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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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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린성은 중국의 성급 행정구역으로, 성도는 창춘시다. 행정상 간칭은 지(吉 )다.
명칭은 만주어로 강 기슭을 의미하는 '기린 울라(Girin Ula)'를 중국어로 음차한 '지린우라(吉林烏拉 )'를 줄인 것이다.[2] 신라를 뜻하는 말인 "계림"과 연관성이 있다는 주장[3] 도 존재한다. 서쪽으로 내몽골 자치구, 북쪽으로 헤이룽장성, 남서쪽으로 랴오닝성, 동쪽으로 러시아 연해주(프리모르스키 크라이), 남쪽으로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북한과 접한다.
동북 3성의 가운데에 위치한 행정구역으로, 면적은 187,400㎢이다. 조선족 밀집지역인 연변 조선족 자치주가 속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4] 지린성 남부가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간도라는 곳이다. 간도의 범위가 워낙 애매한 탓에, 랴오닝성 일부 지역까지 들어가기도 한다. 여행유의 지역인 이유는 북중국경지대이기 때문이다. 이 곳은 북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지역으로, 납북의 위험성이 있다.
인구(약 2,300만 명)[5] 나 경쟁력으로 보면 랴오닝 성과 헤이룽장 성에는 좀 밀리는 편이다. 그러나 과거 청나라 시절 지린성은 매우 크고 아름다운 성이었다. 현재의 지린성 일대뿐만 아니라 헤이룽장성의 남부 그리고 연해주의 전부와 러시아 하바롭스크 지방의 남부를 모조리 차지하고 있었다. 대충 과거 발해의 동쪽 영토 대부분이 이때의 지린 성이었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1858년 아이훈 조약, 1860년 베이징 조약 이후 지린성의 면적은 현재와 비슷해졌다.
바다와 접하지 못한 성이다. 성의 동부 훈춘시 끝은 동해와 10km를 두고 러시아와 북한에 가로막혀 있다. 중국, 러시아, 북한의 삼합점에 가면 동해가 보인다. 지린성은 동해바다를 지척에 두고 해안과 접하지 않는다.
지형은 남고북저형이고 북쪽은 둥베이 평원의 일부에 해당되어 드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다. 남쪽으로 갈수록 확연히 산세가 험해지는데, 창바이 산맥(장백산맥), 장광차이링 산맥, 랴오예 산맥 등이 뻗어 있고 산세는 강을 넘어 한반도의 개마고원과 백두대간으로 이어진다. 성내 최고봉은 남쪽에 위치한 백두산이다.
큰 도시는 북쪽에 집중되어 있고, 대표적인 도시로 북부의 창춘시, 중부의 지린시, 남부의 연길시 등이 있다.
기후는 냉대 대륙성 기후. 내륙도가 상당하기 때문에 겨울엔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추워진다. 겨울에 영하 25도는 기본이다. 특히 백두산 근처 동네는 죄다 중강진만큼의 헬게이트라고 보면 된다.
공업은 북부의 대도시들을 필두로 발달해 있으나, 나머지 지역은 거의 시궁창. 옆의 랴오닝성에 비하면 참으로 눈물나는 인프라 때문에 거의 발달해 있지 않다. 주요 산업은 중공업이지만 남쪽의 연길시 등에서는 경공업과 서비스업이 우세한 편.
농업은 옥수수와 콩이 주를 이룬다. 특이한 점은, 열악한 기후 환경에도 불구하고 쌀 재배 비율이 예상 외로 높은데 이는 조선족들의 영향이 크다.
북쪽으로는 하얼빈으로 가는 철도가 지나가기 때문에 철도 인프라는 나쁘지 않으나, 남쪽은 매우 열악하다.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도문 사이를 잇는 두만강철교가 있지만, 왠지 대한민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 정도의 이미지가 훨씬 강한 듯.
항공도 그리 편하지 않다. 주요 공항이 4개 있는데 하나는 중심지인 창춘에 있고, 다른 하나는 지린시, 나머지 2개는 전부 연변에 위치해 있다. 특히 연변은 한국과의 접근성 때문에 거리에 비해 비행기 티켓값이 장난 아니게 비싸다. 물론 북한 상공을 통과하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 점도 감안해야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가격이 비싸다.
