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북양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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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북양정부(北洋政府, Beiyang government)는 베이징을 수도로 하는 중화민국의 과도정부였다. 북양정부라는 이름의 유래는 초대 대총통 위안스카이가 영도한 군벌인 북양군벌이다.
2. 국기[편집]
다섯 개의 색깔이어서 오색기라고 한다. 공모를 통해 선정되었는데, 그 중 쑹자오런이 고안한 이 깃발을 1912년 1월 난징에서 중화민국 임시의회가 정식 국기로 제정하였다. 공모했었던 여러 깃발 중에서 쑨원이 고안한 청천백일기는 훗날 국민정부 수립과 함께 국기로 채택되기에 이른다.
붉은색은 한족, 노란색은 만주족, 파란색은 몽골족, 흰색은 위구르족, 검은색은 티베트족을 상징한다.[7] 중국을 한족의 국가가 아닌 소위 한만몽회장(漢滿蒙回藏), 즉 다섯 개의 민족이 연합된 국가로 규정하는 오족공화의 사상에 짙은 영향을 받았다.
사실 이 오색기는 긴 역사를 가진 상징이다. 기록에 따르면 수나라 때부터 5가지 색의 군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오행, 즉 나무(청색) 불(홍색), 흙(황색), 쇠(백색), 물(흑색)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오색기는 당나라 때도 사용되었는데, 5개의 서로 다른 깃발이 아닌 한 깃발 안에 5가지 색이 들어있는 형태로 진화하였다. 오색기가 오행만이 아닌, 다민족국가를 의미하게 된 건 정복왕조인 원나라 때부터였다. 이후 명, 청 대까지 오색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되고 활용되어 점차 군기와 국기의 역할을 겸하게 되었다.
3. 국가[편집]
3.1. 오족공화가[편집]
쑨원이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을 당시부터 북양정부 초기까지 쓰였던 국가.
3.2. 경운가[편집]
자세한 내용은 경운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가장 오랫동안 쓰인 국가이며 '북양정부 국가'라고 하면 대개 경운가를 칭한다.
3.3. 단호하게 선 조물주, 중국이여![편집]
위안스카이의 홍헌제제 이후 쓰였던 국가.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이후에도 유지되었다가, 1921년 다시 경운가로 복귀하였다.
4. 역사[편집]
쑨원으로부터 대총통직을 받고 북양정부 수립을 완료한 위안스카이는 수도를 베이징에 두었으며, 독재 체제를 굳히려는 양상을 보였다. 그는 안으로는 혁명가들을 탄압하였으며, 밖으로는 열강들에게 너무 많은 이권을 주어 점차 국민들의 반발을 산다. 대총통에 집권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고문들과 장남 위안커딩의 권유로 이전부터 꿈꿔왔던 황제의 꿈을 실현시켰다. 중화민국을 중화제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수많은 중국인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심지어 측근들도 대부분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가족들조차 위안커딩을 제외하면 모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더 나아가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열강들 반발에도 직면하였다. 결국 1915년 12월 25일에는 운남군벌의 량치차오, 차이어, 탕지야오 등이 합세하여 토원 봉기가 일어나는 등 봉기가 전국으로 퍼져 호국전쟁이 발발하자 3월 23일 제정을 취소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측근들의 배신과 하야 압력에 요독증이 악화되어 6월 6일 사망했고 그 뒤를 이은 대리총통 리위안훙은 임시약법과 구국회의 회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헌법 제정 문제로 국회 내부의 정쟁이 이어졌고 부원지쟁과 장훈복벽을 거쳐 중화민국 국회가 다시 전복되면서 호법전쟁 등 남북 내전이 이어졌다. 북방에서는 북양정부의 권력을 쥐기 위해 북양군벌에서 갈라진 계파인 직예군벌, 안휘군벌, 봉천군벌 등이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아귀다툼을 벌이며 중앙에서 대립했다. 그리고 각 지방에서는 지역 군벌들이 난립하여 내전을 이어갔고,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이 1928년까지 이어졌다. 1919년 외몽골 출병을 통해 외몽골을 다시 복속시키는 등 성과가 없지는 않았지만 이마저도 1921년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세력에게 장악되어 다시 상실하고 만다.
