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 슈퍼 대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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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중국의 역습
4. 폐지
5. 역대 우승 기록



1. 개요[편집]


1984년부터 1996년까지 개최한 바둑 기전. 중국기원일본기원 소속 기사만 출전한 기전이었다. 이기면 다음 순번의 기사와 계속해서 대결하고지면 탈락인 연승전 방식이었다. 가장 유사한 대회는 팀리그, 위너스리그이다. 사실상 원조 팀리그, 위너스리그 방식.

보통 '최초의 국제 기전'이라고 거론되는 1988년 후지쯔배 보다도 이른 시기에 개최된 기전이었음에도 일본과 중국 기사들만 참가한 기전이었기 때문에 국제 기전으로 평가받지는 못한다. 하지만, 해당 기전의 흥행에 힘입어 각국에 국제 기전을 창설하려는 움직임을 고취시켰고 하나둘씩 창설된 국제기전 창설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일본기원 주도에서 벗어나 한-중-일의 바둑 춘추전국시대를 견인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마디로 국제 기전의 프로토타입이라고 할 수 있는 기전이다.


2. 상세[편집]


일본은 현대 바둑 기전 시스템을 확립하고 정석과 포석, 덤을 연구하며 현대 바둑의 기초를 정립하여 1980년대 초반까지 세계 바둑을 주도하였다. 한마디로 1980년대 초반까지는 '세계 바둑=일본 바둑'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반면에 한국기원은 나라 구실을 못하던 환경 속에서 제대로 된 인프라가 생길리가 만무했고 중국기원은 나라 이념에 휘둘리며 '비생산적인 놀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며 박해받기 일쑤였다.

그러다 1984년, 일본은 바둑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늘리기 위해 그나마 선수층이 둘째라도 갔던 중국기원과의 대항전을 개최하였다. 아사히 신문 후원, NEC의 협찬을 통해 개최된 기전. 룰은 대국 장소가 일본일 경우 일본식 룰이 적용되었고, 중국일 경우에는 중국식 룰이 적용되었다. 한마디로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식이었다.

둘째라도 갔던 중국이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변방에 불과했던 처지. 그저 녜웨이핑이나 우칭위안의 제자였던 여류기사 루이나이웨이, 그의 남편 장주주 정도가 입소문을 타는 정도였다. 일본은 이들을 상대로 '한 수 가르쳐 주겠다'는 생각으로 양학을 할 채비를 했으나...


3. 중국의 역습[편집]


파일:중일슈퍼대항전2.jpg

장주주 당시 七단의 예상치 못한 역공에 멘붕요다 노리모토 당시 五단. 1회 대회 2국 장면이다.

그러나 일본의 예상과는 달리 중국의 예상치 못한 역습에 일본 바둑계는 긴장했다. 당시 신인 기사였던 요다 노리모토가 선봉으로 나와서 첫 승을 거뒀으나, 중국의 두번째 주자로 나온 장주주가 5연승을 거두며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이다. 물론 이때까지 일본에선 정상급 기사들이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고 일본의 6번째 주자로 나온 정상급 기사 고바야시 고이치가 장주주를 꺾은 후 6연승을 질주하며 분위기를 다시 반전시켰다. 이제 중국기사는 녜웨이핑만이 남은 절체절명의 상황. 더욱이 남은 일본기사들은 고바야시 고이치, 가토 마사오, 후지사와 히데유키 등 일본 바둑 전성기를 대표하는 주역들이었고, 셋은 대국을 위해 중국으로 출국하기 전 "지고 돌아온다면 삭발을 하겠다!"라는 배수진까지 친 상태라 결의도 충분했다. 그럼에도 녜웨이핑은 "세 분이 삭발하신 모습을 꼭 보고 싶습니다"라고 응수했고, 정말로 셋을 격파해 중국에게 첫 우승을 안겨주었다.

파일:중일슈퍼대항전.jpg

최종국이 끝난 후 녜웨이핑에게 악수를 건네는 후지사와 슈코.

