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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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제11대 국왕. 묘호는 중종(中宗), 시호는 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 휘는 역(懌), 자는 낙천(樂天)이다.
성종의 적차자로 1506년 형 연산군이 폐위되고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38년간의 재위기는 조선사의 혼란기로 평가된다.
2. 생애[편집]
2.1. 연산군 재위 시절[편집]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왕이 되기 이전에는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유래한 진성대군(晉城大君)으로 불렸는데 연산군과는 (12살 차이의) 이복형제 지간이다. 형은 폐비 윤씨의 자식인데 반해 자신은 후처인 정현왕후 소생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중전 소생인 대군(大君)[2] 인 탓에 권력 투쟁의 희생양이 될 소지가 다분했었다.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이자 훗날의 단경왕후와 결혼하였다.[3]
실록에는 연산군 재위 시절 진성대군(중종)이 뭘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연산군 6년(1500년)에 궁에서 사저로 옮겨갔다는 것 정도가 전부이다. 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은 재위 내내 나름 동생이라고 중종에게 잘해준 듯하다. 연산군이 진성대군에게 줄 곡식이 부족해 국고에서 내어주려 했는데 정승들이 전례가 없다고 반대했으며[4] 진성대군의 집을 지어주는 것에도 너무 많은 인력을 써서 몇 번이나 신하들의 반대를 들었으나 동생을 그리도 아끼고 챙겨준 건지 몰라도 끝내 지어줬다. 갑자사화 후인 연산 10년(1504년) 음력 11월 5일에도 말 1필을 선물했다.
2.2. 중종반정 직후[편집]
중종반정 연도인 1506년(중종 1년)부터 유순정과 성희안이 사망한 1513년(중종 8년)까지 7년.
1506년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중종반정 덕분에 조선 국왕으로 추대되어 19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했으며 실록에 따르면 반정 직후 경황이 없어 면복이 아닌 곤룡포를 입고 즉위했다.
재위 초기에는 자신을 추대한 반정 공신들을 논공행상에 따라 적극적으로 우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첫 아내인 신씨를 왕비 책봉 7일만에 폐비했다.[5] 반정 공신들을 중심으로 한 훈구 세력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증대시켜 나가 경제력과 군사력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정권을 바꾸면 권력층을 갈아엎어 뺏은 걸로 재분배를 할텐데 중종반정의 주력들은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그대로 핵심층을 이어갔다. 물론 임사홍 임사영 형제, 신수근 신수겸 신수영 형제, 장녹수와 형부 김효손 등의 연산군의 핵심 최측근들은 제거당했다.
왕좌의 권위(정통성)는 실추되고 권신들의 힘은 더욱 커졌으며 공신 지정이나 공훈까지 지들 마음대로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심지어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을 느끼자 중종까지도 갈아치울 수 있음을 공공연히 내비쳤던 경우도 있다. 연산군 시절의 온갖 폐단들을 수습하려 노력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애당초 정통적인 왕위 계승으로 왕위에 오른게 아니라 신하들이 주도한 쿠데타(반정)를 통해 추대된 왕이라는 태생적인 한계 탓에 중종의 치세는 우유부단과 뒷걸음질로 점철되고 만다.[6]
훈구 공신들의 힘이 너무 커져 이를 견제해보려고 조광조 등 사림을 중용하려 했지만 조광조 역시 중종의 말을 안 들었다. 뒤이어 일어난 기묘사화로 사림이 털려나가는 난리가 났으나 윤원형과 심정 등 훈구 공신의 방자함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다시 사림들을 등용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냉온탕을 왔다갔다하는 그의 불안전한 인재 등용은 중종의 평가를 깎아먹는 제일 큰 원인이 된다.
그래도 당시는 이황, 조식, 서경덕 등 조선 유학의 거두들이 이미 원숙(元塾)의 경지를 뽐내고 있었고 이언적, 박순 등 중견 관료들은 물론 이이, 성혼, 이산해, 류성룡 등 신진 사림들을 잉태하고 있었던 시대다. 권력이 관학 훈구파(기성 세력)로부터 신진 사림파(신진 세력)로 이동하던 과도기였다. 왕권은 이 때 바닥을 쳐서 김공저(金公著)의 옥사와 이과(李顆)의 옥사 등이 일어났다. 김공저(金公著)의 옥사는 의관인 김공저(金公著)와 서얼 박경(朴耕) 등 일부 신진 사림들이 박원종과 유자광 등이 반정 후에 보였던 행태에 분노해 일부 정국공신을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과(李顆)의 옥사는 중종 시대 처음으로 왕을 노린 역모가 일어난 사건이다. 1506년 갑자사화 때 연산군에 의해 전라도로 귀양을 가자 유배지에서 김준손 등과 같이 진성대군을 추대하려고 모의했으나 이미 중종반정이 성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이 해에 유배지에서 풀려나와 1507년 정국원종공신으로 전산군에 봉해졌는데 공을 세우고도 관직이 높지 않음에 불만을 품고 중종이 선릉에 친제하러 가는 틈을 타 일부 무장들과 종친들을 끌어들여 견성군을 옹립하려고 했고 박원종, 유순정 등을 제거하려 했으나 서얼 노영손의 밀고로 발각되어 박원종 등은 이과(李顆)를 포함한 일부 무장들과 종친들을 처형할 것을 요청하였고 이에 박원종등의 청이 받아들여지면서 모두 처형당했고 조정 신하들의 간청으로 중종은 견성군에게 사약을 내렸고 결국 그는 사약을 먹고 죽었다.
중종반정 직후에는 불안정한 정국이 이어졌고 공신들은 의외로 뛰어나지 못한 장악력을 보였다. 그럼에도 왕권은 떨어질대로 떨어졌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재위 초반부 때까지 이야기고 재위 중후반부 때는 안 그랬다. 그 이유는 중종 4년(1509년) 박원종, 중종 6년(1511년) 유순정, 중종 7년(1512년) 성희안 등 반정의 핵심인물이 잇달아 병으로 죽었고 중종 8년(1513년)에 박영문과 신윤무가 무신들을 배척하는 문신들에게 불만을 토로하다 이것을 들은 관노 정막개가 고변하면서 반역죄로 몰려 처형당하는 등[7] 차례차례 역사에서 퇴장했기 때문이다. 국방 분야는 정국공신의 관할이었으며 토지에 기반한 재물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더 이상 정국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2.3. 조광조의 개혁 정치[편집]
유순정과 성희안이 사망한 1513년(중종 8년)부터 본격적으로는 2년 뒤인 조광조가 임용된 1515년(중종 10년)부터 조광조가 실각(기묘사화)한 1519년(중종 14년)까지 4년 총 6년 정도 지속. 이 시기에 《동문선》이 《속동문선》으로 1518년(중종 13년)에 속찬(續撰) 되었다.
왕위에 오른지 10년이 지난 1515년(중종 10년)에 중종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치세를 열어보고자 했다. 그런 중종의 눈에 띈 사람이 바로 조광조. 도학정치의 이상을 가지고 있던 조광조는 바로 신씨 복위 건과 관련해 처벌을 주장하는 노신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하는데 성공했고 이에 왕권을 더욱 강화하려는 중종과 뜻이 맞게 되었다. 조광조는 소위 신진 사류라 불리는 성리학적 이론으로 무장된 인재들을 적극 등용하여 왕도 정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조광조는 왕이 바꿔야 나라와 백성이 바뀐다는 생각으로 경연에서 자신의 생각을 전파하며 개혁을 거침없이 해나갔다.
