 위군은 여기서 자신들이 패배하면 뒤가 없음을 깨닫고 죽기로 싸워 조선군에 피해를 강요하였으나, 이내 기토의 지휘아래 조선군이 반격을 가하여 와해직전까지 가게 된다. 장평성주는 자신의 군이 무너질것을 알았지만 침략자 조선에게 물러날수 없다면 옥쇄를 각오하였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위신이 나선다.
위신: 그런데 말이야, 더 싸울 거야? 지금 그 상태로?
장평성주: 물론입니다! 대의는 이쪽에 있고, 누가 봐도 나쁜 건 저 쪽이겠지요! 정의는 절대로 악에 지지 않습니다! 곧 조선군을 몰아내고, 공자도 구출해 드릴게요!
위신: ......네 주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 같은데.

(중략[14])

장평성주: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요? 저희는 아무 잘못도 한 게 없는데? 어째서 침략자들이 웃고, 선량한 사람들이 우는 거지요?
위신: 미안해, 내 잘못이고, 공가의 잘못이야. 우선순위를 망각한 채로 겉치레에 치중한 결과, 백성들을 보호하지 못했어. .....그러니까, 염치없지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지 않겠어? 이번에는, 이번에는 정말......

결국 장평성주는 눈물을 흘리며 항복하였고 전투는 막을 내렸다.

전투후 지쳐서 퍼진 조선군 1대[15] 병력을 장자에 두고 남은 8만2천을 이끌고 장평으로 향하였다. 장평에는 성주가 모든 군사를 이끌고 나왔기에 남은 군사가 없었고 그대로 조선군에게 점령되었다. 목표를 달성한 기토는 기라에게 포로로 잡힌 위신과 위군을 대동하여 안읍에 보내 휴전협상을 진행시켰다. 위앵은 조선의 휴전요청을 받아들이면서 사자로 온 기라에게 자신이 젊은 시절 봐오던 조선은 전부 가식이었냐며 비아냥을 날린다. 그렇게 조위전선은 종결되었다.


3.6. 소량전투[편집]


진공 영거량이 직접 정예 2만5천을 이끌고 소량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서하군 사령관 공자 위앙이 맞섰으나 서하군 절반을 동부로 지원보낸탓에 숫적으로도 밀리고[16] 질적으로도 진군쪽이 앞섰으며 무엇보다도 진군의 지휘관은 비록 기습이었다지만 1차 서하대전에서 10만의 위군을 패퇴시킨 영거량이었다. 위군이 그나마 유리한 점은 방자의 입장과 요새를 끼고 있는정도였다.

전투가 시작되자 진군은 인정사정없이 위군을 공격하였다. 소량이라는 요새를 끼고 싸웠음에도 위군은 처절하게 진군에게 밀려나갔다. 병력의 약 4할 7푼이 전사하고도 위앙은 여기서 소량이 무너지면 수도 안읍이 위험한 상황이었기에 목숨을 걸고 사수하려 하였으나 끝끝내 위군은 무너지게 되었다.

결국 공자 위앙은 전사하고 소량은 진군이 점령하게 되었다. 소량의 점령 이후, 소량에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 원리와 두평은 스스로 문을 열고 진나라에 항복했다. 이로서 진은 장성지대의 북부와 최서단을 점유하는 데 성공했고, 자연스럽게 오기가 제안하고 공숙좌가 완성한, 작중 위나라 최고 인재 2인이 당대 축성분야의 첨단기술을 집약해 쌓았던 서하군의 장성은 무력화되었다. 한편 지원군으로 소량으로 향하던 5만의 위군은 소량이 점령되었다는 소식에 그자리에서 해산되었다.


3.7. 제군 별동대의 하내 동부 제압[편집]


범군 전인제의 지휘 하에 제군 9만 2천은 하내 방면 진압을 위하여 진격하였다. 진격 도중 거쳐가야 하는, 위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던 작은 위(衛)는 제군을 보고 그대로 항복, 위의 동맹에서 이탈하였다. 조선군의 진격에 하내 방면은 사실상 비어있는 상황이었고 전인제는 순조롭게 하내 동부를 제압하였다. 그리고 위와의 휴전을 위하여 사절을 보냈으나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위후 위앵이 소량 점령 소식에 뒤이어 하내 동부의 제압 소식에 그대로 실신한 것이다. 쓰러진 위앵을 대신하여 태자인 위신이 협상을 진행하였지만, 위신은 동부군이 건재하고 조위휴전이 성립되어 포로를 되돌려 받았기에 다시 싸울 수 있다며 전인제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3.8. 조가현 전투[편집]


