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기스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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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왕이지만 사실상 황제였던 인물










신성 로마 제국 룩셈부르크 왕조 3대 황제
지기스문트
Sigismund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isanello_024b.jpg

제호
지기스문트 (Sigismund)
출생
1368년 2월 14일
독일 왕국 뉘른베르크
사망
1437년 12월 9일 (70세)
보헤미아 왕국 즈노이모
재위
신성 로마 황제
1433년 ~ 1437년 12월 9일
로마 왕
1410년 ~ 1437년 12월 9일
보헤미아 국왕
1419년 ~ 1437년 12월 9일
헝가리크로아티아의 국왕
1387년 ~ 1437년 12월 9일
배우자
마리어 1세
(1385년 결혼 / 1395년 사망)
첼레의 바르바라
(1405년 결혼)
자식
엘리자베트
아버지
카를 4세
어머니
포메른의 엘리자베트
형제
마르가레테, 카타리나, 벤첼, 바츨라프 4세, 안나[1], 요한, 카를, 마르가레테, 하인리히
종교
기독교 (로마 가톨릭교회)
1. 개요
2. 언어별 표기
3. 생애
3.1. 유년 시절
3.2. 헝가리 왕이 되다
3.3. 니코폴리스 십자군
3.4. 왕위를 지키기 위한 악전고투
3.5. 독일왕
3.6. 콘스탄츠 공의회와 후스 전쟁
3.7. 말년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신성 로마 제국황제로, 룩셈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황제. 룩셈부르크 왕조의 군주 가운데 유일하게 헝가리 왕국크로아트 왕국의 왕위에 올랐다.

'지기스문트'라는 독일어 이름을 헝가리어로 발음하면 '지그몬드(Zsigmond)'가 된다. 아무래도 왕보다는 황제가 격이 높아서인지 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으로서의 재위기간은 1387년부터 1437년까지 50년이나 된다.

유럽 정치사에서 몇몇 중요한 결정을 내렸는데, 호엔촐레른 가문에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직을, 베틴 가문에게는 작센 선제후직을 수여하였으며 1416년에는 사보이아 백국사보이아 공국으로 승격시켰다.[2] 또한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를 소집해 서방교회 대분열을 수습했지만, 그 과정에서 얀 후스이단으로 몰아 처형한 것이 화근이 되어 후스 전쟁이라는 내전에 휘말렸다.

2. 언어별 표기[편집]


언어별 표기
독일어
Sigismund von Luxemburg (지기스문트 폰 룩셈부르크)
체코어
Zikmund Lucemburský (지크문트 루쳄부르스키)
헝가리어
Luxemburg Zsigmond (룩셈부르그 지그몬드)
크로아티아어
Žigmund Luksemburški (지그문드 룩셈부르슈키)
라틴어
Sigismundus Luxemburgicus (시기스문두스 룩셈부르기쿠스)


3. 생애[편집]



3.1. 유년 시절[편집]


1368년 12월 9일 뉘른베르크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와 폴란드 왕 카지미에시 3세의 손녀이자 포메른 공작 보기슬라프 5세의 딸인 포메른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카를 4세가 가장 좋아했던 성자인 부르고뉴의 지기스문트를 따서 지어졌다. 그는 머리색이 붉은 편이었기 때문에 '진저 여우'(ginger fox)라는 별명으로 불리곤 했다.

1374년, 헝가리와 폴란드의 왕 러요시 1세는 신성 로마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딸 마리어와 지기스문트의 약혼을 주선했다. 1378년 카를 4세가 사망한 후, 지기스문트는 브란덴브루크 변경백이 되었고 헝가리 궁정으로 보내졌다. 일설에 따르면, 러요시 1세는 지기스문트를 잠재적인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두 딸 마리어와 야드비가가 사망할 경우 그를 헝가리 국왕으로 세우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1381년, 당시 13살이었던 지기스문트는 이복형이자 후견인이었던 독일과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4세에 의해 폴란드 왕국의 수도인 크라쿠프로 보내졌다. 그는 그곳에서 폴란드어를 배우고 여러 인사들과 안면을 익혔다. 여기에 바츨라프 4세로부터 노이마르크(Neumark)[3]를 영지로 수여받았다. 한때 폴란드 국왕으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독일 군주에게 복종하기를 원하지 않은 폴란드 귀족들이 러요시 1세의 두 딸 중 한 명을 섬기기로 결의하면서 무산되었다.


