쥘 반도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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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 반도렌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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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에티엔 마틀레르
(1938~1940)

쥘 반도렌
(1942)

알프레드 아스통
(1944~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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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파일:세네갈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2대


파일:Jules Vandooren.jpg
이름
쥘 반도렌
(Jules Vandooren)
출생
1908년 12월 30일
사망
1985년 1월 7일
국적
[[프랑스|

프랑스
display: none; display: 프랑스"
행정구
]]

출신지
아르망티에르
포지션
풀백
신체조건
180cm / 77kg
등번호
-[1]
소속팀
올랭피크 릴루아 (1927-1939)
레드 스타 파리 (1939-1941)
스타드 드 랭스 (1941-1943)
아라고 스포르트 오를레앙 (1943-1948)
SM 캉 (1949-1952)
감독
스타드 드 랭스 (1941-1943)
아라고 스포르트 오를레앙 (1943-1948)
SM 캉 (1949-1952)
ARA 르강투아 (1952-1956)
아라고 스포르트 오를레앙 (1956-1959)
릴 OSC (1959-1961)
세네갈 대표팀 (1961-1963)
UA 스당토르시 (1963-1964)
아라고 스포르트 오를레앙 (1964-1966)
RCS 부르주아 (1966-1967)
KAA 헨트 (1967-1971)
로얄 엑셀 무스크롱 (1971-1972)
국가대표
22경기 0골 (1933-1942)

1. 개요
2. 생애[2]
2.1. 어린 시절
2.2. 선수 생활
2.2.1. 클럽
2.2.2.1. 데뷔 그리고 1934년 월드컵
2.2.2.2. 월드컵 출전을 위한 노력
2.2.2.3. 이후의 대표팀 생활
2.3. 감독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4. 수상
4.1. 클럽
4.2. 감독



1. 개요[편집]


프랑스의 전 축구선수.


2. 생애[3][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반도렌은 1908년에 프랑스 북부의 아르망티에르(Armentières)에서 태어났다. 반도렌이 5살 되던 해인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졌고 반도렌의 가족들은 파리 남부 교외 지역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어린 시절 반도렌은 운동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고 여러 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 중에서 그의 아버지는 그가 축구를 하길 원했고 SC 초이시(SC Choisy)라는 클럽에서 반도렌은 축구를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후 반도렌과 그의 가족들은 아르망티에르로 다시 돌아갔고 반도렌은 JA 아르망티에르 유소년 팀에 소속되었다. 그러다 올랭피크 릴루아가 반도렌을 주목했고 1927년부터 반도렌은 릴의 선수가 되었다.


2.2. 선수 생활[편집]



2.2.1. 클럽[편집]



2.2.1.1. 올랭피크 릴루아[편집]

반도렌이 릴에 입단할 무렵, 릴의 회장으로 헨리 요리스(Henri Jooris)라는 사람이 있었다. 요리스는 사업가인 동시에 프랑스 북부 지역 리그의 회장이면서 프랑스 축구 연맹의 부회장이기도 했는데 그의 목표는 릴을 프랑스 북부 축구계 최강의 클럽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목표에 걸맞게 릴은 북부 지역 리그에서 2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1932년, 프랑스 축구계가 프로화되면서 전국 리그가 출범했고 릴은 새 감독으로 벨기에 출신의 로베르 더페인(Robert de Veen)을 앉혔다. 그리고 릴은 이 시즌에 디비지옹 1 원년 챔피언이 되었다. 10번째 경기에서 반도렌이 빠진 채 릴은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에 0대7로 대패하기도 했지만 결국 마르세유보다 위의 성적으로 리그를 마쳤고 최종전에서 AS 칸을 4대3으로 꺾고 우승을 확정지었다.

그 이후 10년 동안 릴은 디비지옹 1 우승을 다시 차지하진 못했지만 뛰어난 선수들[4]과 함께 꾸준히 디비지옹 1 상위권에 자리했고 수비가 강한 팀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 평가에 반도렌의 활약이 지대했음은 당연했다.

반도렌은 12년간 릴에서 뛰면서 릴에서 가장 많은 경기를 출전한 선수가 되었고 1938-39 시즌의 쿠프 드 프랑스 준우승을 끝으로 12년의 릴 생활을 마감했다.


2.2.1.2. 레드 스타 파리[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프랑스 축구계도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전국 리그는 중단되었고 많은 클럽들 역시 경기를 제대로 치를 수 없었다. 반도렌은 레드 스타 파리로 이적했다.

