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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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베트남 전쟁
Sino-Vietnamese War


파일:attachment/new_Sino-Vietnamese_War1.jpg

베트남군과 교전 중인 중국군
날짜
1979년 2월 17일 ~ 3월 16일
장소
중국-베트남의 국경
결과
파일:베트남 국기.svg 베트남의 승리,베트남 경제 악화
교전국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파일:베트남 국기.svg 베트남
지원국
파일:민주 캄푸치아 국기.svg 크메르 루주
파일:라오스 국기.svg 라오스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지휘관
파일:중국 국기.svg 덩샤오핑
파일:중국 국기.svg 예젠잉
파일:중국 국기.svg 쉬샹첸
파일:중국 국기.svg 화궈펑
파일:중국 국기.svg 쉬스유
파일:중국 국기.svg 양더즈
파일:베트남 국기.svg 레주언
파일:베트남 국기.svg 보응우옌잡
파일:베트남 국기.svg 똔득탕
파일:베트남 국기.svg 반띠엔중
파일:베트남 국기.svg 담 쿠앙 트렁
병력
중국의 주장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군 20만 명
베트남의 주장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군 60만 명
파일:베트남 인민군기.svg 베트남군 7만 명 ~ 10만 명
파일:베트남 국기.svg 베트남 비정규군 15만 명
피해규모
중국의 주장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군
전사 6,954명
부상 14,800명 ~ 21,000명
포로 238명
베트남의 주장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군
전사 62,000명
중국의 주장
파일:베트남 인민군기.svg 베트남군
전사 42,000명 ~ 57,000명
포로 1,636명
파일:베트남 국기.svg 베트남 비정규군
전사 70,000명

1. 개요
2. 배경
3. 전쟁의 발발
3.1. 양측의 전력
3.1.1. 베트남군
3.1.2. 중국군
3.2. 과정
3.3. 소련의 움직임
4. 종결
5. 1991년까지 계속된 고지전
6. 이후 파장 및 정치적 영향
7. 이야깃거리
8. 대중문화
8.1. 중월전쟁 자체를 다룬 작품
8.2. 등장인물들의 경력으로만 언급되는 작품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 영어: Sino-Vietnamese War
  • 한자: (중월전쟁)
  • 중국어: 對越自衛反擊, 中越戰爭()/对越自卫反击, 中越战争()
  • 베트남어: Chiến tranh biên giới Việt–Trung 1979, Chiến tranh biên giới Việt–Trung năm 1979, Chiến tranh biên giới 1979(월중 국경전쟁)

작은 친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엉덩이를 걷어차 주어야겠다!

덩샤오핑[1]


베트남 전쟁에서 우방 관계였던 중국베트남이 전후 처리 문제를 놓고 대립한 끝에 벌인 전쟁.

1979년 2월 17일부터 3월 16일까지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벌어진 국지전이었으나 국지전치고는 스케일이 상당히 컸고 전쟁 이후에도 60~70년대 군사분계선처럼 간헐적 군사충돌은 베트남군이 캄보디아에서 철수하는 1989년까지 계속되었다. 중국-소련 국경분쟁과 함께 공산권 내 노선 대립과 분열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중국미국과 수교하고 소련과 그 동맹국[2]들이 일본과 관계를 강화한 데다 대만과 비공식 관계를 갖고 있었던 게 당시의 상황이다. 베트남 역시 중국을 견제하고자 대만과 비공식 관계를 가졌다.[3]

현대 베트남에서는 베트남 독립 전쟁, 베트남 전쟁과 함께 두고두고 자랑하는 전쟁이기도 하다. 제국주의 열강인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을 쟁취하고 초강대국 미국의 군사 개입에 맞서 통일을 달성한 데 이어서, 비록 문화대혁명으로 혼란을 겪은 상태이긴 했으나 아시아의 대표적인 강대국인 중국의 침공을 격퇴해냈기 때문이다. 중국의 도움으로 통일을 이루어낸 국가가 이후 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점에서 베트남판 나당전쟁이라고도 볼 수 있다.

2. 배경[편집]



2.1. 중국-베트남 관계 악화[편집]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중국베트남조공국으로 삼고 있었으며 무력에 의한 병합도 여러 차례 시도했다. 실제로도 여러 차례 점령하여서 중국은 베트남을 '남월'이라고 부르며 오랫동안 상전 노릇을 하기도 했다. 삼국지에 나오는 맹획의 종족 연합을 베트남이나 버마로 생각하는 떡밥이 오랫동안 돌았지만 사실 베트남 북부 지역은 손권의 영향 아래 있었다.[4] 애초에 베트남의 시작인 남월진나라 멸망 후 이 곳에 내려간 장수 임효와 그의 부관 조타[5]가 세웠고 이 둘은 한나라에 강력히 저항했으므로 당연한 거다.

그러한 역사적 배경과 베트남 내 화교들의 경제권 장악이 겹쳐서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는 대단히 복잡했다. 베트남 전쟁 때 대만중국의 개입에 대항해서 남베트남에 대해 병력 및 군수지원을 천명했으나 남베트남 정부에서 강력히 막았다. 물론 대만의 참전이 중국의 개입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는 미국의 우려도 있었다. 이는 대한민국일본과 같은 자본주의 진영이었어도 일본에 대해 시선이 좋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실제로 6.25 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이 6.25 전쟁에 UN의 이름으로 개입할 가능성을 아주 싫어했다. 심지어 일본인들이 무장하고 한국에 들어올 경우 군대를 이쪽으로 돌려 막겠다고까지 했을 정도다. 물론 나중에 남베트남도 지원을 받아들여서 대만 육해군 소수 병력이 군수지원대로 참전했다.

일단 건국 초기 북베트남은 중공과 우호적인 관계기는 했다. 중국 대륙을 1949년에 중공이 석권한 덕분에 베트남 공산당은 베트남 국민당을 사이공으로 쫓아내는데 큰 이득을 봤다. 북베트남을 공산당이 장악하는 데 가장 큰 방해물이 바로 중국 국민당의 동맹이었던 베트남 국민당이었기 때문에 중공의 승리가 없었다면 베트남 공산당 역시 큰 어려움에 처했을 것이다.[6] 때문에 초기 북베트남과 중공은 친밀했고 쯔엉찐처럼 중공 쪽에서 영향을 받은 인물들도 많았다. 하지만 북베트남의 경제 역시 중공의 그것이 그랬듯이 개판이 나자 사이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의 지도부도 중화인민공화국이 자기네들을 보호해 준다는 명분으로 개입할까봐 노심초사했으며[7] 중국이 공식적인 파병을 해서 지원해 주겠다고 수차례 제안했는데도 절대로 들어주지 않았다.[8] 물론 적지 않은 중국군 병력이 북베트남에 오긴 했지만 대부분 북베트남군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공병이나 대공포 및 대공미사일 부대 혹은 물자 지원을 위한 보급 부대였다.[9] 미군 및 남베트남군과 직접 전투하는 것은 전적으로 북베트남군이 혼자 도맡았다. 심지어 중국이 북베트남을 지원하는 동안에도 북베트남 정부는 적극적으로 중국과 베트남의 투쟁사를 홍보하고 교육했다. 구정 공세도 중국군의 만류에도 씹고 강행했을 정도. 처음엔 호찌민이 중공 고문단 말 듣고 중국식 토지개혁 정책을 시행했다가 정권 박살날 뻔했고 겨우 진압했지만 이후에는 자아비판을 했으며 1960년대 말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일어날 때 호찌민은 중국에서 홍위병들이 자행하는 파괴와 학살 만행들을 중국에 나가있던 특사들로부터 보고받은 뒤 이런 행위는 인민을 위한 사회주의가 아니라며 문화대혁명을 비판했다. 그래서 중국 의료진이 베트남 주민들에게 의료 활동을 행하는 것까지 제한할 정도로 북베트남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렇게 남북베트남인들은 중국인에 대한 태도에서만큼은 일치했다. 오히려 대외적으로 남베트남측은 월맹-중공 동맹을, 북베트남측은 공산권 특유의 '봉건 반동' 프레임으로 남베트남의 친중적인 면을[10] 부각하며 서로 중국의 앞잡이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마오쩌둥이 처음에는 무력통일에 찬성했으나 닉슨 방중을 계기로 '무력보다는 평화적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말바꾸기를 하자 북베트남이 중국에게 불신감을 가졌을 정도로 베트남의 중국에 대한 반감은 심했다.