3.2. 헝가리 왕이 되다[편집]


1382년 9월 10일, 러요시 1세가 너지솜버트에서 사망했다. 그의 남은 딸 중 큰딸 마리어가 그 해 9월 17일에 헝가리-크로아티아의 새 국왕으로 선포되었고, 모후 엘리자베타가 당시 11살이었던 그녀를 대신해 행정부를 관리했다. 엘리자베타는 결정을 내릴 때 궁정백을 맡고 있던 가라이 미클로시(Garai Miklós)에게 의존했다. 그러나 많은 귀족들은 여왕의 등극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나폴리 왕국의 국왕이며 이슈트반 5세의 딸 마리어의 외증손인 카를로 3세가 헝가리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엘리자베타는 딸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프랑스에 사절을 보내 샤를 6세의 동생이며 지난날 마리어의 언니 커털린과 약혼한 적이 있는 루이와 마리어의 결혼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협상은 러요시 1세가 생전에 정한 대로 지기스문트와 여왕을 결혼시켜야 한다고 여겼던 헝가리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 또한 고위 성직자들은 프랑스인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지지하는 이단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는 이유로 프랑스 왕자와 자국 여왕의 결혼에 반대했다. 러요시1세의 장례식에 참석한 뒤 헝가리에 체류하고 있던 지기스문트는 엘리자베타에게 자신이 마리어의 약혼자임을 상기시키며 결혼을 진행하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하자 1385년 초에 헝가리를 떠났다. 이후 사촌인 모라비아의 요프스트(Jobst)와 프로코프(Prokop)와 함께 헝가리 북부로 쳐들어가서 포조니를 점령하며 헝가리 정부를 압박했다.

1385년 9월, 카를로 3세는 헝가리 귀족과 성직자들의 요청에 따라 달마티아의 센(Senj)에 상륙한 뒤 자그레브로 진군했다. 이에 당황한 엘리자베타는 지기스문트를 부더로 초청한 뒤 그해 10월 마리어와 지기스문트의 결혼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지기스문트는 공동 왕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실권도 얻지 못했다. 이에 화가 난 지기스문트는 부더에서 떠났고, 카를로 3세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부더로 행진했다. 헝가리 귀족들이 대거 카를로에게 귀순하자, 엘리자베타는 별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1385년 12월 초 딸 마리어와 함께 그를 마중한 뒤 함께 부더에 들어갔다.

이후 마리어는 카를로가 자신을 죽일 것을 우려해 12월 중순에 퇴위했고, 카를로는 처음에는 총독이라는 칭호를 칭했지만 의회가 국왕으로 즉위해줄 것을 요청하자 1385년 12월 31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카로이 2세'로서 헝가리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1386년 2월 7일 부더 궁정에서 엘리자베타와 대화를 나누던 중 엘리자베타의 사주를 받은 시종 포르가치 벌라주(Forgách Balázs)가 휘두른 둔기에 머리를 가격당하여 중상을 입은 뒤 2월 24일 비셰그라드에서 사망했다. 마리어는 곧바로 복위했고, 엘리자베타는 전국에 "마리어 여왕께서 신성한 왕관을 되찾았다"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얼마 후, 팔 호르바티를 비롯한 반 엘리자베타 세력이 카로이 2세의 아들 라슬로[4]를 새 왕으로 받들겠다고 선포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1386년 4월, 지기스문트는 이복형 바츨라프 4세와 함께 헝가리를 침공했다. 엘리자베타와 마리어는 두 사람과 만나서 협상한 끝에 그해 5월 초 마리어가 지기스문트의 아내임을 공인하고 지기스문트는 바그 강 서쪽의 땅을 접수한 뒤 모라비아의 요프스트와 프로코프에게 넘기기로 했다. 지기스문트가 협상 결과에 만족하여 보헤미아로 돌아간 뒤, 엘리자베타는 라슬로를 지지하는 헝가리 남부 지역을 찾아가서 딸을 여왕으로 받들어달라고 호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1386년 7월 15일, 엘리자베타와 마리어 모녀가 고르자니에 이르렀을 때 호바트 야노시와 그의 가신들의 습격을 받아 사로잡혔다. 마리어 모녀는 자그레브 주교령의 곰네크(Gomnec) 요새 지하감옥에 감금되었다가 다시 아드리아 해 연안의 노비그라드(Novigrad) 성으로 끌려갔다. 이후 반란자들은 라코비치 이슈트반을 라슬로 왕의 궁정백으로 선출하고 지기스문트를 섭정으로 삼기로 했다.

