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헨드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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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헨드릭스
미치 미첼
노엘 레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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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scograph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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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헨드릭스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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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5ARYZvK4L2afx8AcWcf6kF-1.jpg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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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JIMI HENDRIX EXPERIENCE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지미 헨드릭스, 노엘 레딩, 미치 미첼
입성 연도
1992년
후보자격 연도
1992년
후보선정 연도
1992년



































지미 헨드릭스
Jimi Hendrix


파일:G5kVWkn.jpg

본명
James Marshall Hendrix
제임스 마셜 헨드릭스[1]
출생
1942년 11월 27일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
사망
1970년 9월 18일 (향년 27세)[2]
영국 잉글랜드 런던 켄싱턴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직업
음악가, 싱어송라이터, 프로듀서
소속
King Kasuals (1962 - 1964)
Jimmy James And The Blue Flames (1966)
The Jimi Hendrix Experience (1967 - 1969)
Band Of Gypsys (1970)
서명
파일:지미 헨드릭스 서명.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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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아버지 James Allen Hendrix(1919년 6월 10일생)
어머니 Lucille Jeter(1925년생)
동생 Leon Hendrix(1948년생)
동생 Joseph Hendrix(1949년생)
동생 Kathy Hendrix(1950년생)
동생 Pamela Hendrix(1951년생)
학력
가필드 고등학교 (퇴학)
신체
180cm, 70kg
종교
무종교
장르
사이키델릭 록, 블루스 록, 애시드 록, 하드 록
활동
기간

1962년 - 1970년[1]
사용
악기

보컬, 일렉트릭 기타
레이블
폴리도르, 리프라이스, 캐피톨, 버클리, 트랙, Sue, PPX, RSVP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로고
파일:지미 헨드릭스 로고.png


1. 개요
2. 상세
3. 일생
3.1. 어린 시절
3.2. 세션맨 시절
3.3.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3.4. 익스피리언스 해체, 그리고 사망
4. 앨범
5. 평가와 영향력
6. 여담
7. 대중매체
7.2. 한국에서의 인지도




1. 개요[편집]


왼손으로 악수합시다. 그 쪽이 내 심장과 가까우니까.
Let's shake left hands because they're nearer to my heart.

1969년 5월 14일 로버트 프립이 처음으로 앉아서 기타를 연주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던 공연을 감상한 뒤 그에게 남겼던 말.[3]

미국의 기타리스트.


2. 상세[편집]


1967년부터 1970년까지 록 밴드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 메인 보컬리스트였다.

1960년대 후반에 주로 활동한 기타리스트로,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평가받는다. 물론 취향의 차이에 따라서, 선호하는 기타리스트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순수하게 음악적 성취도가 제일 높은 기타리스트는 지미 헨드릭스임에 아무도 이견이 없다.

미국의 기타리스트이지만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영국에서부터였고, 초창기엔 활동도 영국에서 더 많이 했다.

롤링 스톤이 발표한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기타 연주자 100명’에서 1위에 등극했다. 자세한 건 롤링 스톤 선정 100대 기타리스트 문서 참조.


3. 일생[편집]



3.1. 어린 시절[편집]



파일:external/www.wikitree.com/Hendrix-750.jpg

가족 사진[4]
지미 헨드릭스는 1942년 미국, 인종차별이 합법인 시절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아버지 제임스 알렌 '알' 헨드릭스와 어머니 루실 지터 사이에서 태어났다.[5] 루실이 지미를 출산했을 때는 겨우 17살밖에 되지 않았다. 이 부부는 지미를 낳은 이후에도 5명의 자녀를 가졌으나 가난으로 아이들을 키울 수 없어, 하나둘 입양시키거나 위탁보호 시설로 보냈다. 아버지랑 어머니가 술과 약물에 중독되어서 3명의 자식은 장애, 기형아로 태어났다. 그나마 바로 아래 동생인 레온 헨드릭스는 6살까지는 가족과 같이 살다가 지미의 집에서 가까운 위탁 가정에 맡겨져 어린 시절 두 형제는 자주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지미의 어머니 루실 지터는 밝은 피부와 직모를 가진 빼어난 용모의 여인이었다. 루실은 알 헨드릭스와 이혼 후 고혈압으로 불과 32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는데,[6] 사춘기에 일어난 젊은 어머니와의 사별은 지미 헨드릭스의 성격과 음악에 큰 영향을 준다.

부모의 잦은 부부싸움[7] 끼니조차 잇기 힘든 빈곤으로 어린 지미는 캐나다 밴쿠버 인디언 보호 구역에 살고 있는 할머니에게 자주 보내졌다. 할머니는 지미에게 체로키 인디언 이야기들을 들려주었고, 직접 숄과 판초를 짜서 손자에게 입혀주었다. 결국 지미의 부모는 이혼을 하게 되는데, 아버지 알 헨드릭스가 지미 형제들에 대한 양육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미의 이모, 할머니 그리고 이웃들이 돌아가면서 아이들을 보살폈고, 지미 헨드릭스는 이들 사이를 떠돌면서 찢어지게 가난한 성장기를 보낸다.[8]

어릴 적 일화 중에, 집이 가난해서 아버지가 기타를 사주지 못했는데, 지미 헨드릭스 방에 들어가보면 빗자루 지푸라기들이 매일 널려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린 지미가 빗자루를 들고 방에서 미친 듯이 기타 치는 상상을 하면서 빗자루를 "연주"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심지어 학교에서 하도 빗자루를 기타라고 상상하며 들고 다녀서, 학교 직원이 "얘 기타 안 사주면 심리적으로 충격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라며 저소득층 자녀를 위한 악기 지원 프로그램을 신청한 적이 있다. 안타깝게도 요청은 거절당했다.

그러던 중 지미 헨드릭스가 본격적으로 블루스 음악을 접할 기회가 생긴다. 지미의 아버지가 잠시 형편이 풀려서 낡은 집을 구입하고 하숙을 쳤는데, 하숙으로 들어온 어느 부부가 레코드를 가지고 있었다. 지미는 머디 워터스, 하울링 울프, 로버트 존슨, 라이트닝 홉킨스 등의 블루스 기타리스트들에게 푹 빠지게 되었다.

14살에 쓰레기통에서 주운 한 줄짜리 우쿨렐레를 찾게 되고, 이걸 가지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곡들, 특히 "Hound Dog"를 즐겨 연주했다.[9] 물론 악보 따위 없고 그냥 귀로 듣고 따서 연주.

15살에 아버지가 선물해준 5달러짜리[10] 어쿠스틱 기타가 첫 기타다운 기타였고, 이때부터 친구들과 이웃들로부터 어깨 너머와 귀동냥으로 기타를 배우면서 라디오와 음반에서 나오는 음악들을 귀로 카피했다. 밴드도 결성해서 연주도 했다. 그러나 밴드 음악을 하면서 어쿠스틱 기타는 음량이 작아서 소리가 묻혀버린다는 사실을 알고 일렉트릭 기타를 가지길 간절히 바라게 된다. 마침내 16살 때 그의 아버지가 'Supro Ozark 1560 S'라는 일렉트릭 기타를 지미에게 선물해준다.[11] 일렉 기타를 손에 넣은 지미 헨드릭스는 본격적으로 밴드 활동을 시작한다. 시애틀의 한 유대교 회당 지하실에서 첫공연을 했는데, 공연이 끝나자마자 밴드에서 짤리기도 했다. 이후에 지미 헨드릭스는 벨벳톤스(The Velvetones), 락킹 킹스(The Rocking Kings) 등의 밴드에 가입하고, 클럽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지미가 밴드 활동에 몰입할수록 그가 학교에 나타나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자연히 학업 성적도 떨어졌다. 결국 지미 헨드릭스는 출석수 미달로 고등학교에서 퇴학을 당한다.

지미 헨드릭스는 원래 왼손잡이였는데, 처음에 아버지가 오른손잡이로 교육을 시켰다. 이는 당시 왼손을 쓰는 것은 악마의 상징이라는 사회적 편견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방에 있을 때는 오른손으로 연주를 하다, 아버지가 방을 떠나면 왼손으로 연주를 했다는 일화도 있다. 원래 아버지 때문에 오른손으로 연주를 하다가 정확한 리듬감을 요하는 피킹을 왼손으로 하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을 깨닫고 왼손잡이 연주로 바꿨다는 얘기도 있다. 이와 같은 배경으로 인해 헨드릭스는 양손으로 연주가 가능했다. 이 특이한 스킬은 헨드릭스가 악기점에서 이런저런 기타 오디션을 볼 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3.2. 세션맨 시절[편집]




뒷줄 제일 왼쪽에서 왼손으로 기타를 연주하는 세션맨이 바로 지미 헨드릭스

1961년 헨드릭스는 도난당한 자동차에 타고 있었다는 혐의로 체포된다. 당시에는 입대하는 조건으로 감형을 해주기도 했는데, 지미는 3년 동안 육군에 복무하기로 한다. 그는 제101공수사단에 배치되길 희망했는데, 위험수당으로 달마다 55달러를 더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초군사훈련을 마치고 그가 바라던 공중강습사단에 배치되었지만, 곧 군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베이시스트 빌리 콕스[12]와 캐쥬얼스(The Kasuals)를 결성, 밴드 활동을 계속한다. 기타 천재의 대명사인 지미 헨드릭스이지만 군 부대 내에서 지나치게 연습을 해서 상관으로부터 "그만 좀 하지?"라는 빈정을 들었다고도 한다. 군복무 시절 지미 헨드릭스는 하루빨리 제대해서 제대로 음악을 하고 싶어했는데, 결국 소원대로 낙하산 훈련 중 부상을 입고 조기 제대한다.[13][14]

막상 제대하고 난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제대하고 받은 급여를 버스비도 안 남기고 술집에서 다 써버렸기 때문. 지미는 다시 부대로 되돌아가 동료에게 팔았던 기타를 되찾고 이런 저런 밴드들을 거치면서 세션 활동을 한다. 당시 지미와 함께했던 연주자들의 말에 따르면, 당시 그는 완전히 기타에 미쳐 있었다. 공연 중 휴식 시간에도 기타를 연습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연습했으며, 각성제를 복용하고 밤을 새서 기타를 치기도 했고, 잠을 잘 때도 기타를 꼭 껴안고 잘 정도로 연습광이었다. 지미는 만나는 기타리스트들마다 기타 연주에 대해 가르쳐달라고 했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기타를 치아로 연주하는 퍼포먼스도 이 시기에 익힌 것이다. 한 번은 '지미 제임스(Jimmy James)'라는 이름으로 리틀 리처드의 밴드에서 세션맨 활동을 하기도 했다. 당시 리틀 리처드는 "나보다 옷을 더 멋있게 입는다"는 이유로 지미 헨드릭스를 해고했다. [15] 제임스 브라운의 백밴드에도 몸 담은 적이 있었는데 제임스 브라운한테 쳐 맞고 쫓겨난다.[16] 첨언하자면 리틀 리처드는 자기애의 화신이었고, 제임스 브라운은 평소에 폭력적인 성향이 강한데다가 독불장군 스타일이었다. 자유분방한 지미가 이 둘의 눈 밖에 난 것은 당연할 일인 것이다.