중종의 조광조에 대한 신임은 전폭적으로 매우 높아 조광조가 여진족 문제에 대해서 무리수를 뒀고 그 자리에서 정광필과 무신 유담년에게 논박을 받았음에도 조광조의 의견을 중론으로 채택했다. 소학을 보급했고 사장(詞章)[8] 중심주의의 근원인 과거 제도[9] 대신 현량과를 실시했다. 사실 현량과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으나 중종의 조광조와 신진 사류에 대한 신뢰도는 아직도 강고했다.
조광조를 등용한 시기에 향약을 전국적으로 권장하여 중앙 집권을 강화하였고 다양한 책들을 발간했으며 전국적으로 강원도[10] 전라도[11] 평안도[12] 순으로 각각각 양전 사업을 시행하고 북방의 진들을 보수하였다.
그러나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신진 사류의 왕도정치 사상에 기반을 둔 개혁에 중종반정을 주도했던 공신 세력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침해될까 우려했고 소격서 혁파[13] 와 위훈 삭제[14] 로 결국 갈등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소격서 혁파로 보자면 중종과 조광조 둘의 의견에 모두 일리가 있다. 그러나 조광조는 중종이 든 "세종과 성종을 포함한 선대가 혁파하지 않았으니 그것에는 이유가 있다."라는 논리에 반박으로 당대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과 성종이 대성군이라도 그것만은 실책이라고 하며 역적 취급 받을 수도 있는 왕의 정통성을 건드릴 수 있는 말을 던졌다. 언급은 안되었지만 현량과 역시 의도의 일부는 좋았을 수 있으나 과거 제도의 공정성을 따라오지 못했으며 세력 확대를 추구했다라는 죄목을 얻기 좋은 제도였다. 중종 자신도 처음과는 달리 지나치게 이상주의로 흐르는 조광조에게 염증을 느끼고 스스로의 권력도 제한되었다고 여겼다. 결국 중종은 1519년(중종 14년) 기묘사화로 신진 사류를 숙청한다. 위훈 삭제 직후의 친위 쿠데타였다.[15]
기묘사화와 관련해 야사에서는 홍경주의 딸 희빈 홍씨가 궁녀들을 시켜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조씨가 왕이 된다)이라는 말을 써 개미들이 파먹게 한 뒤 나뭇잎을 왕에게 바쳐 조광조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했다고 한다지만 KBS 역사스페셜에서 밝힌바로는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16] . 벌레들은 꿀이 묻은 부위만 먹는 것이 아니라 나뭇잎 전체를 파먹거나 나뭇잎은 남겨두고 꿀만 빨아먹기 때문이다. 결국 이 일의 실상은 중종이 주도하고 훈구 대신이나 남곤과 같은 온건 사림이 거든 사태에 가깝다.[17] 특히 병조판서 홍경주는 중종 면전에서 쿠데타 협박으로 기묘사화를 압박했다는 설이 있는데[18] 진실은 저 너머에...[19]
2.4. 권신들의 시대[편집]
조광조가 실각(기묘사화)한 1519년(중종 14년)부터 김안로가 실각(정유년의 변)한 1537년(중종 32년)까지 18년. 이 시기에 강원도 양전이 1522년(중종 17년, 중종 17년 11월 30일), 전라도 양전이 1524년(중종 19년, 중종 19년 12월 28일 1, 중종 19년 12월 28일 2), 평안도 양전이 1544년(중종 39년, 중종 39년 12월 28일)에 이루어졌다. 또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覧)》이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1530년(중종 25년)에 증보(增補) 되었다.
이후 중종의 치세는 도로 권신들이 주도하는 시대가 되었다. 1521년(중종 16년)에는 조정에 남아있던 소수의 친 신진 사류 정승인 안당과 아들 안처겸 등을 제거하고자 송사련의 무고로 일어난 기묘사화의 연장전이라 할 수 있는 신사무옥은 전형적인 사건이었다.[20]
이후에도 중종의 시대는 옥사와 피바람이 지속되었다. 권신들이 권력을 잡게 되자 이번에는 권신들 안에서 권력 투쟁이 일어나 경빈 박씨 세력이 세자(인종)의 후견 세력이었던 김안로 일파를 몰아내고 이후 김안로가 작서의 변을 이용하여 경빈 박씨와 복성군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는가 하면 김안로가 몰락한 후 문정왕후의 남동생인 윤원형의 소윤 일파가 득세하는 등 중종은 조광조의 도학(왕도) 정치의 개혁 시절을 제외하고는 정치적으로 자신의 뜻대로 정국을 이끌어나가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사실 중종 시대의 권신들은 결이 다르다. 예컨대 중종 전기(조광조 이전)의 반정 공신들과 달리 중종 중기(조광조 이후)의 남곤이나 김안로는 온건 사림이나 소장 사림들의 지지를 받았으며[21] 중종 후기(김안로 이후)에는 대윤의 윤임과 소윤의 윤원로 윤원형 형제 등이 득세했다.
2.4.1. 남곤 집권기[편집]
조광조가 실각(기묘사화)한 1519년(중종 14년)부터 남곤이 사망한 1527년(중종 22년)까지 8년.
1519년 기묘사화는 속전속결로 진행되면서도 그 과정에서 상당히 잡음이 많이 일어났고 심정 등 관료와 홍경주 중심 정국공신들 등까지도 조광조를 죽이는데 반대했고 남곤 역시 처음에는 방관하나 싶더니 조광조를 죽이려고까지 하는 행동에 경악하여 관직을 버릴 각오로 반대했으며 중종이 설득하는데 실패한 정광필을 비롯한 조광조 반대파와 일반 신료들은 반대를 하는 등 반대 세력이 대다수였다. 남곤과 정광필은 적극적으로 반대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생명을 포기할 강수까지 둘 정도로 반대했으며 심정조차도 죽이지 말라는 대신들의 뜻에 따라달라고 발언하는 등 중종 외에는 아무도 조광조를 죽이는데 동의하지 않을 정도였다.[22] 그 후 선비들의 시습은 땅에 떨어지고도 땅 속을 뚫었으며[23] 민생은 최악까지는 아니었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남곤은 온건 사림파이면서도 현실주의자여서 도학적인 입장으로 이상을 자제하고 현실을 앞세웠다. 남곤의 국정 장악력은 안정적이면서도 강해서 안당 안처겸 부자가 사사된 기묘사화의 연장전이라 할 수 있는 신사무옥을 제외하면 사화, 옥사, 정변 등이 일어나지 않는 일반적인 정국을 유지했다. 남곤 본인 역시 뛰어난 문장 실력으로 직접 대명관계에서 문서를 전담했고 일파는 모두 개인적으로 청렴했다.
그러나 시대의 병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기묘사화와 구 체제의 모순이다. 기묘사화는 그의 사상이 어떻든 조광조가 다시 살려놓은[24] 선비들의 시습을 바닥에 내팽개처버렸고 학문은 바로 잡혀지지 않았다. 또한 구 체제의 모순에 남곤 일파는 일부 영합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비롯한 개혁책을 내놓지 않았다. 다만 남곤과 그의 일파가 무기력했다는 것이 아니다. 남곤은 임금이 그렇게 총애하던 신하를 헌신짝처럼 내던지는 것을 봤고 어찌되었든 주도권은 바로 중종 본인에게 있었다. 중종은 더이상 조광조 같은 이들의 개혁책에 치가 떨리고 질려서 강경 드라이브를 원치 않았고 남곤 역시 이에 부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25]
2.4.2. 과도기[편집]
남곤이 사망한 1527년(종종 22년)부터 심정과 이행이 제거되고 김안로가 집권한 1531년(중종 26년)까지 4년. 이 시기에 《신증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覧)》이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1530년(중종 25년)에 증보(增補) 되었다.