지기스문트는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끌어모아 1387년 1월에 슬라보니아를 침공했지만 반란군을 물리치지 못했다. 얼마 후, 호바트 야노시는 엘리자베타를 끌어낸 뒤 마리어가 보는 앞에서 그녀의 목을 졸라 죽였다. 지기스문트는 1387년 3월 31일에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을 칭했고, 그의 지지자 중 한 사람인 크르크의 이반은 조반니 바르바리고(Giovanni Barbarigo)가 지휘하는 베네치아 함대의 도움으로 노비그라드 성을 포위했다. 1387년 6월 4일, 그들은 노비그라드 성을 함락시키고 마리어를 해방시켰다. 마리어는 바르바리고에게 감사를 표하고 기사 작위를 수여했으며, 600플로린의 연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해 7월 4일 자그레브에서 지기스문트와 합류한 그녀는 공동 통치자로 남았지만 정치에 별다른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카로이 2세의 아들이자 나폴리 왕국의 국왕 라디슬라오는 지기스문트의 집권을 받아들이지 않고 크로아티아-달마티아-헝가리 남부 영주들을 포섭해 지기스문트를 상대로 전쟁을 이어갔다. 지기스문트는 이에 맞서 브렌덴부르크를 모라비아의 변경백이자 자신의 사촌인 요프스트에게 저당잡히는 대가로 군자금을 지원받은 뒤 나폴리 왕국 및 반란자들을 상대로 투쟁했다. 그러나 보유한 군사력이 반란군을 압도할 수준이 되지 못하는 데다 보스니아 왕국트브르트코 1세가 반란군을 지원하는 바람에 좀처럼 승기를 잡지 못하자, 막강한 사병과 드넓은 영지를 보유한 치릴레이(Czillei)-가라이(Garai) 가문 연합의 지원을 받는 대가로 왕실 재산의 상당 부분을 양도해야 했다.

1390~1391년, 가라이 미클라시가 이끄는 왕실군이 트브르트코 1세 휘하의 보스니아군을 격파하면서 보스니아 왕국이 반란군을 더 이상 후원하지 못하게 했다. 이후 반란군의 위세는 점차 약화되다가 1394년 7월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반란군 지도자 호바트 야노시가 사로잡혔다. 지기스문트는 그를 살려주려 했지만, 일전에 어머니를 잔혹하게 죽인 야노시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던 마리어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처형했다.

1395년 5월 17일, 지기스문트의 아이를 임신중이던 마리어는 부더 숲에서 사냥을 즐기던 중 말이 발을 헛디딛는 바람에 낙마했다. 그녀는 현장에서 아기를 유산한 뒤 곧 숨을 거두었고, 유해는 너지바러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폴란드 여왕이자 그녀의 여동생인 야드비가는 자신이 헝가리 왕위를 이어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헝가리 귀족들은 이를 무시하고 지기스문트를 단독 군주로 받들었다.


3.3. 니코폴리스 십자군[편집]


1394년,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 미르체아 1세는 1만 병력을 이끌고 오스만 술탄국바예지트 1세가 이끄는 5만 튀르크군을 상대로 로비네 전투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던 미르체아 1세는 1395년 튀르크군의 공세를 피해 일가족을 이끌고 헝가리로 망명했다. 지기스문트는 그를 받아준 뒤 유럽 각지에 오스만 제국에 맞서기 위해 십자군을 결성하자고 호소했다. 교황 보니파시오 9세는 이에 호응하여 십자군을 선포했고, 신성 로마 제국, 헝가리, 프랑스를 주축으로 한 원정군이 결성되었다. 그들은 남하하면서 라호브에 거주하던 무슬림을 학살하는 등 기세 등등했다.

그러나 군주와 귀족들이 한데 섞인 십자군은 불분명한 지휘체계로 인해 작전 진행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지기스문트와 미르체아 1세 등은 튀르크군을 유리한 지형으로 끌어낸 뒤 그동안 그들과 수많은 격전을 치러봤던 왈라키아 보병대가 전방에서 적을 묶어두는 동안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프랑스와 독일의 기사단이 출격해 적의 측면과 후방을 강타하는 전술을 제시했다. 그러나 기사들은 자기들이 먼저 튀르크군의 정면으로 돌격하겠다고 고집했다. 급기야 미르체아 1세와 지기스문트가 공적을 빼돌리려 든다는 비난마저 일었고, 결국 두 사람은 기사단의 뜻대로 하게 했다.

그 후 1396년 9월 25일부터 28일까지 벌어진 니코폴리스 전투는 십자군의 재앙이었다. 기사단은 무작정 돌격했다가 압도적인 수의 적군에게 포위되어 궤멸되었고, 후방에 남겨진 십자군 역시 승기를 탄 튀르크군의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나마 미르체아 1세는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기사단이 궤멸될 무렵에 전력을 보전한 채 전장을 빠져나갔지만, 지기스문트는 잠시 붙잡혔다가 첼레 백작 헤르만 2세의 활약으로 간신히 탈출한 다음, 어선을 타고 빠져나가 도나우 강에 있던 베네치아 군선에 올라 크로아티아로 피신했다.