레드 스타의 설립자는 FIFA 월드컵의 아버지 쥘 리메였으며 당시 감독은 초대 월드컵 당시 득점왕으로 유명한 기예르모 스타빌레였고 반도렌은 플레잉 코치로 스타빌레 감독을 보좌했다. 1940년에는 올랭피크 릴루아 시절 동료였던 줄리앙 다뤼가 레드 스타에 건너왔고 나중에 감독으로 더 유명해지는 엘레니오 에레라도 이 팀 소속이었다.

반도렌은 레드 스타에서도 지역 리그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지만 1941년 오프 시즌에 스타드 드 랭스로 이적했다.


2.2.1.3. 스타드 드 랭스[편집]

1941년, 32세의 반도렌은 스타드 드 랭스주장이자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평소에는 다른 선수들과 같이 훈련하고 쉬는 날에는 클럽을 돌보는 등 과중한 업무의 연속이었다.

랭스에도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고 팀은 쾌조의 스타트를 끊었다. 반도렌의 직전 소속팀 레드 스타 파리를 만나서 패배하기 전까지 7경기에서 5승 2무를 기록했다. 이후에는 부상 선수들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여 다소 팀이 주춤했지만 결국 레드 스타 파리를 제치고 ocupeé 대회 우승을 거뒀다.

반도렌이 랭스에 있을 때 친정팀 릴 OSC가 계속 반도렌의 복귀를 희망했지만 프랑스 축구 연맹의 거부로 이뤄지진 않았다. 1942-43 시즌에는 5위로 성적이 떨어졌고 반도렌은 3월에 랭스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선수로는 시즌이 끝날 때까지 남아있었다.


2.2.1.4. 아마추어[편집]

랭스를 떠난 반도렌의 다음 행선지는 아라고 스포르트 오를레앙(Arago Sport d'Orléan)이었다. 오를레앙은 지역 아마추어 대회 5연패라는 성공적인 성과를 냈다.

반도렌은 선수 겸 감독으로 오를레앙을 이끌었고 1945년에 오를레앙은 쿠프 드 프랑스에 참가해서 8강까지 갔다. 8강에서 라싱 클뢰브 드 프랑스에 패했지만 16강에서 레드 스타 파리를 꺾는 등 충분히 좋은 성과였다.

반도렌은 41세이던 1949년 또 다시 SM 캉으로 팀을 옮겼다. 이 무렵 프랑스의 새로운 아마추어 챔피언십이 창설되었고 1949년과 1950년에 캉은 우승컵을 들었다.

1952년, 반도렌은 26년간의 축구 선수 커리어를 마무리했고 캉의 감독직에서도 물러났다.


2.2.2. 국가대표[편집]



2.2.2.1. 데뷔 그리고 1934년 월드컵[편집]

올랭피크 릴루아디비지옹 1의 첫 우승을 향해 순항하고 있을 무렵, 반도렌은 당시 프랑스 대표팀의 감독 가스통 바로의 눈에 띄었다. 그리고 1933년 2월 12일, 반도렌은 오스트리아와의 홈 경기에서 처음으로 국가대표팀 경기에 출전했다. 파르크 데 프랭스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비록 프랑스는 0대4로 셧아웃당했지만 반도렌은 90분간 경기에서 자신의 기량을 펼쳐 보였다.

한달 후, 반도렌은 독일과의 원정 경기 명단에 포함되었고 출전했지만 부상으로 경기 시작 9분 만에 경기장 밖으로 나가야 했다. 이 부상으로 인해 반도렌은 다음 경기인 벨기에전에도 결장했다.

다시 한달 후, 반도렌은 부상에서 회복되었고 스페인, 웨일스, 잉글랜드와의 경기에 참가했다. 프랑스는 스페인과 웨일스에게는 이기고 비겼지만 잉글랜드에게는 1대4로 참패했다.

1934년, 프랑스 대표팀은 잉글랜드 출신 조지 킴튼의 지휘 아래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준비했고 킴튼은 당시 물 건너 아스날 FC허버트 채프먼이 사용하던 W-M 포메이션을 프랑스 대표팀에 접목시켰다.

1934년, 프랑스가 벨기에와 스위스를 상대할 때 반도렌은 출전 기회를 잡았지만 그 이후엔 주전 자리에서 멀어졌다. 반도렌도 이탈리아 월드컵 대표팀 멤버에 포함되었지만 스타팅 11에는 들지 못했고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2대3으로 역전패했다. 하지만 유럽 대륙 최강으로 평가 받던 분더팀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잘 싸웠던 프랑스 대표팀 선수들은 자국 축구팬들에게 큰 환대를 받았다.

이후 프랑스는 다시 바로 감독 체제로 돌아갔다.