남곤이 향년 57세로 세상을 뜬 후 그와 친했던 심정, 이행, 이항 등이 권력을 잠시 잡았다. 영의정은 명망 있는 정광필이 맡았으나 심정은 실세 좌의정으로 이행은 실세 우의정으로 승진했다. 좌찬성 이항까지 합세하여 3명은 권신 또는 권간이라는 오명까지 썼다. 먼저 이항은 셋 중에서도 가장 김안로와 철천지 원수였는데 이조년이란 자의 부탁을 들어 변호했으나 김안로파 대간들이 '분경죄'로 다스리라고 해서 결국 귀향한다. 이항의 평판은 세간에서 좋지 않았기에 쌤통이라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다음은 심정이었는데 작서의 변 때 무고를 당한 경빈 박씨에게 뇌물을 받은 죄목으로 유배되었다. 문제는 심정의 죄상이 상당히 날조된 부분이 있는데 일단 경빈 박씨가 범인이라는 것부터가 심증으로 추정한 것이고 설령 경빈 박씨가 작서의 변의 범인이라 해도 심정이 그녀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증거도 없었다. 이행은 작서의 변과는 전혀 무관했으나 심정과 이항 등 동료들이 하나하나 제거되는 것을 보고 반김안로파 대신들을 모두 모아 김안로를 체직시켰고 김안로파 대간은 반김안로파가 경빈 박씨파라는 논리를 만들어 이행마저 유배시킨다.
중종이 김안로를 등용시키려는 의지가 매우 강했기에 김안로와 김안로파는 강경 드라이브까지 걸면서 반대파 신료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이후 김안로를 대사간을 거쳐 이조판서에 제수하며 내직(內職)으로 돌아오게 했다. 사실 중종의 의도가 일부 보이는데 심정, 이행, 이항은 모두 평판이 좋지 않았고 정광필은 명재상이었으나 고질적인 문제가 세력이 약하다는 것이었다. 남곤이 죽은 후 그냥 그런 신하인 심정, 이행, 이항과 세력없는 정광필을 물색하다 능력 있고 세력 빨리 불리고 남곤처럼 역시 현실주의자인 김안로를 불러온 것.
2.4.3. 김안로 집권기[편집]
심정과 이행을 제거하고 김안로가 집권한 1531년(중종 26년)부터 김안로가 실각한 1537년(중종 32년)까지 6년.
김안로는 동궁(인종)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정권을 휘둘렀는데 중종은 본격적으로 김안로에 힘을 몰아주려 동지경연사, 홍문관·예문관 대제학, 춘추관사, 성균관사,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도총부 도총관에 모두 제수한다. 김안로는 준수한 능력과 현실적인 냉철한 판단력을 가졌지만 권력욕이 그 어떤 집권자보다 강했고 한번 당하면 반드시 보복해야 하는 성격을 가졌다. 결국 이 6년간 정치보복을 기반으로 공포정치가 시작된다.
김안로의 보복정치는 엄청난 공포심을 불러옴과 동시에 엄청난 적개심 역시 상대방으로부터 불러왔다. 김안로는 자신과 반대파이거나 정광필 같은 김안로가 쫓겨났을 때 관여한 중신들을 중심으로 보복을 시작했고 그 논리와 증거는 시간과 이치를 뛰어넘었다. 일단 김안로 집권기 초반 1533년(중종 28년)에 경빈 박씨와 복성군이 사사되었고 자신을 반대했던 거물 중신들 중 유일하게 조정에 남아있는 정광필에게 보복하기로 한다. 처음에는 파직당하는 것으로 그쳤으나 2년 뒤 김안로는 20년 전 장경왕후의 산릉 건축 당시 일을 끄내며 공격한다. 산릉 건축 당시 돌이 나왔는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고 몇 자 아레로 옮겼다.[26] 이 일을 가져와서 일단 산릉을 천장하라고 청한 뒤 책임자였던 정광필을 유배보내라고 청한다.[27]
이때까지는 평범했으나 이 일을 서막으로 반김안로파를 '경빈 박씨의 잔당'이라거나 '권간 심정의 부하'로 몰아 대숙청을 행했고 모든 관직을 관리하며 반대파일수록 지방에 제수하라고 하며 힘을 잃게 했다. 그러나 중종이 제어할 수 없는 정도까지 심해지고 있었는데[28] 떠오르고 있던 문정왕후의 남동생들인 윤원로와 윤원형을 숙청하고 문정왕후를 폐비하려다 오히려 김안로 자신이 역으로 걸려서 중종은 세자의 외숙부 윤임과 결합해 그를 탄핵했다.
김안로의 경우 말년에 경원대군을 등에 업은 문정왕후와 그 남동생들인 윤원로와 윤원형이 급부상하는 것에 위기를 느껴 이들을 제거하려는 선을 넘게 되자 중종은 이대로 가만히 놔두면 안되겠고 자신에게도 위협적인 인물이 될 가능성이 있어 윤은보에게 비망기를 내려 조정에 사람이 없음을 걱정한다며 극론하였다. 또한 중종은 도승지 양연에게 '김안로를 없애야겠으니 여론을 조성하라'는 밀지를 내려 양연은 대간들에게 김안로의 횡포가 심해 주벌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고 대간들은 그동안 김안로가 워낙 횡포와 부패가 심했다보니 양연의 말에 동의하였다. 중종은 왕세자의 외숙부인 윤임과 최보한, 윤안인, 양연과 의논하여 김안로의 직첩을 회수하고 삭탈관직을 한 다음 유배보내서 사사시키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2.5. 말년[편집]
김안로가 실각한 1537년(중종 32년)부터 중종이 사망한 1544년(중종 39년)까지 7년.
이후 중종은 정치질에 염증을 느꼈는지 앞서 언급한 김안로를 축출하는데 공을 세운 양연과 함께 군적수포제 같은 제도적 개선에 나서기도 했으나 큰 효과는 없었다.[29]
동지사(同知事) 양연(梁淵)은 아뢰기를,
"보병(步兵)의 번가(番價)를 함부로 징수하는 폐단은 역사(役事)하는 곳과 관원과 근수(跟隨)에게 물어서 분정(分定)하는 데서 기인합니다. 번가를 받아서 분급(分給)하는 관아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분정된 곳에 바칩니다. 따라서 색리(色吏)·사령(使令)·구사(丘史) 등이 함부로 징수하여 제 몫으로 쓰는데 관원들은 이러한 것을 알아도 금지하지 않기 때문에 그 폐단이 이러합니다. 따로 이를 맡을 관청을 설치하거나 또는 사섬시(司贍寺)의 제조(提調)에게 맡겨 그 일을 전담하게 하여 군사(軍士)가 초번(初番)을 들거나 선상(選上)이 올라올 때 각 고을에서 일체 관인을 찍어 올려 보내게 하고 만약 외람되이 거두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적발하여 치죄한다면 함부로 징수하는 폐단은 없어질 것입니다." 【이미 법령을 세워놓고 사섬시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하였으나 선상들이 하인들의 작폐가 달라진 게 없다 하였고 때맞추어 봉납할 수가 없어 더욱 괴롭게 여겼다. 법을 봉행하는 자가 적합한 사람이 아니면 법을 매일 변경하여도 폐단이 날로 생길 것이니 양연의 말이 어찌 말단의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시적으로 담당 관청을 설치했다가 다시 없애는 것도 부당하다. 비록 담당 관청을 만들지 않아도 유사(有司)가 힘써 처리한다면 될 것이다. 만약 그래도 봉행하지 않는다면 법사(法司)가 규찰하는 것도 괜찮다."
하였는데, 영사(領事) 홍언필(洪彦弼)이 아뢰었다.
"사섬시(司贍寺)에 봉납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특별히 담당 관청을 두고 창고를 설치하여 부지런하고 검소한 재상을 골라 제조(提調)를 맡긴다면 반드시 힘써 봉행할 것입니다."