3.4. 왕위를 지키기 위한 악전고투[편집]


니코폴리스 전투 후 크로아티아에 도착한 지기스문트는 크로아티아의 주요 도시인 크리제브치(Križevci)를 방문한 뒤 자신은 반대자들에게 개인적인 복수를 시도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서면 보증서를 발표했다. 이에 나폴리 왕 라디슬라오를 지지하던 라코비치 이슈트반과 추종자들이 그와 만나서 협상하기 위해 크리제브치의 사보르 교회에 찾아왔다. 크로아티아의 법률에는 누구도 무기를 들고 사보르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라코비치와 추종자들은 교회 앞에 무기를 넘기고 예배당에 들어섰고, 라코비치의 사병대는 도시 밖에 주둔했다.

그러나 사보르 내부에서 완전 무장을 한 채 대기하고 있던 지기스문트의 지지자들은 라코비치와 추종자들이 들어오자마자 그들을 에워싼 뒤 니코폴리스 전투 때 왕을 위해 제대로 싸우지 않아 튀르크인들에게 패배했다며 책임을 물었다. 라코비치가 사보르 내에서 완전무장한 것에 따져물으며 맞대응하자, 그들은 검을 뽑아들어 라코비치와 조카 이슈트반, 그리고 추종자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라코비치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도시 밖에 주둔하고 있던 사병대가 도시로 진입하여 지기스문트 지지자들과 시가전을 벌였지만 격퇴되었다.

이후 프로다비치 이슈트반이 이끄는 크로아티아 귀족들이 지기스문트를 잡으려 하자, 지기스문트는 1397년 3월 2일 신하들과 함께 드라바 강을 건너 헝가리로 도주했다. 그 후 헝가리 귀족과 성직자들이 자기 지시에 제대로 따르지 않는 상황에 염증을 느끼고 독일과 보헤미아의 왕위 계승권을 확보하는 데 관심을 돌렸다. 그는 바츨라프 4세를 부추겨서 자신을 신성 로마 제국의 총대리자로 삼게 했다. 그러나 1400년 8월 20일 바츨라프 4세가 선제후들에 의해 독일 왕위에서 물러나고 팔츠 선제후 루프레히트 3세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401년 봄, 지기스문트는 모라비아 변경백 요프스트와 상호 상속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자 자기들의 동의없이 상속 계약을 맺은 것에 분노한 브라나 공작 베베크 임레(Bebek Imre)와 에스테르곰 대주교 야노시가 그해 4월 28일 사병들을 이끌고 지기스문트를 납치한 뒤 부더 성에 수감했다. 이 소식을 접한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4세와 모라비아 변경백 요프스트는 지기스문트를 해방시키기 위해 군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바그 강과 도나우 강 사이로 진군하여 너지솜버트, 프라우엔마르크, 프레스부르크를 공략했다.

지기스문트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헝가리 귀족들은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를 헝가리 국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을 비롯한 독일계 국가의 반발이 거센데다 귀족 내부에서도 폴란드 국왕을 섬기는 것에 반발하는 이들이 적지 않아서 무산되었다. 결국 지기스문트는 1401년 10월 27일 자신을 납치한 자들을 처벌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헝가리 국왕으로 복위했다. 이후 보헤미아 귀족들이 바츨라프 4세를 상대로 일으킨 반란을 지원하다가 1402년 3월 6일 헤르만 2세와 함께 바츨라프 4세를 프라하의 흐라드친에서 체포한 뒤 에페르딩 근처의 샤운베르크 성으로 이송한 후 보헤미아를 18개월간 통치했다. 그러다가 1403년에 바츨라프 4세를 석방시켜서 보헤미아를 다스리게 했지만, 실권은 본인이 계속 쥐었다.

1403년, 나폴리 왕 라디슬라오가 재차 헝가리로 쳐들어왔다. 그는 자다르를 공략한 뒤 헝가리 귀족들에게 자신을 왕으로 받들라고 요구했다. 많은 귀족들이 이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지기스문트는 치릴레이-가라이 연합 가문의 지원과 독일인 용병들의 분투에 힘입어 라디슬라오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라디슬라오는 달마티아로 후퇴했다가 나중에는 그곳의 도시들을 베네치아 공화국에 100,000 두카트에 팔고 떠났다. 이후에도 헝가리 각지에서 발발한 반란에 시달리던 지기스문트는 부더에 소집된 의회에서 자신을 적대하는 자들을 사면하겠다고 선언해 내전을 어느정도 잠재웠다.

1404년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4세가 27세의 나이에 이질로 사망했다. 후계자인 알브레히트 5세는 겨우 7살이었기 때문에 삼촌 빌헬름이 후견인을 맡았다. 빌헬름 공작이 라디슬라오의 누이인 조반나와 결혼하고 보헤미아 왕 바츨라프 4세와도 동맹을 맺으면서, 지기스문트는 또다시 압박을 받았다. 그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1405년 헤르만 2세의 막내딸 바르바라와 결혼함으로써 당시 상당한 군사력과 부를 갖추고 있던 첼레 백국의 지원을 받았다. 또한 이탈리아 중부 도시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라디슬라오가 중부 이탈리아로 진출하려는 시도를 저지하게 했다. 1407년 보스니아 일대가 라디슬라오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자신에게 반기를 들자, 지기스문트는 5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하여 보스니아로 진군해 1408년 도보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보스니아 귀족 200여 명을 학살했다.