중공측에서도 베트남전 초기와 분수기야 어쨌든 같은 사회주의 형제국가가 초강대국 미국의 엉덩이를 걷어차주니 이쁜지라 지원을 팍팍 해 주긴 했는데 60년대 말쯤 되면 일단 중국의 대외정책도 중소결렬에 따라 미국과의 데탕트를 추구하기 시작했고 안그래도 도움받는 놈 주제에 월맹측이 이리 태도나 싸가지나 좀 영 고깝게 나오니 배은망덕한 놈들이라며 1968년을 기점으로 대월맹 지원을 팍 줄여 버렸다. 이후 월맹 정권은 중국에서 받아먹는 군사적 지원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최대한 소련의 지원만으로 전쟁을 수행하려고 노력했으며 1972년 대규모 춘계공세를 위해 다시 한번 대규모로 손벌린 이후 공세가 끝나자마자 불청객 내쫓듯 주월 중공군을 추방, 아니 본국 송환시켰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설상가상으로 사실 중국은 베트남의 통일을 처음부터 바라지 않았다. 이미 1954년 제네바 협정 당시 중국은 베트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라오스와 크메르의 혁명군을 지지하는 북베트남을 압박하여 이들의 주장을 취소하게 하고 라오스 왕국과 크메르 왕국을 모두 승인하였다. 그리고 베트남이 너무 나댔다가는 미국이 인도차이나에 개입해서 이것이 중국까지 말려드는 인도차이나 대전으로 확전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저우언라이는 프랑스 측에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군주정이 대중적 지지를 받는다면 그것이 유지되지 않을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으며 중국은 두 개의 베트남이 공존하길 원한다고 밝혔다. 저우언라이는 저녁 식사에 북베트남 대표 팜반동과 바오다이 정부의 대표들을 동시에 초대하였고 베트남국 대표들에게 베트남국이 베이징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길 희망한다고 발언하여 팜반동이 격분하기도 하였다. 아직까지 문서적 증거가 발굴되진 않았지만[11] 1975년 중국은 프랑스와 공동으로 국제평화유지군 명목으로 공수부대를 파견하여 남베트남을 존속시켜 주겠다는 비밀 제안을 타진하여 베트콩과의 연립정부를 구성하라고 조언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북베트남 측은 중국이 가장 사악한 음모를 꾸몄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였고 남베트남 점령 후 잔류하던 화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했다. 유명한 보트피플의 상당수는 중국계 베트남인들이다. 국경 문제에 있어서도 소련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깜라인만에 있는 해군 기지를 소련 극동 해군에게 임대해 주는 등 반중, 친소 노선으로 급격하게 돌아섰다.

이 시점에서 베트남과 중국 간의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안그래도 월맹이 한창 중공에게 아시아 공산권 큰형님이라며 손벌리던 시절 중국은 대약진 운동으로 자국 인민들이 굶어죽어 나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초반부터 거액을 들여 베트남에 지원해 줬고 문화대혁명으로 나라가 엉망이던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초반에도 베트남에 여러 군수물자를 대 줬다. 중국 입장에서는 굶어가며 베트남을 도와줬는데 막상 도움받는 놈들이 자세나 태도는 옛날에 비해 고분고분해진 건 하나도 없고 여전히 띠껍게 나오다가 결국 갑자기 소련 편을 드니 그 괘씸함이 어마어마했다.[12] 외교적으로도 모스크바 10번 방문했다면 베이징은 두세번 방문했을 뿐이다. 다급해진 중국은 거액을 적극 지원해 주겠다고 하면서 베이징에 초대했으나 이에 베트남은 몇십배의 거액 지원을 요구했을 뿐이다.

중국은 기껏 지원해 줬더니[13] 통일 후 자신들을 적대시하는 베트남을 배은망덕하게 여겼고 자신의 앞마당으로 여기고 있던 동남아시아에서 반중 세력이 갑툭튀한 데다 소련까지 끌어들이려고 하자 격노했다. 1978년 1월에는 이전부터 빈발하던 중국-베트남 국경분쟁을 이유로 들어 양국 간 외교관계까지 단절되었다.

2.2. 베트남-캄보디아 전쟁[편집]


같은 시기 캄보디아는 1973년 파리 평화회담 조인 후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미국의 관심이 급격하게 식으면서 사이공 함락 2주 전 론 놀이 이끌던 캄보디아의 친미 정권도 폴 포트가 이끌던 크메르 루주에 의해 무너졌다. 폴 포트는 당시 극단적인 마오이즘에 경도되어 역사상 유례없는 폭력적 공산화 정책에 따른 대학살을 마구잡이로 추진해 캄보디아 전역을 말 그대로 사지(死地), 즉 킬링필드로 만들어 버렸다.

이때 크메르 정권은 자민족중심주의를 내세워서 베트남계 주민들을 모조리 제거해 버렸는데 폴 포트가 캄보디아 공산화를 도와줬던 베트남이 먹었던 땅을 되찾겠다고 선포했다. 이건 베트남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고 이미 베트남 전쟁으로 장기간 전쟁을 통해 군사적으로 동남아에서 손꼽히는 패자(覇者)이자 강호로서 프랑스미국을 물리쳐 자신감도 높아지고 미군이 남기고 간 무기 등으로 무장까지 엄청나게 강화되었기 때문에 베트남 정부 입장에서는 선제공격하는 크메르 루주를 손봐주는 걸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1978년 12월 마침내 베트남은 캄보디아에 대한 전면 침공을 감행했다. 원래 과거부터 캄보디아보다 훨씬 많은 인구와 강력한 국력을 자랑했던 베트남은 베트남 전쟁 기간 쌓인 장교들의 능수능란한 전술과 함께 막강해진 군사력을 바탕으로 파죽지세로 진격을 거듭해 개전 10여일만에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을 점령하고 사실상의 전쟁을 마무리했다. 크메르 루주 정권은 베트남 국경과 반대쪽에 있는 태국 국경 쪽 정글로 숨어들어갔다. 크메르 루주 정권을 멸망시킨 베트남은 캄보디아에 친베트남 괴뢰정권을 수립했다.

그런데 분명 침략이긴 침략인데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로 지옥도를 경험하던 캄보디아 민중들 사이에선 오히려 잘 됐다며 베트남군과 베트남군이 밀어 주던 극좌 민병대를 해방군이라며 환영하는 분위기도 있었다(...).[14]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베트남은 공식적으로는 "자국민에 대한 학살극을 벌이는 크메르 루주를 응징하고 그들의 압제에 시달리는 캄보디아 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베트남군이 출병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양두구육에 지나지 않으며 본질은 반월, 친중 성향을 띈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을 몰아내고 친소, 친월 정권을 수립해 이권을 챙기고자 했던 베트남의 명백한 침략 전쟁이었다. 실제로 베트남이 폴 포트 정권을 전복하고 세운 캄보디아의 헹 삼린 국가수반은 크메르 루주 출신이지만 쿠데타를 기획했다가 실패하고 베트남에 망명한 인물로서, 이때의 캄보디아 정부는 전형적인 괴뢰정권이었다. 애당초 크메르 루주 정권이 대책 없는 막장 정권이긴 했지만 베트남의 침공은 크메르 루주의 악정에서 캄보디아 인민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반월, 친중 성향인 크메르 루주를 제거하고 캄보디아를 지배하여 인도차이나 반도 공산연합을 수립하려는 베트남 공산당의 원대한 야욕을 실현시키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지원한 소련을 비롯한 몇몇 공산권 국가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나라는 베트남이 세운 캄보디아 괴뢰 정부를 승인하지 않았고 사실상 베트남이 강점한 캄보디아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실제로도 베트남이 주장하는 것처럼 캄보디아인들이 베트남군을 해방자로 환영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100여년 전 베트남의 가혹한 민족 말살 식민 지배를 경험했던 캄보디아인들은 베트남이 또 다시 자신들을 지배하러 온 것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최악일 수 없는 크메르 루주의 잔혹함보다는 차악인 베트남이 그나마 낫다는 정도의 반응이었다. 그래서 캄보디아에서는 당시 베트남군이 스스로는 해방군이라고는 하지만 10여년간 친베트남 정권을 지원하면서 여러가지 이권을 얻어먹었기 때문에 분명 크메르 루주의 학정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군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뒷맛이 영 찝찝하고 불편함이 느껴진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이전에 사이공 같은 메콩강 하류 지역이 원래 캄보디아 영토였는데 베트남에 빼앗긴 데다 크메르 제국이 세가 약해진 이후로 베트남에 많이 시달려봤기 때문에 악감정이 심할 수밖에 없다. 크메르 루주 정권이 몰락하고 베트남 괴뢰정권이 들어선 후 캄보디아에서는 과거에 서로 정적이었던 크메르 루주 정권과 보수 지도자들이 베트남의 괴뢰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서로 연합하기도 했다.