한국 관광객들이 백두산에 가기 위해 들러야 하는 곳이다. 보통 연길에서 출발하는데 도로 사정이 상당히 좋지 않다. 절벽으로 떨어질 듯한 아슬아슬 체험(...)이 가능하다. 연길에서 백두산까지는 대략 버스로 4~5시간 정도 소요된다. 백두산 외에 용정시, 도문시 등도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최근 중국 당국이 백두산을 가는 교통에 투자하고 있으며,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백두산을 잇는 고속철 노선(둔바이 고속철도)가 2021년 개통 예정이다.
또, 북중 교역 강화를 위해 퉁화와 북·중 접경 지안까지 연결되는 지안~퉁화 고속도로가 개통하였다. #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연변은 한국어가 꽤 통한다. 그러나 일단 연변 지역이 조선족 자치구라고는 해도 한족 인구가 반수를 넘어가는 추세다. 게다가 조선족이라도 중국조선어는 본토 한국어와 어느 정도 분화가 생겼기 때문에, 소통에 지장이 있다. 그나마 조선족은 한국 TV와 한국책 등이 많이 보급되어 있고 한국으로 일하러 들어가는 경우가 워낙에 많다보니 한국인들의 말을 알아듣는 것까지는 가능하지만, 한국인은 상대적으로 조선족의 말을 알아듣기 힘들다. 법적으로 강제하기 때문에 가게의 간판은 한글/한자 2가지 문자로 적혀있다.
고구려시대나 발해시대 유물, 건축물이 꽤 많아 관광을 위해 일반인에게 개방해 놓았지만, 일부 지역은 한국인이 아예 입장할 수 없는 곳도 있다.
지금은 중국에 소속되어 있지만, 그 이름이 만주어 어원인데서도 알 수 있듯 역사적으로 한족의 통치 하에 있었던 시기보다는 한국사 왕조, 퉁구스계 왕조, 몽골계 유목제국의 지배를 받은 기간이 길었다. 옆 동네 랴오닝은 그래도 중국이 직접 통치한 시기도 꽤 있었지만, 지린은 지도상으로 중국 영향권 내에 표시되어 있었던 몇몇 시기에도 워낙 춥고 산세가 험하고, 툭하면 유목민족들에게 털리는지라 간접적 통치가 대부분이었고 관리도 매우 힘든 곳이었다.
고대에는 고조선, 고구려, 부여, 발해의 활동무대였으며 발해 멸망 후 거란, 여진, 몽골 등이 발흥해 이 곳을 통치했고 청나라 또한 이 곳에서 발흥하였다.
하지만 워낙 관리가 힘든 곳이라, 이 지역을 차지한 왕조들은 중원을 지배하고 나면 항상 이곳을 버리다시피 해왔다. 청나라의 경우 1644년 중원 정복 이후, 중원 지역에 대해서는 '행성제(行省制)'를 적용했지만 만주 지역에 대해서는 장군부(將軍府)를 두어 통치하게 하는 '군부제(軍府制)'를 채택했다.
1653년(순치 10) 지금의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닝안시(寧安市)에 '영고탑앙방장경(寧古塔昻邦章京)'이라는 벼슬을 두었다가, 1662년(강희 1) 이를 '진수영고탑등처장군(鎭守寧古塔等處將軍, 약칭 영고탑장군)'으로 개칭하였다. 1673년(강희 12)에는 지금의 지린성 지린시에 '길림성(吉林城)'을 쌓고, 길림오랍(吉林烏拉, 지린우라)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이 일대를 지린성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1676년(강희 15) 장군의 주둔지를 지금의 지린성 지린시로 옮기고 1757년(건륭 22) 군부의 명칭을 '진수길림오랍등처장군(鎭守吉林烏拉等處將軍, 약칭 길림장군)'으로 고쳤는데, 이 길림장군이라는 군부가 이후 지린성의 전신이 되며, 공식적으로는 신해혁명 직후인 1912년 길림성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그러나 1740년(건륭 5) "여긴 우리가 태동한 땅이니 신성한 곳이라 아무도 발 들이지 말라."하고 '유민귀환령(流民歸還令)'을 내려 산해관 동쪽 지역에 대대적인 봉금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현지에 살던 만주족들은 대다수가 이미 순치제의 중원 정복 이후에 중국 본토로 이주해버렸기 때문에 정작 이 지역에 남아 있던 만주족들은 매우 적었고, 그 뒤 극심한 가뭄 및 흉년 등으로 생계에 위협을 받은 화북 지역의 한족 농민들이 대량으로 유입해 들어오는 것도 저지할 수 없었기에 사실상 방치나 다름없어 분명 실효성에 문제가 있었던 정책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 봉금정책은 1803년(가경 8) 폐지되었고, 1878년에는 한족에 대한 가족 동반 이민을 허용하면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래서 100여년 사이에 한족들의 대대적인 이주로 이곳의 다수민족은 한족이 되었다.
