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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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폭스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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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1929
1930







파일:MLB 로고.svg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external/baseballhall.org/Foxx%20Jimmy%20Plaque_NBL_1.png
지미 폭스
헌액 연도
1951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79.20% (7회)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32 ~ 1933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MVP
레프티 그로브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지미 폭스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미키 코크런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38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MVP
찰리 게링거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지미 폭스
(보스턴 레드삭스)


조 디마지오
(뉴욕 양키스)


파일:MLB 로고.svg 메이저 리그 타자 트리플 크라운

로저스 혼스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25년)

지미 폭스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1933년)

척 클라인
(필라델피아 필리스, 1933년)

루 게릭
(뉴욕 양키스, 19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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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이모리 폭스
James Emory Foxx

출생
1907년 10월 22일
사망
1967년 7월 21일 (향년 59세)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출신지
메릴랜드 주 퀸 앤스 카운티
포지션
1루수
투타
우투우타
신체
183cm, 88kg
프로입단
1925년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입단
소속팀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1925~1935)
보스턴 레드삭스 (1936~1942)
시카고 컵스 (1942, 1944)
필라델피아 필리스 (1945)

1. 소개
2. 유년 시절
3. 선수 시절
3.1.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
3.2. 보스턴 레드삭스
3.3. 그 이후
4. 은퇴 이후
5.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6. 기타



1. 소개[편집]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 보스턴 레드삭스등에서 뛰었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전 야구선수.

홈런 1위 4회, 타점 1위 4회, 타율 1위 2회, 출루율 1위 3회, 장타율 1위 5회, 트리플 크라운 1회(1933년 0.356 48홈런 163타점). 또한 역사상 단 7명 뿐인 통산 OPS 1.0 이상을 기록해 전성기 시절엔 '우타 베이브 루스'로 불리기도 했으며, 당대 루 게릭 다음가는 1루수로 정평이 난 대선수였다.[1]

통산 7차례의 삼진왕 시즌을 기록했는데, 이 중 4시즌은 볼넷이 삼진보다 더 많았다. 통산 삼진이 1311개인데, 볼넷은 1452개. 한 마디로 장타력도 출중하면서 선구안도 좋았다는 이야기.

여러가지 면에서 현대 야구팬들에게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시절의 알버트 푸홀스와 비슷한 인상을 주는데, 실제로 두 선수는 레퍼런스 기준 similarity score에서 서로 3, 4위를 기록하고 있다. 통산 1루수 누적 WAR 기준 지미 폭스가 96.4로 3위, 알버트 푸홀스가 16년 8월 22일 기준 100.4로 2위인 점도 참고 사항. 다만 이 두 선수 모두 전성기 대비 커리어 후반부 극적으로 추락한 것마저 닮아버렸다.


2. 유년 시절[편집]


1907년 미국 메릴랜드주에서 아일랜드 계 농부 밑에서 태어난 폭스는 남북전쟁에 참전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군인의 꿈을 키웠으며 미국이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자신도 군에 자원하려 했으나 당시 미군에선 폭스가 10살이었기 때문에 받아주지 않았다.

이후 폭스는 운동선수의 꿈을 키웠으며 학교에서 육상선수로 두각을 나타내었으나 점차 야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학교 야구팀에 들어갔으며 세미프로팀에 입단했다.

폭스가 세미프로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데드볼 시대의 대표적인 강타자였으며 당시 이스턴 쇼어 리그 팀의 감독을 맡고 있던 프랭크 베이커[2]에 눈에 띄어 16살에 나이에 이스턴 쇼어 리그에 데뷔 했다. 그 해 폭스는 타율 .296를 기록했다.

시즌 막판에 베이커는 폭스를 메이저리그에 데뷔 시키기 위해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뉴욕 양키스에 폭스를 영입하라고 제의했다. 이 두 팀 중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가 폭스에 더 큰 관심을 보이자 베이커는 2천 달러를 받고 폭스를 넘겼다.


3. 선수 시절[편집]



3.1.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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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단 당시 폭스)

폭스는 마이너리그에서도 일찍이 두각을 나타내 1925년 대타요원으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그러나 이 해 폭스는 10경기 9타수 6안타를 기록했을 뿐, 대부분은 마이너리그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미 사이 퍼킨스라는 주전 포수와 훗날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미키 코크런이 이 해 필라델피아에 입단했기 때문이다.