3. 전쟁의 발발[편집]


파일:attachment/jido.jpg

중국군의 공세. 국경 전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침공했으나 주공은 라오카이와 랑선 방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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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월 국경을 넘어 도하하는 중국군 62식 전차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덩샤오핑화궈펑베트남에 대한 징벌행위로써 무력침공을 비밀리에 모의해 대외적으로는 캄보디아 해방 등을 명분으로 삼아 1979년 2월 17일 중국군이 국경을 넘어오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베트남의 국방장관이자 미국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보응우옌잡 대장은 친중파이자 주화파였기 때문에 사실상 지휘에서 물러났고 총참모장인 반띠엔중 대장이 총지휘를 했다.[15]
파일:attachment/vietnam.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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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단총을 든 베트남군 여자 민병대
중국군 의무병의 치료를 받는 베트남 여군 포로
베트남군 주력이 모두 캄보디아 방면으로 나가 있었기 때문에 중월전쟁 당시의 사진에는 여자 민병들이 자주 등장한다. 베트남군의 주력은 당시 1,000km가 떨어진 캄보디아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 북부는 거의 공백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중국에서는 '단숨에 하노이까지 점령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선전했지만, 문제는 당시 베트남이 중국이 쉽게 털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명실공히 초강대국인 미국을 상대로도[16] 무려 8여년을 굳건히 버텨낼 정도의 저력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군이 쉽게 상대할 만한 적은 아니었다. 중월전쟁 당시 베트남군의 총병력은 현역만 세계 3위권이었고 1975년부터 캄보디아에서 철수하는 1980년대 말까지 베트남군 총병력은 100여만 명이 넘었다. 감축된 후에도 현역 45만, 예비군 500만으로 여전히 대병력이다. 게다가 저 민병들 중에는 비엣민, 베트콩 출신들이 많았다. 당연히 이들은 모두 게릴라전이나 시가전 등 실전경험이 중국군보다 더 풍부할 정도로 많았다. 미군이 남기고 간 무기도 상당했고 그 덕분에 무기의 양은 적어도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말까지 베트남군은 미제 전투기 F-5A-37 및 미제 헬리콥터 다수를 사용했을 지경이었다.

반면 당시 중공군은 열악한 물적 상황에서도 창의력과 오랜 실전에서 다져진 경보병 발로 하는 기동전으로 UN군을 깜짝 놀라게 한 하드웨어는 부실했어도 소프트웨어는 상당히 숙련되었던 30년 전 6.25 전쟁 시절의 중공군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어도 당장 구식 전술과 구식 장비들로 인해 승리를 할 수 있을까 말까인데 무엇보다 이 시기 중국은 여전히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군부 숙청과 군대를 포함한 사회 전반의 전문성 마비의 여파가 생생하했다. 애초에 강대국의 정규군과 최근에 총력전까지 치른 상태였던 (중국에 비하면)소국[17]의 2-3선급 민병대 간의 결과가 뻔한 싸움으로 보였던 전쟁이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이러한 내부의 조직적 차이가 명확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3.1. 양측의 전력[편집]



3.1.1. 베트남군[편집]


중국군을 상대하던 베트남군의 병력은 북부에 남겨졌던 6개 사단의 정규군 7만에서 10만, 여기에 기타 민병 15만명 가량을 동원하였다.

베트남은 대부분의 정예사단이 캄보디아와의 전쟁에 동원됐고 중국군이 침공한 중월국경과 베트남군 주력이 전개하던 캄보디아와의 거리는 직선거리로는 700km, 실제 이동거리는 1,000km에 가까웠다. 이렇게 베트남군의 단순 이동도 며칠 걸리는데 게다가 아직 태국 접경 지역에서는 크메르 루주 잔당과의 전투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어서 병력을 빼 오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예비사단과 민병들을 주로 동원했다.

북부에 주둔한 병력은 미국과의 베트남 전쟁 동안 후방 지역에 머물렀던 만큼 대부분의 병력이 민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AK-47 같은 총기는 주로 정규군에서나 사용하는 무기였고 민병대는 대부분 SKS 같은 2선급 무기나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 전쟁 중에 노획된 온갖 서방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베트콩, 비엣민[18] 출신들도 많이 참전했다고 한다.[19]

베트남 공군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미제 전투기들이 많이 섞여 있었는데 원래는 북베트남군을 상대하던 UH-1F-5A-1, A-37 등이 중국군을 상대하게 되었다. 베트남군은 예비로 남겨졌던 소수의 국경수비대와 대다수의 민병들을 규합하여 최종적으로 18만명 정도의 병력을 동원하였으며 40여 대 미만의 항공기와 소련제 T-34-85 전차, 미제 M113 장갑차, 중국산 63식 장갑차 등 소수의 기갑차량을 투입했다. 게다가 포병 전력인 자주포도 소련제와 함께 서방제인 M110M107이 투입되었다.


3.1.2. 중국군[편집]


중국군은 동쪽에서는 광저우군구(사령관 쉬스유)가 중심이 되어 서쪽에서는 쿤밍군구(사령관 양더즈)가 주력으로 참전했다. 최종적으로는 5개 군[20] 29개 사단을 동원했다.

중국군은 초기에 6만여 명의 병력으로 전쟁을 시작해 최종적으로는 약 20만명 정도의 병력을 동원하였고 100여 기의 항공기, 59식 전차, 62식 전차, 63식 전차 등을 포함한 400여 대의 전차63식 장갑차 등의 기갑전력을 투입하였다.

하지만 중국군은 수는 많았을지언정 문화대혁명의 여파에 직통으로 얻어맞은 여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펑더화이, 뤄루이칭, 양상쿤으로 대표되는 인민해방군의 현대화론자들이 주자파 반동으로 몰려 참혹하게 숙청당한 후 인민해방군의 현대화는 60년대 중반 이후 전혀 진전이 없었으며 1971년 9.13 사건 당시에는 공군의 야간전투 자체가 불가능하여 소련으로 도주하는 린뱌오 일가를 먼 산 보듯이 바라봐야만 했다. 거기에 문혁으로 고급장성들이 대대적으로 숙청당하고 1967년 7.20 사건 이후로 군부 자체가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장칭을 필두로 농민과 노동자를 무장시켜 반동 인민해방군을 대체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이 나오던 판이었다. 장교 몇 명이 당했을 뿐 군에는 피해가 없다는 주장이 있는데 총참모부 정치부주임, 총후근부 부장, 군구의 사령과 부사령과 정치위원 등의 고급장교들을 동네 학생 양아치들이 임의로 잡아가서 죽도록 패거나 아예 때려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군의 지휘계통이라는 것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1967년 장칭의 특명을 받은 베이징의 홍위병들이 사천성까지 쳐들어가서 펑더화이를 납치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저우언라이 총리는 성도군구를 이용하여 펑더화이를 구출하려고 했으나 성도군구의 군구사령과 정치부 주임이 모조리 홍위병에게 조리돌림당하고 있어서 끝내 펑더화이 구출에 실패할 정도였다. 겨우 1967년의 3월 흑풍을 비롯하여 군의 홍위병 진압을 두고 군의 전투력이 유지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애초에 약탈한 총기와 사제 병기로 무장한 미성년자 민간인들을 중화기로 무장한 정규군이 진압하지 못한다면 그건 당장 군복 벗고 집에 돌아가야할 일이지 그거 했다고 전투력이 보존되었다고 주장할 일이 아니다.

이렇게 원수들도 죽어나가던 실정인데 그 아래 부하들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숙청된 원수들인 허룽, 펑더화이, 천이 인맥으로 찍힌 군인들은 모조리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에게 구타당하고 수용소나 사설 감방에 갇혀 학대당했다. 덩샤오핑 집권 후 이들은 풀려나기 시작했으나 행정처리 미숙으로 석방이 늦어지거나 수용소에서 혹사와 학대 때문에 군에 복귀하기보다는 장기간 요양해야 할 처지의 사람들이 많았다.

또 이 시절에 군대의 베테랑 병사나 장교들도 사라졌는데 6.25 전쟁, 중국-인도 국경분쟁 때 참전했던 베테랑들이 홍위병의 구타를 당해 죽거나 감방에 가거나 산골에 끌려가 삽질을 하고 있었고[21] 신병들은 군사 훈련보다는 마오쩌둥 어록을 외우는 데 더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에 마오식 정신주의의 폐해 때문에 군사훈련보다는 사상훈련이 더 강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력이 향상될리 만무했다.