휴전 협상을 거절한 위신은 조선에게서 돌려받은 포로와 남은 구사를 규합 총 3만 2천의 군단을 조성하여 점령당한 하내 동부를 되찾기 위해 서쪽으로 진군하였다. 한편 전인제는 협상 실패 후 동부군 괴멸을 위하여 대량으로 향하려 하였으나 중간에 길을 잘못 드는 불상사가 발생하여 도착이 지체된 사이 위신이 이끄는 위군의 접근 정보를 듣고 조가현으로 돌아와 이를 요격하게 되었다. 전력비는 1 대 3으로 위군이 불리하였고 숙련도 역시 양군 40대로 낮았다. 이론대로라면 위군 측은 공현 또는 급현에서 방어전을 치루는것이 정상이었지만 위신은 여차하면 조가나 중모를 다시 탈환하려 간을 보고있는 상황이었기에 회전이 성립되었다.

결과는 제군의 압승이었다. 병력 자체의 차이를 뒤집을 수 없었거니와 유능한 지휘관 전인제의 지휘에 위군은 대패를 당하고 결국 3만 위군은 와해되었다. 전인제는 다시 위신에게 사절을 보내 휴전협상을 요청하였고, 이번에는 위신도 받아들일수밖에 없었다.

제는 점령한 조가현을 위에 돌려주는 대가로 한에게 상채를 넘겼다. 이외에 제양과 수환을 제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휴전이 체결되었으며 제위전선도 종결되었다. 다만 휴전협정 체결 소식이 늦게 알려져 대량 인근의 소황에서 제한연합군과 위 동부군 사이의 2차전이 발생하였다.


3.9. 소황전투[편집]


대량에서 동부군 회복이 완료되어 다시 싸우려던 방연은 뒤늦게 위가 3면으로 포위되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성급히 나가는것보다 대량에서 대기하며 상황을 지켜보려 하였다.

제한연합군 또한 처음에는 대량으로 진격하여 이를 점령하려 하였으나 위나라 최대의 요새도시 대량의 위용에 전기는 잘못하면 연합군이 요새를 공격하다 괴멸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대량 외곽인 소황에 주둔하여 상황을 지켜보게 하였다.

양군 모두 움직이지 않는 상황이 되자 방연은 기다리다 못해 결국 소황으로 진격하여 제한연합군을 공격하게 되었다. 방연이 이끄는 위군의 맹공에 제한연합군이 밀리게 되었고 이내 전투의 승세가 위나라로 넘어온 순간 수도에서 위앵의 사자가 와서 전투의 종결을 주문하였다. 방연은 다이기던 상황에서 무슨 종전이냐며 화를 내자 사자는 하동쪽에서 위군이 대패하여 상당군이 조선에게 넘어가고 소량이 점령되었으며 공자 위앙이 전사해 하동이 완전히 비어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한다. 방연 또한 사자의 설명에 더이상 싸울수 없어서 전투는 종결되었다.


4. 결말[편집]



4.1. 제조동맹[편집]


전쟁 종결후 제나라와 조선은 정식으로 동맹을 맻기로 하였다. 이 동맹은 사전에 제나라가 조선에게 제나라의 편에 참여시 주겠다는 보상으로, 혈맹인 위나라를 배신함으로써 얻은 불신의 시선을 제는 참여하지 않고 막아주겠다는 의미였다. 양국은 서로 인질을 교환하여 기원전 358년 12월 12일 조선과 제의 동맹이 정식으로 체결되었다.

사실 제나라 입장에서 위나라와 다시 손잡고 조선을 공격하는 것도 가능은 했지만 여러 요인, 특히 패자가 돼서 각국의 분란을 막고 평화를 이룩하겠다는 사상의 영향으로 인해 조선은 공격 받지 않았다.

덕분에 제나라와 동급의 국력을 지니게된 조선은 제나라에 외교적으로 종속 되었고, 제나라는 조선이라는 강국을 밑에 둠으로써 그 명성이 크게 높아졌다.


4.2. 위나라, 패권국에서 내려오다.[편집]


위국은 전후 조선을 최우선의 경계대상으로 삼았다.[17] 특히 위앵은 누구보다 위나라 제일의 친조선파였기에 그 반동은 매우 심했다. 이에 위앵은 제후 전오와 협약을 맺어 제의 패권을 인정할 테니 차후 조선과 위가 전쟁을 벌일시 모른 척 해달라고 요청한다. 전오는 국지전까지는 그렇게 하겠지만 전쟁이 확대된다면 제나라는 조선의 편에 서겠다는 조건하에 이를 수락한다. 또 진나라에게 소량이 넘어가 수도 안읍의 안위가 위험했기에 곡옥을 제2의 수도로 삼고 안읍-곡옥 이중수도 체제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과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고 이 대가로 평양을 한에게 넘겼다.[18] 위의 외교전략은 제와 한과 연대하여 북의 조선과 서의 진나라라는 두 호랑지국(虎狼之國)을 경계하는것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중원대전 이후 심화된 인재난과 실추된 위신은 돌아오지 않았고, 위나라는 이후 호시탐탐 동진을 시도하는 진나라의 위험에 시달리는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4.3. 제나라, 중원의 패권을 쥐다[편집]


