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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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 국왕
지그문트 1세 스타리
Zygmunt I Stary


별칭
원로왕 (Stary)
출생
1467년 1월 1일
폴란드 왕국 코지에니체
사망
1548년 4월 1일 (81세)
폴란드 왕국 크라쿠프
재위
폴란드 왕국의 왕
1507년 1월 24일 ~ 1548년 4월 1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1506년 10월 20일 ~ 1548년 4월 1일
배우자
서포여이 바르바라 (1512년 결혼 / 1515년 사망)
보나 스포르차 (1517년 결혼)
자녀
야드비가, 안나, 이자벨라[1],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조피아, 안나, 카타지나[2], 올브라흐트
아버지
카지미에시 4세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형제
울라슬로 2세, 야드비가, 카지미에시, 얀 1세 올브라흐트,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 조피아, 엘즈비에타, 프리데리크, 엘즈비에타, 안나, 바르바라, 엘즈비에타
서명
1. 개요
2. 즉위 전
3. 대외정책
4. 내치
5. 기타



1. 개요[편집]


폴란드어: Zygmunt I Stary
리투아니아어: Žygimantas Senasis

지그문트 1세는 카지미에시 4세와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의 막내 아들로 폴란드 왕국의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이었다. 그의 치세 동안에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동군연합과 외국과의 전쟁이 계속되었으나 유능한 신하들과 함께 이를 능란하게 대처하였다.

2. 즉위 전[편집]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보헤미아 왕국의 왕이 된 큰형 브와디스와프[3], 폴란드 왕이 된 셋째 형 얀 1세 올브라흐트, 리투아니아 대공이 된 넷째 형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와 달리 그는 아무런 영지를 받지 못한 찬밥 신세에 불과했다. 이를 불쌍히 여겼던 어머니 엘리자베트는 막내를 위해 형들에게 부탁을 했고 보헤미아 왕이 된 큰형 브와디스와프가 슐레지엔의 일부를 떼어준 덕분에 슐레지엔을 통치하면서 정치 경험을 쌓았다.

3. 대외정책[편집]


1506년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모스크바 대공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와중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스몰렌스크를 상실하였으나, 대부분의 영토를 방어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1515년 형 브와디스와프가 딸 안나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들[4]과 결혼시키면서 야기에우워 왕조 출신임에도 그의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 상속권은 배제되었다. 1521년 튜튼 기사단의 후신 독일 기사단국이 폴란드 왕국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자 선제 공격을 가한 후 완전 복속시켜, 1525년부로 폴란드 왕국의 봉신국 프로이센 공국으로 만들었다. 외조카이기도 한 튜튼 기사단장 알브레히트는 튜튼 기사단을 해산하고 신민들과 함께 루터교회로 개종하였는데 이는 후대 프로이센 왕국의 전신이 되었다. 또한 지그문트 1세는 오늘날에 바르샤바 일대에 해당하는 마조프셰 공국의 공작의 대가 끊기자 마조프셰 공국을 폴란드 왕국으로 합병하였다.

당시에는 오스만 제국헝가리 왕국을 무너트리며 판노니아 분지 일대를 장악한 시점이었다. 이미 큰아버지인 브와디스와프 3세가 오스만 제국과 싸우다 바르나 전투에서 전사하고, 조카인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러요시 2세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한 상황이라, 지그문트 1세는 오스만 제국과 직접 싸움은 피하는 정책을 폈다. 대신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 크림 칸국동군연합 영토 내 우크라이나 코사크들 간의 치열한 접전이 계속 벌어졌다.

4. 내치[편집]


지그문트 1세는 밀라노 공국 출신의 보나 스포르차(Bona Sforza 1494~1557)와 결혼하였다. 보나 스포르차 왕비는 토마토, 브로콜리, 아티초크, 강낭콩, 콜리플라워, 배추, 당근, 상추, 시금치 같은 여러 야채 종자를 폴란드 농촌에 보급해서 농가의 소득을 개선시킨 것은 물론 물론 이탈리아의 화가들을 크라쿠프로 데려와 폴란드 르네상스에 크게 기여하였다. 지그문트 1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기는 했으나 정교회루터교회, 유대교에 모두 관대하였다.

덕분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의 동부는 평온을 누렸고, 코사크들이 몰다비아 공국의 침입을 자체적으로 격퇴하기도 하였으며 새로 편입된 바르샤바 일대의 유대인 상인들도 폴란드 왕국에 충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도시에서는 개신교 선교사들이 교육 사업을 펼치며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였으며, 이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3국에 르네상스 문화가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5. 기타[편집]


폴란드 200즈워티 지폐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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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르디난트 1세의 대립 헝가리 국왕 서포여이 야노시와 결혼하여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를 낳았다.[2] 스웨덴 국왕 요한 3세와 결혼하여 지그문트 3세를 낳았다.[3] 큰형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상속 대신에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로 간 것은 어머니 엘리자베트가 룩셈부르크 왕조의 뒤를 이어 독일왕,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의 국왕이 된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알브레히트 2세의 딸으로 외숙부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 사후 혈연에 따른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 상속을 주장해서 그렇다. 보헤미아 왕국 의회는 이를 받아들여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의 뒤를 이을 보헤미아 국왕으로 지그문트 1세의 큰형을 선택했다.[4] 당시에 카를페르디난트 중 누가 안나 공주와 결혼할지는 결정이 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