1966년, 헨드릭스는 '지미 제임스 앤드 블루 플레임스(Jimi James and Blue Flames)'라는 밴드를 조직하며 홀로 서게 된다. 당시에는 오리지널 곡이 없어서 하울링 울프의 'Killing Floor', 밥 딜런의 'Like a Rolling Stone', 트록스의 'Wild Thing' 등의 기존 곡들을 커버 연주했었는데, 지미는 원곡 그대로가 아니라 자신만의 스타일로 편곡하여 매번 다르게 커버 연주했었다. 어느 날 린다 키스라는 영국 모델이 지미의 공연을 보고 뻑 가버리는데, 당시 키스 리처즈(롤링스톤즈의 그 양반 맞다...)라는 기타리스트와 사귀면서 음악에 조예가 있었던 그녀는 주변의 음악 업계 종사자들에게 지미 헨드릭스를 소개해준다. 마침 투어차 미국에 와있었던 애니멀스(Animals)의 베이시스트 채스 챈들러(Chas Chandler)가 그녀의 권유로 지미가 연주하는 클럽, '카페 와(Cafe Wha?)'에 들리는데, 헤이 조(Hey Joe)를 연주하는 지미를 보자마자 매니저가 되기를 자청, 영국에서 활동하자고 제안을 한다.[17] 그동안 모리스 제임스, 지미 짐, 지미 제임스로 불렸던 이 청년은 마침내 지미 헨드릭스라는 본명으로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3.3.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편집]


채스 챈들러는 지미 헨드릭스를 영국에서 데뷔를 시켰는데, 이것은 매우 성공적인 전략이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블루스 리바이벌이 일어나고 있었다. 로큰롤이 영국으로 들어온 후 당시 영국의 젊은 기타리스트들은 로큰롤의 원류 중 하나인 블루스까지 파고들면서 블루스를 재해석하고 있었는데,[18] 채스 챈들러는 '본토박이' 흑인 블루스 기타리스트가 영국에서 활동한다면 성공할 것이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지미 헨드릭스에게도 미국보다 영국에서 활동하는 것이 여러 모로 이점이었다. 당시 미국에는 비비 킹, 앨버트 킹, 머디 워터스, 버디 가이 등의 블루스 거장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그들에 의해 블루스 기타는 이미 정형화되어 고착되어있었다. 보수적인 미국의 청자들과 음악산업 관계자들에게 지미 헨드릭스의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연주는 그저 생뚱맞게 들렸을 뿐이었다.



원곡



지미 핸드릭스의 변형ver[19]

런던에 도착한 지미 헨드릭스는 노엘 레딩을 그의 새 밴드의 첫 번째 멤버로 맞아들인다. 노엘 레딩[20]은 원래 애니멀스의 기타 오디션을 보러 왔었는데, 채스가 베이스도 연주할 수 있냐고 물어보았던 것. 노엘은 베이스는 처음이었지만 한 번 해보겠다고 하고 밴드의 베이시스트로 뽑히게 된다. 지미 헨드릭스는 밥 딜런을 닮은 노엘의 헤어 스타일이 마음에 들어서 그를 뽑았다고 했다.

영국으로 건너간 지 일주일 후, 지미 헨드릭스와 에릭 클랩튼, 두 천재 기타리스트들이 처음 만나게 된다. 채스는 에릭 클랩튼을 소개시켜주겠다는 지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미를 크림(Cream)이 공연하는 장소로 데려갔다. 채스는 그냥 서로 인사 정도만 시켜주려고 했는데, 지미 헨드릭스는 순진한 건지 당돌한 건지 크림과 (즉흥 합주)하고 싶다고 부탁한다. 에릭 클랩튼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그는 '두 곡 정도 같이 연주할 수 있을까요?' 하고 물었죠. 나는 괜찮다고 대답해줬지만, 속으로는 '별 웃기는 놈 다 보겠네.'라고 생각했어요." 허락이 떨어지자 지미는 무대로 올라와서 하울링 울프의 '킬링 플로어(Killing Floor)'[21]를 에릭이 이제껏 듣도보도 못한 스타일로 새롭게 커버 연주해버렸다. 에릭 클랩튼은 지미의 연주를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곡을 따라가지도 못했다 술회했다. 관객석에는 또 한 명의 천재 기타리스트가 직업인으로의 위기의식을 느끼며 이 광경을 보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제프 벡.

노엘 레딩에 이어 드러머 미치 미첼[22]이 가입하여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라인업이 완성된다.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는 아직 싱글조차 발매하지 않은 밴드였지만, 기타를 뒤집은 채로 죽여주게 연주하는 왼손잡이 흑인 기타리스트의 입소문은 런던 뮤지션들과 음악팬들 사이에서 금방 퍼졌다.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전에 영국의 뮤지션들 사이에서 그에 대한 소문이 나고 주목 받는 존재가 되었다.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독일까지 투어 일정이 잡히고, 훗날 레전드가 되는 음악인들이 지미의 공연을 보고 그의 친구 및 후원자가 되었다. 비틀즈폴 매카트니링고 스타, 롤링스톤즈브라이언 존스, 에릭 클랩튼, 더 후, 제프 벡 등... 비틀즈의 링고 스타는 그의 안 쓰는 아파트를 빌려주기도 했다. 폴 매카트니는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가 미국의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에 출연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지미 헨드릭스의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 출연은 그가 단숨에 록계의 새로운 별로 큰 주목을 받으며 뜨는 계기가 되었다.



피드백 Feedback 사운드로 시작하는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대표곡 ‘Foxey Lady’

1966년 12월, 밴드의 첫 싱글 '헤이 조(Hey Joe)'가 발매되고 영국 차트 4위까지 오른다.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는 투어 도중 짬짬이 곡을 만들고 녹음을 하여 1967년 정규 앨범 'Are You Experienced'을 발표, 영국 차트 2위까지 오른다.[23] 'Purple Haze', 'Foxy Lady', 'Red House', 'Fire' 등이 이 앨범의 대표적인 곡들이다. 그 해 6월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는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에 출연하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건너간다. 몬터레이 공연의 마지막 곡 'Wild Thing'의 연주 막바지, 기타와 섹스하는 것처럼 기타를 눕힌 채 격렬히 아밍을 하던 지미 헨드릭스는 별안간 라이터 기름을 기타에 붓고 불을 붙인다. 그리고 불타오르는 기타 앞에 무릎을 꿇고 불꽃이 더 타오르게 하려는 듯한 퍼포먼스를 한다.[24] 이렇게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미국 데뷔 무대는 전설이 된다.



기타 박살!



당시 박살났던 기타의 현재 모습[25]

이후 'Axis: Bold As Love', 'Electric Ladyland' 앨범을 내놓으며 2년간 활동한다. 헨드릭스의 명곡들은 거의 다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한마디로 리즈 시절.


3.4. 익스피리언스 해체, 그리고 사망[편집]


1969년, 급조한 밴드의 한계였는지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는 해체하게 된다. 그 후 헨드릭스는 솔로 활동을 하며 우드스탁 페스티벌에도 참여하였다.

1970년 필모어 이스트에서, 친구였던 빌리 콕스(베이스)와 버디 마일스(드럼)와 함께 결성한 밴드 오브 집시스의 데뷔 공연을 한다. 또 다시 전설이 시작될 것 같았으나, 같은 해 9월 18일 헨드릭스는 런던의 스마르칸트 호텔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수면제 과다복용 후 토사물로 인한 질식사.[26]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27세였다.[27]

게다가, 그의 사망 전날 사진들이 꽤나 많이 찍혀있는데,[28] 보통 이렇게 급사한 사람들의 사망 직전 사진이 이렇게 많이 찍히는 경우가 흔치 않기 때문에 주목받고 있다. 사진 속에서 그는 정원에서 차를 마시며 즐거운 휴식을 보내고 있는데, 그 다음 날 그가 어떻게 되는 지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사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친구이자 또 다른 전설적인 기타리스트인 에릭 클랩튼은 지미의 사망 전 지미에게 줄 선물로 왼손잡이용 기타를 구매해 두고 지미를 만나면 주려고 했다. 스스로의 회상에 따르면, 당시 음악계는 생각보다 좁아서[29]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공연에 가면 어련히 만날 수 있겠거니 하고 공연장에 갔는데 지미가 없어서 당황했고, 바로 다음 날 지미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그의 생전 마지막 사진들.