도보로 전투에서 승리한 뒤, 지기스문트는 개인 기사단인 드라곤 기사단을 창설했다. 이 기사단의 구성원들은 가라이 미클라시, 첼레 백작 헤르만 2세, 스티보르츠의 스티보르, 피포 스파노 등 그의 정치적 동맹자들과 추종자들이었다. 이들은 서로 교역할 때 관세를 매기지 않았고, 외국 상품에 대해 공동으로 관세를 부과했으며, 국가 전체의 무계 단위와 척도를 표준화함으로써 교역을 장려했다. 또한 독일인이 자신의 영역에 이주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했고, 이들에게 주도적인 역할을 맡겼다.

한편, 지기스문트는 오스만 술탄국의 팽창을 저지하고자 세르비아 공작 스테판 라자레비치를 봉신으로 삼고 세르비아 북서부와 헝가리 남부 일대를 수호하는 임무를 맡겼다.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1427년 사망할 때까지 지기스문트의 충실한 봉신으로서 오스만 술탄국의 공세를 저지했고, 그의 뒤를 이은 게오르게 브란코비치도 지기스문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난도르페헤르바르를 지기스문트에게 돌려줬다. 그 덕분에, 지기스문트는 헝가리 남쪽 국경을 안정화시킬 수 있었다.


3.5. 독일왕[편집]


1410년, 루프레히트 3세가 사망했다. 지기스문트는 자신을 독일왕으로 복위시켜달라는 바츨라프 4세의 요청을 무시하고 1410년 9월 20일 3명의 선제후에 의해 독일왕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0월 1일 4명의 선제후에 의해 선출된 사촌이자 모라바 변경백인 요프스트와 대립했다. 1411년 1월 18일 요프스트가 사망하면서 이 분쟁은 해소되었고, 지기스문트는 1411년 7월 21일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다. 대관식은 1414년 11월 8일 아헨에서 거행될 때까지 연기되었다.

그는 독일왕으로서 튜튼 기사단과 동맹을 맺고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에 맞섰다. 스티보르츠의 스티보로가 이끄는 제국군은 노비송치(Nowy Sącz)를 공략하여 파괴하는 등 분전했지만, 튜튼 기사단은 1410년 7월 15일 그룬발트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을 상대로 참패했다. 이후 튜튼 기사단은 막대한 금액의 금을 폴란드에 지불해야 했지만, 지기스문트는 스티보로의 탁월한 외교력 덕분에 브와디스와프 2세로부터 좋은 조건으로 은을 빌릴 수 있었다.

스티보로는 지기스문트의 후원을 받으며 에르데이 공작으로서 슬로바키아의 1/4를 소유하면서, 지기스문트 왕국의 재정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지기스문트는 스티보로의 이같은 활약 덕분에 1412년 헝가리 부더에서 2,000명의 기사들과 독일, 폴란드, 세르비아에서 온 군주, 추기경, 백작들이 참가한 최대규모의 마상창시합을 개최하는 등 위세를 떨칠 수 있었다.


3.6. 콘스탄츠 공의회와 후스 전쟁[편집]


1414년, 지기스문트는 서방교회 대분열을 수습하고자 콘스탄츠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는 이 공의회의 심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프랑스, 잉글랜드, 부르고뉴 공국을 잇따라 방문해 3명의 경쟁 교황들에게 퇴위를 종용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공의회는 교황에 우선한다"라고 선포하고 마르티노 5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고 다른 교황들을 폐위한다고 밝혔다. 또한 이단으로 규정된 얀 후스를 소환했다. 얀 후스는 처음에는 가지 않으려 했지만, 지기스문트가 신변을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하자 고위 성직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전하고자 참석했다.

그러나 1414년 11월 3일 콘스탄츠에 도착한 얀 후스는 11월 28일에 공개적 강론을 금지한 교회의 처분을 무시하였다는 빌미로 체포되었다. 지기스문트는 자신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게 되자 황권이 침해되었다며 거세게 항의했지만, 주변인들이 "이단자와의 약속은 지킬 이유가 없다."고 설득하자 침묵했다. 결국 얀 후스의 처분은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3세에게 넘어갔고, 루트비히 3세의 결정에 따라 후스는 1415년 7월 6일 화형에 처해졌다. 지기스문트는 그를 살려주고 싶은 생각에 사형을 담당하던 루트비히 3세에게 후스가 혐의를 인정하면 살려주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얀 후스는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고 화형을 달게 받았다. 이 일로 지기스문트는 후스파로부터 '얀 후스를 함정으로 유인해 죽여버린 원수'로 간주되었다.