다음해인 1925년, 폭스는 26경기에 출장했으나 여전히 대타요원 노릇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7년부터 폭스에게 기회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1927년 .323 3홈런 20타점을 기록한 폭스는 다음해인 1928년 .328 13홈런 79타점을 기록하며 자신의 입지와 실력을 높여가며 성장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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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코니 맥 감독은 1루수 조 하우저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이적시키고 폭스를 주전 1루수로 기용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시즌이 시작되자, 폭스는 자신을 기용해준 맥 감독에게 보답하듯 맹타를 휘둘렀다. 시즌 초반 4할대 타율을 넘나들던 폭스는 .354 33홈런 116타점으로 시즌을 마무리. 폭스의 소속팀 필라델피아는 이 해 104승을 올리며 15년만에 아메리칸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월드시리즈에서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16년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930년에도 폭스는 계속 맹활약했다. 폭스는 이 해 타율 .335 37홈런 156타점을 기록했으며 홈런과 타점은 리그 3위에 랭크 되었다. 필라델피아는 다시 한번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상대로 시리즈 전적 4승 2패로 우승하였다.[3]

1931년, 데뷔 후 처음으로 타율이 3할 밑으로 내려가 .291을 기록했으나 30홈런과 120타점을 기록하며 필라델피아의 리그 3연패에 공헌했다. 그러나 필라델피아는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다시 맞붙었으나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배했다. 폭스는 이 해 자신이 거둔 성적이 맘에들지 않아 스윙을 교정하기로 결정했다.

다음 해인 1932년, 폭스의 결정이 옳았음이 입증됐다. 폭스는 이 해 타율 .364 58홈런 169타점이라는 캐사기 성적을 기록하며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다. 당연히 폭스는 이 해 아메리칸리그 MVP를 수상했다. 그러나 필라델피아는 뉴욕 양키스에게 리그 챔피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4][5]

1933년 폭스는 타율 .356 48홈런 163타점을 기록하며 전년도에 아쉽게 놓친 타격 트리플 크라운을 기록했고 MVP까지 거머쥐며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2년 연속 MVP를 수상한 선수가 되었다. 그해 필라델피아는 뉴욕 양키스워싱턴 세네터스에 밀려 3위에 올랐다.[6][7]

1934년, 폭스는 .334의 타율에 44홈런으로 루 게릭에 이은 리그 2위에 랭크되었고,130타점을 기록하며 홀로 분전했으나 필라델피아는 리그 8팀 중 5위에 올랐다.

1935년, 폭스는 신인 앨릭스 훅스의 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한 맥의 결정으로 포수로 복귀했으나 앨릭스 훅스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마이너리그로 가자 5월 말에 다시 1루수로 복귀했다. 폭스는 이 해 36홈런을 치며 홈런왕에 올랐으며 타율 .334 115타점을 기록했으나 이런 폭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필라델피아는 결국 리그 꼴찌를 기록하고 말았다. 시즌이 끝나고 더이상 폭스의 연봉을 감당할수 없었던 필라델피아는 폭스를 자니 마컴과 함께 15만 달러를 받고 보스턴 레드삭스에 팔아넘겼다.


3.2. 보스턴 레드삭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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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으로 이적한 뒤의 폭스. 오른쪽은 테드 윌리엄스)

레드삭스로 이적하고 나서도 폭스의 기량은 여전했다. 폭스는 이적 첫 해 타율 .338 41홈런 143타점을 기록하며 리그 최고의 타자의 위용을 자랑했다. 그러나 레드삭스는 8개 팀중 6위에 머물렀다.

1937년 폭스는 두통을 겪기 시작하며 성적이 다소 하락한 모습을 보였다. 타율 .285 36홈런과 127타점을 기록하며 전년도보다 다소 성적이 하락한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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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폭스는 전년도의 부진을 만회 하듯이 타율 .349(1위) 50홈런(2위) 175타점(1위)을 기록하며 다시 MVP를 차지하였다.

1939년에도 폭스는 맹타를 휘둘렀다. 비록 9월 초에 충수염으로 시즌을 마감했으나 타율 .360으로 조 디마지오에 이어 2위에 올랐고, 35홈런으로 홈런왕을 차지했다.[8]

1940년 폭스는 .297 36홈런 119타점으로 홈런과 타점 부문에서 각각 2위와 4위를 기록했다. 폭스는 이 해 9월 24일, 친정팀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를 상대로 개인통산 500호 홈런을 쳤다.

1941년부터 폭스는 무절제한 생활로 인해 기량이 하락하기 시작한다. 폭스는 타율 .300을 기록 했으나 홈런 수가 19개로 줄어들었고 107타점을 기록하며 뚜렷한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스프링캠프 때 입은 부상의 후유증 등으로 인해 부진하자 레드삭스는 그를 포기했고, 폭스는 시카고 컵스로 이적한다.