사신은 논한다. 보병들이 지나친 가포(價布) 때문에 곤란을 겪는 것은 모두가 공사(公私)의 토목 공사에서 빚어지는 부역과 염치의 도가 상실된 가운데서 기인한다. 근원을 밝게 하고 근본을 바르게 할 방법에는 힘쓰지 않고 말단적인 일만 따져 가포(價布)를 조절하여 관에서 받아들여 분급(分給)하는 것으로 상책을 삼으니 탄식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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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선상 보병(選上步兵)의 번가(番價)를, 대신 입역(立役)하는 자가 입역하는 곳의 군사에게서 임의로 받는다면 그 값을 더욱 무겁게 할 것이므로, 그 액수(額數)를 짐작해서 정병(正兵)이면 한 달에 세 필 반으로, 선상이면 두 필 반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신 입역하는 자들이 앞다투어 훨씬 더 많이 거두려고 하여 폐단을 일으키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병조와 사섬시(司贍寺)에서 그 값을 받아서 나누어 주기로 이미 의논하여 정하였습니다. 그 값은 본디 다섯 새(升) 무명베인데 지금의 다섯 새는 예전에 넉 새입니다. 새가 거칠면 대신 입역할 자가 없으므로, 부득이 반 필을 더하는 법이 나왔습니다. 보병이 번드는 달에 병조 참의가 승여사(乘輿司)의 낭관(郞官)과 함께 친히 감독하여 받아들여서 각처에 나누는데, 준역(準役)을 받아 내지 못하여 침탈당하는 일이 많을까 염려되므로, 곧 준역을 내주어 서울에 머무르는 폐단을 없애게 하였습니다. 지금 반 필을 더한 것이 온편하지 못하다는 의논도 있습니다. 그러나 법을 세운 처음이므로, 값을 장만하긴 하였지만 새가 거칠기 때문에 바치지 못하는 자도 있다 합니다. 법을 세운 지 오래되면 다들 새가 거칠고 고운 것을 알아서 바칠 만한 것만 장만하여 가져올 것이니, 반 필을 더 바치는 폐단이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또 그 법을 고쳐서 값을 적게 하고 새를 거칠게 하면 대신 서는 자가 입역하려 하지 않을 것이니, 이미 의논하여 정한 것을 갑자기 다른 의논에 따라 고친다면 뒤폐단을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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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평안도 양전이 1544년(중종 39년)에 이루어졌고[30] 《대전속록》이 《대전후속록》으로 1543년(중종 38년)에 속찬(續撰) 되었다.[31] 어쨌든 자신의 아버지인 성종을 본받겠답시고 《동문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覧)》, 《대전속록》 이것들을 각각 《속동문선》, 《신증동국여지승람》, 《대전후속록》으로 속찬증보(續撰增補) 한 것 정도의 업적은 남겼다.[32]○ 步兵番價, 每一朔五升綿布三匹半, 皁隷·羅將選上則二匹半,
--大典後續錄 兵典 雜令 (步兵番價…)
2.6. 고변과 익명서의 시대[편집]
중종 시기에는 역모 고변이나 익명서 사건이 많았는데 대개는 무고가 많았다고 한다.[33] 물론 '김공저·박경의 옥사', '이과의 옥사' 등 실체가 있는 일도 있었지만 '정막개의 고변' 등 허황된 것도 많았고[34] '정막개의 고변' 이후에 팔자를 고쳐보겠다고 거짓 고변을 했다가 목이 날아가는 사람도 많았다. 한 예로 도박장을 운영하던 건달 유세창, 유세영 형제가 먼저 역모성 발언을 하고 이에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이 동조하자 이걸 가지고 고변했다. 동조한 사람들도 목이 날아갔지만 물론 그 형제들도 참수당했는데 그나마 고변을 했기에 연좌제는 피했다. 중종이 왕위에 있는 동안 고변서, 익명서 사건이 수도 없이 많았다. 39년간 주요 옥사만 십여 차례다.
원년 (폐세자&창녕대군)
2년 (김공저&박경, 이과&이찬&진성군)
3년 (신복의)
4년 (이흔)
8년 (신윤무&박영문)
14년 (기묘사화)
16년 (안당&안처겸)
20년 (유세창&유세영)
22년 (작서의 변)
26년 (심정&심사순)
27년 (이종익)
28년 (경빈&복성군&당성위, 이항, 김형경)
30년 (진우)
32년 (김안로)
39년 (사망)
2.7. 중종 사후[편집]
능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의 정릉(靖陵).[35] 아버지 성종이 묻힌 선릉과 가까운 곳에 묻혔다.[36] 원래는 장경왕후가 묻힌 희릉에 합장했는데, 문정왕후가 경기도 고양에서 중종의 능을 천장시켜 지금의 서울 강남으로 옮겼다. 그런데 비가 조금만 많이 오면 정자각 앞에 배가 떠 다닐 정도로 침수 문제가 심각했다. 사후에 남편과 함께 묻히려던 문정왕후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태릉에 매장됐다.[37] 게다가 정릉은 임진왜란 통에 왜군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이 불태워졌다.
이 사건 때문에 종전 후 한때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에도 막부에서 조선과의 수교를 트기 위해 범인들과 중종 유골이란 시신을 돌려보냈는데 심문해봤더니 범인들은 이 일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었고 유골이 중종의 것이라 믿을 증거도 전혀 없었다. 조정은 한 때 일본을 정벌해야 한다고 크게 들끓었으나 결국 현실적인 필요에 의하여 "왜놈들이 그렇죠 뭐. 걍 없던 일로 치고 계속 수교 논의하시져."라는 온건론이 우세를 점하면서 1609년(광해군 원년) 기유약조를 통해 일본과 조선은 수교를 다시 시작하였다. 한편 정릉에서는 출처불명의 유골이 나왔다. #
아무튼 출처불명의 유골이 중종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당시 조정은 생전의 중종을 봤던 노인들[38] 을 수소문해 몽타주를 작성했다. 기록에 의하면 중종은 키가 큰 편이였고 보통의 체격이었는데 정릉의 시신은 풍채가 장대하고 키가 포백척으로[39] 으로 작고, 체격도 다른 편이였다. 정릉에서 발견된 출처불명의 유골은 중종이 아닌가라는 주장이 나왔으나 중종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에 유골은 정릉 근처의 정결한 곳에 묻는 것으로 마무리 했다고 한다. 그 유골이 정말 중종의 시신이었는지 아닌지 확실하게 확인할 방법은 아직은 없다. 임진왜란 때 훼손된 탓에 선릉과 정릉은 시신이 훼손되었거나, 시신이 없는 빈 묘일 가능성이 크다. 중전은 셋을 두었지만 어떤 중전과도 같은 곳에 함께 묻히지 못하고, 능 역시 빈 묘일 가능성을 생각하면 죽어서는 상당히 푸대접을 받는 임금.[40]
이 때문에 그 얼굴이 어떤지 알 길이 영영 없어진 조선 임금이 바로 성종과 중종이다.[41][42] 한국전쟁 종전 이후의 혼란기 속에 부산 용두산 대화재로 그동안 잔존했던 조선 왕들의 어진들이 태조, 세조, 영조, 철종을 제외하고 대부분 타버리는 바람에 어진이 남아있는 (사진이 남아있는 고종, 순종은 제외하고) 조선 임금들의 얼굴을 알 길이 요원해졌으나, 그래도 이 두 사람을 제외하면 일단은 이를 알아낼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무덤을 열어 보는 것. 영국 왕 리처드 3세의 사례도 있듯이 두개골만으로도 그 사람의 생전 모습을 거의 정확히 파악할 수 있으며, 게다가 석회로 두껍게 밀봉되어 있는 조선왕릉 특성상 내부의 시신이 미라화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으므로 이 경우 용안의 어진 복원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된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얘기지, 이를 실행에 옮긴다는 것은 문화재 훼손에 대한 대중들의 반대 및 전주 이씨 종친회의 반발을 생각하면 비현실적이다.
