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3세 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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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제4대 국왕
스웨덴 바사 왕조 제4대 국왕
지그문트 3세
Zygmunt III Waza


파일:800px-Sigismund_III_of_Poland-Lithuania_and_Sweden_(Martin_Kober).jpg

이름
스웨덴어
시기스문드 바사
(Sigismund Vasa)
폴란드어
지그문트 바사
(Zygmunt Waza)
리투아니아어
지그만타스 바자
(Zigmantas Vaza)
출생
1566년 6월 20일
스웨덴 마리에프레드 그립스홀름 성
사망
1632년 4월 30일 (66세)
폴란드-리투아니아 바르샤바
재위
스웨덴 국왕
1592년 11월 17일 ~ 1599년 7월 24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1587년 8월 19일 ~ 1632년 4월 30일
배우자
오스트리아의 아나 (1592년 결혼 / 1598년 사망)
오스트리아의 콘스탄체[1] (1605년 결혼 / 1631년 사망)
자녀
안나 마리아,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 얀 알베르트, 카롤 페르디난트, 알렉산데르 카롤, 안나 카타지나 콘스탄차
아버지
스웨덴 국왕 요한 3세
어머니
카타지나 야기엘론카[2]
형제
안나, 콘스탄차
종교
기독교 (로마 가톨릭)
서명
1. 개요
2. 초기생애
3. 스웨덴 왕위 계승과 폐위
4. 폴란드 대내정책
5. 폴란드 대외정책
6. 사망
7. 평가



1. 개요[편집]


폴란드-리투아니아스웨덴의 왕. 폴란드에서는 지그문트 3세로, 스웨덴에서는 시기스문드로 불린다.

2. 초기생애[편집]


1566년 스웨덴의 그립스홀름 성[3]에서 구스타브 1세 바사의 둘째 아들 핀란드 공작 요한과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의 막내딸 카타지나 야기엘론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백부 에리크 14세에 의해 수감되어있던 시절 태어났으나 1568년 아버지가 에리크 14세를 폐위시키고 요한 3세로 즉위하면서 자연스럽게 스웨덴 왕위 계승자가 되었으며, 어린시절 폴란드 공주인 어머니의 뜻에 따라 가톨릭 신자로 성장하였다. 1587년 8월 폴란드 왕국의 수상인 얀 자모이스키(Jan Zamoyski 1542~1605)의 위상에 힘입어 이모부 스테판 바토리의 뒤를 이어 경쟁자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시밀리안 대공(Maximilian III der Deutschmeister 1558~1618)[4]을 제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3. 스웨덴 왕위 계승과 폐위[편집]


1592년,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인 오스트리아의 아나와 결혼했고, 같은 해 부왕이 사망하자 스웨덴 의회의 승인하에 스웨덴의 왕위도 계승했다.[5] 하지만 시기스문드는 열성적인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루터파 위주인 스웨덴 귀족들, 특히 숙부인 쇠데르만란드의 칼 공작과 갈등을 겪었다. 결국 종교 문제와 국왕 부재시 권한을 두고 1597년, 칼 공작은 반란을 일으켰다. 시기스문드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스웨덴으로 복귀했으나 스토녜브로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실상 감금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위협을 느낀 시기스문드는 폴란드로 탈출했고 시기스문드의 주요 지지자들은 1599년 핀란드 오보에서, 1600년 스웨덴 린셰핑에서 처형당했다. 더이상 거리낄 것이 없어진 칼 공작은 자신의 지지자들을 가득 채워 의회를 개최하였고 스웨덴 의회는 시기스문드에게 아들 브와디스와프를 루터파로 개종시켜 스웨덴으로 보내는 조건을 수용한다면 브와디스와프의 스웨덴 왕위 계승을 인정하겠다고 했지만 시기스문드는 아무 응답을 하지 않았다. 결국 스웨덴 의회는 시기스문드를 스웨덴 왕위에서 폐위시켰고, 이어서 칼 9세로 즉위한 칼 공작은 요한 3세 가계의 스웨덴 왕위 계승권을 박탈시켰다.

1595년 루스 차르국과 테우시나[6] 조약을 체결하여 1583년 얻었던 잉에르만란드(Ingermanland), 켁스홀름(Kexholm)[7]을 반환하였으나 나르바 강을 국경으로 나르바까지 에스토니아의 영유권을 최종 확정지었고 핀란드 방면으로도 사볼락스(Savolax)[8]까지 스웨덴의 영토를 확정지었다.

