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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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린역 일대
중국 지린성 중부의 지급시. 만주어로 '강가의 마을'이란 의미인 기린우라 (ᡤᡳᡵᡳᠨ ᡠᠯᠠ) [한역] 에서 지명이 유래되었고, 이는 다시 지린성 자체의 어원이 되었다. 다만 1954년 이후 지린성의 성도는 최대 도시이자 지린시에서 서쪽으로 80km 떨어져 있는 창춘으로 이전되었다.[1] 그래도 지린시의 지급시 관할 인구는 360만, 도시 자체의 인구만도 200만이 넘는 등 지린성 제2의 도시이다. 인근의 비옥한 토지를 이용한 농업과 동쪽 쑹화강 상류 펑만댐의 수력 발전으로 인한 전력 공급을 이용한 화학 공업 도시로 발전하였다. 만주 중남부에 입지한 덕에 만주족 23만명, 조선족 11만 등이 거주하는 다민족 도시이다.
쑹화강 양안에 위치한 시가지는 양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방어에 적합하고, 순환도로로 둘러져 있다. 쑹위안과 함께 지린은 쑹화강의 대표적인 하항이며, 목재와 곡물의 집결지이다. 도심 서북쪽 외곽에 지린 에르타이지 공항이 있었으나 불과 70km 거리의 창춘 룽자 국제공항이 성장하며 여객이 중단되었고, 현재는 군공항으로 쓰이고 있다. 지린역은 창춘-옌지 철도와 하얼빈-수란 철도가 교차한다. 시내에는 지린 만주 박물관, 지린 박물관이 있으며 평만댐으로 인해 생긴 쑹화호 역시 관광지이다. 인근 강변, 구릉지대에는 선사시대부터 고구려 / 요나라 / 금나라 시기 고분이 많다.
고대 북부여의 중심지로, 예성(濊城)과 부여성이 위치했다. 이후 고구려와 발해를 거쳐 요나라, 발해부흥국들, 금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명나라 영락제가 당시 일대를 지배하던 여진 안부를 복속시켰으나 일시적인 것에 그쳤다. 17세기 초엽 후금이 일대를 정복하였고, 청나라 대인 1671년에 길림성(吉林城)이 세워졌다. 1727년 영길주(永吉州)가 설치되어 길림성에 중심지를 두었고, 1747년 영길주를 고쳐 길림청(吉林廳)이 되었다. 1881년에는 길림청이 길림직예청으로 승격되었다가 이듬해인 1882년 다시 길림부(吉林府)로 승격해 일대의 중심이 되었다.
다만 20세기 들어 창춘이 성장하며 점차 위세가 창춘에 밀리게 되었고, 신해혁명 이후인 1913년에는 길림부가 길림현(吉林縣)으로 격하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성도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1929년에는 길림현에서 영길현(永吉縣)으로 이름이 바뀌고 동시에 길림시정주비처(吉林市政籌備處)가 설치되었다.
1931년 9월 21일, 불과 3일 전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에 의해 길림성(城)이 점령당했고, 이듬해인 1932년 3월 1일 괴뢰국가 만주국이 수립되자 만주국 길림성공서(吉林省公署)가 성립되었다.
지린은 홍수가 잦았기에 1937년 만주국 시기에 펑만댐 건설이 시작되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 뒤 그해 10월 중국공산당 길림시위원회의 조직 하에 길림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948년 해방 후에도 지린성의 성도 지위를 유지했고, 1953년에는 펑만댐이 완공되었다. 다만 1954년 성도는 창춘으로 옮겨졌다. 문화대혁명 시기인 1968년 ~ 1980년에는 지린시 혁명 위원회가 자치적으로 통치하기도 하였다. 2005년 석유 화학 발전소 폭발로 6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하는 사고가 있었다. 2010년에는 홍수가 발생하여 백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고 독성 화학 물질이 담긴 통 수천개가 방류되어 군병력이 동원되는 등 혼란을 겪었다. 이후 펑만댐을 증축하여 2019년 완공, 이후로는 수해 피해가 거의 사라졌다.