3. 평가[편집]
임금(上)이 선(善)을 좋아하시기는 하나 곧은 말에 대해서 황효헌(黃孝獻)[43]
이 홍문관 박사로 있을 때에 유독 말하기를 ‘임금이 선(善)을 좋아하시기는 하나 곧은 말에 대해서 반드시 자세를 고치고 용색(容色)을 바꾸시니 나는 매우 의심스럽게 여긴다.' 하였는데, 이제 그 말이 과연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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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의 경우 그토록 총애했던 조광조를 기묘사화로 제거했을 땐 조광조의 정적이었던 남곤마저 용서해달라고 하다가[44] 중종이 계속 죽여야 한다고 강조하니 그럼 조광조를 파직하고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하자고 주장했지만[45] , 중종은 홀로 조광조를 사사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계속 피력하여 결국 이뤄내고 만다.[48] 실제 염증을 떠나서, 숙청 직전의 조광조는 이미 중종이 위협을 느낄 정도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림의 견제로 훈구가 무너져 가고, 필연적으로 사림은 성장하는데 그 수장의 역할이 조광조였다. 게다가 조광조는 훈구에 대해 굉장히 공격적으로 대했으며,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과 성종이 대성군이라도 그것만은 실책이라고 비난하며 역적 취급 받을 수 있는 왕의 정통성을 건드릴 수 있는 위험하고 무례한 발언을 하며 이는 중종에게 위기 의식을 가져다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중종은 신하들의 반정으로 왕위에 옹립된 왕이다. 심지어 대신들까지도 조광조에게 반대하더라도, "철이 없어서 마구 날뛰기는 해도 의지는 순수한 후배"라고 보는 듯 내심 좋게 보던 것으로 보이며, 이게 중종에게 더욱 큰 위협으로 다가왔을 것으로 보인다. 당장 대신들까지 조광조의 위훈 삭제에 처음에 반대하다가 찬성으로 돌아선 것이 중종에게 위협적이었는지 조광조 일파를 숙청한 후 중종은 위훈 삭제는 계속 진행하려던 대신들을 대놓고 압박해서 강제로 위훈 삭제를 취소하게 시킨다.전일에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하루에 세 번씩 뵈었으니 정이 부자처럼 아주 가까울 터인데, 하루아침에 변이 일어나자 용서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이제 죽인 것도 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
--중종실록 37권, 중종 14년 12월 16일 병자 2번째기사[* 조광조를 숙청하는 모습을 두고 한 사관의 논평이다. 일반적으로 중종은 우유부단하고 끌려다니는 나약한 군주의 인상이 강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중종반정 직후 ~ 초기 때의 모습이지, 신권의 지나친 비대화로부터 권력을 지키기 위해 왕권을 극단적으로 강화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위선적인 면모를 많이 보인 임금이었다.]
처음에는 조광조를 발탁해 팍팍 밀어주며 개혁을 이뤄보고자 했던 중종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저렇게 돌변하여 그를 죽여버린 것을 보고, 사관들은 "전일에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하루에 세 번씩 뵈었으니 정이 부자처럼 아주 가까울 터인데, 하루아침에 변이 일어나자 용서 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이제 죽인 것도 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라고 씁쓸한 논평을 적어놨다. 또한 남곤이 배후로 억울하게 몰렸을 때, 조광조를 안타깝게 여기는 사관이 중종의 심기를 거스른 조광조를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왜 한 편이던 남곤을 적으로 돌려서..."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렇듯 중종은 자신의 왕권의 위협되는 인물들을 쳐내고 치세가 길어지면서 왕권도 안정됐지만,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도 신하들의 눈치를 너무 보았으며, 결국 과감한 정책 추진을 못했다. 특히 중종은 이러한 정국 주도 능력을 당시 조선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임금의 자리와 권력을 지키기에만 지나치게 몰두를 했다는게 문제점이다. 조광조나 김안로 등 특정인물에게 지나치게 힘을 몰아주었다가 제거하기를 반복하면서 정치 혼란이 되어버린 것이다.[49] 또한 자신은 검소하게 생활하였지만 자식들, 종친들이나 신하들의 사치는 결코 막지 못해서 이로 인한 폐단이 크게 발생했다.
중종 생전에도 평이 엇갈리기는 마찬가지였는지 중종의 사망 후 사관의 평들이 매우 엇갈린다.
사신은 논한다. 상(上)은 인자(仁慈)하고 현명(賢明)하여 세상에 뛰어난 자질로 혼암(昏暗)한 폐조(廢朝)의 시대를 당하여 효도와 우애를 독실히 하고 신하의 도리에 극진하였다. 폐주(廢主)의 난정(亂政)이 더욱 혹독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자 황천(皇天)의 돌보심으로 천명(天命)이 돌아오게 되었다. 신민의 추대를 사양할 수가 없어 드디어 임금의 자리에 오르니 귀신과 사람이 모두 기뻐하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의탁할 곳이 있게 되었다. 중흥한 공적은 너무도 높아서 어떻게 이름지을 수 없다. 즉위한 당(唐)·우(虞)의 다스림에 간절하여 백성을 언제나 불쌍히 여겼고 간언(諫言)을 따르는 데 어김이 없었다. 재위 39년 동안에 치도(治道)를 이루기 위해 근심하고 괴로와한 것이 모두가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사였으니 진실로 세상에 드문 현주(賢主)라 할 수 있다. 애석하게도 인자하고 온화함은 넉넉했으나 과단성이 부족하여 진퇴(進退)시키고 용사(用捨)하는 즈음에 현·불초(賢不肖)가 뒤섞이게 하는 실수를 면하지 못했다. 그래서 군자와 소인이 번갈아 진퇴함으로써 권간(權奸)이 왕명을 도둑질하여 변고가 자주 일어났고 정치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며, 재변이 중첩해서 일어나 삼한(三韓)의 신민이 끝내 다시는 삼대(三代)의 정치를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임금은 있으나 신하가 없다는 탄식이 어찌 한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옛것을 좋아하고 선을 즐기는 정성으로 만일 함께 일을 할 만한 신하를 얻어서 일을 맡기고 소인이 그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였다면 군신이 덕(德)을 함께 하고 시종 서로 신임하여 완성된 미덕(微德)을 이루었으리니, 그 치적이 융성함과 공업(恭業)의 성대함이 어찌 여기에 그칠 뿐이었겠는가.
사신은 논한다. 신(臣)은 상고하건대, 중종 대왕은 공검(恭儉) 인자(仁慈)하시어 재위 40년 동안에 안으로는 성색(聲色)을 즐기는 일이 없었고, 밖으로는 사냥하며 즐기는 데 빠진 적이 없었다. 즉위한 이래로 힘써 치도(治道)를 강구하여, 조야(朝野)가 모두 바라보고 태평을 기약했는데 신하의 보좌를 받을 즈음에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하여, 처음에는 기묘년에 징계되고 나중에는 정유년에 실수하여 조정이 조용하지 않고 붕당을 지어 서로 모함함으로써 드디어는 어진이를 좋아하고 선행을 즐기는 마음이 잠시 열렸다가 끝내 닫혀지고 말았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조광조(趙光祖) 등이 옛것을 사모한다는 이름만 있었고 옛것을 사모하는 실상은 없이 한갓 번잡하게 고치는 것만 일삼았으며 점차로 개선해 나가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배척만을 힘써 자신의 흉중에 품은 생각을 대폭적으로 실행하려 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삼대(三代)의 정치가 진실로 이러한 것인가. 그후로는 비록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을 누가 혹 앞에서 진술하더라도 전후로 징계된 바 있어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청납(聽納)하는 일이 없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아무리 슬기 있는 사람도 뒤끝을 잘 맺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잘못을 추구해보면 모두가 기묘년 사람들이 단서를 열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인후(仁厚)한 성덕(聖德)으로 부지런하고 공손하게 상국을 정성으로 섬기고, 백성들의 질고(質苦)를 잘 알아 크고 작은 고통을 어루만져 구휼함에 힘입어 나라 안이 소생되고 원망이 없어졌으니, 참으로 중흥의 성군이라고 할 만하다. 묘호(廟號)를 중종(中宗)이라 하였으니 그 또한 이 때문인가 보다.