물론 녜웨이핑은 굳이 안그래도 된다며 삭발을 적당히 말리기는 했어도 셋은 책임을 지겠다는 일념으로 정말로 삭발을 단행했고, 일본기원으로선 첫 패배를 당함과 함께 해당 일화는 일본바둑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사건으로 화자되고 있다. 삭발한 고바야시 고이치[1]

이듬해 개최된 2회 대회에서도 일본은 중국의 첫번째 주자로 나온 여류기사 루이나이웨이에게 2연패를 당하면서 초반부터 삐걱거렸고, 고바야시 사토루의 5연승으로 일본이 자존심을 회복하는가 싶었지만, 이번에도 마지막 주자로 나온 녜웨이핑이 다케미야 마사키, 오타케 히데오 등의 5명의 기사를 전부 격파하고 다시 중국에게 우승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3회 대회에서도 마지막 주자로 나온 녜웨이핑이 일본의 마지막 주자 가토 마사오를 격파하고 중국에게 또 다시 우승을 안겨줌과 동시에 대회 통산 9연승을 달성했다.[2] 그리고 녜웨이핑의 활약으로 중국은 일본 못지않은 바둑 경쟁력을 갖춘 국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리고 1988년 4회 대회가 되어서야 요다 노리모토 당시 七단의 6연승으로 중국을 올킬 직전까지 몬 것을 녜웨이핑이 막은 후 2연승을 기록하다가 하네 야스마사에게 패해 역올킬에 실패, 연승행진을 11연승에서 마감하면서 비로소 일본이 우승을 맛보게 되었다.


4. 폐지[편집]


그러다 1988년, 후지쯔배에 이어 응씨배라는 명색을 제대로 갖춘 국제 기전이 출범하긴 했지만, 아직은 중국과 일본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쩌리에 불과한 위치였기에[3] 둘만의 무대가 될 것으로 점쳐졌...으나, 느닷없는 조훈현의 응씨배 우승으로[4] 갑작스레 한국기원의 위상 또한 급상승했으며 여기에 덤으로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 등의 4천왕까지 등장함에 따라 한국기원은 되려 중국과 일본을 압도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렇다보니 최강국을 빼놓은 그들만의 리그에 대해서 관심이 멀어지게 되는건 당연한 현상. 결국 1996년 화제성 저조로 인해 11회를 끝으로 폐지가 결정되었다. 대회 통산은 중국 7승과 일본 4승. 참고로 마지막 11회 대회에서는 창하오가 6연승을 기록하며 중국에게 우승을 안겨주었다.[5]

중일 슈퍼 대항전 폐지를 결정한 NEC사였지만 바둑 기전 주최 및 후원은 계속 이어나갔다. 일본 국내 속기 기전인 NEC배는 지속적으로 개최했고, 중국에서도 동명의 속기 기전 NEC배를 개최하였다. 또한 단체연승전 방식은 아니었지만 양국의 NEC배 우승자끼리 3번기를 통해 자웅을 겨루는 NEC배 중일 대항전도 지속적으로 개최하였다.

그러나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여파로 중국 NEC배 후원을 철수하면서 중국 NEC배와 NEC배 중일 대항전이 전부 폐지되었고, 이후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로 일본 NEC배마저 2012년에 폐지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관련 기사


5. 역대 우승 기록[편집]


회차
연도
우승
전적
준우승
최종국 승자
최종국 패자
비고
1회
1984년 ~ 1985년
중국
8:7
일본
녜웨이핑
후지사와 히데유키
첫 대회
2회
1986년 ~ 1987년
중국
9:8
일본
녜웨이핑
오타케 히데오

3회
1987년 ~ 1988년
중국
9:8
일본
녜웨이핑
가토 마사오

4회
1988년
일본
7:2
중국
하네 야스마사
녜웨이핑

5회
1989년 ~ 1990년
중국
8:3
일본
첸위핑
다케미야 마사키

6회
1991년 ~ 1992년
일본
8:7
중국
가토 마사오
녜웨이핑

7회
1992년 ~ 1993년
일본
7:5
중국
아와지 슈조
녜웨이핑

8회
1993년
일본
7:3
중국
요다 노리모토
녜웨이핑

9회
1994년
중국
6:3
일본
차오다위안
가토 마사오

10회
1995년 ~ 1996년
중국
7:5
일본
마샤오춘
오타케 히데오

11회
1996년
중국
7:2
일본
창하오
오타케 히데오
마지막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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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사진은 그 유명한 조치훈의 휠체어 대국 장면으로서, 대회가 끝난지 얼마가지 않았는지, 반삭의 고바야시 고이치를 확인할 수 있다.[2] 이 공적으로 녜웨이핑은 '철의 수문장'이라는 별명과 함께 중국기원으로부터 '기성' 칭호를 받았다.[3] 응씨배 같은 경우는 한국은 조훈현 1명만이 출전하는 등 홀대가 심했다.[4] 재미있는점은 조훈현이 결승에서 꺾은 상대가 중일 슈퍼 대항전에서 중국의 영웅으로 떠오른 녜웨이핑이었다.[5] 창하오는 10회 대회에서도 중국 대표팀의 3번째 주자로 나와서 5연승을 기록하며, 중국의 우승에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