지미 헨드릭스 사망 50일 전의 마지막 마우이 공연. Voodoo Child(Slight Return)을 연주하고 있다.


4. 앨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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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 You Experienced (1967년 5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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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 one
  • 1. Foxy Lady
  • 2. Manic Depression
  • 3. Red House
  • 4. Can You See Me
  • 5. Love or Confusion
  • 6. I Don't Live Today

Side two
  • 7. Maybe This Be Love
  • 8. Fire
  • 9. 3rd Stone from the Sun
  • 10. Remember
  • 11. Are You Experienc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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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xis: Bold As Love (1967년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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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 one
  • 1. EXP
  • 2. Up from the Skies
  • 3. Spanish Castle Magic
  • 4. "Wait Until Tomorrow
  • 5. Ain't No Telling
  • 6. Little Wing
  • 7. If Six Was Nine

Side two
  • 8. You've Got Me Floating
  • 9. Castles Made of Sand
  • 10. She's So Fine
  • 11. One Rainy Wish
  • 12. Little Miss Lover
  • 13. Bold as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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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ectric Ladyland (1968년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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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 one
  • 1. ...And the Gods Made Love
  • 2. Have You Ever Been (To Electric Ladyland)
  • 3. Crosstown Traffic
  • 4. Voodoo Chile

Side two
  • 5. Little Miss Strange
  • 6. Long Hot Summer Night
  • 7. Come On (Let the Good Times Roll)
  • 8. Gypsy Eyes
  • 9. Burning of the Midnight Lamp

Side three
  • 10. Rainy Day, Dream Away
  • 11. 1983... (A Merman I Should Turn to Be)
  • 12. Moon, Turn the Tides...Gently Gently Away

Side Four
  • 13. Still Raining, Still Dreaming
  • 14. House Burning Down
  • 15. All Along the Watchtower
  • 16. Voodoo Child (Slight Return)

  • Band of Gypsys(1970)

헨드릭스는 생전에 정규 음반 3장과 라이브 음반 1장을 남겼다.

2010년 3월, 미공개 녹음 12곡을 담은 지미 헨드릭스의 새로운 앨범 'Valleys of Neptune'이 공개되었다. 2009년 8월, 계약 기간 만료로 유니버설 뮤직 그룹에서 소니 뮤직으로 판권이 이적되어 발매되었다. 그리고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명의로 낸 앨범들도 모조리 딜럭스 에디션으로 발매. 한국에서도 살 수 있다.

2013년 3월 5일, 마찬가지로 미공개 녹음 12곡을 담은 'People, Hell And Angels'가 전세계 동시 발매되었다.

2018년 3월 9일, 'Both Sides Of The Sky' 앨범이 발매되었다.


5. 평가와 영향력[편집]


지미 헨드릭스는 틀림없이 록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주자다. 헨드릭스는 일렉트릭 기타의 범위와 어휘를 음악가가 이전에 시도하지 않았던 영역으로 확장했다. 그의 무한한 추진력, 기술력, 그리고 창의적인 적용은 로큰롤의 소리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


지미 헨드릭스는 오늘날 대중이 일렉트릭 기타라는 악기에서 기대하는 거의 모든 소리를 사실상 혼자서 개발해온 인물이다. 음악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기억되고 있으며, 데뷔한 이래 장장 50년이 넘어가는 현재까지도 대중음악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일렉트릭 기타기타리스트의 역사는 이 사람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고 확고하게 말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음악 분야에서 '드러머'의 존 본햄과 함께 각 분야에서 가장 압도적인 인물을 선정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며, 현 시점 거의 모든 리스트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 1위에 선정되었다.[30][31]

일렉트릭 기타는 1950년대 당시 어쿠스틱 기타의 부족한 소리를 메꾸기 위해 발명된 악기였고, 따라서 오랫동안 '마이크 단 어쿠스틱 기타'나 '소리 큰 어쿠스틱 기타'라는 취급이 강했다. 대중적으로 처음 성공한 일렉트릭 기타를 만든 펜더 회사 역시 록 보다는 깔끔한 소리가 요구되는 컨트리 기타리스트를 위해서 작업했다. 일렉트릭 기타 특유의 소리에 대해 연구가 많이 부족했고, 악기가 발명된지 10년이 넘어가도 이미 존재하던 어쿠스틱 기타의 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 당시 록의 선두주자라고 불리던 엘비스비틀즈를 들으면 기타의 대중적인 소리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지미 헨드릭스. 현대 록밴드에서 요구되는 '더티/크런치' 사운드는 그가 선호하는 마샬 앰프의 오버드라이브에서 비롯된 것이며, 당시에 막 개발되었던 퍼즈(Fuzz), 와우 페달(Wah Pedal), 유니바이브(Univibe) 등의 기타 이펙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개성적인 일렉트릭 기타만의 톤(음색)을 만들어냈다. 이후 톤 메이킹[32] 실력도 모든 일렉트릭 기타리스트를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는 연주 중 피드백 사운드나 격렬한 아밍으로 음정을 벗어난 음, 기타를 앰프 스피커에 부딪히거나 마이크 스탠드에 비벼서 생기는 소리 기타가 박살나는 소리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며, 정확한 음이 아닌 노이즈도 강렬한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레코딩에서도 환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낼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시도를 하였다.[33]

그의 음악은 블루스를 바탕으로 했지만 끝없는 상상력을 실천하면서 더욱 더 공격적이고 거칠게 발전시켰는데, 이러한 시도와 결과물은 블루스를 넘어 록 음악, 특히 본인은 하지 않은 후대의 사이키델릭 록, 하드 록, 블루스 록, 헤비 메탈 같은 여러 장르들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드 록과 헤비메탈의 정체성 중 하나인 '귀를 거칠게 찌르는 고주파의 굉음으로 청중들을 압도하는 사운드를 뿜어내는 기타리스트의 음악'이라는 정의는 훨씬 늦게 자리잡고, 지금과는 다른 형태였을지도 모른다. 왼손잡이였던 지미 헨드릭스는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뒤집어서 연주했었는데,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기타와 한 몸이 된 듯 신기에 가깝게 연주하는 모습을 선보였다. 지미 헨드릭스는 1960년대에 새로운 기타 연주의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기타를 넘어 대중음악에도 막대한 영향을 준 위대한 아티스트들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다시 말하자면, 현시대 일반인들이 일렉트릭 기타하면 떠올리는 '좡좡좡' 거리는 거친 찢어질듯한 소리를 이펙터 사용을 통해 거의 최초로 도입하고 이를 전기 소음이 아닌 음악의 영역으로 끌어온 다음, 이런 소음을 가지고 어떤 음악을 만들지까지 비전을 만들어놓은 인물. 이러한 사운드는 지미 헨드릭스를 통해 음악으로 새로 탄생했고 그의 시도에 영감을 얻은 동시대 기타리스트와 후배들이 발전시켜 나가면서, 일렉트릭 기타로만 할 수 있는 장르까지 새롭게 생겨나면서 이제는 상술한 어쿠스틱 기타의 그늘에서 벗어나 완전한 독자적인 악기로 독립할 수 있었다.[34] 그의 진취적인 음악으로 인하여 비단 일렉트릭 기타 뿐만이 아닌, 1960년대 이후 대중음악의 전체적 역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개인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이 27년이라는 그의 짧은 일생 중 마지막 4년 동안[35]에 모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27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남들보다 늦은 15세[36]에 기타를 정식으로 시작하였으며, 즉 Are You Experienced를 만든 것은 그가 기타를 정식으로 배운 지 9년이 된 해이다. 다른 유명 기타리스트들이 대부분 10세 전후에 기타를 처음 접한 것을 감안하면 지미 헨드릭스가 얼마나 천재인 지 알 수 있는 부분.[37]



Jimi Hendrix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Live)

연주력 자체가 뛰어났던지라 다른 뮤지션의 곡들을 커버하는 것에도 매우 능하였는데, 원곡 그대로 카피하듯 커버하기보다는 자기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하여 독창적으로 커버하곤 했다.[38] 그의 라이브 음반을 들어본다면 다른 뮤지션들이 낸 곡들과 그만의 스타일로 해석한 라이브 곡들을 비교해서 들어보는 재미도 있다.

위의 동영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페퍼상사에 수록된 첫 곡인 Sgt Pepper's Lonely Heart Club Band를 자신 만의 하드록 스타일로 커버했다. 심지어 나온지 3일 만에 저러한 완성도 높은 연주를 보여줬다! 실제로 원곡자 폴 매카트니도 이를 듣고선 지미의 뛰어난 재해석 및 독창적인 소화 능력을 칭찬하였다.[39][40] 또한, 밥 딜런의 곡인 'All Along The Watchtower'는 오히려 원곡보다도 지미 헨드릭스의 커버 버전이 더 유명하다.[41]

여러 매체에서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의 순위를 정하는 자리를 가질 때 2위부터는 순위 변동이 다소 잦지만[42] 1위는 항상 지미 헨드릭스.[43] 무엇보다 흑인이 아직 많은 차별을 받던 시대[44]와 브리티시 인베이전으로 인해서[45] 영국이 음악 시장을 주로 점령하고 있던 시대에 현재 올타임 레전드로 평가받는 당대 최고의 영국계 백인 밴드인 롤링 스톤즈, 비틀즈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스타덤에 오른 흑인 미국 아티스트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가?