또 1972년 린뱌오가 꾸민 쿠데타의 여파인 571 공정 때문에 린뱌오와 그 아들 린리궈의 개인 왕국이었던 공군 수뇌부가 연루 유무에 관계없이 대거 체포되어 감옥에 갔다가 4인방 몰락 후에야 겨우 하나 둘씩 복귀했기 때문에 침공 작전에서 필수적인 공군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일단 기술적으로도 뒤떨어져있는데다가, 지휘관들도 수 년간 감옥 생활을 하고 왔기 때문에 역시 지휘에 감이 매우 떨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이 전혀 유리한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이 베트남 전쟁 기간 대규모 인력을 파견하여 군사원조를 해 주면서 중국의 군사고문단으로 베트남에 갔다 왔던 중국군 인력들이 북베트남 곳곳의 지형이나 엄폐물, 방공망 등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또 1960년대 말부터 고조된 소련과의 긴장 상황 때문에 중국은 소련군의 침공에 대비한 준비를 계속해 왔다. 이때 중일전쟁의 전훈을 살려서 중국 영내 깊숙한 지역이자 베트남 바로 위쪽의 쓰촨성에 대규모 군수공업단지를 조성하고 대규모 군수물자를 비축해 놓고는 있었다. 거기에 세계 조류에는 다소 뒤떨어져 있었지만 중국 자체 기술로 만든 여러 무기가 개발되어 나왔다. 문제는 이런 것은 방어전을 위한 것이었고 자국 영내에서 싸우기 위한 것이었지 베트남과의 충돌을 상정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중월전쟁이 시작되던 시점에도 예젠잉을 비롯한 중국 군부의 실세들은 문혁으로 정지된 중국군의 현대화 사업에 사활을 걸고 있었으며 군축, 장교의 정예화, 무기의 현대화를 위해 막대한 예산을 책정하였으나 이 모든 것이 베트남과의 전쟁을 위해 취소되자 덩샤오핑에게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즉 꼬붕인 줄 알았던 나라가 갑자기 적이 되니 한 대 때려서 개기지 못하게 만들긴 해야겠는데 미제 방검복을 입고 있는 꼬마를 상대로 팔에 깁스를 한 채 돌칼 밖에 꺼낼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게 문제였다.


3.2. 과정[편집]


베트남과 캄보디아는 양국의 공산화 직후인 1976년부터 지속적으로 국경에서 분쟁을 벌이고 있었고 상당한 규모로 확대되고 있었다. 중국-베트남의 틈새에서 캄보디아가 노골적으로 반베트남 정책을 취하자 베트남은 캄보디아의 "레짐 체인지"를 목표로 13개 사단 15~20만의 정예병력을 동원하여 1978년 12월 21일 본격적인 캄보디아 침공을 시작했다. 1월 7일 베트남군은 프놈펜을 함락시키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라는 괴뢰정권을 수립했는데, 베트남군 및 정부 수뇌부는 2월에 캄보디아 신(괴뢰)정부의 출범을 축하하기 위해 대거 캄보디아를 방문하고 있었다.

베트남군이 3주만에 캄보디아를 석권하는 동안 중국은 우방국 캄보디아에 아무 도움을 주지 못했다. 결국 2월 중국은 베트남 수뇌부가 캄보디아를 방문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을 철군시키기 위해 1979년 2월 17일에 중국군도 베트남 침공을 시작했다. 중국군은 윈난성광시성에서 출발하였으며 베트남 산악지대와 정글을 재빠르게 돌파해 국경 너머 약 30km 정도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특히 이 전쟁은 베트남에 대한 경고 성격이 짙은 만큼 전략적 목표를 달성한 뒤에는 바로 철군할 생각이었으므로 전투 의지가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의 지형은 산악지대 너머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고 만약 산악지대가 뚫린다면 수도 하노이까지는 일사천리인 상황이었다.

중국군은 정글지대를 돌파하기 위해 인해전술에 가까운 밀어붙이기식 돌파 전략을 구사했다. 베트남군은 이를 간파하고 산 능선을 따라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진지에는 베트콩 출신들을 배치하고 각종 부비트랩들을 설치했으며 정글을 이용한 게릴라전을 펼쳤다.

원래 중국 침공군의 총지휘는 인민해방군에서 가장 지장으로 알려진 쑤위(1955년 대장)가 맡기로 되어 있었으나 쑤위가 건강이 안좋았기 때문에 광저우 군구 사령관이던 쉬스유(1955년 상장)가 맡았다. 쉬스유는 1920년대부터 국공내전과 항일전쟁을 겪어 온 군인이었고 광저우-난징 군구 사령관으로 오래 재직해 왔다. 침공군의 참모장은 부수상 덩샤오핑이 직접 맡았는데 총참모장을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쉬스유나 덩샤오핑은 1940년대 말의 국공내전에서는 엄청난 활약을 해서 장제스군을 패퇴시키는데 한 몫 했지만, 당시에는 두 명 모두 70대에 접어들었고 모두 실전을 겪은 지 30년이 지난지라 군인으로서는 흘러간 인물이었다.[22] 이에 반해 베트남측의 지휘관인 반띠엔중은 1940년대부터 계속 일본-프랑스-미국-캄보디아와 전쟁을 치러 왔기 때문에 중월 양국은 지휘관부터 능력 차이가 확연했다.

중국군은 1950년대의 혼란과 빈곤 및 60~70년대의 문화대혁명으로 6.25 전쟁 이래 통신 장비나 전술이 지난 25년간 크게 발전하지 않은 상태였다. 반면 베트남군은 베트남 전쟁을 겪으면서 베트남의 지형에 맞추어 교리를 발전시켰으며 마오쩌둥의 국공내전 당시의 전술을 익혔기 때문에 중국군의 전술을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23] 베트남군은 미군에게서 노획한 M113 같은 장갑차나 미군의 군용 수송기, 헬리콥터를 이용해서 보병을 빠르게 수송, 재배치하였으며 거점을 뺏기기 전에 중국군의 위협으로부터 재빠르게 빠져나가 새로운 방어선에 투입하는 기동 전술을 사용했다. 전투 병력을 최대한 보전한 것이다.

베트남군은 소련제 대전차 미사일을 활용하여 개전초 24시간 동안에 중국의 63식 경전차를 13대나 격파했고 초기에 15대나 되는 중국군 항공기를 격추시켰다.

중국군은 진격이 지체되는 것에 초조함을 느끼고 예비부대 10만의 병력을 추가로 동원하여 총 20만의 병력을 규합해 대공세를 펼쳤다. 결국 베트남군의 방어선은 뚫리기 시작하였고 돈단몽카이가 중국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러나 중국군은 2,000여 명의 병력을 손실했고, 40여 대의 기갑장비가 파괴되었다. 그에 비해 베트남군은 840여 명의 병력을 잃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베트남군은 역공을 시작하여 2월 28일에는 돈단을 다시 탈환하였다. 중국군 수뇌부는 이에 위기감을 느끼고 3월 1일부터 6.25 전쟁에 투입되었던 정예부대인 325사단과 338사단을 주축으로 란손을 공략했다. 중국군의 공격으로 많은 베트남군의 방어진지가 격파당했고 베트남군은 중과부적으로 밀리긴 했지만 전략적인 철수로 중국군에게 최대한의 손실을 입혔다. 결국 중국군 6만명의 집중공격으로 란손은 함락당했고 중국군은 란손을 조직적으로 파괴한 뒤 바로 철수했다. 3월 2일에는 중국군이 국경 인근의 라오카이도 공격하여 파괴하였다. 중국은 전략적 목표가 달성되었지만 예상보다 병력 손실이 많아 더 이상의 전쟁 지속이 무리라는 판단에 이르렀다. 어차피 완벽하게 승리하여 베트남을 굴복시키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대국인 중국이 전쟁을 벌인 이유는 캄보디아를 무단점거한 베트남군의 철군이었다. 중국은 앞서 언급된 지역에 대한 순간적인 점거는 가능했지만, 베트남의 주력군이 캄보디아에 있었다는 점과 인민해방군의 상대였던 베트남군은 대다수가 민병(예비군)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캄보디아에서 베트남군의 철수는 중월전쟁을 통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실질적으로는 중국의 실패와 별 다를 바 없다.

파일:attachment/victory.jpg

고지를 점령하고 환호하는 중공군의 선전 사진.