중종의 평을 두고 통일된 의견이 없이 참 다양하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건 오직 겉으로는 인자하다는 것 뿐이다. 그럼에도 평은 미완의 현군, 중흥의 성군, 혼군, 비정한 임금 등 극단적으로 갈리니 중종은 당대에도 논란이 많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사신은 논한다. 상은 인자(仁慈)하고 유순(兪順)한 면은 남음(濫音)이 있었으나 결단성이 부족하여 비록 일을 할 뜻은 있었으나 일을 한 실상이 없었다. 좋아하고 싫어함이 분명하지 않고 어진 사람과 간사한 무리를 뒤섞어 등용했기 때문에 재위 40년 동안에 다스려진 때는 적었고 혼란한 때가 많아 끝내 소강(小康)의 효과도 보지 못했으니 슬프다.
사신은 논한다. 인자(仁慈)하고 공검(恭儉)한 것은 천성에서 나왔으나 우유부단하여 아랫사람들에게 이끌리어 진성군(甄城君)을 죽여[50]
형제간의 우애가 이지러졌고, 신비(愼妃)를 내치고 박빈(朴嬪)을 죽여 부부의 정이 없어졌으며, 복성군(福城君)과 당성위(唐城尉)[51] 를 죽여 부자간의 은의(恩義)가 어그러졌고, 대신을 많이 죽이고 주륙(誅戮)이 잇달아 군신의 은의가 야박해졌으니 애석하다.
--중종실록 105권, 중종 39년 11월 15일 경술 12번째기사
--유시에 상이 환경전 소침에서 훙하다(중종의 졸기)
다만, 이런 어중간한 평가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중종이 우유부단하다는 의견을 주기도 했다.
4. 기타[편집]
- 6조 직계제를 의정부서사제로 다시 되돌린 왕이다. 조선은 정도전이 구상한 왕권과 신하의 권력이 조화를 이루는 나라를 만들고자 의정부서사제를 실시했으나, 무인정사로 왕좌를 찬탈한 태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6조 직계제를 시행했고, 세종이 다시 의정부서사제로 되돌렸으나, 계유정난으로 왕좌를 찬탈한 세조가 또 다시 6조 직계제를 시행한 후,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때까지 이어졌는데, 중종이 다시 의정부서사제로 되돌렸고, 이후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바뀔 때까지 왕권 지상주의의 6조 직계제가 부활하지 못하고 왕권과 신하의 권력이 조화를 이루는 의정부서사제로 운영되었다.
- 막내 딸 인순공주를 제외하고는 딸 11명의 이름이 전부 알려져있는데 조선 왕조에서 한 왕에게서 태어난 왕녀들의 이름 대부분이 알려진 경우는 중종이 유일하다. 적녀들은 옥(玉)□으로 지었고 서녀들은 □환(環)으로 지었다.
- 아들 인종이 세조의 경우처럼 묘호를 조(祖)로 바꾸어 "중조(中祖)''로 격상시키도록 명했으나, 신하들이 송 고종이 중흥하였으나 송 휘종의 아들로서 바로 대통을 이어받았다는 사유로 고조가 아닌 고종으로 칭해진 역사가 있고[54] 세조의 경우 형 문종의 왕위를 동생으로서 이어받은 경우이므로 성종의 왕위를 아들로서 이어받은 중종의 경우와는 다르다고 반대했다. 이에 인종은 부왕이 성종의 아들이지만 사이에 폐왕이 있으니 문종과 세조의 사이에 노산이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반박했으나, 결국 중조로 격상되지 못했다.
- 사관에게 비판당한 적이 있다. 당시 중종의 딸 효정옹주가 병으로 사망한 직후였는데, 중종은 부마인 조의정의 과거일까지 꺼내며 욕을 했다.[55] 이에 대해 한 사관이 "조의정도 죄가 있기는 하지만 왕의 행동이 너무 과하고, 한 나라의 임금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는 내용의 글이 중종실록 102권, 중종 39년 2월 21일 경인 2번째기사에 적혀있다.
- 중종은 이복형 연산군의 자식이자 자신의 조카에게도 많은 배려를 베풀었다. 중종반정 이후 신하들이 훗날의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폐세자 이고를[56] 비롯한 연산군의 아들들을 죽이라고 상소하자, 아이들이 아직 어린데다가 조카들을 죽이는 행위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어떻게든 조카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신하들의 의견이 거세시자 결국 연산군 아들들의 사형을 허락하면서도 조카들의 장례만이라도 제대로 치러주라고까지 했다. 연산군의 장녀인 휘신공주가 '폐주의 딸'이라는 이유로 시댁에서 내쳐지자 조카를 가여워한 중종이 도움을 주어 휘신공주는 남편과 화해하고 재결합을 할 수 있었다. 중종은 휘신공주뿐만 아니라 연산군의 다른 딸들도 나름 피해를 입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했다.
- 설상가상으로 중종의 치세 때, 조선은 이민족의 침략을 자주 받았다. 세종과 세조 때에 평정된 여진족들이 북방에서 다시 힘을 회복하여 조선의 북방을 괴롭혔고, 남방에서는 왜구의 침략이 잇달았는데, 왜구의 침략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삼포왜란이다. 비변사[57] 가 생겨난 것도 이 때.
- 명으로 보낼 공녀를 차출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중종실록 42권, 중종 16년 6월 2일 임오 1번째기사
- 1533년에 한성에서 6살의 노비 여아가 괴한에게 발목이 절단된 상태로 길거리에 방치된 용산 소아 발목 절단사건이 발생하자 대노하여 국문을 주도하였다. 조선에서는 역모 사건이 아니면 왕이 국문을 명령할 수는 있어도 주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중종 이전에 연산군도 그렇고 훗날 봉산옥사와 계축옥사를 직접 주도한 광해군도 국문을 주도하였다. 중종은 "백성을 구휼하는 것은 정사 중에 가장 먼저 할 일이다. 이같은 어린 아이를 구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은 없다."라고 말하며 피해자를 위하여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처음이는 동상에 걸려서 발이 절단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절단된 부위가 칼처럼 정교한 물질에 베인 것이 명확해서 중종은 수사를 지속하라고 명하였다. 피해자는 범인을 알고 있었고 포도대장에게 진술하였지만 10세 이하의 증언은 증거로 채택할 수 없어서 결국 범인은 체벌받지 않았으며 사건은 그렇게 흐지부지되며 종결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왕조실톡에서도 다루었다.#
- 모든 군, 공주, 옹주의 집이 궁궐에 비길 정도로 왕실의 사치가 오늘 같은 때가 없었다면서 실록에서 사관들이 비판할 만큼 동역하는 관원들이 사치를 숭상하여 자신들의 재능을 과시하기 위해 서로 앞다투면서 출궁한 자녀들의 집을 호화스럽게 꾸며 문제가 되었다.# 그 중 적장녀 효혜공주는 중종의 잠저 시절 본궁[58] 을 하사받았고,# 적차녀 의혜공주의 집은 훗날 동생 명종이 감탄할 정도였다.