3.3. 그 이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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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컵스 시절 폭스)

컵스로 이적하고서도 폭스는 좀처럼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1942시즌을 타율 .226 8홈런 33타점으로 마무리하며 데뷔 이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이후 폭스는 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1944년 15경기에 출장했으나 5푼 타율에 2타점이라는 처참한 성적을 남겼고 홈런은 한개도 치지 못하며 자신의 커리어 로우 성적을 갈아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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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 필리스 시절의 폭스)

1945년 폭스는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이적해 89경기에 주로 대타로 출장했다. 또한 선발 투수로도 출장해 신시내티 레즈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리고 이 해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4. 은퇴 이후[편집]


은퇴 후 폭스는 몇가지 사업을 벌였으나 실패했다.한때는 전미 여자 야구 리그의 포트웨인 데이지스의 감독으로 활동[9]하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자신의 친구가 소개해준 일자리에서 일하기도 했다.

선수시절부터 술을 달고 살았던 폭스는 은퇴후 자신이 벌은 돈을 대부분 술값으로 썼다.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는 1951년 7수만에 79.20%의 득표율로 입성했는데 한 시대를 풍미한 슬러거치고는 꽤나 낮은 편. 아래 HOF 통계 단락을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첫 턴에 입성하는 게 당연해보이는 커리어다. 아무래도 자기관리가 안 되는 선수라는 이미지가 컸던 듯.

1963년 심장마비를 겪은 이후 그의 건강상태는 좋지 않았는데,1967년 7월 21일 식사 중 음식이 목에 걸려 호흡이 마비되는 바람에 사망했다.


5.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편집]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지미 폭스
59
257
314
72
HOF 입성자 평균
27
144
100
50

  • JAWS - First Base (3rd)

career WAR
7yr-peak WAR
JAWS
지미 폭스
96.4
59.5
77.9
1루수 HOF 입성자 평균
66.4
42.7
54.6


6. 기타[편집]


  • 미국 초기 여자 야구 리그 소재 영화인 그들만의 리그에서 톰 행크스가 맡은 지미 듀건이 폭스를 모티브로한 인물이다. 유명한 장면은 여자야구팀 감독인 톰 행크스가 야구지도에 성의를 보이지 않고, 전날밤 음주 후 아침에 작전회의 시간에 오줌만 싸고 있는데 여자선수들이 오줌 싸는 시간을 재는 장면.

  • 홈런 베이커가 폭스가 소가 농사를 지을 때 끌고 가는 기구를 한 손으로 드는 걸 보고 그를 스카우트 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이미 폭스가 유명해진 시점에 나온 이야기로 낭설로 보인다.

또한 스윙 폼이 거칠어서 부드러운 폼이었던 루스와 꽤 대조, 비교가 되었던 듯 하다. 다만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깨기 전까지 최연소 500홈런 타자(만 32세)였지만 무절제한 생활로 이후 홈런을 많이 추가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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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로 역대 1루수 랭킹을 매겼을 때 루 게릭 다음가는 선수로 지미 폭스와 푸홀스가 가장 자주 꼽힌다. 우타자 자체로는 3시즌 4할에 4할 트리플 크라운 2회라는 야구 역사상 유일무이한 대기록을 가진 넘사벽 챔피언 로저스 혼스비라는 괴물이 있고, 그 밑에도 행크 아론이나 행크 그린버그 등이 있어서 만만치 않다.[2] 훗날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3] 폭스는 5차전에서 9회초 183m 짜리 대형 투런홈런을 치며 결승타를 기록했다.[4] 이 때 부터 필라델피아의 몰락이 시작되는데, 당시 미국 전역을 휩쓸던 대공황으로 인해 수입이 줄어들어 고액연봉의 선수들을 감당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코니 맥 감독은 샤이브 파크의 개축을 위해 빚까지 지고 있었다.[5] 결국 필라델피아는 팀의 주축선수들이었던 알 시몬스, 뮬 하스, 지미 다익스를 10만달러에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팔아넘겼다.[6] 게다가 시즌이 끝나면서 필라델피아의 붕괴는 가속화되었다.레프티 그로브, 루브 월버그가 12만 5천 달러에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했고,미키 코크레인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트레이드 되었다.[7] 폭스 역시 연봉이 1만 6천 333달러에서 1만 2천 달러로 삭감 될 뻔 했으나 난항을 겪은 끝에 1만 6천 달러에 도장을 찍었다.[8] 이 해 MVP 3위는 밥 펠러, 4위는 테드 윌리엄스이었다.[9] 이때 그의 이야기가 후술될 영화 그들만의 리그의 소재가 되었다. 물론 시점은 영화와 현실이 다르다. 영화는 미국 여자야구리그가 생긴 직후인 2차대전 시기를 다루지만, 지미 폭스는 2차대전이 끝난 이후에야 여자야구리그 감독을 하였기에 몇년 차이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