사실 지미 헨드릭스는 기존의 흑인 블루스 연주자나 팬들한테는 상당히 멸시받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유는 '흑인 음악인 블루스를 가져다가 백인 음악이었던 록 음악에 결합해 백인에 아첨하는 음악만 만들고 있다.'라는 것이었다. 1960년대의 블루스 리바이벌 당시 고전 블루스를 한창 재해석하던 에릭 클랩튼, 피터 그린 등의 영국의 기타리스트들을 정통 블루스 음악가들은 '테크닉은 있지만 블루스의 느낌을 재현하지 못하는 외국인의 모방'으로 평가받았고, 이는 당시 백인 블루스 아티스트들에게는 일종의 컴플렉스로 작용했다. 실제로도 많은 평론가들이 이 당시의 브리티시 블루스를 고전 흑인 블루스에 영향을 받아 나타난 별개의 장르로 구분한다. 이 때문에 흑인들의 선천적 감성과 필을 모르는 백인들이 지미의 시도를 자신들의 눈으로 해석해 블루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탄생한 것이 블루스와 록의 결합이었고, 이를 갈고 닦은 것이 지금의 록 음악, 나아가 프로그레시브 록,사이키델릭 록,하드 록,헤비메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백인 블루스계의 노력은 미국의 정통 블루스의 입장에서는 흑인 블루스 음악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 영국인들의 변화구, 사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지미 헨드릭스는 미국 출신의 흑인 기타리스트였음에도 정통의 블루스 어법 뿐 아니라 자신만의 창의적인 어법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블루스 록 음악을 완성했다. 이는 에릭 클랩튼을 위시로 한 영국 블루스 록 음악계에서는 엄청난 호응을 얻었지만, 미국의 정통 블루스 음악인들의 반응은 영 좋지 못했다. 당시 흑인들에게는 그다지 좋은 소리를 듣는 인물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팬들은 대부분 백인이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업적 덕분에 블루스와는 1도 관계 없는 뿌리에서 태어난 영국 바깥의 클래식계 기타리스트 잉베이 말름스틴같은 후대 음악가에게 있어서도, 지미 헨드릭스가 일렉트릭 기타라는 악기를 든 이상 안토니오 비발디,니콜로 파가니니같은 거장의 사이에 자리잡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미 헨드릭스는 이러한 평판을 어느 정도 신경쓰고 있었다고 하며,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해체 이후 흑인 멤버들로 구성된 밴드 오브 집시스를 결성하며 보다 펑크(Funk)소울 음악등 흑인음악에 경도된 음악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얼마 못가 지미 헨드릭스가 사망하면서 밴드 오브 집시스의 이후 행보는 영원히 미완으로 남게 되었다. 이후 위와 같은 비판적인 시각은 점차 줄어들었는데, 일단 지미 헨드릭스 이전의 정통 블루스 뮤지션들은 이미 노환으로 사망했거나 음악계를 은퇴한 것도 있고, 지미 헨드릭스가 후대에 남긴 영향력이 워낙 거대하기에 위와 같은 비판 의견이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에 가깝다. 실제로 헨드릭스가 일부에서 이러한 멸시를 받을 무렵에도 이미 비비 킹, 마일스 데이비스, 조지 클린턴과 같은 흑인 음악의 거장들은 창의적인 사운드를 들려주는 헨드릭스의 혁신성을 알아보고 그에 영향받은 음악을 선보였고, 이후 재즈, 소울 음악, 펑크 등 흑인 음악계도 지미 헨드릭스의 영향을 받아들여 큰 발전을 이룩했다. 그래서 현재는 미국/흑인 음악계에서도 전설로 평가받는다.[46]

결국,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뮤지션으로써 흑백의 통합을 이뤄낸 인물중 하나다. 백인으로써 흑인음악을 메인스트림에 받아들일 수 있게한 엘비스와는 반대로 흑인으로써 한계를 넘어선 음악을 해, 백인들의 음악을 진보시킨 인물. 그러니 음악의 한계를 넘고 문화 통합을 이끌어낸 사람을 단순한 뮤지션이라고 보면 안된다. 그는 일렉트릭 기타라는 기계로 하나의 컬처를 새로 만들어낸 문화의 선도자였던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헨드릭스를 통해 하드 록, 헤비메탈의 정체성이 확립된 이후로 정작 헨드릭스의 뒤를 이을 흑인 하드 록, 헤비메탈 뮤지션이 거의 나오지 못했다는 것. 지미 헨드릭스 이후에 나왔던 전설적인 흑인 음악 뮤지션들은 대다수가 펑크(Funk)디스코, 더 길게 보자면 R&B힙합 쪽의 음악을 했다. 그로 인해 하드 록, 메탈씬은 다소는 백인 위주의 문화로 다시 분리되었고 아직까지도 지속되는 중이다.

기타 실력이 너무나 부각되어 살짝 가려진 감이 있지만, 프론트맨으로서의 역량 또한 최고 수준이라 평가받으며, 프레디 머큐리, 믹 재거, 짐 모리슨 등과 함께 록 역사상 최고의 프론트맨으로 평가받는다. 공연때마다 수준급의 퍼포먼스를 유감없이 보여줬으며, 그 유명한 몬터레이 콘서트나 우드스톡 페스티벌 등에서 그의 퍼포먼스와 무대 매너를 잘 확인 할 수 있다. 이로 인해서 빌보드 선정 25대 위대한 록 프론트맨에서 3위에 오른적 있다.#[47]

그에 대한 평을 단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기타의 본좌로 꼽히는 인물이다. 동시에 대중음악의 역사에 있어서도 제일 위대한 거목 중 하나로 꼽힌다. 그가 사망한 지 50년이 넘어가는 현재까지도 일렉트릭 기타의 주요한 주법들 중 대부분에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으니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에 항상 1위로 선정될 만도 하다. 굳이 기타에 국한되지 않고 음악계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줬는데, 그의 주 장르인 블루스, 사이키델릭 록 쪽은 말할 것도 없고, 재즈 뮤지션[48]들도 그의 독특한 화성 방식이나 주법에 영향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후대 등장한 하드 록, 헤비메탈이라는 장르는 헨드릭스를 통해 지금의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따라서 사실상 후대의 일렉트릭 기타 연주자는 장르를 불문하고 무조건 그의 발자취 안에 있을 수밖에 없는데, 지미 헨드릭스가 현역이던 시절 에릭 클랩튼[49], 제프 벡, 더 후피트 타운젠드, 브라이언 메이[50] 등 지금에서는 올타임 레전드라고 평가받는 전설적인 기타리스트들조차 지미 헨드릭스의 지금까지 듣도보도 못했던 혁신적인 음악을 기타와 물아일체의 경지에 다다른 듯 연주하는 장면을 본 후에 '기타를 접어야 하나...' 하고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리고 지미의 스킬과 곡 해석력, 감성을 따라잡기 위해 다양한 시도와 갖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영국의 록 계뿐만 아니라 지구 전체의 록 음악이 발전을 할 수 있었다.

6. 여담[편집]


  • 트레이드마크는 아프로 헤어스타일이다. 이 헤어스타일은 당시 흑인 민권운동가들 사이에서 시작되었으며, 당시 독한 약품을 써가며 곱슬머리를 억지로 펴서 백인식 헤어스타일을 따라하던 것이 아닌 흑인 고유의 곱슬머리도 멋지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 헤어스타일은 곧 수많은 미국의 젊은 흑인들에게 퍼졌으며, 지미 헨드릭스와 같은 흑인 셀레브리티도 아프로 헤어를 함으로서 흑인 민권 운동에 힘을 보태주었다.

  • 당시 대부분의 기타리스트들이 그랬듯 그도 리틀 리처드, 척 베리 등 선배급 로큰롤 아티스트블루스의 세 거장인 3킹(앨버트 킹, B.B 킹, 프레디 킹)에게도 영향을 심하게 많이 받은 인물이나, 그의 연주 주법이나 와우 페달, 옥타비아, 퍼즈 박스 등의 이펙터의 적절한 사용과 놀라운 퍼포먼스는 당시로서는 무척이나 혁신적이고 새로운 시도였던 만큼 '록이란 어떻게 연주하는가'에 꼭 빠지지 않는 락 역사상 최고의 인물이다.

  • 그의 연주 스타일은 펜타토닉 스케일 기반의 블루지한 솔로였으나[51], 당시에 그처럼 록에 걸맞은 빠르고 스타일리쉬한 주법은 보기 힘들었기 때문에 너도 나도 그의 스타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일렉트릭 기타를 처음 배울 때 기초적인 백킹(오픈 코드, 하이 코드, 파워 코드, 스트로크, 아르페지오 등)을 떼고 본격적인 멜로디 연주로 접어들면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펜타토닉 스케일이고, 그 다음에 지미 헨드릭스를 중심으로 다른 고전 록 기타리스트들의 프레이즈들을 다룬다. 지미 헨드릭스가 록의 문법 내에서 집대성한 펜타토닉 스케일(+ 블루스 스케일) 프레이즈들은 일렉트릭 기타의 교과서로 자리 잡은지 오래다.[52]

  • 다만 기타 연주 실력관 별개로 보컬에는 핸디캡이 있었는지, 자신을 '백만 달러짜리 기타 실력과 5달러짜리 보컬 실력을 가진 뮤지션'이라고 말하기도 했다.[53] 보통 지미 헨드릭스의 노래 대부분은 지미 헨드릭스가 보컬을 맡았는데, 그의 말과는 달리 보컬도 나쁘지는 않은 축이었다.[54]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진 보컬리스트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자타공인으로 보컬 실력이 뛰어나지 않은데도 뜬 밥 딜런이 있어서 묻힌다. 일설에 의하면 원래 노래는 안하려고 했으나, 밥 딜런의 노래를 듣고 '저렇게 부르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못 할 게 뭔가'라고 생각해서 보컬까지 하게 되었다고.

  • 헨드릭스는 록 음악R&B의 보컬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정립했다고 평가되는 리틀 리처드밴드에서 기타를 치고 있었으며, 보컬을 겸한 선배격의 블루스 기타리스트들이 보컬적인 역량으로써도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보컬을 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으나, 딜런의 노래를 듣고 보컬에 있어서 기교보다 표현력이 더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보컬을 시작했다고 알려져있다.