관내에 지린역이 존재하는데, 해당 역은 창투철도(长图铁路), 지슈철도(吉舒铁路), 선지철도(沈吉铁路), 창훈 도시간철도(长珲城际铁路)가 교차하는 역이다. 지린역은 창춘같은 바로 옆 도시는 물론이고 베이징, 충칭, 닝보, 칭다오 등 지린에서 상당히 거리가 먼 도시까지도 열차가 운행된다. 그러나 창춘 룽자 국제공항이 지린시에서 꽤 가깝기 때문인지 공항은 없으며 건설계획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린역 일대
1. 개요[편집]
중국 지린성 중부의 지급시. 만주어로 '강가의 마을'이란 의미인 기린우라 (ᡤᡳᡵᡳᠨ ᡠᠯᠠ) [한역] 에서 지명이 유래되었고, 이는 다시 지린성 자체의 어원이 되었다. 다만 1954년 이후 지린성의 성도는 최대 도시이자 지린시에서 서쪽으로 80km 떨어져 있는 창춘으로 이전되었다.[1] 그래도 지린시의 지급시 관할 인구는 360만, 도시 자체의 인구만도 200만이 넘는 등 지린성 제2의 도시이다. 인근의 비옥한 토지를 이용한 농업과 동쪽 쑹화강 상류 펑만댐의 수력 발전으로 인한 전력 공급을 이용한 화학 공업 도시로 발전하였다. 만주 중남부에 입지한 덕에 만주족 23만명, 조선족 11만 등이 거주하는 다민족 도시이다.
쑹화강 양안에 위치한 시가지는 양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방어에 적합하고, 순환도로로 둘러져 있다. 쑹위안과 함께 지린은 쑹화강의 대표적인 하항이며, 목재와 곡물의 집결지이다. 도심 서북쪽 외곽에 지린 에르타이지 공항이 있었으나 불과 70km 거리의 창춘 룽자 국제공항이 성장하며 여객이 중단되었고, 현재는 군공항으로 쓰이고 있다. 지린역은 창춘-옌지 철도와 하얼빈-수란 철도가 교차한다. 시내에는 지린 만주 박물관, 지린 박물관이 있으며 평만댐으로 인해 생긴 쑹화호 역시 관광지이다. 인근 강변, 구릉지대에는 선사시대부터 고구려 / 요나라 / 금나라 시기 고분이 많다.
2. 역사[편집]
고대 북부여의 중심지로, 예성(濊城)과 부여성이 위치했다. 이후 고구려와 발해를 거쳐 요나라, 발해부흥국들, 금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명나라 영락제가 당시 일대를 지배하던 여진 안부를 복속시켰으나 일시적인 것에 그쳤다. 17세기 초엽 후금이 일대를 정복하였고, 청나라 대인 1671년에 길림성(吉林城)이 세워졌다. 1727년 영길주(永吉州)가 설치되어 길림성에 중심지를 두었고, 1747년 영길주를 고쳐 길림청(吉林廳)이 되었다. 1881년에는 길림청이 길림직예청으로 승격되었다가 이듬해인 1882년 다시 길림부(吉林府)로 승격해 일대의 중심이 되었다.
다만 20세기 들어 창춘이 성장하며 점차 위세가 창춘에 밀리게 되었고, 신해혁명 이후인 1913년에는 길림부가 길림현(吉林縣)으로 격하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성도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1929년에는 길림현에서 영길현(永吉縣)으로 이름이 바뀌고 동시에 길림시정주비처(吉林市政籌備處)가 설치되었다.
1931년 9월 21일, 불과 3일 전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에 의해 길림성(城)이 점령당했고, 이듬해인 1932년 3월 1일 괴뢰국가 만주국이 수립되자 만주국 길림성공서(吉林省公署)가 성립되었다.
지린은 홍수가 잦았기에 1937년 만주국 시기에 펑만댐 건설이 시작되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 뒤 그해 10월 중국공산당 길림시위원회의 조직 하에 길림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948년 해방 후에도 지린성의 성도 지위를 유지했고, 1953년에는 펑만댐이 완공되었다. 다만 1954년 성도는 창춘으로 옮겨졌다. 문화대혁명 시기인 1968년 ~ 1980년에는 지린시 혁명 위원회가 자치적으로 통치하기도 하였다. 2005년 석유 화학 발전소 폭발로 6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하는 사고가 있었다. 2010년에는 홍수가 발생하여 백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고 독성 화학 물질이 담긴 통 수천개가 방류되어 군병력이 동원되는 등 혼란을 겪었다. 이후 펑만댐을 증축하여 2019년 완공, 이후로는 수해 피해가 거의 사라졌다.
3. 교통[편집]
관내에 지린역이 존재하는데, 해당 역은 창투철도(长图铁路), 지슈철도(吉舒铁路), 선지철도(沈吉铁路), 창훈 도시간철도(长珲城际铁路)가 교차하는 역이다. 지린역은 창춘같은 바로 옆 도시는 물론이고 베이징, 충칭, 닝보, 칭다오 등 지린에서 상당히 거리가 먼 도시까지도 열차가 운행된다. 그러나 창춘 룽자 국제공항이 지린시에서 꽤 가깝기 때문인지 공항은 없으며 건설계획도 존재하지 않는다.
4. 하위 행정구역[편집]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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