1926년 장제스의 북벌이 시작되면서 북양정부를 치기 위해 북상했고, 이에 북양군벌들의 계파는 급하게 연합전선을 결성하여 대응했다. 국민당은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잠시 분열되었으나 곧 영한합작을 통해 난징 국민정부로 통합하였고 1928년 펑위샹, 옌시산 등과 힘을 합쳐 2차 북벌에 나섰다. 결국 장쭤린은 수도를 봉천으로 옮긴다고 선포한 후 내각을 거느리고 본거지인 만주로 퇴각하다가 관동군의 고모토 다이사쿠, 도이하라 겐지 등이 일으킨 황고둔 사건으로 암살당했다. 그 뒤를 이어 장쉐량이 봉천군벌의 지도자가 되지만, 국민당과 일본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다 결국 장제스에게 복종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동북역치로 국민정부에 합류함으로 북양정부는 완전히 소멸했다.
5. 주요 사건[편집]
- 1911년 신해혁명
- 1912년 청나라 멸망, 중화민국 수립.
- 1912년 8월 16일 장전우 사법살인 사건
- 1912년 8월 24일~9월 25일 쑨원-위안스카이 회담
- 1913년 3월 20일 쑹자오런 암살 사건
- 1913년 4월 25일 선후대차관 사건
- 1913년 7월 12일 계축전쟁 발발, 2개월 만에 진압.
- 1913년 10월 10일 위안스카이 대총통 취임.
- 1914년 1월 10일 중화민국 국회 해산
- 1914년 5월 1일 신약법 발표.
-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
- 1915년 12월 25일 호국전쟁 발발
- 1916년 3월 23일 중화제국 취소.
- 1916년 6월 6일 위안스카이 사망.
- 1916년 7월 14일 국무원 취소, 호국전쟁 종결.
- 1916년 8월 1일 국회 개막.
- 1917년 7월 1일 장훈복벽
- 1917년 7월 12일 장훈복벽 진압.
- 1917년 7월 14일 돤치루이 내각 재출범.
- 1917년 7월 17일 쑨원이 광저우로 남하하여 1차 호법운동 전개.
- 1917년 8월 호법정부 창설.
- 1917년 9월 호법전쟁 발발
- 1918년 11월 호법전쟁 종결
- 1919년 5월 4일 5.4운동이 일어나다.
- 1919년 11월 외몽골 출병
- 1920년 7월 14일 안직전쟁 발발.
- 1920년 7월 19일 돤치루이 하야.
- 1920년 7월 23일 안직전쟁 종결.
- 1920년 11월 28일 쑨원이 천중밍의 도움으로 광저우에 돌아옴. 2차 호법운동 전개.
- 1922년 홍콩 선원 대파업 사건
- 1922년 제1차 직봉전쟁(봉직 전쟁), 장쭤린이 우페이푸에게 패퇴.
- 1922년 6월 16일 영풍함 사건
- 1922년 11월 18일 뤄원간 사건
- 1923년 2월 7일 2.7 사건
- 1923년 2월 21일 쑨원이 광저우에 돌아옴.
- 1923년 담조전쟁
- 1923년 10월 회선 사건
- 1924년 9월 3일 강절전쟁 발발.
- 1924년 9월 17일 2차 직봉전쟁 발발.
- 1924년 1차 국공합작
- 1924년 광저우 상단 사건
- 1924년 9월 강절전쟁
- 1924년 9~11월 2차 직봉전쟁
- 1924년 10월 23일 북경정변
- 1924년 11월 핍궁사건
- 1924년 12월 제노전쟁
- 1925년 2~4월 선후회의
- 1925년 2~3월 국민당의 1차 동정
- 1925년 객군 반란
- 1925년 8월 20일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 1925년 10월 국민당의 2차 동정
- 1925년 손봉전쟁.
- 1925년 반봉사건
- 1926년 1월 직봉풍전쟁
-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
- 1927년 장쭤린의 대원수 취임.
-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
- 1928년 황고둔 사건, 장쭤린 사망.
- 1928년 동북역치
6. 관련 인물[편집]
6.1. 역대 국가원수[편집]
자세한 내용은 중화민국 국가원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2. 역대 부총통[편집]
자세한 내용은 중화민국 부총통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3. 역대 정부수반[편집]
자세한 내용은 중화민국 역대 국무총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4. 정치가[편집]
6.5. 국민당[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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