어쨌든 이 봉금정책으로 지린성 남부 지역에 사람이 거의 살지 않게 되어 비무장지대 같이 완전 야생지역이 되다 보니, 조선에서 기반이 없던 일부 조선인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 청나라 영토로 넘어가서 마을을 만들기도 하고, 거기서 쑥쑥 자란 산삼 같은 작물들을 채집하기 위해서 등, 조선 사람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이 곳으로 많이 넘어오게 된다. 이것이 중국조선족의 시초이며, 간도 떡밥의 시작이었다. 공식적으로 정한 국경선을 맘대로 넘어가는 문제라 조선에서도 불법으로 간주해 처벌했으나, 북한 탈북자마냥 적극적으로 발본색원하려는 의지는 없었다. 이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청 양국 간에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는데,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청 멸망 이후에는 만주 지역에 한족 군벌들이 성장하였고, 당초에는 길림독군 멍언위안의 지배를 받았으나 1919년 동삼성 순열사 장작림이 이 지역을 장악했다. 이후 10년 넘게 봉천군벌의 지배를 받았으나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 일본 제국이 점령했고 선통제를 옹립하여 만주국을 수립하였다. 이 만주국의 수도가 신경특별시(新京特別市)라는 곳이었는데, 바로 지금의 창춘이다. 1930년대 중국 공산당과 그 휘하에 있던 독립군들이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곳이기도 하며, 역으로 일본에 부역한 친일파들과 일본군이 토벌전을 벌였다. 1945년 소련군이 일본군을 무찌른 곳이기도 하며, 일본 패망 후 소련군이 잠시 이 곳을 접수했다가 얼마 후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 하에 들어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1. 개요[편집]
지린성은 중국의 성급 행정구역으로, 성도는 창춘시다. 행정상 간칭은 지(
2. 명칭[편집]
명칭은 만주어로 강 기슭을 의미하는 '기린 울라(Girin Ula)'를 중국어로 음차한 '지린우라(
3. 지리[편집]
3.1. 인문지리[편집]
동북 3성의 가운데에 위치한 행정구역으로, 면적은 187,400㎢이다. 조선족 밀집지역인 연변 조선족 자치주가 속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4] 지린성 남부가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간도라는 곳이다. 간도의 범위가 워낙 애매한 탓에, 랴오닝성 일부 지역까지 들어가기도 한다. 여행유의 지역인 이유는 북중국경지대이기 때문이다. 이 곳은 북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지역으로, 납북의 위험성이 있다.
인구(약 2,300만 명)[5] 나 경쟁력으로 보면 랴오닝 성과 헤이룽장 성에는 좀 밀리는 편이다. 그러나 과거 청나라 시절 지린성은 매우 크고 아름다운 성이었다. 현재의 지린성 일대뿐만 아니라 헤이룽장성의 남부 그리고 연해주의 전부와 러시아 하바롭스크 지방의 남부를 모조리 차지하고 있었다. 대충 과거 발해의 동쪽 영토 대부분이 이때의 지린 성이었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1858년 아이훈 조약, 1860년 베이징 조약 이후 지린성의 면적은 현재와 비슷해졌다.
바다와 접하지 못한 성이다. 성의 동부 훈춘시 끝은 동해와 10km를 두고 러시아와 북한에 가로막혀 있다. 중국, 러시아, 북한의 삼합점에 가면 동해가 보인다. 지린성은 동해바다를 지척에 두고 해안과 접하지 않는다.
3.2. 자연지리[편집]
지형은 남고북저형이고 북쪽은 둥베이 평원의 일부에 해당되어 드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다. 남쪽으로 갈수록 확연히 산세가 험해지는데, 창바이 산맥(장백산맥), 장광차이링 산맥, 랴오예 산맥 등이 뻗어 있고 산세는 강을 넘어 한반도의 개마고원과 백두대간으로 이어진다. 성내 최고봉은 남쪽에 위치한 백두산이다.