  • 시대를 앞서간 기타 연주 실력과 이펙터 사용, 그리고 락 역사에 끼친 지대한 영향력 덕분에 지금도 기타리스트 중에 존경하지 않으면 이유를 물어볼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며, 기타 매거진에서 다른 록 기타리스트를 인터뷰할 때, 다소 식상한 질문인 '가장 존경하는 기타리스트가 누군가요?' 라고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빠지지 않는 인물 중 하나다.

  • 현대 기타리스트에 있어서 록의 첫 번째 혁명은 그가 일으켰다고 해도 좋을 만큼 록 음악대부, 혹은 시초라 불린다. 록 음악 이외에 흑인 음악에도 큰 영향을 미쳐, 당시에도 재즈계의 거물이었던 마일스 데이비스가 헨드릭스를 위시한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같은 후배 록 뮤지션의 음악을 듣고 삘받아서 재즈 펑크를 창시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마일스 데이비스는 불후의 명작 앨범 'Bitches Brew'에서 재즈 기타리스트 존 맥러플린에게 "지미 헨드릭스 스타일로 연주해줘"라고 특별히 부탁할 정도로...

  • SF장르를 좋아했다. 자신의 집 뒷마당에서 UFO를 목격한 뒤로는 직접 책을 쓰기도 했다고.

  • 무종교인이었다.# 자신의 종교는 음악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 정치적으로는 여느 아프리카계 미국인처럼 좌파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출생해야 비로소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다"라는 논지로 낙태에 대해서 옹호했다.[55] 또한 "If 6 Was 9"이라는 곡에서는 화이트칼라 보수주의자들과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가사가 실려있기도 하다.
White-collar conservatives flashing down the street
Pointing their plastic finger at me.
They're hoping soon my kind will drop and die,
But I'm gonna wave my freak flag high

화이트칼라 보수주의자들이 길가에서 번쩍거리고 있어
그들은 플라스틱 손가락을 나에게 겨누지
그들은 우리 종족이 모두 꺼지고 죽어버리기를 원해
하지만 난 내 미친 깃발을 높이 날릴거야

  • 아직도 살아있는 대부분의 전설적인 기타 연주자들은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무엇보다 그들이 기타를 시작한 이유의 대부분이 그의 연주를 들었기 때문이라는 걸 보면 그의 영향력은 실로 무서울 정도.

  • 그의 영향력이 대단한 또 한 가지 이유는 그가 실제로 5년도 안 되는 활동 기간에 이 모든 걸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그의 정규 앨범은 고작 세 장에 라이브 앨범 한 장뿐이지만 하나하나가 다 록 역사상 최고의 명반으로 대우받는 걸작이며, 기타리스트라면 꼭 한 번쯤은 들어봐야 할 불후의 명곡들로 채워져 있다. 또한, 이러한 무시무시한 기타 연주를 1970년대도 아니고 무려 1960년대 말에 해냈다. 이 때 대한민국은 아직 유신 정권도 되기 전이다.

  • 대표곡은 'Purple Haze', 'All Along the Watchtower'[56], 'Foxy Lady', 'Little Wing', 'If 6 Was 9', 'Crosstown Traffic', 'Hey Joe', 'Third Stone from the Sun', 'Voodoo Child (Slight Return)', 'Wild Thing' 등이다.

  • 주로 사용하던 악기는 그 유명한 Stratocaster. 가끔씩 Flying VSG, 레스폴연주하기도 했다.[57][58] 앰프는 그 유명한 플렉시 마샬 앰프. 지미는 마샬 앰프의 게인을 극도로 높여 오버드라이브 사운드를 내기를 좋아했는데, 가까이서 들으면 귀가 터질 지경이었다. 너무 게인을 높여 앰프에서 연기가 날 때도 있었다.[59] 또 앰프에 구멍을 뚫어 잡음이 섞인 지직거리는 소리를 만드는 것 역시 좋아했다. 결국 그 비싼 앰프를 태워먹고 찢어놓는 짓이 무의미하다고 여겨, 이 소리들을 재현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달라고 의뢰한 것이 오늘날 페달형 드라이브 이펙터의 조상 격 되시겠다. 이후 그의 스타일은 하드 록과 헤비메탈 기타 사운드메이킹에 기본으로 자리잡게 된다.


  • 기존 문서에 Fender에서 지미 헨드릭스 트리뷰트 스트랫을 생산한 적이 없다고 기술되어 있었지만, 구글에 'Jimi Hendrix Stratocaster'라고 치면 분명히 이미지와 연주 동영상이 뜬다! 1997년에 판매되어 늦은 감이 있지만, 펜더 시그니처 모델이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이므로 헨드릭스 생전에 펜더사와 어떤 논의도 할 사이 없이 요절했다는 것과 레오 펜더가 헨드릭스의 연주를 싫어했다는 것 또한 근거가 없다. 사용한 68년 스트라토캐스터가 헨드릭스의 메인 기타로 인식되고 있는 편. 헨드릭스가 쓰던 방식의 반대로 왼손잡이용 68 스트랫을 오른손잡이용으로 뒤집어놓은 트리뷰트 아닌 트리뷰트가 잠깐 발매되었던 적이 있긴 있었다.

  • 멕시코 Fender에서 정식으로 시그네쳐 모델이 출시되었다. 색상은 그가 생전에 쓰던 올림픽 화이트/블랙에 메이플 지판의 두 가지 사양이며, 바디나 컨트롤부는 편의를 위해 오른손잡이용 그대로이지만 위아래가 뒤집힌 리버스 헤드에 리어 픽업이 오른손잡이용을 뒤집어 왼손잡이용으로 만든 것처럼 경사가 기존과는 반대로 져 있어 오리지널의 사운드 특징은 잡되, 연주는 더 편하게 만들었다.

  • 헨드릭스가 스타덤에 오르게 된 계기는 1967년도에 개최된 '몬테레이 팝 페스티벌(Monterey Pop Festival)' 무대에 서면서부터였다. 당시 무대에서 엄청난 고출력 사운드와[60] 핵폭탄이 터지는 듯한 폭발적인 연주와 기타를 불태우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61] 여담으로 재니스 조플린도 이 페스티벌에서부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 또한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의 미국 국가 연주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유명 잡지에서 실시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국 국가 공연에서 일개 연주곡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초반에는 정상적으로 연주한 듯한 미국 국가 멜로디가 나오는 듯 싶더니 기타음을 최대한 왜곡시켜서 전투기 소리 같은 전장의 소음을 연출하여 당시 베트남 전쟁의 늪에 빠진 미국 정부를 풍자했다.[62] 이건 60년대 미국 히피 문화를 넘어 68 혁명으로 대표되는 세계적 반체제 운동을 상징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http://youtu.be/sjzZh6-h9fM

  • 사실 그의 퍼포먼스는 혁신적이긴 하나, 기타를 박살내고 태우는 정도의 광기 어린 짓을 많이 하기도 했다. 지금 보면 '뭔 미친놈이 저 좋은 기타에 휘발유를 뿌려서 태우나' 할 정도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몇몇 락 매니아들은 이것도 그의 연주기법 중 하나로 분류한다. 확실히 기타가 탈 때 특유의 소리가 나긴 하지만... 흠좀무. 이 행동은 약물과도 관련이 있다.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라 무대에 오르는 긴장감을 없애기 위해 약물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당시 매니저들은 흑인인 헨드릭스를 차별대우를 하거나, 출연료를 받으면 술과 마약을 사서 헨드릭스에게 주고 나머지 돈은 꿀꺽하는 막장 행보를 보였다고. 참고로 기타를 박살내는 건 더 후의 피트 타운젠드가 원조이다[63]. 하지만 다른 퍼포먼스를 보면 기타를 단순히 연주하는 게 아닌, 쇼맨십에서도 매우 훌륭한 프론트맨였다는 걸 알 수 있다.[64]

  • 사생활은 굉장히 좋지 못했다. 술과 약물 중독에 중독되어 가정을 파탄 낸 부모처럼 지미도 술과 약물에 심각하게 중독되어 있었다. 특히 술과 약물에 취하면 난폭하게 변해 이로 인해 폭력을 일삼아 경찰에 수도 없이 체포 당했다. 친구 폴 루카소를 때려서 체포당하고 연인 카르멘 보레로를 눈 위를 꿰매야 할 정도로 심하게 때려 체포 당했다. 그래서 이로 인해 소속사들과의 갈등이 매우 컸으며 벌어들인 돈을 그가 저지르는 폭력 사건의 보석금과 위자료로 많이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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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로 치아 연주도 바로 지미 헨드릭스의 대표적인 퍼포먼스 중 하나로, 1967년 스톡홀름 공연에서 처음 선보였다.[65] 록 음악 기타리스트의 상징적인 퍼포먼스. 참고로 함부로 따라하지 않는 게 좋다. 이거 기분이 굉장히 더럽고 무엇보다 잘 안 된다(...) 게다가 라이브에서 하면 튜닝도 다시 해야 하니 그냥 쇼맨십으로 하는 것이다.[66] 사실 치아로 줄 퉁기는 게 아니라 손가락만으로 풀링 오프를 하는 것이다.


  • 지미 헨드릭스가 생전에 재즈 록 밴드 시카고의 멤버 중 기타리스트 테리 카스가 자신이 좋아하는 기타리스트들 중 한명이었다고 한다. 1968년에 로스엔젤레스 위스키 고고(Whisky go go)에서 지미 헨드릭스가 시카고(당시엔 시카고 교통국이란 이름으로 활동함)의 연주를 감상하고 난 후 시카고의 색소폰 연주자 월터 페러자이더와 대면하여 그에게 테리 카스를 "당신 밴드의 기타주자가 나보다 나은것 같다."라고 말해주었다.

