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로 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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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iro_Sato_1932.jpg

사토 지로
(佐藤 次郎 Jirō Satō)
출생
1908년 1월 5일 일본 군마현 키타군마군 나가오무라[1]
사망
1934년 4월 5일 아시아 말라카 해협
프로데뷔
1929년
신장
미상
사용 손
오른손 (언노운 백핸드)
세계 랭킹
최고 3위
개인전 통산 성적
128승 26패 (83.1%)
개인전 타이틀 획득
18회
그랜드슬램 결과
호주 오픈 4강 (1932)
프랑스 오픈 4강 (1931, 1933)
윔블던 4강 (1932, 1933)
US 오픈 4라운드 (1933)

1. 개요
2. 커리어
3. 선수 경력
4. 여담
5. 압박과 불안 그리고 죽음




1. 개요[편집]


일본 제국의 전 테니스 선수.


2. 커리어[편집]



  • 개인전 통산 성적 : 128승 26패 (승률 83.1%)
  • 통산 타이틀 획득 : 18개


그랜드슬램 대회 단식: 최고 4강 - 통산 32승 9패(승률 78.05%)

  • 호주 오픈 : 4강 (1932) - 3승 1패(승률 75.00%)
  • 프랑스 오픈 : 4강 (1931, 1933) - 13승 3패(승률 81.25%)
  • 윔블던 : 4강 (1932, 1933) - 14승 3패(승률 82.35%)
  • US 오픈 : 4라운드 (1933) - 2승 2패(승률 50.00%)

지로 사토의 연도별 메이저대회 성적표
연도
호주
프랑스
윔블던
US
1931
불참
4강
8강
불참
1932
4강
4라운드
4강
2라운드
1933
불참
4강
4강
4라운드

그랜드슬램 남자복식 최고성적

그랜드슬램 혼합복식 최고성적

3. 선수 경력[편집]


1929년 프로에 데뷔하였으며 1930년 일본 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1930년 미드 퍼시픽 인비테이셔널 토너먼트에서 미국의 테니스 선수 크랜스턴 홀먼에게 패하였다. 그리고 복식 경기에서는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1931년 일본 선수권 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프랑스 안티베 주엉 레 빵에서 열린 Miramar LTC에 참가하여 복식 우승, 혼합 복식 준우승을 기록하였고 웨스트 잉글랜드 챔피언십에서는 단, 복식 모두 우승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이어서 참가한 영국 커버드 코트 챔피언십에서는 프랑스의 테니스 스타 장 보로트라에게 패하였다. 몬테카를로 오픈에서는 우승하며 2번째 단식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그는 1931년에만 13개의 타이틀을 획득하였고 태평양 남서부 챔피언십[2]에서는 1932년, 1933년 영국의 테니스 전설 프레드 페리에게 모두 패하며 타이틀 획득에 실패하였다. 1933년 8월 동료인 누노이 료스케와 독일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며 복식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사토는 데이비스 컵에서도 맹활약 하였으며 22승 6패(78.5%)의 승률을 기록하였다. 사토는 그랜드 슬램에서도 화려한 커리어를 자랑하는데 불과 3년동안 단식전에서 5번의 4강 진출을 기록하였고 1933년에는 윔블던 복식 결승까지도 진출하였다. 사토는 프레드 페리, 버니 오스틴과 함께 세계 TOP3를 구성했을 정도로 당시 아시아의 위상을 생각했을때 엄청난 파격력을 자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플레이 스타잍은 프랑스의 테니스 전설 앙리 장 코셰의 플레이를 따라 플랫 포핸드를 사용하였고 서브 앤 발리 플레이를 하였다고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kL7PXA58HyM&t=44s
1933년 윔블던 결승에서의 그의 모습


4. 여담[편집]


  • 사토는 와세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1933년 테니스에 전념하기 위해 학업을 포기하기 전까지는 공부했었다고 한다.
  • 그의 형 역시도 테니스 선수였다고 한다. 형의 이름은 사토 효타레로 ITF, ATP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다.
  • 일본의 여자 테니스 스타 오카다 사나에와 약혼했었다고 한다.


5. 압박과 불안 그리고 죽음[편집]


1934년 4월 4일 사토는 국제 론 테니스 챌린지를 위해 팀원들과 함께 유럽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사토는 그날 아침부터 복통을 호소하였고 건강 진단을 위해 싱가포르에 잠시 정박한다. 검사 결과 질병이 아닌 심리적 문제였고 문제가 없다는 통보를 받는다. 신문 자료에 따르면 사토는 일본으로 귀국하려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날 저녁 주싱가포르 일본 영사가 주최한 만찬을 받은 사토는 영사에게 그대로 일정을 진행하라는 압박을 받았고 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그대로 일정은 진행된다.[3] 4월 5일 배가 말레이시아 페낭에 도착했을때 팀원이었던 야마기시 지로는 사토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냈고 그의 유서[4]를 발견하였다. 그를 찾는 수색은 7시간이나 계속되었으나 그를 찾지 못하였고 "일본 최고의 테니스 선수이자 국가 영웅이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라디오 메시지를 전송하였다. 그의 죽음은 단순 일본 내의 슬픔이 아니었으며 세계 외신에서도 이슈가 되었고 많은 이들이 그를 애도하였다. 그와 함께 세계 테니스를 주름잡았던 영국의 테니스 스타 프레드 페리는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쾌활한 사람이었다."라고 표했으며 버니 오스틴은 "그는 유머 감각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지구에서 그러한 종말을 맞는 마지막 사람이 될 것이라는 감상을 주었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함께 데이비스 컵을 준비하였던 류키 미키 역시도 "사토는 사람들을 잘 웃게하는 유쾌한 인물이었다."라고 애도하였다. 또한 사토의 죽음은 일본 테니스 협회의 유럽진출에 대한 책임감에 의해 발생한것 같다고 말하였고 사토의 형인 사토 효타레와 함께 사토의 유언을 위해 경기 취소를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다. 미키는 사토에 이어 데이비스 컵 주장을 맡았고 1934년 윔블던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사토의 비극을 헛되이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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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부카와시[2] 현 LA오픈[3] 이미 그날 일본 테니스 협회로부터 일정을 진행한다는 전보를 받았다고 한다.[4] 그는 유서를 총 2개 남겼는데 유서의 내용은 이러했다. 팀원들에게 쓴 유서의 내용은 다가오는 대회에서 팀을 도울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영적으로 함께하겠다. 이 경기에서 최선을 다해달라는 내용이었고, 선장에게 쓴 다른 유서에는 항해에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