3.3. 소련의 움직임[편집]


당초 이 전쟁은 베트남이 친소 정책을 취하면서부터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소련은 베트남을 지지하고 중국을 비난하는 한편 베트남에 대한 각종 무기 원조 계획을 발표했다.[24] 사실 중국과 베트남 간의 긴장상태가 높아지면서 소련의 군사고문단이 베트남에 파견되어 있었고 이들은 베트남군의 방위태세를 지원하고 있었다. 다만 지리적 문제 때문에 소련이 직접적으로 병력을 지원하는 것은 힘들었고 소련 해군공군이 개입하기에는 너무 전쟁이 일찍 끝났다.[25] 또 중국은 전쟁을 개시하기 전에 소련에게 제한적 전쟁임을 통보했고 소련측도 중국군이 몇주 작전 후 철수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베트남에 군사지원을 하지는 않았다.

당시 중국은 소련과 앙숙이었기 때문에 중국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중국제 무기를 미국에 판매하는 것으로 소련에 간접적으로 보복했다. 미국은 이걸 무자헤딘에게 뿌렸고 무자헤딘은 이들 중국제 무기를 활용하면서 소련군을 물리쳤다. 반면 소련도 가만히 있지는 않아서 베트남과의 관계를 대폭 강화하였다. 베트남 지도부는 사회주의권 전반에 불어닥친 불경기로 서방에 빌린 막대한 외채를 상환하느라 동유럽과 소련이 헤롱대는 걸 보고 소련보다는 미국에 붙는 것이 체제 발전을 위해 유리하다는 것을 남베트남을 멸망시키기 전부터 정확하게 인식하고 통일 직후부터 미국에 관계 개선의 의사를 타진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자신들의 위신을 심각하게 실추시킨 베트남에 대한 원한으로 이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고 베트남에 남아 있는 미군 유해 송환 등을 집중적으로 거론하며 경직된 반응을 보였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단기간에 이뤄지지 않을 것임을 확인한 베트남은 어쩔 수 없이 소련과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개선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코메콘에 가입하는 등 친소 노선을 타서 소련의 지원을 대거 유치했다. 다만 소련 및 동구권 경제도 1980년대 후반부터 막장으로 치달았기 때문에 베트남에 경제지원을 축소했다.

결국 소련 붕괴에 따라 베트남도 친소적인 외교방침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했고 1991년 중국과 평화조약을 맺고 복교하였...는데 동시에 베트남이 원래 바라던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도 이루면서 중국의 뒤통수를 또 제대로 쳤고 북미 제네바 회담, 미국의 베이징 올림픽 반대, 리덩후이의 방미와 미국의 대만으로의 무기 판매, 베오그라드 중국 대사관 폭격 사건, 하이난도 정찰기 격추 사건이 겹치면서 90~2000년대 초반 중국은 미국의 대중 적대 정책에 포위되어 있다는 심각한 불안에 휩싸였다.


4. 종결[편집]


파일:Chinese_solders_in_Vietnam_1979a.jpg

베트남군에게 포로로 잡힌 중국군.

침공이 시작된지 3주가 조금 안 된 3월 5일 중국측은 "중국은 전략적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에 철수한다"고 대외적으로 공표하고 일방적으로 병력을 철군시키기 시작했다. 중국군은 원래 목표였던 베트남의 캄보디아 공격을 중단시키기는 실패했고 그저 국경도시를 파괴하고 베트남에 지속 팽창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경고만 보낸 뒤 물러나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 원래부터 중국군의 목표는 베트남의 점령이 아니라 국경에서 다발적 분쟁을 이끌어 베트남 주력을 북부로 유인하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 직후 나라 사정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장기간 전쟁을 치를 만한 역량도 없었다.[26]

철군하는 중국군을 베트남군이 가만히 놔 두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군의 철군 도중에도 계속 전투가 벌어졌다. 중국군은 중국 경내로 철군하면서 베트남군이 이용할 수 있는 교량 및 도로를 모두 파괴했다. 결국 침공한 지 한 달이 지난 3월 16일이 되어서야 총성은 일단 멎었다.

양측 공식발표에서는 서로 만 단위 이상을 사살했다고 하지만 실제론 중국군 5,000여명이 사망하고 베트남군 4,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집계된다. 다만 공산국가의 특성상 중국측과 베트남측 모두 서로의 피해를 축소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중국군 사망자는 많게는 2만 6천명까지 추산, 베트남군은 민간인까지 합해서 3만명으로 추정치가 올라간다. 대체로 베트남군의 피해가 중국군보다 약간 많거나 거의 비슷한 걸로 나오는데 요새 지대로 돌격하는 입장이고 중국군이 형편없었다는 걸 생각해도 경무장한 민병 상대로 중무장한 정규군이 사실상 비슷한 피해를 본 것이다. 이후 중국은 현대화의 필요성을 실감하고 경제력이 향상되는 1990년대부터 본격적인 군 현대화에 착수하게 된다.

중월 양국은 일단 휴전하고 종전협상을 벌이게 되었다. 중국군이 잡은 베트남군의 포로는 1636명, 베트남군이 잡은 중국군 포로는 238명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여름에 교환되었다. 하지만 12월에 협상이 결렬되면서 양국은 이후 10년간 국경부근에서 고지전을 계속하게 된다.

양측은 당시 모두 승리를 주장했으나 현재 봐서는 전쟁 목표를 달성시킨 베트남군의 승리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전술적으로 봐서는 베트남군의 방어선을 뚫고 어느 정도 내륙까지 진입한 중국군의 승리지만 전략적, 즉 전쟁 목표의 달성이란 측면에서 보면 캄보디아 주둔군을 철수시키지 않고 엄청난 피해까지는 입지 않은 상태로 적인 중국군의 철수를 이끌어낸 베트남군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중국군이 최대로 진출했을 때조차 베트남의 전쟁 수행 역량에 큰 타격을 주지 못했으며 실제로 캄보디아에 있던 주둔군은 아예 빼지도 않았다.

게다가 베트남은 주력이 민병(예비군)으로 구성돼 있었고 주력군은 캄보디아에 있었다는 점과 중국군은 정규군이었다는 점에서 중국에 대한 국제사회에서의 이미지는 나빠졌다. 중국군 돌아가는 상황이야 국제사회에 잘 알려져 있었지만 민병을 밀어버리지 못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당시의 중국군이 이전의 다른 전쟁들에 비해 졸전을 펼친 이유는 1960년대 이래 정치 문제 때문에 전력 증강이 거의 멈추었고 문화대혁명 때문에 고급 지휘관 상당수가 숙청[27]되었으며 군사훈련도 전투보다는 정치 교육에 더 매진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6.25 전쟁이나 중인분쟁에서의 인상적인 작전능력은 보여주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전쟁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으므로 패전이라고 봐도 큰 무리는 없다.

다만 베트남은 자국이 전쟁터가 된 데다 중국측이 도시나 도로, 교량을 계획적으로 파괴하고 떠났기 때문에 물적 피해는 중국측에 비해 훨씬 더 컸고 아래 설명할 몇몇 요충지는 중국군이 철수하지 않고 계속 점령하면서 국경지역의 영토를 조금 잃었다. 즉 중국군은 중월국경에서 국경선이 불명확했거나 전략적으로 유리한 요충지 몇몇은 자국군을 주둔시켜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이런 곳은 227제곱킬로미터 정도 되었으며(서울 면적의 절반 정도) 아래 설명할 고지전의 전장이 되었다. 결국 1992년 평화조약에서 이곳을 반반씩 나누어 중국측이 114제곱킬로미터, 베트남측이 113제곱킬로미터를 차지하는 것으로 확정했다. 굳이 중국측이 얻은 게 있다면 이렇게 얻은 쥐똥만한 영토일 것이다.

베트남은 프랑스, 미국, 중국을 모조리 몰아낸 국가로서 한동안 동남아 지역의 패자로 군림했는데 민족주의적인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캄보디아, 라오스 뿐만 아니라 태국, 버마까지 아우르는 동남아 공산국의 맹주를 꿈꾸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실 세계 열강에게 정복당하기만 한 것처럼 알려지기 쉽지만 베트남 자체도 동남아 내에서는 엄청난 소중화 노릇을 하며 주위의 소수 민족을 정복하고 강제로 동화시키려고 해왔던건 사실상 마찬가지다. 당장 사이공을 비롯한 남베트남 일대는 19세기 프랑스 식민화 직전까지만 해도 역사적으로 참파나 캄보디아 땅이었던 걸 베트남이 수세기에 걸친 남진 정책으로 뺏어먹고 식민화한 땅이다.