1419년 2월, 바츨라프 4세는 이단을 배제하라는 지기스문트의 강한 압력에 굴복하여 프라하의 교회를 가톨릭으로 바꾸고 후스파 교회를 3개만 남긴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이에 분노한 후스파는 7월 30일 프라하에서 봉기를 일으켜 왕을 따르는 귀족들을 창밖으로 내던지는, 이른바 제1차 프라하 창밖 투척 사건을 벌였다. 이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은 바츨라프 4세는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그해 8월 16일에 사망했다. 이후 지기스문트가 보헤미아의 왕위를 겸임했다. 그러나 후스를 죽게 만든 그를 용서할 수 없었던 후스파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면서, 후스 전쟁이 발발했다.

얀 지슈카가 이끄는 후스파 반란군이 쉽사리 진압되지 않자, 지기스문트는 교황청에 후스파를 진압하기 위한 십자군을 선포해달라고 요청했다. 1420년 3월 1일, 교황 마르티노 5세는 지기스문트의 요청을 받아들여 십자군을 선포하고 동유럽의 제후들에게 십자군 결성을 촉구했다. 이에 동유럽 각지에서 십자군 모집에 응한 기사들이 지기스문트에게 모여들었는데, 그 숫자는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후 후스파 십자군은 지기스문트의 군대와 합세해 보헤미아로 쳐들어갔지만, 수도몌르 전투비트코프 전투에서 얀 지슈카가 이끄는 후스파 반란군에게 연이어 참패했다. 반란군은 여세를 몰아 보헤미아 전역에서 십자군을 몰아내고, 1421년 20명의 지도자로 구성된 잠정 정부를 설립했다.

1421년 말, 지기스문트는 다시 보헤미아를 침공하여 쿠트나 호라 인근까지 진격했다. 얀 지슈카가 이를 막고자 진군해 쿠트나 호라 전투에서 지기스문트와 격돌했다. 이때 쿠트나 호라 시민들이 지기스문트 편으로 돌아서면서 후스파 군대가 지기스문트의 십자군과 쿠트나 호라 민병대에게 포위섬멸될 위기에 놓이자, 얀 지슈카는 새벽에 어둠을 틈타 바겐부르크를 대거 이끌고 지기스문트의 십자군을 향해 핸드 캐논과 석궁, 화승총을 퍼부어 전열을 뚫고 탈출했다. 당시 십자군은 분산되어 있었고, 적이 이토록 신속하고 과감하게 돌파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해서 이를 막지 못했다.

지기스문트는 쿠트나 호라를 손에 넣은 것에 만족했고, 겨울 동안 푹 쉰 뒤 날씨가 개면 프라하로 진격하기로 하고, 전군을 사방에 분산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얀 지슈카는 쿠트나 호라에서 빠져나온 뒤 2주 동안 전력을 보강하고 쿠트나 호라 탈환 작전을 개시했다. 1422년 1월 6일, 얀 지슈카가 이끄는 후스파 군대는 네보비디에 주둔한 헝가리군 수천 명을 기습해 큰 타격을 입혔고, 1월 8일 하브리 마을 외곽의 고지에 주둔한 헝가리군을 재차 공격해 2,000~12,000명의 사상자를 입혔다. 지기스문트는 급히 병력을 집결시키려 했으나, 얀 지슈카의 후스파 군대는 1월 10일 네메츠키 브로트(현재의 하블리치쿠프 브로트)에 주둔한 십자군 2,000명을 습격하여 500명을 죽이고 많은 보급물자를 탈취했다. 이러한 일련의 습격으로 전의를 상실한 지기스문트의 십자군은 1월 말 보헤미아에서 전면 철수했다.

