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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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초대 국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Zygmunt II Aug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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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20년 8월 1일
폴란드 왕국 크라쿠프
사망
1572년 7월 7일 (51세)
폴란드-리투아니아 크니신
재위
폴란드 왕국의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국 대공
1548년 4월 1일 ~ 1572년 7월 7일
배우자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1543년 결혼 / 1545년 사망)
바르바라 라지비우
(1547년 결혼 / 1551년 사망)
오스트리아의 카타리나
(1553년 결혼 / 1572년 사망)
아버지
지그문트 1세
어머니
보나 스포르차
형제
야드비가, 안나, 이자벨라, 조피아, 안나, 카타지나, 올브라흐트
문장
파일:Coat_of_Arms_of_Jagiellon_kings_of_Poland.svg
서명

1. 개요
2. 생애
3. 리보니아 방어
4. 루블린 조약



1. 개요[편집]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는 폴란드 왕국-리투아니아 대공국 동군연합 야기에우워 왕조 최후의 국왕이자 대공이었다.


2. 생애[편집]


선왕 지그문트 1세밀라노 공국 출신 왕비 보나 스포르차의 외동아들로 크라쿠프에서 태어났다. 그의 치세 말엽인 1569년 7월 1일 루블린 연합을 통해 폴란드 왕국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통합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이루어졌다. 지그문트 2세는 폴란드의 국왕이자 리투아니아의 대공의 직함을 따로 가지고 있었으나, 이후에는 단일 국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으로 다스리게 되었다.

적자가 없었으며 사후 야기에우워 왕조는 막을 내리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회에서 왕을 선출하게 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역사에서 지그문트 2세는 비록 후사가 없어 왕조의 문을 닫기는 했으나, 외세로부터 영토를 능란하게 방어하고 국내 통치에서는 현명하고 신중했으며 일생 생활에서는 교양이 넘치는 명군으로 기록되었다.

결혼을 세 번 하였으나 자녀가 없었고, 왕비들이 임신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출산했다는 말이 없고, 유산이나 사산 등의 기록도 없는 것을 보면 실제로는 임신을 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세 번째 왕비에게서도 자식을 볼 가망이 없자 절박해진 왕은 폴란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들을 정부로 삼았으나[1] 결국 단 한명의 정부들에게서도 자녀를 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지그문트 2세는 불임이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3. 리보니아 방어[편집]


지그문트 2세의 제위 기간 루스 차르국이반 4세리보니아 연맹을 침공하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옛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이 통치했던 영토는 지켜냈으나 루스 차르국에게 라트비아로 향하는 교역 도시 폴로츠크를 상실했으며 탈린을 위시한 에스토니아 북부는 스웨덴 국왕 에리크 14세에게 굴복해 스웨덴령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리보니아 해안지대는 폴란드의 봉신국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이 되었고, 라트갈레 지역과 에스토니아 동남부 일대는 리보니아 공국이 들어섰다.


4. 루블린 조약[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루블린 조약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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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임은 이렇게라도 해서 왕이 사생아라도 낳는다면 정식으로 입적시켜서 후계자로 삼도록 합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