5. 1991년까지 계속된 고지전[편집]


파일:PLAin19861014.jpg

1986년 10월 14일의 라오산 고지에서 촬영된 인민해방군 병사 뤄부지(罗卜基)의 사진. 손에 들고 있는 81식 자동소총을 통해 그 시기를 가늠할 수 있다. 촬영 이후 바로 이 10월 14일의 작전에서 전사함으로써 이 사진은 그의 생전 마지막 사진이 되었다.[28] 이곳에서는 1991년까지 계속 크고 작은 고지전이 벌어졌으며 심각할 때는 군단급이 맞붙는 전면전 상황까지 갔지만 양국이 정보공개를 꺼리는 사회주의 국가였고 자국에 유리한 보도만을 공개했으며 외국의 보도진이 접근하기 힘든 지역이어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양군 모두 전사자가 수천명에 이를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전쟁 이후에도 1980년대 내내 중국-베트남 국경지역에서는 고지를 중심으로 중국과 베트남 양국의 일진일퇴의 소규모 전투가 계속 벌어졌다. 6.25 전쟁의 고지전을 연상케 하는 전투였기 때문에 사상자도 꽤 많았지만 서방에는 이 전투들의 치열함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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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 분쟁지의 한 고지를 점령하고 기념사진을 찍은 중국군 병사들.

중국군은 이 고지전을 실전능력을 향상시키려는 기회로 삼으려고 했는지, 담당지역 관할인 쿤밍군구뿐만 아니라 여러 군구들이 소속병력을 로테이션으로 투입했다. 이것은 6.25 전쟁 때도 마찬가지였다. 베트남군은 3개 사단을 상시로 해당 지역에 배치하고 있었으며 전황이 심각해질 때는 마찬가지로 남부의 정예병력을 증원했다.

양국은 냉전 말기인 1988년 평화협정을 맺었으며 1989년에는 캄보디아에 있던 베트남군이 철수하였다. 하지만 1991년까지 계속 소규모 접전이 계속되었으며 이 지역에서 총성이 멎은 것은 중국과 베트남 양국이 공식 수교를 맺고 현재의 국경을 확정지은 1992년이 되어서였다.[29]

캄보디아는 다시 왕정으로 복귀했고[30] 친베트남+왕정세력의 연립정부가 출범하면서 크메르 루주는 배제되었다.

냉전 시절에 미중수교가 이루어진 이상 1980년대 내내 이어진 베트남-중국 국경분쟁에서 서방 언론(특히 미국)은 중국 편을 드는 보도를 했다.[31] 그러니까 베트남이 도발해서 중국이 대응한 것으로 자주 보도되었다.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서방-중국은 소련을 견제한다는 입장에서 중국과 한편을 먹고 있었고 베트남은 친소 국가인 데다 베트남 전쟁의 앙금으로 악마화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에 지속적인 전쟁은 자제하라고 촉구하기도 하였다.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미국에게는 중국도 같은 길을 걷게 되는 것이기 때문. 베트남이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 미국과 같은 입장인 현재를 감안하면 정말 30년만에 상전벽해다.


6. 이후 파장 및 정치적 영향[편집]


2019년 6월 뜬금없이 싱가포르리셴룽 총리가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략했다"고 발언해서 큰 파장이 일었다. 이에 대해 베트남 및 당시 베트남의 괴뢰정권을 이끌었던 캄보디아의 훈 센 총리는 강력 반발했다.# 중월전쟁의 원인이 된 1978년 베트남 캄보디아 침공을 반공적인 싱가포르가 포함된 아세안 각국[32]이 규탄했으며 베트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베트남군에 의해 축출된 크메르 루주를 아세안 각국이 은근히 지원했다는 설도 있다. 리셴룽의 발언은 이것의 연장선상인 것이다.

중국 측도 이 전쟁으로 손해만 본 것은 아니다. 먼저 소련-베트남 동맹을 견제하는데 앞장서서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020년대 기준으로는 전혀 감이 안 오겠지만 1980년대 후반에 천안문 6.4 항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미중관계는 양호했으며 이때 미국이나 동맹국의 여러 군사기술이 중국 측에 전수되었다.[33] 가장 대표적인 것이 UH-60의 민수용 버전인 S-60이 중국 측에 수출되었으며 중국측은 이 헬기를 분석하여 2010년대 Z-20을 개발했다. 또 미국의 승인 및 묵인 하에 중국은 프랑스와 이스라엘로부터 군사기술을 적극 섭취하여 1950년대 수준의 군사기술에 머무르던 중국군은 현대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는 소련과 동남아에서 소련의 대리자 역할을 하던 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의 군사력을 키우려던 미국의 큰 그림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미국 자본은 당시 중국 측에 대규모로 투자했으며 이런 미국의 자본은 문화대혁명으로 박살났던 중국의 경제를 일으켜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 중국 측은 군사행동도 불사한다는 의지를 보여 베트남의 팽창주의를 견제했으며 베트남도 중국의 침략을 의식하여 나쁜 경제에도 불구하고 북부에도 병력을 배치하여 총 100만의 대병력을 유지해야만 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이런 대병력은 베트남 경제에 큰 부담이 되었으며 1990년대까지 베트남이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는 이유가 되었다.

7. 이야깃거리[편집]


  • 당시 중국군은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다. 원래 인민해방군 창군 당시에는 계급 없는 평등한 인민의 군대라고 하여 계급제도가 없었고 6.25 전쟁에도 계급이 없이 참전했지만 상대가 다들 하나같이 답이 없다거나 뭔가 나사가 하나 둘 씩 빠진 상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6.25 전쟁 당시 총사령이었던 펑더화이가 국방부장을 맡으면서 1955년 계급제가 도입되고 1956년에 원수 10명, 대장 10명을 임명했다. 그러나 펑더화이가 실각한 이후인 문화대혁명 직전인 1964년 계급은 다시 폐지되었다. 원래 소련군도 계급을 폐지했다가 답이 없다고 판단해 계급체계를 부활시켰는데[34] 1987년에야 비로소 다시 중국군에 계급이 도입되었다. 중국군은 기본적으로 담당 직급만 있고(부대의 지휘관, 참모장, 정치장교 및 여러 보직에 따르는 직급) 계급은 없었다. 전쟁을 위해서는 무계급제로 더는 군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문화대혁명처럼 내부 정치투쟁 때문에 할 여력이 없었기도 했지만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6.25 전쟁을 거치면서 양성된 인적자원이 있었기 때문에 무계급제로도 운영이 가능했다.

  • 이 전쟁은 중국군에게는 군의 현대화가 필요하다는 경각심을 주었다. 하지만 수구적인 군 상층부는 계속 미적거렸는데 10여년의 시간이 흐른 뒤 1차 걸프 전쟁에서 수십만 명의 대병력을 지닌 이라크군이 미군과의 기술력 격차로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초토화되는 것을 실시간으로 봤는데도 미적거리다가 1990년대 후반 양안 갈등을 통해 직접 미군의 힘을 겪어 본 뒤 엄청난 충격을 받고 고루한 인민의 바다 전략을 전면폐기하고 미군을 모델로 해서 군현대화 작업에 돌입했다.[35]

  • 베트남군의 선전으로 1990년대까지 전쟁에서 중국군 60만이 투입되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 공개된 자료를 보면 후방인 윈난에 머물지 않고 직접 전선에 전개된 중국군의 실전병력은 20만 정도라고 추정되고 있다. 베트남의 병력은 10만 명의 정규군에 15만 정도의 민병이 투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군은 병력은 많았지만 문화대혁명 이래 재래식 전력의 증강이 지연되어 전력이나 무장은 1960년대 수준에 머물고 있었고[36] 그리하여 수만명의 사상자[37]가 나서 투입병력에 비해 비교적 큰 피해를 냈다.

  • 전술했듯이 미국 언론에서는 중국 편을 드는 보도를 했다. 왜냐하면 베트남과의 전쟁은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베트남을 악마화할 필요가 있었고 당시 미국은 소련과 대립하면서 친소 성향 국가였던 베트남을 좋게 봐 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미중관계는 공적인 소련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으로 1972년 닉슨 방중을 계기로 개선되고 있었고 결국 1978년에 미중 수교가 이뤄졌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오랫동안 교전하지 말라고 촉구하기도 하였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전쟁 비용이 엄청나게 깨졌는데 중국도 만신창이가 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 중월전쟁 이후 베트남에 거주하던 약 30만 명의 중국계 베트남인들은 베트남 정부에 의해 강제로 중국 남부로 추방당하거나 홍콩이나 마카오 등지로 떠나든지 해야 했다.[38]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 근해에도 자주 나타났던 보트피플은 사실 대부분 이런 중국계 베트남인들이다. 그들은 모국인 중국이 자신들을 따뜻하게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막상 중국은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그대로 길거리에서 가난하게 떠돌도록 방치했으며 중월 국경지대에 베트남인 자치구역을 마련해 줄 뿐이었다. 21세기라면 사정이 다르겠지만 당대까지만 해도 중국은 인구만 많지 경제적으로 가난했으므로 도와줄 여유가 없긴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추방 화교들 중 상당수는 베트남이 개혁개방 정책을 도입하면서 귀국하였고 베트남 경제계에서 상당한 손으로 부상했다는 후일담격인 얘기가 있다.