  • 지미가 모 토크쇼에 나와서 "세상에서 가장 잘 치는 기타리스트가 된 기분이 어때요?" 라는 질문을 받자 "그건 로리 갤러거한테 가서 물어봐"라고 대답했었다는 얘기가 있다. 다만 그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루머이고 사실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실제로 TV쇼에서 그런 질문을 받긴 했으나, 지미는 이에 대해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선 가장 잘 치는 기타리스트겠죠."라며 겸손한 답변을 내놨다.

  • 유달리 앨범 아트에 곡절이 많았던 뮤지션이기도 하다. 첫 번째 앨범은 영국판 커버가 마음에 안 들어 미국판은 새로 커버를 만들었고, 두 번째 앨범도 앨범 커버를 마음에 안 들어했고[67], 세 번째 앨범은 폴 매카트니와 결혼하게 되는 린다 매카트니[68]센트럴 파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동상에 애들 앉혀놓고 찍은 사진을 원했다가 빠꾸 먹었고, 영국판으로 나온 벌거벗은 여자들 커버는 싫어했다.[69] 어째 영국판 앨범 커버하고는 악연인 듯.

  • 지미 헨드릭스가 생전 쓰던 기타 중 하나는 생전에 녹음실 음향기사에게 줬다. 이게 여러 사람을 거쳐 2015년 한 경매 관련 프로그램에서 해당 기타와 판매자를 방영하여 감정 결과 완벽한 진품이 인정되었다. 해당 방송에서 판매자는 75만 달러 정도를 받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경매로 가서 160만 달러에 팔렸다. 경매 프로에서는 수수료 드립 치며 45만 달러에 구입하려고 했었다

  • 에피소드도 많고, 워낙 미친듯한 퍼포먼스로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사실 사생활에선 오히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지만 정중하고 예의바르고 정도 많은 성격이었다. 비비 킹이나 버디 가이 같이 만나서 협주도 해본 뮤지션들은 한결같이 약간 쑥쓰러워 하지만 친절하고 예의바른 사람이었다고 회고하며, 가정생활 면에서도 좀 불행한 의미로 전형적인 불안정한 흑인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유명인이 돼서도 가족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재혼한 새엄마쪽 의붓, 이복형제 자매들도 따뜻하게 챙겨줬다.*

  • 사실 지미 헨드릭스는 당시 흑인 커뮤니티에서 흑인이면서 백인에게 아첨하는 배신자라고 불리기도 했었다. 따라서 흑인을 위한 음악을 방송하던 라디오에선 그의 음악은 철저히 무시당했다. 헨드릭스가 선배 기타리스트 하울링 울프(흑인)와 함께 공연했을 때, 울프는 헨드릭스를 "백인과 짜고 돈벌이를 하고있는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헨드릭스는 울프의 발언에 가만히 견디고 있었다고한다. 하지만 마일스 데이비스처럼 살아있었을 때부터 헨드릭스을 높이 평가했던 흑인 아티스트도 존재한다.

  • 한 번은 영국의 명문대인 임페리얼 대학에서 공연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당시 재학 중이던 스마일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와 만난 적이 있다. 브라이언이 해당 공연의 스텝 중의 한 명으로 참여했었다. 훗날 브라이언은 지미 헨드릭스를 매우 쿨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현란한 기타 솜씨를 보고 엄청난 감명을 받았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7. 대중매체[편집]


  • 일본 만화 나루토에 등장하는 구름 마을의 초대 라이카게가 지미 헨드릭스처럼 생겼다. 작가가 딱히 언급한 적은 없지만 구름 마을에는 헐크 호건을 닮은 닌자가 있는 등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그린 듯한 캐릭터가 있다[70].

  • 일본의 락 밴드 MAN WITH A MISSION은 지미 헨드릭스의 실험체로 만들어졌다는 설정이다.

  • 영국밴드 배드 컴퍼니의 대표곡인 Shooting Star는 술과 약물에 찌들어가 죽어간 젊은 가수의 일생을 다룬 내용인데, 헨드릭스의 삶에서 영감을 얻은 곡이라고 밝혔다. 정확히는 헨드릭스 말고도 재니스 조플린짐 모리슨 등 약물로 요절한 가수들에게서 영감을 따왔다고 한다.

  • 일본 만화 봇치 더 록!의 등장인물 고토 히토리의 개, 지미헨은 이 가수의 이름을 본딴 것이다. 애초에 내용 대부분이 주로 기타리스트들에게 영감을 받거나 오마주 한 것들이다.



7.1. 왼손잡이[편집]


왼손잡이로 유명하다. 오른손잡이였단 이야기도 있지만 여러 소스들[71]을 볼 때, 그는 원래 왼손잡이였지만 이후 오른손잡이로 교육받았고, 이로 인해 양손을 자유자재로 쓰게 된 사례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다른 기타리스트들도 원래 왼손잡이인데 오른손잡이 기준 운지법으로, 기타 연습을 하던 중 오른손으로는 도저히 피킹이 안 돼서 왼손 기타리스트로 돌아온 사례가 많다.

이는 그의 기타 톤에 영향을 줬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기타를 보면 스트라토캐스터의 브릿지 픽업이 살짝 기울어져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높은 현(1번 줄)의 높은 소리를 픽업하고, 낮은 현(6번 줄)의 낮은 소리를 픽업하기 위한 디자인이었는데, 지미 헨드릭스는 오른손잡이 기타를 거꾸로 들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운드 쉐이핑이 반대로 된다.
또한 스트라토캐스터의 헤드를 보면 6개의 헤드머신이 일렬로 되어있다. 즉 제일 저음인 6번줄이 브릿지-헤드머신의 거리가 제일 짧고 최고음인 1번줄이 제일 길다. 하지만 헤드가 뒤집힘으로서 반대로 저음줄이 더 길어지고 고음줄이 더 짧아져서 저음이 좀 더 타이트해지고 높은 음을 연주할 때 텐션이 낮아 테크니컬한 연주가 용이해진다.

지미 헨드릭스와 대조되는 기타리스트가 바로 딕 데일. 그도 왼손잡이였지만 처음에는 오른손잡이 기타를 뒤집어 들고 연주했었다.[72]

7.2. 한국에서의 인지도[편집]


해외 등지에서 기타 부문 불변 최고의 인물이란 평을 받음과는 대조적으로 대한민국에서 지미 헨드릭스의 인지도는 높지 못하다. 밴드 음악을 좀 알면 모를까. 그가 활동했던 당시 유행했던 사이키델릭 록 자체가 한국에서 마이너하기 때문인 것도 있고, 그는 1970년에 죽었는데, 당시에는 대중음악 검열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시기라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접하기 쉽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다. 결정적으로 대한민국은 미8군을 통해 건너온 스탠다드 팝 시절 이후로는 미국처럼 록큰롤, 브리티쉬 인베이전, 사이키델릭 록 같은 장르들이 순차적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1960년대의 서양 록 씬은 훌쩍 건너 뛰고 1970년대부터야 비로소 서구 록/팝 음악이 국내에 제대로 소개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지미 헨드릭스를 비롯한 1960년대의 레전드 록 음악가들은 한국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찬밥 신세이다.

예를 들어 해외에선 한창 1차 브리티쉬 인베이전 영국 밴드들과 지미 헨드릭스, 도어즈 등의 신진 미국 록 뮤지션들이 음악씬을 점령했던 1960년대 중~후반 시절에 한국 대중들에게 제일 인기 있던 해외 뮤지션은 클리프 리처드, 폴 앵카, 앤디 윌리엄스, 톰 존스 등이었을 정도로 딴 세상이었다. 심지어 엘비스 프레슬리도 정작 최전성기였던 1950년대 후반~60년대 초반엔 한국에서는 큰 인기는 없었고, 최전성기가 지난 후인 60년대 후반~70년대 초중반의 라스베가스 시절(살이 찌고 구레나룻을 많이 기르고 트레이드마크 같은 큰 칼라를 바짝 세운 점프슈트를 입고 나왔던 바로 그 시절)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국에서도 인기를 얻었다. 그나마도 당시 한국 최고의 인기 가수였던 남진이 후기 엘비스 이미지를 흉내낸 덕에 한국에서의 엘비스의 인지도와 인기도 덩달아 올라간 면이 컸다.

물론 한국에서 영미 록음악이 불모지 시기였던 1960년대에도 미8군을 통해 들여온 음반을 불법복제한 음반(소위 '빽판')이 암암리에 소량 유통되기도 했지만, 그것도 발품 팔며 적극적으로 찾아가서 구해 들었던 극소수 매니아급 음악팬들(오늘날 표현으로 치면 첨단 유행을 달리는 힙스터들)의 이야기기일 뿐이고, 행여 음반이 있더라도 음반을 틀 전축을 갖춘 집도 드물었던 시절이다.[73]

물론 음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거나 일렉트릭 기타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기타 교본에서 소개하는 이름으로 알 것이다. 전술한 대로 기타 이펙터들의 활용에 있어 거의 대다수 교본을 만들어낸 사람이니. 그래도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지미 헨드릭스를 존경하는 캐릭터가 나오고, 앨범도 라이센스 발매되는 등, 위대함 대비 인지도가 낮은 것이지, 기타 다루는 사람들마저 저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존 본햄과 더불어 지식채널 e에 등장하기도 했다. #