전후 제나라는 명실상부히 새로운 중원의 패권국이 되었다. 진은 지금 당장은 서하군 이외에 더 동쪽은 관심이 없었고 위[19], 한[20], 조선[21]은 전부 나름의 이유 때문에 제를 적대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반수에서 한 수 접어주는 상태였다.[22] 따라서 당시 화북에서 제를 견제할 만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차후 제후 전오가 죽고 그 아들인 전인제가 제후가 되었을때, 전인제는 본격적으로 패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제나라는 소위 패자 체제에서 정점의 자리에 서서 열국들을 통솔하는 황금기를 맞이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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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와 모의하여 참전한 것이 아니라 서하 주둔군의 절반이 빠져나간 것에 대응해 서하 점령을 위하여 참전[2] 작중에서 딱히 누구라고 묘사되지 않음[3] 악조의 제 1대 6만 3천, 태자 기토의 제 2대 8만 7천[4] 도주, 와해된 병력등은 제외한 순수 전투 손실만 계산.[5] 중원천지에서 월나라만 조문 사신을 보내지 않았는데, 이 당시 월나라는 실질적으로 제나라 영향권이었기에 월나라와 더불어 제나라의 대외 평가도 나빠졌다. 물론 원인은 월의 귀족들이었기에 전오는 이들의 처분을 월왕 예에게 맡긴다.[6] 당시 조선후 기이는 위나라의 여러 고위층과 두루 연이 있었으며, 위후 위앵도 태자교환으로 인해 조선에서 보고들은 것이 많았다. 거기에 더해 위격-위앵 교체기의 반란 진압에 도움을 준 전적도 있었다.[7] 참치들 사이에서도 처음에는 위와의 동맹을 유지하고 제-한 동맹과 전쟁하자는 의견과 아예 제나라 편을 들어서 조선의 이익을 얻자는 의견이 오갔고 결론적으로 제나라를 선택하였다.[8] 원 역사의 상앙이다.[9] 사실 작중 공숙좌와 공손앙은 유사 부모자식 관계에 가까웠지만, 공손앙은 작은 위(衛)의 공족 출신이라 위(衛)를 함부로 대하던 위나라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위나라에서 벼슬하기 싫어 일부러 그런 태도를 보였다.[10] 공숙좌는 사적인 애정을 억누르고 공적인 책임감을 우선해, 원 역사에서처럼 ' 등용하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에 가지 못하게 죽이기라도 해야 한다 '고 위후에게 조언하였다. 그러나 위후 위앵은 공손앙이 공숙좌를 낮춰보자 발끈했으면서도, 정작 본인 역시 '공숙좌도 이제 늙어서 사람보는 눈이 없다'며 그 조언을 무시하였다. 결국 공손앙은 별 탈 없이 조선으로 향하게 된다.[11] 조선 또한 방연과 외교적 마찰을 빚어 껄끄럽게 여기던 도중이었다.[12] 숙련도 100의 최정예군[13] 동맹을 배신하고 침입한 놈들은 삼대가 까마귀밥이 되어 버리라지![14] ... 이긴 하지만 이 때 장평성주는 그제서야 병사들 개개인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고, 위신은 선택을 종용하였다.[15] 둔류로 직행한 2대와 달리 기현을 시작으로 중도, 열, 동제 등을 거쳐서 진격했기 때문에 많이 지친상황이다.[16] 서하주둔군 총 4만5천에서 절반가량인 2만 1천을 지원하였기에 남은 군은 2만 4천이었다.[17] 두번째 경계대상은 서하를 빼앗아간 진나라.[18] 원래 한후 한무는 위앵이 수락하지 않으리라는 예상 하에 일부러 평양을 요구했지만 위앵은 대조선/대진 문제가 시급했기 때문에 수락하였다. 이 때문에 한의 원래 계획인 '제와 연대하여 위에 대항하여 세력팽창을 노리자'는 전략은 무산되었다.[19] 조선과 진을 경계하기 위하여 제와 연대했다.[20] 새로운 제나라 패권을 연 개국공신과도 같은 입장으로 누구보다 제와의 연대가 강하다.[21] 혈맹 배신으로 인한 불신의 시선 때문에라도 제와 같이 갈 수밖에 없었다.[22] 당시 송은 사실상 제의 속국이나 다름없었으며, 위(衛)는 너무나도 작아 발언할 힘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