큰 도시는 북쪽에 집중되어 있고, 대표적인 도시로 북부의 창춘시, 중부의 지린시, 남부의 연길시 등이 있다.
기후는 냉대 대륙성 기후. 내륙도가 상당하기 때문에 겨울엔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추워진다. 겨울에 영하 25도는 기본이다. 특히 백두산 근처 동네는 죄다 중강진만큼의 헬게이트라고 보면 된다.
4. 산업[편집]
공업은 북부의 대도시들을 필두로 발달해 있으나, 나머지 지역은 거의 시궁창. 옆의 랴오닝성에 비하면 참으로 눈물나는 인프라 때문에 거의 발달해 있지 않다. 주요 산업은 중공업이지만 남쪽의 연길시 등에서는 경공업과 서비스업이 우세한 편.
농업은 옥수수와 콩이 주를 이룬다. 특이한 점은, 열악한 기후 환경에도 불구하고 쌀 재배 비율이 예상 외로 높은데 이는 조선족들의 영향이 크다.
5. 교통과 관광[편집]
북쪽으로는 하얼빈으로 가는 철도가 지나가기 때문에 철도 인프라는 나쁘지 않으나, 남쪽은 매우 열악하다.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도문 사이를 잇는 두만강철교가 있지만, 왠지 대한민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 정도의 이미지가 훨씬 강한 듯.
항공도 그리 편하지 않다. 주요 공항이 4개 있는데 하나는 중심지인 창춘에 있고, 다른 하나는 지린시, 나머지 2개는 전부 연변에 위치해 있다. 특히 연변은 한국과의 접근성 때문에 거리에 비해 비행기 티켓값이 장난 아니게 비싸다. 물론 북한 상공을 통과하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 점도 감안해야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가격이 비싸다.
한국 관광객들이 백두산에 가기 위해 들러야 하는 곳이다. 보통 연길에서 출발하는데 도로 사정이 상당히 좋지 않다. 절벽으로 떨어질 듯한 아슬아슬 체험(...)이 가능하다. 연길에서 백두산까지는 대략 버스로 4~5시간 정도 소요된다. 백두산 외에 용정시, 도문시 등도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최근 중국 당국이 백두산을 가는 교통에 투자하고 있으며,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백두산을 잇는 고속철 노선(둔바이 고속철도)가 2021년 개통 예정이다.
또, 북중 교역 강화를 위해 퉁화와 북·중 접경 지안까지 연결되는 지안~퉁화 고속도로가 개통하였다. #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연변은 한국어가 꽤 통한다. 그러나 일단 연변 지역이 조선족 자치구라고는 해도 한족 인구가 반수를 넘어가는 추세다. 게다가 조선족이라도 중국조선어는 본토 한국어와 어느 정도 분화가 생겼기 때문에, 소통에 지장이 있다. 그나마 조선족은 한국 TV와 한국책 등이 많이 보급되어 있고 한국으로 일하러 들어가는 경우가 워낙에 많다보니 한국인들의 말을 알아듣는 것까지는 가능하지만, 한국인은 상대적으로 조선족의 말을 알아듣기 힘들다. 법적으로 강제하기 때문에 가게의 간판은 한글/한자 2가지 문자로 적혀있다.
고구려시대나 발해시대 유물, 건축물이 꽤 많아 관광을 위해 일반인에게 개방해 놓았지만, 일부 지역은 한국인이 아예 입장할 수 없는 곳도 있다.
6. 역사[편집]
지금은 중국에 소속되어 있지만, 그 이름이 만주어 어원인데서도 알 수 있듯 역사적으로 한족의 통치 하에 있었던 시기보다는 한국사 왕조, 퉁구스계 왕조, 몽골계 유목제국의 지배를 받은 기간이 길었다. 옆 동네 랴오닝은 그래도 중국이 직접 통치한 시기도 꽤 있었지만, 지린은 지도상으로 중국 영향권 내에 표시되어 있었던 몇몇 시기에도 워낙 춥고 산세가 험하고, 툭하면 유목민족들에게 털리는지라 간접적 통치가 대부분이었고 관리도 매우 힘든 곳이었다.