- 세자궁에 불이 나서 세자가 타 죽을 위험에 처한 적이 있었다. 세자빈이 세자에게 빨리 나가자고 청했으나 세자는 이 화재가 자신을 미워한 계모 문정왕후가 한 짓이라고 생각했고 살아나가도 어차피 문정왕후의 심기를 건드려서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라고 여겨서 나가지 않고 세자빈과 함께 그대로 타 죽으려고 했다. 그런데 세자궁에 화재가 났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 중종이 의관도 갖추지 않고 잠옷 바람으로 달려가서 세자를 애타게 부르자 이를 듣고 마음을 바꾸어 세자궁을 탈출했다는 일화도 있다.[59]
- 효정옹주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어서 중종이 가장 신경쓰고 애착하였다고 한다. 효정옹주는 숙원 이씨 소생이었는데 조의정에게 시집가게 된다. 효정옹주가 못생겼다는 이유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조의정은 효정옹주를 소박놓고 효정옹주가 궁에서 데려온 몸종 풍가이를 더 사랑해서 첩으로 삼는다. 부마는 첩을 들이지 못하는 법을 어긴 것으로 중종은 조의정을 꾸짖었으나 조의정이 태도를 고치지 않자 풍가이를 함흥으로 귀양보내려고 마음먹는다. 이 와중에 효정옹주는 중종에게 2번이나 찾아가 선처를 부탁하는데 중종은 효정옹주에게 "부녀로서 질투가 없다는 것은 진짜 정(情)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풍가이는 귀양을 갔으나 조의정이 왕명에 불복하면서 가지 않았으며 조의정이 풍가이와 비슷하게 생긴 다른 몸종을 대신 귀양보내고 풍가이는 빼돌려 자신의 고향에 숨겨두고는 모친의 집에 간다는 핑계로 꾸준히 만난다. 이는 명백히 왕명을 어긴 것이나 효정옹주가 함구하였으므로 조의정의 목숨이 붙어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효정옹주는 출산한지 15일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이 때 조의정은 효정옹주가 난산한 이래 15일 동안이나 왕에게 보고하지 않다가 사망 직전에서야 비로소 보고하였으며 중종이 효정옹주를 구하기 위해 의녀를 보냈으나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논란이 되었고 풍가이가 버젓이 한양에 머무르며 조의정의 첩 노릇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다. 중종은 이에 빡쳐서 조의정과 풍가이에게 중벌을 내리려고 했으나 조의정은 부마를 지냈다는 이유로 재산을 몰수한 뒤 귀양형으로 끝날 수 있었다. 풍가이의 경우 11번의 국문 끝에 장 100대와 귀양형[60] 을 내렸다. '조의정이 효정옹주를 죽이고 풍가이를 정처로 앉히려 했다'는 소문까지 있었기 때문에 중종의 분노는 대단했는데 중종은 풍가이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으나 풍가이가 과거 몸이 편찮은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손가락을 잘라 먹인 일로 동정심을 느낀 신하들이 목숨만은 살려주기 위해 간청했기에 감형된 것이었다. 그러나 풍가이는 직후 상궁 은대[61] 에게 납치당한 뒤 10여 일 동안 갇히는데 풍가이가 죽지 않자 은대는 하인을 시켜 풍가이의 장 맞은 곳을 지속적으로 때리게 하였고 결국 후유증으로 20일 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에 신하들은 은대에 대한 처벌을 촉구했으나[62] 중종은 은대의 벌을 미적지근하게 처리했고 신하들의 상소로 마지 못해 은대를 유배보냈지만 중종 사후 문정왕후에 의해 방면된다.[63] 중종이 조의정의 목숨을 거둘 수 없었던 것은 당시에 이미 조의정과 효정옹주 사이에 낳은 5살 아들이 있었고[64] 조의정의 아버지인 조침은 요직을 두루 거친 정치거물이었기 때문이었다.
- 쫀쫀한 면도 있고 변덕이 심해서 자질구레한 일에도 참견이 심했다고 한다. 군 열병식을 할 때에도 병사들로 하여금 여기 모이라고 했다가 저기 모이라고 했다가 '아니, 아니 다시 저쪽에 서 봐라' 라면서 제멋대로 변덕을 부리기도 했고, 오래 재위하면서 궁궐 행사나 의례 등의 규칙, 절차에 대해 도통하게 되면서 행사 접전 중에 조그마한 실수가 발견되면 그 자리에서 뭐가 틀렸다고 꼬치꼬치 따지며 아랫사람들을 마구 갈궜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공사가 있으면 현장에서까지 가서 둘러보고 확인해가며 잔소리를 해대고 행차를 할 때면 내구마(왕이 타는 말)들을 모조리 끌어내어 쉴새 없이 바꿔 타곤 했다. 그러다가 자신이 탄 말이 맘에 안들면 괜히 아랫사람들에게 괜히 잔소리를 해댔고 담당자를 처벌했을 정도.
- 심각한 만성 치통을 앓았다고 전해진다. 중종 14년(1519년) 음력 6월 16일 기사에는 중종의 잇병, 즉 치통에 관해서 처음 언급된다. 이때부터 시작된 치통은 중종의 재위 기간 39년 중 무려 25년 동안이나 그를 괴롭혔다고 한다. 특히 중종이 죽기 4개월 전인 중종 39년(1544) 6월 29일자 중종실록 기사에서는 아픈 이가 빠지고 다른 이도 아프며 진물이 흐른다고 기록이 있는데 통증의 원인을 긁어내는 조치를 취하지 못한 이상, 중종은 최소 25년을 끔찍한 고통을 계속해서 겪었을 것이다.[65][66]
- 재위하는 도중 기형 동물이 많이 태어나기도 했다. 중종 5년, 경상도 김해에서 오른쪽 앞다리에 다리 하나 더 달린 송아지가 태어났고 재위 10년째에는 한 달도 안되는 사이에 다리가 5개 달린 수송아지가 태어나기도 했으며, 11년엔 전라도 해남에서 머리에 얼굴 2개가 붙어있는 송아지가 태어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평안도 상원군에서는 머리는 1개인데 다리는 8개, 콧구멍이 4개, 귀는 3개, 등뼈는 2개, 꼬리는 2개, 배꼽 아래로는 몸이 갈라져 꽁무니가 2개인 송아지가 태어나기도 했다. 같은 해에 충청도 대흥현에서는 발이 6개 달린 송아지가 태어난 바 있다. 재위 24년과 25년에도 기형 송아지가 출생했다고 한다. 또한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는 괴이한 일도 수차례 일어났는데 대간들은 이러한 괴변의 원인이 중종이 부도덕해서 그렇다며 중종을 까내렸다.
- 식중독 사태가 2차례 발생한 일이 있었다. 중종 20년 세자가 수업을 마치고 나서 익위사[67] 에 음식을 내렸는데, 이 음식 가운데 포육을 먹은 관원 조광원이 식중독 증상을 보였다고 한다. 또한 같은 음식을 먹은 하인들 중에서도 같은 증상을 보고가 있었다. 사옹원 제조 윤희인은 독이 있는 포육이 아니라면 반드시 독충이 오줌을 싸서 그런 것이니 각 도에 포육을 만들 때 청결하자고 건의하며 대책을 보고하였다. 이에 중종은 식중독을 유발한 포육이 어디에서 진상된 것인지 확인하고 만약 남은 음식이 있다면 하인들에게 다시 시험해 보라는 명을 내렸다. 이후 임상실험? 대상인 하인들은 다행히도 남은 음식을 먹어도 식중독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우부승지 이환은 포육과 함께 닭고기를 먹은 사람들이 식중독에 걸렸다면서 닭이 지네를 먹으면 독이 있다는 말을 들었고 이에 따라 지네를 다스리는 약으로 치료하자 사람들이 닭고기를 전부 토하면서 병이 나았다면서 이번 식중독의 원인이 포육이 아닌 지네를 먹인 닭이 의심된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중종은 포육은 하인들에게 임상실험 할 때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추문할 근거가 없지만 닭고기를 섞어서 식중독이 발생했다면 문제가 된다고 생각했고 만일 닭고기만 먹었다면 의심할 것이 없지만 포육도 함께 먹었으니 이에 대해 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보였다. 한편 대간들 사이에서 포육을 진상한 지방의 도 관찰사와 담당 관원들의 처벌을 요구하였는데 이에 중종은 지방에서 한양으로 포육을 진상하면 이를 모두 섞어서 보관하기 때문에 출처를 알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식중독 사태에 관련해서 음식관리를 담당하는 감선제조와 내관,선부에 대한 조사와 닭고기의 식중독 가능성에 대해 조광원 이외에 다른 사람들도 증상이 동일한지 알아보라는 지시를 하였다. 며칠 후 승정원 관리들은 초반에는 포육을 식중독의 원인이라고 말하였다가 나중에는 포육에서 닭고기로 결국 돌고돌아 포육으로 식중독의 원인으로 의심된다고 말하며 이에 대해 사관은 말바꾸기에 대해 비난을 하였다고 한다. 여하튼 결국 포육으로 의심되는 식중독 사태의 진상은 밝히지 못하며 흐지부지되었다.