  • 이 전쟁으로 인하여 북한-베트남 관계도 덩달아 나빠졌는데 북한이 이 전쟁에서 중국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원래도 베트남과 북한의 관계는 미군을 계속 베트남에 붙들고 싶었던 김일성이 베트남에 휴전협정에 동의하지 말라고 마구 땡깡을 부리는 바람에 베트남 지도부가 이뭐병 반응을 보이면서 악화되고 있었고 결국 결정타를 찍은 게 이 사건이다. 북한과의 사이가 나빠진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 전쟁 종전 당시 억류한 대한민국 남베트남 주재 대사관의 이대용 공사 외 2인을 석방해 한국으로 돌려보냈다. 원래 이들은 북한이 북송을 목적으로 베트남에 요청해서 억류한 것이었는데 이들이 전향을 거부하던 와중에 이 전쟁이 터지고 북한이 중국 쪽으로 돌아서자 더 이상 북한의 말을 들어 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때마침 경제 사정이 월등히 나아진 한국 측에서도 베트남이 약간의 경제원조를 조건으로 내걸자 거기에 동의했고 이에 베트남 측이 이들을 석방하였다.

  • 중국측은 자신들이 승전했다고 선전했지만 이 침공의 동부방면을 총지휘한 광저우군구 사령관 쉬스유 상장은 결과적 패전 및 예상을 넘는 큰 피해로 희망하던 총참모장 승진을 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후 당에서 근신처분을 내렸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작전이 마무리된 후 광저우 군구 사령관에서 해임되어 당직으로만 돌다가 1985년 사망했다. 다만 서부방면을 지휘한 양더즈 상장은 이후 총참모장으로 승진하여 7년간(1980-1987) 재직했다.


  • 전략적 목표가 중요한 사례다. 만일 중국이 처음부터 베트남 점령 목표로 갔다면 더 철저히 준비해서 군대를 더 많이 투입했을 것이며 민심을 얻을 준비를 해뒀을 것이다. 그러나 애초부터 베트남에게 경고할 겸 크메르 루주를 간접적으로 돕기 위해 베트남 정규군을 캄보디아에서 빼는 게 목표였고 수도 하노이까지 도달하고 대치했으나 베트남 정규군은 본국으로 뺄 생각은 꿈도 없었던 데다 중국은 실패할 것이라 판단하고 스스로 철수하였다.


8. 대중문화[편집]


80년대 대륙에서 이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꽤 많이 만들어졌다. 배달의 기수 수준의 작품이 많은데 당시 중국군의 장비나 배달의 기수식의 클리셰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아래 설명할 "고지위의 화환"은 1980년대 나온 중국의 전쟁 영화 중에서 가장 수작으로 당국강 주연이며, 반공영화의 대륙판으로 볼 수 있지만 그 와중에도 전쟁의 비극과 군내 부조리 문제를 다룬 문제작이다.

친절하게도 대부분 인민해방군 영화제작소가 만들었기 때문에 저작권 문제에서 자유로워서[39] 유쿠나 투더우 같은 중국 사이트뿐만 아니라 유튜브에 올라온 것도 그대로 볼 수 있다. 1979년의 전쟁뿐만 아니라 198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영화들은 여러 고지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중국군과 베트남군의 전투를 다루기도 한다.


8.1. 중월전쟁 자체를 다룬 작품[편집]


  • 방화(2017): 문화대혁명 시대를 소재로 하는 작품이나 중월전쟁이 큰 비중 있게 다뤄진다. 희한하게 군의 제작지원을 받았는데도 전쟁에 대한 미화는 일체 없고 참혹함은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이 영화에서는 전쟁의 배경도 언급되지 않고[40] 전쟁이 왜 발발하고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도 전혀 언급이 없다. 중국이 어떤 나라와 전쟁을 했는지조차 영화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영화의 중국군 병사들은 적의 매복에 걸려 엄청난 피해를 보지만 정작 적군인 베트남군은 제대로 등장하지 않고, 화면만 보면 정말 베트남군인지도 알기 어렵다. 이는 어른의 사정 탓으로, 안그래도 사이가 안 좋은 베트남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41] 이 영화 자체가 2017년 10월 1일 국경절에 개봉하려다가 현실 비판 수위가 문제가 되어 2달 연기되었다.

혁명에 참가한 고관의 외아들인 주인공은 베이징에만 근무하다가 장교의 필수코스인 순환근무를 위해 오지로 가야 한다. 부모의 빽으로 비교적 환경이 좋은 운남성의 한 부대의 꿀보직인 정치장교로 전출되지만 갑자기 정세가 나빠져 그의 부대는 재수없게 베트남과의 전쟁에 투입된다. 주인공의 부모는 사령관에게 연락해 아들을 최전선에서 빼 달라고 부탁하고... 삼국연의(1994)제갈량으로 잘 알려진 당국강이 주연.
  • "长排山之战" (장파이산 전투, 1981) (링크를 찾을 수 없음)
  • "蛇谷奇兵" (사곡기병, 1984)
  • "铁甲008" (철갑008, 1981) - 드물게 기계화부대가 나온다.

위의 영화들을 포함해 10여편이 존재한다.


8.2. 등장인물들의 경력으로만 언급되는 작품[편집]


서금강, 임국빈, 원일초 주연의 홍콩 영화 성항기병속집(省港旗兵續集, 1986)에서 홍콩 경찰의 제안으로 범죄 조직의 스파이로 잠입하게 된 3인방[42] 중 한 명인 위경생(임국빈 분)이 중월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다. 전쟁 당시 중상을 입었고 3등공을 수립했으며 통신병으로 있었다고 짧게 언급된다.

이연걸과 종려시가 나온 보디가드(中南海保鑣, 1994)에 나오는 악당[43] 바로 중월전쟁에 참전한 중국군 특수부대 출신으로 나온다.

그리고 2003년에 중국에서 제작된 사라진 총이라는 작품에 주인공과 마을 주민들은 중월전쟁에서 참전 경력자로 나온다.