고대에는 고조선, 고구려, 부여, 발해의 활동무대였으며 발해 멸망 후 거란, 여진, 몽골 등이 발흥해 이 곳을 통치했고 청나라 또한 이 곳에서 발흥하였다.
하지만 워낙 관리가 힘든 곳이라, 이 지역을 차지한 왕조들은 중원을 지배하고 나면 항상 이곳을 버리다시피 해왔다. 청나라의 경우 1644년 중원 정복 이후, 중원 지역에 대해서는 '행성제(行省制)'를 적용했지만 만주 지역에 대해서는 장군부(將軍府)를 두어 통치하게 하는 '군부제(軍府制)'를 채택했다.
1653년(순치 10) 지금의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닝안시(寧安市)에 '영고탑앙방장경(寧古塔昻邦章京)'이라는 벼슬을 두었다가, 1662년(강희 1) 이를 '진수영고탑등처장군(鎭守寧古塔等處將軍, 약칭 영고탑장군)'으로 개칭하였다. 1673년(강희 12)에는 지금의 지린성 지린시에 '길림성(吉林城)'을 쌓고, 길림오랍(吉林烏拉, 지린우라)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이 일대를 지린성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1676년(강희 15) 장군의 주둔지를 지금의 지린성 지린시로 옮기고 1757년(건륭 22) 군부의 명칭을 '진수길림오랍등처장군(鎭守吉林烏拉等處將軍, 약칭 길림장군)'으로 고쳤는데, 이 길림장군이라는 군부가 이후 지린성의 전신이 되며, 공식적으로는 신해혁명 직후인 1912년 길림성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그러나 1740년(건륭 5) "여긴 우리가 태동한 땅이니 신성한 곳이라 아무도 발 들이지 말라."하고 '유민귀환령(流民歸還令)'을 내려 산해관 동쪽 지역에 대대적인 봉금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현지에 살던 만주족들은 대다수가 이미 순치제의 중원 정복 이후에 중국 본토로 이주해버렸기 때문에 정작 이 지역에 남아 있던 만주족들은 매우 적었고, 그 뒤 극심한 가뭄 및 흉년 등으로 생계에 위협을 받은 화북 지역의 한족 농민들이 대량으로 유입해 들어오는 것도 저지할 수 없었기에 사실상 방치나 다름없어 분명 실효성에 문제가 있었던 정책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 봉금정책은 1803년(가경 8) 폐지되었고, 1878년에는 한족에 대한 가족 동반 이민을 허용하면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래서 100여년 사이에 한족들의 대대적인 이주로 이곳의 다수민족은 한족이 되었다.
어쨌든 이 봉금정책으로 지린성 남부 지역에 사람이 거의 살지 않게 되어 비무장지대 같이 완전 야생지역이 되다 보니, 조선에서 기반이 없던 일부 조선인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 청나라 영토로 넘어가서 마을을 만들기도 하고, 거기서 쑥쑥 자란 산삼 같은 작물들을 채집하기 위해서 등, 조선 사람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이 곳으로 많이 넘어오게 된다. 이것이 중국조선족의 시초이며, 간도 떡밥의 시작이었다. 공식적으로 정한 국경선을 맘대로 넘어가는 문제라 조선에서도 불법으로 간주해 처벌했으나, 북한 탈북자마냥 적극적으로 발본색원하려는 의지는 없었다. 이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청 양국 간에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는데,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청 멸망 이후에는 만주 지역에 한족 군벌들이 성장하였고, 당초에는 길림독군 멍언위안의 지배를 받았으나 1919년 동삼성 순열사 장작림이 이 지역을 장악했다. 이후 10년 넘게 봉천군벌의 지배를 받았으나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 일본 제국이 점령했고 선통제를 옹립하여 만주국을 수립하였다. 이 만주국의 수도가 신경특별시(新京特別市)라는 곳이었는데, 바로 지금의 창춘이다. 1930년대 중국 공산당과 그 휘하에 있던 독립군들이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곳이기도 하며, 역으로 일본에 부역한 친일파들과 일본군이 토벌전을 벌였다. 1945년 소련군이 일본군을 무찌른 곳이기도 하며, 일본 패망 후 소련군이 잠시 이 곳을 접수했다가 얼마 후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 하에 들어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7. 역대 영도인[편집]
8. 행정구역[편집]
9. 교육[편집]
지린성 최대 규모의 중점 대학으로는 창춘시에 위치한 지린대학(吉林大学,Jilin University)과 지린시에 위치한 베이화대학(北华大学, Beihua University)이 있다. 지린대학은 지린성에서 중국대학랭킹 1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지린대학은 1946년 동북행정학원으로 출발해 지금의 국공립 종합대학이 되었다. 중국 교육부가 A급 쌍일류대학으로 분류한 명문대이다. 베이화대학은 1999년 교육부의 승인으로 지린사범학원, 지린의학원, 지린임학원, 지린전기화고등전문학교가 합병해서 세워졌다. 따라서 동, 서, 남, 북 4개의 캠퍼스가 존재한다. 그외에도 100개가 넘는 대학이 지린성 내에 위치해 있다.