- 1514년(중종 9)에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 1518년(중종 13)에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편찬하였다.
5. 가계[편집]
5.1. 친가(전주 이씨)[편집]
5.2. 배우자/자녀[편집]
- 정비: 단경왕후 신씨
-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
-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
- 후궁: 경빈 박씨
- 후궁: 희빈 홍씨
- 후궁: 창빈 안씨[73]
- 후궁: 귀인 한씨
- 왕자
- 후궁: 숙의 홍씨
- 후궁: 숙의 이씨
- 후궁: 숙의 나씨 - 출산 중 사망
- 후궁: 숙의 김씨
- 숙정옹주
- 후궁: 숙원 이씨
6. 대중매체[편집]
6.1. 드라마[편집]
- 1996년 KBS 드라마 《조광조》에서는 배우 이진우가 연기했다. 조광조의 도학 정치를 지지하다가 조광조를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자 결국 죽이는 우유부단한 임금으로 나온다. 드라마는 정사와는 거리가 있는 전개를 보여주는데 중종이 평생 단경왕후 신씨만을 사랑했다는 야사를 채택해 중종이 왕권을 세우고 도학 정치를 펴려던 시도 역시 단경왕후를 다시 복위시키기 위한 것으로 해석[75] 했다. 이 과정에서 '단경왕후 복위'라는 안건에 동의하지 않는 조광조와 끝까지 맞서 그를 설득시키지 못하고 결국 죽여버린다. 드라마 내내 사춘기 소년 같은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보여주는데 의외로 누르고 참았다가 결국 자기 의사를 관철하고야 마는 중종의 다크 사이드를 제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정상적인 정치 행위보다는 반은 눈물과 애원, 나머지 반은 분노와 저주. 극 중에 묘사되는 단경왕후 신씨와의 사랑이 애절하기는 하다.
-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배우 최우혁[76] 이 연기했다. <왕과 비>가 끝나기 채 몇 회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 등장한데다 비중 또한 적다는 것이 함정. 할머니 인수대비에게 유일한 적통 왕자로 인정받지만 이복형 연산군에게 허구한날 호구잡혀 내리갈굼당하는 불쌍한 신세로 묘사된다.
-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배우 최종환[77] 이 연기했다. "그 입 다물라! 다물라! 다물라!"는 대사로 유명하며 주로 조정 대신들에게 외치지만 치부책 에피소드의 일부인 제75화에서 정난정에게도 시전한다. 문정왕후, 경빈 박씨 등의 여인들과 조정 권신들에게 끌려다니는 임금으로 그려진다.
- 2003년 MBC 드라마 《대장금》에서 배우 임호가 연기했다.[78] 중종이 제일 긍정적으로 나온 드라마다. 여기서는 미식가 임금이자 사상 최초로 여성을 어의를 임명하는 대범한 임금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드라마 초기에는 "맛있구나" "맛이 아주 좋구나" "이 음식은 ~하고…" 하는 식의 대사밖에 없어서 시청자들에게 "저 놈은 왕이냐 심사위원이냐"라는 불평을 듣기도 했다.[79] 임호도 그 날 메뉴가 무엇인지만 알면 자기 대본은 거의 다 외운 것이나 다름 없었다고 한다.[80] 다만, 드라마의 내용이 내용인지라 중종의 정치에 대해서 그리는 내용은 없다. 그나마 진성대군 시절 역모에 휘말리는 내용이 정치적인 장면의 전부이며, 후반부에는 민정호와의 삼각관계를 그리며, 질투 많은 서브 남주인공 역할이라서 왕으로서의 모습은 거의 그려지지 않았다.
- 2017년 SBS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는 배우 최종환이 연기했다.[81]
- 2017년 KBS 드라마 《7일의 왕비》에서는 배우 백승환(아역)과 배우 연우진이 연기했다.[82] 한국 드라마 역사상 처음으로 드라마에서 주인공 역할로 등장한 만큼 실제 역사나 다른 드라마 속에서 그려진 중종과는 크게 다른 부분이 많다. 우선 대부분의 드라마에서는 최소 30대 이상으로 나오며 이미 왕위에 등극한 상태로 등장하거나 왕이 되기 전 진성대군 시절만 그려지고는 했으나 여기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 시절부터 중종 즉위 이후까지 폭넓은 연령대가 다뤄졌다. 사실 그동안 중종이 드라마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았던 이유는 한 작품의 주인공이 될만큼 매력적인 인물이 아니라고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지만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한 이역(중종의 본명)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그려졌다. 어려서부터 한 여자[83] 밖에 모르는 로맨티스트[84] 이며 친구들과의 우정을 목숨처럼 여기는 인물로 나왔다. 그동안 중종은 역사적 기록을 비롯해 여러 작품으로 인해 왕이 될 의지가 하나도 없고 준비도 안 되어 있는데 반정 공신들 때문에 왕이 되어서 공신들 눈치나 보다가 조강지처도 못 지킨 한심하고 유약한 인물로 인식돼 왔지만 이 작품 속에서는 처음부터 왕이 될 생각이 없었던건 역사와 동일하지만 절대 유약한 인물도 아니고 오히려 연산군 앞에서 기죽지 않고 할 말 있으면 다 하는 카리스마 있는 캐릭터.[85] 왕이 되는 과정도 실제 역사와 정반대로 그려지는데 여기에서는 직접 반정 군사들을 이끌고 들어가 연산군을 벌한다. 때문에 역사에서는 반정 공신들이 중종과 단경왕후를 억지로 헤어지게 하고 중종은 끽 소리도 못 하고 반정 공신들의 요구에 따르지만 작중에서는 이런 요구를 하는 대신들을 중종이 카리스마로 제압한다.[86]
6.2. 영화[편집]
6.3. 기타[편집]
- 애니메이션 신비아파트 특별판: 조선퇴마실록에 등장하는 500년 전 조선 국왕 순훤왕의 모티브다.
7. 관련 문서[편집]
- 간이벽온방언해
- 고양 원각사 달마대사관심론
- 기묘사화
- 김안로
- 단경왕후
- 대전후속록
- 명종
- 문정왕후
- 복성군
- 백자 철화매죽문 항아리
- 사림
- 사성통해
- 성종실록
- 성종(조선)
- 연산군
- 인종(조선)
- 작서의 변
- 장금
- 정릉
- 정현왕후
- 조계진각국사어록
- 조광조
- 조선/왕사
- 중종반정
- 중종실록
- 치통
- 중종 시기의 괴수 출현 소동
- 용산 소아 발목 절단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