2.2.2.2. 월드컵 출전을 위한 노력[편집]

1935년으로 넘어오면서 프랑스 대표팀 내에 반도렌의 자리가 다시 마련되었다. 1월부터 프랑스는 한 달 간격으로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과 연달아 친선 경기를 가졌다. 하지만 프랑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3연패라는 초라한 결과물이었고 특히 독일에 1대3으로 패한 것은 충격적이었다.

이로 인해 반도렌은 다시 주전 자리를 잃었고 4월의 벨기에전에선 전반 43분, 마틀레르의 부상으로 교체의 기회[5]를 잡았지만 심판이 교체를 받아주지 않았고 그 사이 마틀레르가 다시 회복되면서 반도렌의 출전은 없던 일이 되기도 했다.

1936년, 가스통 바로의 전임 감독 체제로 완전히 고정된 프랑스 대표팀에서 반도렌은 유고슬라비아와의 홈 경기에 출전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반도렌은 다소 불안한 모습을 보였고 반도렌의 자리도 불안해졌다. 이 일로 인해 조르주 보쿠르와 장 고테루(Jean Gautheroux)가 의문을 제기했고 돌아온 결과는 세 명의 프랑스 대표팀 제외였다.

1937년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프랑스는 A매치 4연패를 당하며 엄청나게 헤맸다. 프랑스는 10월이 되어서야 스위스를 2대1로 잡고 반등의 기회를 마련했다. 12월에는 골키퍼 로랑 디로르토의 활약으로 이탈리아와 0대0으로 비기면서 나름 자국에서 열릴 월드컵을 준비해 가고 있었다.

이 때의 반도렌은 대표팀과의 거리가 멀어져 있었지만 월드컵 대표팀 명단에 다시 한 번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반도렌에게 출전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고 프랑스는 8강에서 이탈리아에게 1대3으로 패하며 그들의 월드컵을 마감했다.

이미 반도렌의 나이는 29살. 다음 월드컵이 있다 해도 이 상태로는 출전을 장담하기 힘들었다.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반도렌의 월드컵 출전은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다.


2.2.2.3. 이후의 대표팀 생활[편집]

반도렌은 1938년 12월, 나폴리 원정 경기에서 다시 푸른 유니폼을 입었지만 경기 시작 전부터 분위기는 살벌했다. 이탈리아는 프랑스파시스트 경례를 할 것을 종용했지만 프랑스 선수들은 이를 거부했고 이탈리아 관중들은 프랑스 선수들과 라 마르세예즈를 연주하려는 악대들을 공격했다. 시합도 거칠었다. 그러다 전반 32분, 반도렌과 골키퍼 르네 렌스와의 실수를 틈타 아메데오 비아바티의 득점이 나왔고 프랑스는 이것을 만회하지 못했다.[6]

이 실수에도 가스통 바로는 반도렌에게 신임을 보냈고 계속 그를 대표팀에서 중용했다. 그 믿음에 반도렌은 3승 1무라는 좋은 성적의 밑거름이 되는 탄탄한 수비로 보답했다.

1940년, 프랑스는 포르투갈과의 홈경기에서 3대2로 승리했고 이 경기는 에밀 베낭트, 에티엔 마틀레르, 라울 디아뉴의 마지막 대표팀 경기가 되었다.

1942년, 반도렌도 대표팀 경력을 마무리했다. 반도렌이 주장 완장을 차고 출전했지만 스위스스페인은 전력이 약해진 프랑스를 각각 0대2, 0대4로 깨뜨렸고 반도렌은 그렇게 대표팀에 다시는 선수로 뛰지 못했다.


2.3. 감독[편집]


1952년부터 반도렌은 라강투아(La Gantoise)의 감독을 맡았다. 라강투아는 벨기에 퍼스트 디비전 우승도 노려볼만한 전력으로 평가 받았지만 9위, 3위, 2위에 머물렀고 1956년에는 아예 12위로 성적이 떨어졌다. 그래도 이 시기에 라강투아는 벨기에의 대표적인 강팀으로 평가 받았기에 수많은 유명 클럽으로부터 친선 경기 제안을 받기도 했다. 이 팀들의 목록이 무시무시했는데 스탠리 매튜스[7]가 이끄는 블랙풀 FC, 알프레도 디스테파노로 대표되는 레알 마드리드 CF, 페렌츠 푸스카스가 속한 부다페스트 혼베드 FC, 레몽 코파쥐스트 퐁텐을 보유한 팀이자 반도렌의 전 소속팀 스타드 드 랭스, 저 멀리에선 펠레가 나중에 세계를 놀라게 할[8] 산투스 FC도 그 제안을 보낸 팀 중 하나였다.