10. 독립군 활동[편집]
지린성은 일제강점기 때, 한국 독립군들이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지역이다. 랴오닝성은 일본의 통치력이 강했고, 헤이룽장성은 지리적으로 너무 멀어, 교포들이 많이 사는 지린성이 독립운동의 사실상 중심지가 되었다.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 수많은 전투가 이 곳에서 벌어졌고, 간도 참변 등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을 거치고 이 곳의 독립군 활동은 잠시 위축되는데[6] 그러던 와중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한다. 이후 3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독립군과 중국군이 한-중 연합 작전을 전개해 상당한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점점 일본의 통치력이 강해지면서 만주의 독립군들은 대부분 중국 관내로 들어가, 만주의 독립운동은 시들해지게 된다.
물론 그 후에도 김일성이 이끄는 세력이 함경도 내에 진입을 시도하는 과감한 활동을 하는 등 저항 운동이 있었다. 북한에서 치켜세우는 보천보 전투가 이것이다. 그마저도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사라지게 된다.
11. 중국의 동해 진출?[편집]
지도를 보면 지린성의 동쪽은 북한과 러시아 영토에 막혀 아슬아슬하게 동해 바다와 접해있지 않다. 그러다보니 동해로 나가고 싶은 중국 정부가 동해로의 진출로를 모색하려고 북한에게 여러 가지 지원을 해주면서 나진항 이용권을 얻어가고 있다. 하지만 실용성이 있을지는 미지수이긴 하다.
과거 청나라와 제정 러시아 시절에 연해주를 놓고 갈등을 벌인 적도 있다. 양국은 네르친스크 조약과 캬흐타 조약이라는 국경 획정 조약을 맺었지만, 1800년대에 서구 열강들이 중국을 차례차례대로 전쟁에 이기면서[7]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으로 지금의 국경선이 만들어진 것이다.
12. 출신 인물[편집]
자세한 내용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마잔산
- 당예서
- 왕훙원
- 류샤오보
- 리웨이펑
- 리자쥔
- 리쯔쥔
- 리젠러우
- 저우양
- 양양(S)
- 주권
- 진징다오
- 김용국
- 런쥔
- 스여우싼
- 이순자
- 오극렬
- 방원철
- 최현
- 이영
- 윤동주 - 일제강점기의 시인
- 임갑교
- 차이윈성
- 정진
- 장이판
- C.T.O - 윌리엄스
- D.Ark
13. 기타[편집]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4-06-17 00:57:12에 나무위키 지린성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중국은 전 지역(홍콩, 마카오, 대만 포함)이 중국 표준시를 사용한다.[2] 참고로, 당시 관화는 구개음화가 되지않던 시기여서 오늘날 'ji'로 발음되는 것들은 대부분 'gi'로 발음했다. 구개음화가 완전히 진행된 건 청나라 말기 이후부터였다.[3] 청나라 건륭제의 <만주원류고>에서 길림이 신라를 뜻하는 계림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했다. 만주원류고에서는 신라가 길림성 일대까지 지배하고 있었다하여 한국사학계의 입장과 대치된다.[4] 대부분 함경북도(특히 두만강권)계.[5] 북한 인구와 비슷하다. 다만 출생아 수는 북한의 절반도 채 안 된다. 그만큼 고령화와 인구 감소 문제가 심각한 지역이라는 것.[6] 그 와중에도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설립 등 활로를 모색하기도 했다.[7] 아편전쟁, 청프전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