그 후 지기스문트는 후스 전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 대신 작센, 브란덴부르크 등 자신의 충실한 동맹자들에게 전쟁을 맡겼다. 그러나 이들마저 얀 지슈카와 그 뒤를 이은 야코프 프로코프의 후스파에게 연이어 패배했다. 후스파는 여세를 몰아 보헤미아 주변 지역을 침공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자기들의 교리를 전파했다. 1427년, 교황 마르티노 5세는 갈수록 기세등등해지는 후스파를 어떻게든 무너뜨리기 위해 4차 십자군을 선포하고, 헨리 4세의 이복 동생이자 윈체스터 주교인 곤트의 존의 아들인 헨리 보퍼트를 수장으로 세워 십자군을 모집하게 했다. 이때 교황은 지기스문트에게 십자군 지휘관을 맡기려 했지만, 지기스문트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에게 떠넘겼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는 타호프 전투에서 허무하게 패배했고, 헨리 보퍼트 역시 더 이상 전쟁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기에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이후 후스파는 바이에른, 팔츠, 작센, 루지체, 슐레지엔, 모라바 등 주변의 여러 지역을 공격하여 살육과 약탈을 일삼고, 포교 활동을 벌였다. 지기스문트와 변경백들은 성채 수비를 굳건히 할 뿐 이들을 막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고, 후스파는 성채를 우회하여 독일의 여러 마을을 휩쓸었다. 하지만 후스파 역시 오래 지속되는 전쟁에 점차 지쳐갔고, 양형파에 속한 보헤미아 귀족들은 사유재산 폐지, 신분제 철폐 등 급진적인 주장을 내세우는 타보르파의 영향력이 갈수록 강해지는 상황에 위협을 느꼈다. 그들은 전쟁을 조속히 끝내야 한다고 여기고, 가톨릭 측에게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마침 후스파에게 강경했던 교황 마르티노 5세가 1431년 2월 선종하였고, 뒤를 이은 에우제니오 4세는 1431년 3월 3일에 열린 바젤 공의회에서 후스파와의 평화 협상을 논의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평화 협상은 결렬되었다. 후스파가 동방 정교회 및 모든 기독교 계열의 대표자들도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가톨릭 측은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협상을 거부했다. 마침 독일 각지에서 후스파의 약탈 행위에 분노한 독일인 사이에서 십자군을 재차 일으켜 이단을 심판해야 한다는 여론이 빗발쳤다. 이에 에우제니오 4세는 제5차 후스파 십자군을 선포하고, 보헤미아 인근의 바이에른 도시인 바이덴에 십자군을 집결시키고, 추기경인 줄리아노 체사리니를 파견해 십자군에 참여하게 했다. 지기스문트는 이번에도 십자군 총사령관 직을 거부했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가 다시 지휘관이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도마슐리체 전투에서 후스파에게 참패했다.

결국 지기스문트와 독일 제후들, 그리고 교황청은 십자군을 동원하여 후스파를 무찌를 수 있다는 희망을 완전히 버리고 평화 협상을 재개하기로 했다. 1434년 1월, 바젤 공의회는 2년간의 협상 끝에 후스파의 고유 신앙 및 관습을 인정하고 압류했던 재산을 돌려주기로 하였고, 보헤미아 의회는 바젤 공의회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타보르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항전하려 했다.

1434년 5월 30일 양형파+가톨릭 지원군과 타보르파가 리파니 전투에서 격돌했다. 그 결과 타보르파가 섬멸되었고, 야코프 프로코프는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리하여 후스 전쟁은 마무리되었고, 지기스문트는 비로소 보헤미아를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지기스문트는 리파니 전투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역시 보헤미아 문제는 보헤미아인들이 스스로 해결해야 했구나!"



3.7. 말년[편집]


지기스문트는 후스 전쟁을 치르던 와중인 1428년 오스만 술탄국에 대항하는 원정을 이끌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또한 1429년에 리투아니아 대공국비타우타스가 리투아니아 왕위를 교황으로부터 승인받으려던 계획을 도왔지만, 폴란드 의회(세임)의 견제 및 비타우타스의 죽음(1430년)으로 흐지부지되었다. 민다우가스 대공 시절인 13세기 중반에 민다우가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자 교황령에서 그에게 리투아니아 왕위를 수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민다우가스가 왕위를 노리던 조카에게 암살당하고 리투아니아가 도로 발트 신화로 개종하면서 리투아니아의 통치자는 14세기 말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에도 대공 칭호를 썼다. 비타우타스는 일찍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통치권을 두고 사촌인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와 알력이 있었고, 리투아니아의 독자성을 유지하려 했다.

1431년에는 밀라노로 가서 그해 11월 25일에 이탈리아의 국왕으로서 롬바르디아 철왕관을 받았다. 이후 시에나에 머물면서 교황 에우제니오 4세와 신성 로마 황제로서 대관식을 치르는 문제, 바젤 공의회 승인 문제 등을 협상했다. 그 결과 1433년 5월 31일 로마에서 신성 로마 황제 대관식을 치렀다. 후스 전쟁이 수습된 후인 1436년에 보헤미아로 가서 그 곳의 귀족들을 소집해 왕으로 공인받았다. 한편 알바니아인들이 오스만 술탄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자, 불가리아 귀족 프루진을 그들에게 보내 동맹을 논의했다. 그러나 1436년 반란군이 튀르크군에게 패배하면서,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437년 12월 9일 모라비아의 즈노이모에서 사망했고, 헝가리의 너지바러드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두 번째 왕비인 첼레의 바르바라와의 사이에서 외동딸인 룩셈부르크의 엘리자베트만 낳았기에, 룩셈부르크 가문은 단절되었다. 엘리자베트는 지기스문트가 후계자로 지명한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5세와 결혼했다. 알브레히트 5세는 1438년 1월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왕위에 올랐고, 6개월 후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으며, 1438년 3월 독일왕 알브레히트 2세로 선출되었다. 한편 지기스문트 생전에 헝가리를 충실히 따랐던 왈라키아 공국은 그가 사망한 뒤 블라드 드라쿨의 지도하에 오스만 술탄국 쪽으로 전향했다.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편집]