라디오 스타에서 김구라김태원을 한국의 지미 헨드릭스라고 칭찬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헨드릭스 사인이 마약 중독이라 언급하며 김태원에게 한 방 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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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명은 조니 앨런 헨드릭스(Johnny Allen Hendrix).[2] 사인은 토사물에 의한 질식사. 존 본햄의 사인과 똑같다. 최고의 드러머와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꼽히는 사람이 같은 이유로 사망한 것이다. 게다가 존 본햄도 지미 헨드릭스 사망 10년후에 사망했다. 그것도 같은 9월에[3] 참고로 당시 로버트 프립은 이전에 결성했던 밴드인 자일스 자일스 앤 프립이 실패하면서 무명 상태였고, 이후 결성한 킹 크림슨은 아직 첫 앨범을 내기도 전이었다.[4] 왼쪽부터 아버지 알 헨드릭스, 어린 지미 헨드릭스, 어머니 루실 헨드릭스, 동생 레온 헨드릭스.[5] 지미 헨드릭스의 혈통에는 다인종의 피가 섞여있다. 그의 외조부, 조부는 모두 전직 노예와 백인 주인 사이에 태어났으며, 외조모와 조모도 둘 다 인디언과 흑인 노예의 혼혈이었다.[6] 지미 헨드릭스는 아버지가 장례식에 보내주지 않아서 장례식 당일에는 방에 틀어박혀 하루종일 울었다.[7] 부모가 모두 술과 약물에 중독되어 있어 정상이 아니다 보니,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8] 고등학교 퇴학 후에도 친구가 일하는 햄버거집에 마감 시간에 나타나 그날 팔리지 않아 버려진 햄버거감자튀김을 얻어갔었다. 지미 헨드릭스는 걸음걸이가 어정쩡했는데, 어렸을 때 제대로 된 신발을 신지 못하고 사이즈가 맞지 않거나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다녀서 였다.[9] 실제로 지미는 1957년쯤에 엘비스의 공연을 현장에서 본 적이 있다. 또한 영어 위키에서도 지미가 커버한 'Hound Dog'는 엘비스의 버전을 듣고 한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본래 'Hound Dog'는 여성 흑인 가수 빅 마마 쏜튼이 발표한 것이고, 리틀 리처드도 리메이크한 적이 있다.[10] 여담으로 당시 Stratocaster 한 대의 가격이 200달러 초중반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11] 지미 헨드릭스 사후 저작권을 비롯한 그의 유산이 아버지에게 상속되었다. 이 양반은 2002년에 타계했는데, 그 당시 아들이 남겨준 유산은 무려 8천만 달러로 불어나있었다!!![12]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해체 후 지미는 빌리 콕스와 밴드 오브 집시스(Band of Gypsys)를 결성한다. 전설의 우드스톡 페스티벌에서 베이스를 연주한 사람도 바로 이 사람.[13] 이 사실을 바탕으로 나온 곡이 마츠토야 유미 1집 (당시엔 아라이 유미)에 실린 '사랑의 파라슈트'다. 유밍은 지미 헨드릭스 팬이다.[14] 찰스 R 크로스가 집필한 지미 헨드릭스의 전기(국내에서는 <지미 헨드릭스:록스타의 삶>으로 번역 출간)에 따르면 사실은 정신과 군의관을 만나서 정신과적 꾀병을 부려 조기 제대에 성공했다. 동료에 대한 애정, 잦은 자위 횟수, 지속적인 몽정...[15] 사실 이건 핑계고 불성실한 태도가 주된 이유였다.[16] 이 당시 제임스 브라운은 백밴드가 자기가 요구하는 연주를 어기면 벌금을 물리고 수틀리면 후드려패기로 악명이 높았으니(나중에 이 때문에 백밴드 멤버들이 집단 탈퇴를 하고 나서야 이 성향을 고치게 되지만), 지미의 자유분방한 스타일이 안 맞은 건 당연했다.[17] 나름 뉴욕에서 커리어를 쌓고 있었던 지미 헨드릭스는 영국행을 망설였다고하는데, 채스는 영국에 가면 에릭 클랩튼을 소개시켜준다고 꼬드겼다고.[18] 대표적인 예가 에릭 클랩튼이었다.[19] 이렇게 연주하는 지미 헨드릭스에게 미국인들은 손사래를 쳤지만 영국의 기타리스트들은 엄청난 컬처쇼크를 먹었다.[20] 1945~2003. 원래 기타리스트였으나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에서는 베이스를 치게 된다. 게다가 <Electric Ladyland>의 몇 곡을 녹음할 때는 녹음 빨리 끝내서 제작비 아끼려고 헨드릭스가 직접 베이스를 치기도 했다.[21] 훗날 레드 제플린이 이 곡을 편곡하여 앨범에 수록하기도 했는데, 그 곡이 바로 The Lemon Song이다.[22] 본명 존 그래엄 미첼. 1946~2008. 밴드의 프론트맨이었던 헨드릭스에 비해 묻힌 감이 없잖아 있다만 이 사람도 3살 때부터 드럼을 친 헨드릭스 못지않은 천재이다. 가입당시 고작 18살이었던 최연소 멤버였으며, 프로그레시브 록의 슈퍼밴드 ELP(Emerson, Lake and Palmer) 가입을 제안받았지만 헨드릭스와 계속 연주하고 싶다고 가입을 거절했다. 만약 그가 가입을 승낙했다면 그룹의 이름은 Emerson, Lake and Mitchell이 되었을 것이다. 헨드릭스 사후에는 특별히 한 밴드에서 연주한 적은 없지만 동시기 여러 밴드와 음반에 참여한 세션맨으로 활동했고. 롤링 스톤 선정 가장 위대한 드러머 8위로 선정되었다.[23] 당시 1위는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참고로 지미 헨드릭스는 이 앨범이 발매되고 사흘 뒤에 동명의 타이틀 곡을 커버했다.[24] 이 퍼포먼스는 지미가 즉흥적으로 한 것은 아니고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다. 영국에서도 같은 퍼포먼스를 한 적이 있었는데, 기타 부수기는 이미 피트 타운젠드가 선점하고 있어서 더 튀어보이려고 기타에 불을 붙였다고.[25] 프랭크 자파의 아들인 Dweezil Zappa의 소유인데, 몇 번을 고쳐서 지금의 상태가 되었다. 아빠가 '너 가질래?'라면서 줬다고(...).[26] 주로 볼케이노라고 불린다. 똑같은 사인으로 사망한 사람으로는 영국 밴드 레드 제플린의 드러머 존 본햄, 호주 밴드 AC/DC의 전직 보컬 본 스콧 등이 있다.[27] 28세 생일이 2개월 앞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천재 뮤지션인 재니스 조플린, 도어즈짐 모리슨도 사망했다. 지미 헨드릭스, 제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을 3J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 천재 뮤지션이 한 시기,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며 '천재들은 스물일곱 살을 넘기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28] 약 10~20장 정도[29] 1960년대 말 런던 록 음악계는 정말로 한두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이였다. 일례로 지미 페이지는 레드 제플린 결성 전에 비틀즈 멤버들도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로 런던 록 음악가들 사이에서 유명했고, 핑크 플로이드의 경우는 심지어 데뷔조차 하지 않았던 아방가르드 밴드였을때부터 더 후,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에릭 클랩튼과 친분을 맺었을 정도다.[30] 게다가, 지미 헨드릭스의 경우에는 척 베리, 비비 킹같은 본인의 선배들보다도 더 높은 위치에 랭크된다. 즉, 일렉트릭 분야 뿐만이 아닌 기타라는 악기가 생긴 뒤에 등장한, 블루스 록부터 헤비메탈까지의 모든 장르의 기타리스트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31] 이런 엄청난 영향력 때문에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제프 벡으로 이루어진 소위 "세계 3대 기타리스트"를 반박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3대 기타리스트만큼이나 훌륭한 록 기타리스트라고 불리는 데이비드 길모어, 키스 리처즈, 조지 해리슨, 에디 밴 헤일런, 스티비 레이 본 등은 어디까지나 장르도 다르고 스타일도 다르기 때문에 우위를 가르기 힘들지만, 지미 헨드릭스만큼은 3대 기타리스트에 비해 음악적 영향력과 실력 등에서 확실한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반박의 근거로 사용된다.[32] 연주자만의 개성적인 톤을 만드는 것.[33] 그렇게 만들어진 사이키델릭풍의 데뷔 앨범 'Are You Experienced'는 록 음악 내에서 손에 꼽히는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이를 증명하듯이, 2020년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에서 30위에 선정되었다. 비록 2012년 15위에서 2020년 30위로 너프되긴 했지만, 2020년 개정판에서는 록 앨범 대부분이 평가가 낮아졌음을 감안하면, 최고의 록 음악 명반이라는 점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34] 지미 헨드릭스 이전의 일렉 기타 소리는 지금의 재즈 기타, 초창기의 일렉트릭 블루스, 엘비스 프레슬리척 베리 등의 초기 로큰롤 사운드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35] 다시 말하자면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결성 시기인 1966년부터 사망할 시기인 1970년.[36] 한국 나이로 중3에 기타를 처음 배운 것이다. 일반인 기준으로는 아주 늦다고는 할 수 없지만, 문제는 지미 헨드릭스는 유명 기타리스트, 아니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라는 것. 대부분의 유명 기타리스트들은 더 이른 나이에 기타를 잡기 시작한다. 예외적으로 잭 화이트의 경우 지미와 비슷한 나이에 기타를 잡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하여 테크닉을 내세우는 연주보다는 간단하고 중독성 있는 리프를 개발하는 데 능하다. 