1956년부터 1959년까지 반도렌은 프랑스로 돌아가 아라고 스포르트 오를레앙(Arago Sport d'Orléan)의 감독직을 맡았고 1957년 오를레앙을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1959년, 반도렌의 친정팀 릴 OSC가 그에게 SOS를 요청했다. 릴은 앙드레 추바(André Cheuva) 감독의 지휘 아래 1954년 디비지옹 1 우승을 차지했지만 다음 해엔 18개 팀 중 16위로 미끄러지는 믿기 힘든 부진을 보였고 1956년에도 16위는 유지했지만 강등팀이 3팀으로 불어나는 바람에 아예 디비지옹 2로 강등당하고 말았다. 다음 해에 릴은 비록 다시 승격했지만 2년 만에 다시 디비지옹 2로 강등을 당하면서 추바 감독도 1958년에 사임하는 등 말 그대로 표류하는 난파선 신세였다. 하지만 반도렌의 능력으로도 릴을 극적으로 반등시킬 순 없었다. 디비지옹 2에서 11위, 9위에 머물렀고 반도렌은 1960년에 새로 독립한 세네갈의 대표팀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라울 디아뉴의 뒤를 이어[9] 세네갈 대표팀 감독이 된 반도렌은 1963년 세네갈 대표팀을 이끌고 친선 대회에 참가했다. 예선에서 세네갈은 카메룬, 나이지리아, 니제르를 모두 누르고 손쉽게 2라운드에 진출했다. 그리고 테랑가의 사자들은 프랑스 아마추어 팀도 이기고 결승에 올라 튀니지와 1대1로 비겼지만 개최국 어드벤티지로 우승을 차지했다.

1963년 다시 프랑스로 돌아간 반도렌은 1년간 UA 스당토르시를 지휘했지만 12위로 시즌을 마쳤고 1964년 자신이 선수 겸 감독으로 있던 아르고 스포르트 오를레앙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9위, 다음 시즌에는 11위로 팀의 강등을 막지 못했다.

반도렌의 다음 팀은 벨기에의 RCS 부르주아에드몽 델푸르, 쥘 비고, 조르제 무리스 등 많은 프랑스 출신 감독들이 거쳐간 팀이었다. 반도렌이 부임할 당시 팀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시궁창이었다. 3부 리그로 추락한 팀의 경영진은 불만에 가득 차 있었고 선수들의 충성의 방향도 잘못되어 있었다. 하지만 반도렌은 1년 사이에 클럽을 잘 추슬렀고 이런 반도렌을 라강투아가 다시 불러 반도렌은 라강투아의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1967년 반도렌이 재차 라강투아의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라강투아는 2부 리그로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반도렌은 1968년 팀을 벨기에 퍼스트 디비전으로 승격시켰고 1969년에는 퍼스트 디비전 11위, 1970년에는 3위로까지 순위를 끌어올리며 라강투아 팬들의 기대감을 높였으나 1970-71 시즌에 라강투아는 충격의 강등을 당했고 이렇게 반도렌과 라강투아의 동행도 끝났다. 그리고 이를 끝으로 반도렌은 벨기에 팀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1971년, 반도렌은 1년간 RE 무스크롱(RE Mouscron)이라는 3부 리그 팀을 맡았지만 시즌을 끝내지도 못하고 감독직에서 경질당하고 말았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편집]


빠른 스피드를 가졌던 풀백. 어린 시절에 반도렌이 여러 운동을 섭렵해왔던 비결이 바로 이 스피드였으며 백미터를 11초대에 뛰었다고 한다. 공중볼 다툼에도 강했으며 자주 라인을 올려 공을 끊어내는 플레이를 즐겼다. 하지만 기술적인 면에서는 그다지 좋지 못했고 터프함과도 거리가 있었다.


4. 수상[편집]



4.1. 클럽[편집]




4.2. 감독[편집]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출처: 위키피디아, 11v11[4] 당시 릴 소속으로 월드컵에 참가한 선수만 해도 골키퍼로는 로베르 데포세, 줄리앙 다뤼가 있었고 수비수 조르제 보쿠르, 공격수 조제프 알카사르 등이 있었다.[5] 친선 경기에선 교체가 가능했다.[6] 이 경기가 끝난 후 대표팀 주장 마틀레르는 프랑스의 신예 선수 라르비 벤바렉에 대한 이탈리아 선수들의 인종 차별에 공개적으로 벤바렉을 감싸기도 했다.[7] 매튜스는 이 해의 발롱도르 수상자이기도 하다.[8] 반도렌이 1956년 라강투아의 감독직에서 물러났으므로 이 때는 펠레가 산투스 1군에 데뷔하기 전이었다.[9] 이 시기 반도렌은 감독이 아닌 코치로 디아뉴를 보좌했다는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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