  • Kingdom Come: Deliverance에서는 배경 인물로 언급되는데, 작중 보헤미아 왕국의 실버 스칼리츠를 침공해 막장으로 만들어놓은 주범이다. 컷신을 제외하고는 본인이 직접 등장하진 않지만 작중 인물들의 대화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는데, 실버 스칼리츠 일대 귀족들은 물론 대부분의 평민들까지 하나같이 벤체슬라스를 지지하는 쪽이라 좋은 소리를 거의 못듣는다. 심지어 지기스문트를 지지하던 평민조차 그에게 뒤통수를 맞고 저항하여 사망하며 엔딩에선 지기스문트 파벌이었다가 벤체슬라스 쪽으로 돌아선 요프스트 변경백까지 등장한다.

  • 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2, 4에서 등장한다. 출생연도가 1368년이라 1382년에 부다페스트에서 재야로 등장하며, 시나리오 2는 1271년 시작이라 일부러 그 때까지 시간을 끌지 않았다면 플레이어가 유라시아를 통일하고도 남기에 파워업키트에서 추가된 시나리오 4에서 볼 확률이 높다.
능력치
특기
병과적성
(보병, 궁병, 기병, 수군)
문화권
정치 63 전투 59 지모 66
농업, 외교
C C B E
발칸(동유럽)

  • 소녀전쟁에서는 메인 빌런으로 등장. 명군의 자질을 갖춘 인물이나, 후스파를 제압하기 위해 악랄한 수도 사용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서 헝가리의 왕으로 등장, 오스만-왈라키아의 침공과 후스 전쟁에 시달리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일단 후스 전쟁은 체사리니 추기경의 중재를 통해 온건 후스파들을 대부분 회유하고, 왈라키아는 트란실바니아 전체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휴전을 맺어 겨우 마무리하고 실제 행보와 비슷하게 오스만을 막기 위해 세르비아 십자군을 결성하는 등 온갖 노력들을 한다. 하지만 세르비아의 배신으로 인해 수천 명의 헝가리 의용군을 잃은 이후 베오그라드 근교에서 벌어진 일전에서 무라트 2세의 뛰어난 용병술에 큰 피해를 입고 패배하며, 그 이후 지병이 생겨서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자 후녀디를 헝가리를 통치할 전권을 위임한 고명대신으로 삼은 채 현실보다 일찍 숨을 거둔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얀 지슈카 캠페인의 주적으로 등장. 교만한 폭군스런 모습을 보여주지만 지슈카에게 연전연패하고 마지막 스테이지에서는 비관적인 대사만을 내뱉는다.[5]

  • 용병대장과 성녀에서도 등장한다.

  • 마지막 바이킹에서 등장. 이단 얀 후스와 주인공 하얀 마녀 시그리드를 치겠다며 십자군을 소집해 프라하를 공격한다. 플젠을 불태우는 등 초토화 전술을 쓰며 후스파의 내분을 유도하는 등 프라하를 위기에 몰아넣지만, 시그리드의 계략에 속아 허무하게 생포당하고 협상을 강요받는다.


5. 둘러보기[편집]


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및 헝가리, 보헤미아 국왕
카를 4세

지기스문트

프리드리히 3세(신성 로마 제국)
마리어 1세

지그몬드

얼베르트[6](헝가리)
바츨라프 4세

지기스문트

알브레히트 1세(보헤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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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와 결혼.[2] 브란덴부르크와 사보이아는 먼 훗날 각각 독일이탈리아를 통일했고, 베틴 가문은 현재 영국, 벨기에 왕실의 조상 중 하나이니 그의 결정이 20세기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3] 현재의 폴란드 루부스키에주 일대.[4] 헝가리어 발음은 '라슬로', 이탈리아어 발음은 '라디슬라오'로 둘 다 같은 이름이다.[5] 처음에는 오만함이 가득하게, 패배를 입은 뒤에는 왜 이기지 못하냐며 분노를, 최후에는 실의에 빠져서 비관을 내뱉는 황제의 3단 변신(...)을 감상할 수 있다.[6] 지기스문트 황제의 사위이다. 알브레히트는 로마왕까진 올랐지만 정식 대관을 받지 못해 신성 로마 황제는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