9.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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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발언은 1979년 1월 덩샤오핑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지미 카터에게 베트남을 두고 한 발언이었다. 지미 카터는 중국이 베트남을 치는 것에 대해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물론 소련이 개입해서 중국에게 베트남에서 발 빼라고 했지만.[2] 동독, 폴란드, 불가리아, 헝가리[3] 물론 대만은 미승인했다. 말 그대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비공식 관계.[4] 정확하게는 교주의 사씨의 자치령이었다. 참고로 제갈량이 맹획을 공격하러 갔던 남만은 지금의 중국 서남부인 운남성이다. 베트남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당시 베트남인들의 조상들은 베트남 북부에서부터 장강 이남 중국 남부 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었으며 한족이 장강 이남을 개척하면서 베트남인들은 현재의 위치로 계속 밀린 것이다. 맹획은 그 지역의 행정을 다스리던 한족 관리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한족 관리였던 맹획과 현지 호족의 관계를 뒤집어서 맹획을 남만왕으로 묘사해 버린 것이다(...).[5] 베트남어로는 찌에우다. 현재 베트남인조타를 시조로 받든다. 일단 일부 극우 베트남인들은 광동인의 경우 나중에 내려온 화교가 아닌 중국 본토인 광둥성의 광동인 및 남방 월족계 중국인들까지 원래 동포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6] 베트남 공산당은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종결됐던 1949년에는 이미 남베트남의 반공주의 연합들과 적대관계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에서도 국민당이 이겼거나 하다못해 베트남 국경 지방이라도 장악하고 있었다면 베트남 공산당은 남북으로 포위된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이웃 캄보디아와 라오스가 공산화된 것도 아니었으니. 중공의 승리가 베트남 공산당의 안전 역시 보장해준 것이다.[7] 이러한 상황은 21세기에도 여전하다. 경제사업에 중국이 참여하겠다고 하자 필리핀은 승낙한 반면 베트남은 기술 주권을 중국에게 뺏길까봐 노심초사하며 단번에 거절했다고 한다.[8] 북한도 마찬가지다. 마오쩌둥이 전초기지 세우겠답시고 평양에 진입하려고 하자 김일성은 되레 위협으로 받아들여 친소파는 물론 친중파들을 전부 숙청해 버렸다.[9] 베트남 지원을 위해 후방에서 근무하다가 전사한 중국군이 수천명에 이르는 만큼 베트남측도 이를 전적으로 무시할 수 없어서 양국관계가 어느정도 개선된 21세기에는 매년 추모행사를 열고 있다.[10] 쉽게 말해 월남 정권은 봉건반동세력=>베트남의 주요 봉건사상은 유교=>유교는 원래 중국 거→남베트남은 친중(...)이란 기적의 논리이다. 논리적으로 따지고 보면 현대에도 주로 인터넷에서 종종 보이는 정치적 해석이 팍팍 가미된 사이비역사학적 개소리지만 애초에 뭐 이념대립, 동족상잔을 논리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당시 북베트남 정권의 프로파간다는 저랬다. 사실 베트남 국민당이라면 중국국민당과 밀월관계였으니 친중이라면 친중이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오히려 자기네 당도 친중인 건 마찬가지였고 무엇보다 남베트남에서 국민당은 만년 야당 신세였다.[11] 하지만 이 제안을 전달한 프랑스 측 특사와 제안을 전달받은 즈엉반민의 마지막 내각, 심지어 북베트남까지 이 제안의 존재를 인정하며 프랑스 정부와 중국 정부는 당연히 침묵하고 있다.[12] 아이러니하게도 깜라인만 해군 기지는 원래 미국이 엄청난 돈을 들여서 만든 해군기지였는데 미국이 떠난 후에 비어 있다가 소련군이 들어와서 썼다. 당시 소련 해군이 쓸 수 있는 해외기지가 거의 없었는데 그걸 미국이 공짜로 지어 줬으니 소련으로서는 정말 고마울 지경. 자세한 내용은 깜라인만 문서 참고.[13] 베트남군의 게릴라전 교리는 중국군에게 배운 것이었다. 베트남 전쟁 동안 북베트남군 주요 지휘관들은 대부분 접경인 중국 윈난의 보병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을 정도였다.[14] 크메르 루주가 얼마나 미움을 받았느냐면 1980년대에 영화를 찍으러 크메르 루주 병사로 분장한 배우들이 진짜로 오인되어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했다고 한다. 킬링필드 문서를 조금만 읽어 봐도 알겠지만 지옥도가 다름없었다. 홀로코스트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거나 더 할 지경.[15] 전쟁이 끝난 후 잡 장군은 실각하고 반띠엔중 장군이 국방장관이 되었다. 사실 잡은 나이가 많아 전쟁 말기인 1975년에는 이미 실권은 대부분 중에게 넘어가 있었다. 근데 잡이 더 오래 살았다[16] 비록 자기 스스로가 제한을 걸어 둔 상태였다고는 하지만[17] 1979년 베트남 인구가 이미 5,300만명이었는데 전세계 어디 내놓아도 객관적으로 '소국' 소리 들을 만한 덩치는 아니다. 사실 한국도, 동남아 열국들도 자체적으로 보면 4,000만명, 5,000만명대 인구는 기본에 그리 작은 나라들이 아닌데 워낙 중국이 크다 보니 외부적으로도 그렇고 내부적으로도 중국 이웃나라 사람들은 스스로를 '소국'으로 인식하는 성향이 있다.[18] 이들 중에는 베트콩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사람들도 많았다.[19] 베트남 전쟁 이후 베트콩 출신 중에서 베트남 공산당에서 각종 직책들을 역임한 사람들이 많다. 2016년 4월까지 베트남의 국가 주석을 역임했던 쯔엉떤상(Trương Tấn Sang)만 보더라도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에서 학생운동을 하고 베트콩에 들어가 활동했다. 베트콩 항목 참조.[20] 당시 중국의 "군"은 한국군의 군단에 해당했다.[21] 문화대혁명의 타겟은 주로 지식인들이었으나 나중에는 군인들도 당하기 시작하면서 피해가 많았다.[22] 여기에 덩샤오핑은 국공내전 이후 군문을 떠나 정치가로 전직했다.[23] 애초에 보응우옌잡 같은 사람도 사실 교육과 혁명가 커리어 초반은 대부분 운남육군강무당이나 황포군관학교에서 교육받으며 쌓았는지라... 민족보다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보면 초창기에는 동고동락에 같이 혁명하며 성장했던 동아시아 사회주의권이 이제 커서 각 나라의 집권 세력으로 갈라서자 벌인 동족전쟁스러운 성격도 있다.[24] 다만 이런 무기가 도착하기 전에 전쟁은 끝나 버렸다.[25] 소련군이 베트남의 깜라인만에 주둔한 것은 이 전쟁 이후의 일이다.[26] 중국은 공산정권 수립한 해인 1949년 이래로 "꺾여지는 해"인 5년마다 10월 1일 국경절에 대규모 열병식을 실시하는데 문화대혁명 말기인 1974년과 개혁개방 초기인 1979년은 이를 생략할 정도로 군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1984년이 되어서야 재개된다.[27] 단 여기서 오해가 있다면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의 숙청은 처형이 아니라 노동교화소에서 중노동을 하거나 혹은 홍위병에게 학대를 당하는 수준이었다. 그때까지 자살하거나 맞아 죽지 않았다면 대부분 덩샤오핑 집권 이후 복권되었다. 사지와 정신이 멀쩡했다면 말이지 참고로 총사령관은 죽었다[28] 자세히 보면 중월전쟁 중간에 채택된 리버서블 위장복을 사용하고 있으며 6.25 전쟁 이후 수십년간 쓰이던 90식 철모나 GK80과는 다른 방탄모가 사용되었지만 너무 쓸데없이 큰 피아 식별 및 병과 표기 마크를 헬멧과 팔에 부착했다.[29] 실제로 중국은 이와 비슷한 예로 인도와의 산발적인 교전이 이미 수십 년 전에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2017년에 라다크 지역에서 중국군과 인도군이 주먹다짐을 하며 서로 다툰 것처럼 전쟁이 끝났어도 위협하는 형식으로 서로 도발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30]시아누크 왕이 왕정에 시절 저지른 전횡으로 나라가 막장이 되었던 현실을 고려해 실권은 주지 않고 지위만 갖는 입헌군주제를 선택했다.[31] 특이(?)한 건 북한이 중국 편을 들었다는 것이다.[32] 당시 아세안은 미국의 입김 아래 반공연합의 성격이 짙었다. 베트남은 냉전 이후인 1995년에 가입했다.[33] 당시 중국의 차세대기 개발에 노스롭이 참가하기로 결정되었지만 이는 천안문 항쟁 진압 때문에 무산되었다. 만약 이런 협력이 계속되었다면 J-10에 미국의 기술이 들어가고 J-11은 Su-27 대신 F-15나 F-16의 라이센스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34] 이 시기가 스탈린의 대숙청이 작용되기 직전인 1935년이었는데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기 한참 직전이었으며 소련이 건국된지 20년이 채 되지 않았다.[35] 2010년대 이후 방산비리로 현대화가 지체되었던 러시아와 다르게 등장한 중국의 무기체계나 군수품을 보면 하나같이 미군의 최신개념을 의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군복까지 비슷하게 따라가고 있다.[36] 다만 미사일 및 핵개발은 그 당시에도 지속적으로 증강되었다. 중국 입장에서는 돈드는 재래식 전력 증강보다는 핵무기+미사일로 안보를 땜방하려고 한 것이다.[37] 중국측 주장으로도 전사자 6천여명, 전상자 1만8천명이 났다.[38] 이로 인해 1980년대 초 홍콩,마카오,싱가포르의 인구가 늘었다.[39] 저작권이 없는 건 아니지만 홍보 영화의 특성상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유튜브에 자유로이 올라와도 아무도 지워 달라는 요청을 안 한다.[40] 영화에서는 중국의 서남지방이라고만 언급된다.[41] 마찬가지로 2010년대부터 자주 제작되는 중국의 6.25 전쟁 영화(집결호, 금강천, 나의 전쟁)에도 한국군은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미군과의 대결만이 중점적으로 그려진다.[42] 셋 모두 고급 간부의 자제들이며 경찰로 재직하고 있었고 자유를 찾아 대륙에서 홍콩으로 밀입국을 시도하다가 붙잡혀 대륙으로 압송을 대기중이었다.[43] 매트릭스 2와 견자단이 출연한 도화선이라는 영화에서 나온 예성이라는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