4. 폴란드 대내정책[편집]


1596년, 폴란드의 수도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천도하였다.

5. 폴란드 대외정책[편집]


대외적으로는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제휴를 계속 유지했고, 1598년 아나 왕비가 사망하자 7년 후인 1605년 그녀의 동생인 콘스탄차와 재혼했다.

1600년부터 리보니아의 주도권을 두고 폴란드와 스웨덴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명장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윙드 후사르를 이끌고 키르홀름(Kirchholm)[9]에서 스웨덴군을 격파하였으나 전술적 승리를 전략적 승리로까지 이끌지는 못했다.

지그문트 3세는 루스 차르국이반 4세 사후 혼란해지자 가짜 드미트리 1세를 지원하였고, 스웨덴이 개입하자 정교회 이단을 정화하자는 명목으로 세임을 설득하여 군대를 파견했다.[10] 클루쉬노 전투에서 스타니스와프 주키에브스키(Stanisław Żółkiewski 1547~1620)[11]가 이끄는 5천의 윙드 후사르는 러시아-스웨덴 연합군을 박살낸 후 모스크바로 입성하여 바실리 4세를 폐위시켰다. 이후 러시아 귀족들은 폴란드와 협상을 진행하여 지그문트 3세의 아들 브와디스와프를 러시아의 새로운 차르로 선출시켰다.

한편 러시아 귀족들이 폴란드와 협상하면서 내건 조건은 "브와디스와프가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한 다음 차르위에 오른다", "러시아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 "가톨릭을 강요하지 않는다"였다. 브와디스와프 자신은 정교회 개종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열성적인 가톨릭 신자인 지그문트 3세가 극렬히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결국 러시아인들은 1612년에 폴란드 세력을 러시아에서 축출시켰고, 이후 1613년 이반 4세의 사돈 가문인 로마노프 가문의 미하일을 러시아의 새로운 차르로 선출했다. 차르에 즉위한 미하일은 전쟁을 신속하게 끝내는 것을 목표로 삼아 1618년 데울리노 조약으로 스몰렌스크 일대를 폴란드에 할양했다.

지그문트 3세 치세에는 남쪽의 오스만 제국과도 연이어 전쟁이 벌어졌다. 오스만 2세가 친정한 오스만 제국군이 봉신국인 몰다비아 공국을 거쳐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침공하였다. 루스 차르국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던 스타니스와프 주키에브스키가 몰다비아 공국으로 파견되었으나 몰다비아 공국 측에서 연방군을 배신하였고 주키에브스키는 퇴각 도중 전사하였다. 전사한 주키에브스키를 대신에 코드키에비츠가 오스만 제국의 침공에 맞설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621년 호침 전투에서 총사령관 코드키에비츠마저 전사하는 격렬한 전투 끝에 결국 적군 사령관의 전사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오스만 제국군이 먼저 퇴각하였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은 두 명장을 잃었으나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막아내는데 성공하였다.

6. 사망[편집]


1617년 사촌 동생인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군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치루고 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공격해 리가와 리보니아 일대를 대부분 점령했다. 스웨덴 해군에 맞서기 위해 폴란드는 네덜란드스코틀랜드 출신 해군 용병을 고용하였고 이들의 힘을 빌어 올리바(Oliwa)[12]에서 스웨덴 해군을 격파하면서 최악의 상황을 넘겼다.[13] 이후 프랑스 왕국 리슐리외 추기경의 중재로 1629년 알트마르크 휴전 협정을 체결했으나 리보니아는 사실상 상실했고 폴란드의 국제적 위신은 실추되었다. 1631년 7월 두번째 부인인 콘스탄차의 죽음으로 지그문트 3세는 정신적 충격과 함께 신체 또한 극도로 쇠약해졌다. 1632년 4월 30일 뇌졸중으로 사망했으며, 시신은 크라쿠프 바벨 대성당에 안치됐다.