그런데 지미의 연주는 간단한 리프보다는 새로운 기법과 화려한 연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단 것을 감안하면... 만약 10년만 더 살아있었어도 그의 작품 세계에 맞는 어마어마한 음반들이 더 많이 나왔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37] 대부분 기타리스트들은 최소 10년 이상의 구력을 가지고 나서 서서히 메인스트림에 올라오며, 20년은 쳐야지 기본적으로 세계 제일의 수준까지 가는 것을 감안하면 9년만에 일렉트릭 기타라는 악기의 거의 모든 기법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지미 헨드릭스는 단순히 기타라는 악기 뿐만 아니라 대중음악 전체의 역사에 있어서도 가장 위대한 천재들 중 하나이다.[38] 사실 훌륭한 커버란 그런 것이다. 만일 그냥 똑같이 복사해내는 것에 머문다면, 데뷔 전 아마추어 밴드의 연주 연습은 될 수 있어도 기성 아티스트로서는 타 뮤지션의 흉내내기에 불과하니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39] 참고로 폴 매카트니는 지미 헨드릭스가 데뷔 전 영국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할 때부터 이미 그의 재능을 간파하고 눈여겨 본 뒤 지미의 데뷔 및 미국 공연 진출 등에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40] 지미의 Sgt Pepper's Lonely Heart Club Band 커버 공연에 관련된 또 하나의 일화가 있는데, 지미가 이 곡을 연주할 때 본인 연주의 특성상 과격할 정도로 트레몰로 암을 구부렸다 폈다 하는 연주를 선보였다. 문제는 워낙 과격하게 한 탓에 기타의 튜닝이 완전히 나가버렸고, 무엇보다도 이 페퍼 상사 커버곡이 그 공연의 첫 번째 곡이었다는 것. 이에 공연장에 있던 관객들은 "이제 뭘 어떻게 할 작정이지?"라는 생각으로 지미를 보았고, 지미는 관객석에 있던최선을 다해 숨던 에릭 클랩튼을 불러 "나 이거 줄 좀 맞춰주라."라는 농담을 던졌다고. 참조[41] 이로 인해서 밥 딜런은 후일 공연에서 그 곡의 지미 헨드릭스 버전을 부르기도 했다.[42] 당장 제일 존경받는 기타리스트들 중에선 앞 세대 중에선 비비 킹, 척 베리 등이 있고, 동 세대 중에서만 따져도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제프 벡, 키스 리처즈, 피트 타운젠드 등이 있다. 물론 이분들 역시 지미 헨드릭스를 제외하고 보자면 올타임 레전드로 평가받는 전설적인 기타리스트들이다.[43] 당장 맨 위에 있는 수상 이력만 봐도 알 수 있다. 모든 매체에서 선정한 기타리스트 순위에서 항상 1위에 꼽히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사실상 0위로 평가받기도 한다.[44] 물론 40년대 후반에 재키 로빈슨의 메이저리그 성공과 60~70년대에 무하마드 알리가 복싱계를 호령한 덕에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많이 호전되긴 했지만, 당시에도 많은 차별을 받던 건 사실이다. 실질적으로 미국, 그리고 전 세계의 인종차별은 80년대 마이클 잭슨의 등장과 Thriller 앨범 발매 이후부터 제대로 나아졌다.[45] 여담으로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매니저였던 채스 챈들러 역시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주역들 중 하나였다.[46] 비슷한 시기의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와 함께 소울이나 힙합 쪽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이다. 모스 뎁은 그의 곡 'Rock & Roll'에서 헨드릭스를 언급했고 커먼은 Jimi Was Rock Star라는 헌정곡을 발표하기도 했다.[47] 여담으로 1위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이며 2위는 프레디 머큐리이다. 위 둘이 역사상 최고의 라이브 공연을 많이 선사했던 전설적인 프론트맨임을 감안하면 지미 헨드릭스 역시 위대한 프론트맨임을 알 수 있다.[48] 예를 들자면 그 마일즈 데이비스. 심지어 마일즈 데이비스는 1926년생으로 지미보다도 나이가 무려 16세나 많은 데다가 지미가 유년기였던 1959년, 이미 Kind of Blue라는 역대급 모달 재즈 명반을 발매한, 이미 전설의 위치에 오른 인물이었다.[49] 지미 헨드릭스랑 생전에 친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또한 이 사람은 블루스 록의 선구자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에 지미 헨드릭스를 제외하고 항상 들어가는 수준의 전설이다.[50] 대학교 시절, 스마일 소속 당시. 이 때에는 퀸이 아직 결성되기 전이다.[51] 따라서 블루스 기타리스트로 분류되며, 만들었던 음악의 형식 등으로 미루어보아(대부분이 12마디 블루스) 스스로를 블루스 음악가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대부분 록 기타리스트로 인정받는다.[52] 블루스의 색채가 굉장히 강했던 초기 하드록 이후 많은 록 기타리스트들이 다양한 스케일과 함께 멜로딕한 연주로 선회했다. 그럼에도 지미 헨드릭스의 영향이 짙은 기타리스트들은 여전히 꾸준하게 출현했는데, 다소 거칠게 들릴 수도 있는 펜타토닉 스케일을 아름다운 톤과 함께 물 흐르듯 부드러운 연주로 승화시킨 에릭 존슨, 무지막지한 파워와 스피드로 휘몰아치는 연주를 하는 잭 와일드 등이 있다. 특히 존 프루시안테는 라이브에서 퍼즈와 와우 이펙터를 입힌 상태로 펜타토닉 스케일에 기반한 즉흥 연주를 즐기는 것이 특징적인데, 딱히 블루스적 색채가 강하지 않다는 점만 빼면 누가 봐도 지미 헨드릭스의 영향이 크다고 밖에 볼 수 없다.[53] 를 녹음할 때는 자신의 목소리가 부끄러워서 뒤돌아 서서 녹음을 했다는 후문이 있다.[54] 물론 기타리스트 중 노래를 가장 잘 부르기로 정평난 에릭 클랩튼. 데이비드 길모어, 존 메이어보다는 덜하다. 앞의 셋은 보컬도 상당히 두드러지는 축에 든다.[55] 바로 위의 종교관 링크에서는 지미 헨드릭스가 "낙태에 반대했다"는 논지로 지미 헨드릭스가 다소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가졌다고 쓰여져있는데, 이는 사실 관계에서 상당히 어긋난다.[56] 원곡은 밥 딜런.[57] 플라잉 브이의 경우는 사이키델릭 페인팅, SG는 아이보리 색의 트리플 험버커 픽업으로 둘 다 그 유니크함으로도 유명하다.[58] 세션 활동 때는 재즈마스터도 사용했으며, 간혹 Les Paul을 연주하는 사진들도 보인다.[59] 초기 라이브 영상을 보면 헨드릭스가 관객들에게 기타 소리가 시끄럽다고 생각되면 귀를 막아도 괜찮다고 말할 정도였다. #[60] 무대에서 앰프게인을 한계가 넘어설 정도까지 사용하곤 했다. 연주를 마치고 나면 무대에 셋팅된 음향장비가 모두 맛이 가버리곤 해서 페스티벌 등에선 대부분 마지막 순서였다.[61] 다만 연주 후에 기타를 불태우는 퍼포먼스는 언론 노출을 노린 매니저의 지시였다는 설이 있다. 실제 유명 뮤지션들의 이런 기행이나 퍼포먼스 중에는 노이즈 마케팅을 노린 매니저의 지시인 경우도 많다. 출연료 대신 마약을 사다주면서 기행을 부추긴 섹스 피스톨즈의 매니저 이야기도 있다.[62] 덧붙여 이것은 지식채널e에서 언급되기도 한다. FPS 게임 스펙 옵스: 더 라인의 오프닝 BGM으로도 쓰이는데, 같이 나오는 화면의 성조기는 뒤집혀진 채 너덜너덜해져있다. 항목에서 볼 수 있듯 기존 콜 오브 듀티배틀필드류의 FPS 게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적을 죽이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담긴 게임이다. 현대판 지옥의 묵시록을 떠올려보라. 정의인 줄 알았던 것이 광기의 모습을 드러내가는 게임에 걸맞는 BGM.[63] 피트 타운젠드가 공연 중에 기타를 높이 들었는데 천장에 닿아 부숴지자, 일부러 그랬다는 듯이 모두 때려 부숴버린 것이 시초이다.[64] 당장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에는 고정 1위로 선정되어 있을 뿐더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프론트맨에서도 5위 안에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여담으로, 현재 로큰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프론트맨 겸 보컬로 평가받는 록 밴드 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가장 존경한 퍼포머 중 한 명이 지미 헨드릭스였다. 같은 팀의 드러머 로저 테일러의 증언에 따르면, 지미의 공연을 14일 연속으로 본 적도 있다고...[65] 이때 연주했던 곡은 'Purple Haze'.[66] 국내에선 N.EX.T 1기 멤버인 기타리스트 정기송이 라이브에서 간간이 보여주었다. 3분 11초에 1초 동안 나온다.[67] 좀 더 아메리칸 원주민 풍으로 원했다.[68] 둘은 굉장히 친한사이였다. 당시엔 사진작가였고 록 뮤지션들의 사진을 주로 찍었다. 린다가 폴 매카트니와 친해진 것도 사진 촬영이 계기가 됐다.[69] 다른 버전인 지미 헨드릭스 본인 얼굴 사진에 대한 코멘트는 알려진 게 없다.[70] 여담으로 헐크 호건은 지미 핸드릭스의 곡 ‘Voodoo Child’를 테마곡으로 썼던 일이 있다.[71] 링크 1, 링크 2, 링크 3 [72] 때문에 줄 순서를 변경하지 않고 가장 얇은 줄이 위로 올라오게 하여 연주했었다.[73] 만약 그 당시에 지미 헨드릭스 음악이 제대로 들어왔더라도 한국에서는 크게 인기를 얻었을 가능성은 적다. 특히 음악 감상에 있어서 대체로 악기 파트보다 보컬의 영향력을 더 크게 치는 한국에서는 더더욱 그런 경향이 있다. 거기다 지미 특유의 느낌 가는대로 가버리는 자유분방한 연주는 다소 보수적인 음악 씬에서 인정받긴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지미가 영국에서 금방 인정받은 것도 마침 그 시기가 영국에서 로큰롤 부흥이 한창이던 때라 미국의 블루스 등 루츠한 사운드에 관심있던 영국 뮤지션들이 지미 헨드릭스의 재능을 빨리 간파했기 때문에 매우 빨리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