7. 평가[편집]


때를 잘 만난 암군. 이 인간의 삽질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가 1648년까지 전성기를 구가한 게 신기해보일 지경이다. 모국 스웨덴에서는 이미 루터파 위주인 스웨덴인과 심각한 갈등을 겪어 왕위에서 쫓겨난 것으로도 모자라, 이후에도 정신 못차리고 스웨덴의 왕위를 주장하는 등 스웨덴과 극한의 갈등을 빚었고 후일 대홍수에서 스웨덴이 개입하는 단초를 마련했다. 그래도 스웨덴군이 오합지졸이던 시기에는 폴란드령 리보니아로 진격해오는 스웨덴군을 폴란드군이 족족 털어먹어 영토를 빼앗기진 않았지만, 역으로 반격할 기회가 여러차례 있었는데도 폴란드 귀족들과의 갈등으로 진격 한 번을 하지 못했다. 결국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군제 개혁을 거친 스웨덴군을 상대로는 연패하여 리보니아와 발트해의 주요 무역항인 리가를 사실상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러시아, 정확히는 루스 차르국을 상대로는 삽질을 훨씬 더 크게 벌였다. 사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정말로 루스 차르국를 멸망시키거나 병합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러시아에 친폴란드 귀족들도 적지 않았고, 반폴란드 러시아인들도 오랜 전란과 기근으로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3세의 아들인 브와디스와프가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한다면 러시아인들은 그를 차르로 받아들일 의지가 있었고 브와디스와프 본인도 긍정적으로 생각했지만 지그문트 3세가 거부하여 다된 밥에 재를 뿌렸다. 결국 폴란드는 엄청난 희생을 치룬 후에야 러시아와 데울리노 조약을 체결하여 스몰렌스크 등지를 할양받았는데, 애초에 러시아를 병합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국경 요충지 몇 개를 할양받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했으니 암군 소리를 들어도 결코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이 전쟁은 러시아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는 것도 실패했고, 폴란드에 대한 적대감정이 엄청나게 치솟게 만들어 후일 대홍수에서 러시아는 카자크 편을 들어 개입한다.

이렇게 무수한 삽질을 벌이게 된건 본인의 역량 부족도 있었지만 스웨덴 왕위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에게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는 어머니를 통해 덤으로 얻은 부가적인 요소에 불과했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스웨덴 왕위에 더 애착을 가졌기 때문.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의 이해관계와 스웨덴인 지그문트 3세의 이해관계는 대부분 맞지 않았고, 본인이 태어나고 자란데다 대부분 귀족들이 충성을 바쳤던[14] 스웨덴에 애착을 가졌던 것은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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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아내 오스트리아의 아나의 여동생이다.[2] 지그문트 1세의 막내딸로,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의 막내여동생이다.[3] 프레드리크 1세 항목에 있는 컬트적인 사자 박제를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4]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5남.[5] 원래 지그문트 3세는 아버지인 요한 3세의 뜻에 따라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를 합스부르크 왕가에 던져버리고 헨리크 발레지처럼 런한 다음에 스웨덴 왕위만 승계받으려고 했다. 문제는 도주 시도가 얀 자모이스키에게 걸려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에서 폐위당할 뻔했으나 얀 자모이스키의 폐위 시도도 실패로 끝났고 지그문트 3세가 얀 자모이스키에게 몰다비아 공국에 대한 재량권을 약속하여 한 발 물러서면서 어찌저찌 해결되었다.[6] 에스토니아 나르바-러시아 이반고로드 국경 인근이라고 하나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7] 핀란드어로는 캐키살미(Käkisalmi). 현재 러시아 프리오제르스크(Приозе́рск).[8] 핀란드어로는 사보(Savo)[9]라트비아 살라스필스(Salaspils)[10] 말이 좋아 이단 정화지, 실제 지그문트 3세의 목적은 러시아를 먹어치워 스웨덴 왕위 탈환을 위한 교두보로 삼을 생각이었다.[11]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에 가려져서 그렇지 유능한 외교관이자 명장이었다. 나중에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으로 즉위하는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외증조할아버지.[12] 현재 폴란드 그단스크 근처.[13] 여담으로, 이 해전의 패배로 열받은 구스타브 2세가 내놓은 함선이 바로 바사 호다.[14] 실제로 칼 9세와 지그문트 3세의 스웨덴 왕위 쟁탈전 당시, 가톨릭 신자라는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스웨덴 귀족들 상당수는 지그문트 3세를 지원했다. 칼 9세가 승리한 후 스웨덴과 핀란드 각지에서 대규모 처형식을 집행한 것도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귀족들에 대한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