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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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규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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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그레 이글스 등번호 26번
손경호
(1989~1990)

지연규
(1992)


고기성
(1993~1994)
빙그레 이글스 등번호 27번
이동석
(1988~1992.4.9.)

지연규
(1993)


길배진
(1994~1998)
한화 이글스 등번호 11번
김락기
(1989~1993)

지연규
(1994~1998)


홍우태
(1999~2001)
한화 이글스 등번호 51번
김정윤
(1994)

지연규
(2001~2006)


윤근영
(2007)
한화 이글스 등번호 74번
김인철

지연규
(2007~2008)


성준
(2010)
NC 다이노스 등번호 76번
팀 창단

지연규
(2012~2021)


전민수
(2023~)




파일:한화 지연규 투수.jpg

지연규
池連奎 | Ji Yeun-Gyu

출생
1969년 8월 15일 (54세)
충청남도 태안군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시목초 - 천안북중 - 북일고 - 동아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2년 1차 지명 (빙그레)
소속팀
빙그레-한화 이글스 (1992~1998, 2001~2006)
지도자
대전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 (1999~2000)
한화 이글스 플레잉 코치 (2004~2006)
한화 이글스 2군 투수코치 (2007~2008)
북일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 (2009~2011)
NC 다이노스 투수코치 (2012)
고양 다이노스 투수코치 (2013~2016)
NC 다이노스 1군 불펜코치 (2017~2018)[1]
NC 다이노스 1군 투수코치 (2018)[2]
NC 다이노스 잔류군 투수코치 (2019)
NC 다이노스 2군 투수코치 (2020~2021)
개성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22~)
프런트
NC 다이노스 스카우트 (2011)

1. 개요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4. 연도별 주요 성적
5. 여담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한화 이글스의 투수, 코치. 현역시절 등번호는 26번 - 27번- 11번 - 51번을 달았다. 2023년 현재 개성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활동중이다.

2. 선수 경력[편집]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10323135450858G.jpg

파일:빙그레 이글스 엠블럼.svg 빙그레 이글스 선수 시절

천안북일고-동아대를 거쳐 1992년에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 당시 구대성, 정민태와 함께 국가대표 투수 3인방으로 꼽힐 정도의 대어급 투수 유망주라 매번 해태 타이거즈에 밟히던 빙그레 팬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으나, 데뷔 첫 해 찾아온 어깨부상은 그의 프로 인생의 결정적인 암초가 되었다. 이후 1998년까지 7시즌 동안 고작 3승만을 올리는 극도의 부진을 보이다 30세의 젊은 나이에 은퇴한다. 빠른 공을 뿌리는 선수가 아니라서 1군에서는 조기강판이 잦았다고 한다.

이후 2년간 대전고 코치를 맡으며 아이들을 지도하다 야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2001년 시즌을 앞두고 다시 한화에 연습생 자격으로 입단하여 현역으로 복귀한다.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10407182038234G.jpg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1994~2006).svg 한화 이글스 선수 시절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1994~2006).svg 한화 이글스 선수 시절 투구폼[3]

복귀 후에도 부상으로 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2002년 5월 1일에 복귀 첫 승과 동시에 통산 4승을 기록한다. 이후 한화의 부진한 불펜 사정으로 인해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면서 2003년 45이닝, 2004년 32⅓이닝을 소화했으나 평균자책점은 5점대에 머무르는, 그저 그런 베테랑 투수였다.


파일:/image/032/2005/09/26/5a2774a.jpg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1994~2006).svg 마지막 한화 이글스 선수 시절

2005년부터는 사실상 플레잉 코치로 보직을 변경했으나, 김인식 감독에 의해 마무리 투수로 낙점되면서 1패 20세이브 ERA 2.84의 최고 시즌을 기록한다. 다만 마무리 투수 치고는 위력적인 구위가 아니여서 세이버스탯이 좋지 않아 이닝수가 38이닝으로 매우 적었고, 자신보다 앞서 던지던 정병희, 윤규진의 혹사 비중이 커졌다.[4] 김인식 감독의 추천으로 이 시즌에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이대호에게 홈런을 맞고 패전투수가 되긴 했지만.

2006년에는 플레잉 코치 신분으로 2군에서 선수를 조련하고 있었으나 주전 셋업맨인 최영필의 부상으로 불펜에 구멍이 나자 김인식 감독의 요청에 급히 몸을 다시 만들어 정규시즌 막판에 1군에 올라와 복귀했으며, 삼성 라이온즈와의 2006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도 포함되었다. 어깨는 1993년 부상으로 인해 철심을 박았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여서, 2006년 시즌 초반 당시 그의 직구 구속은 겨우 140km에 미치는 정도였다. 언제 부서질 지 모르는 그의 어깨를 보며 당연하게도 그에게 큰 기대를 건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

10월 28일 한국시리즈 5차전은 그의 생애 가장 빛나는 순간이 되었다.

시리즈 전적 1승 3패로 벼랑 끝에 몰려 있던 한화는 이미 4경기 동안 투수가 바닥날 대로 바닥나 1선발[5] 문동환을 중간계투로 돌리는 악수까지 둔 상황이라 정말로 낼 투수가 없었다. 정민철제이미 브라운의 선발 대결로 시작된 경기에서 정민철이 5이닝 1실점 후 일찍 강판되자 지연규가 등판했고, 생애 최고의 역투를 선보이며 4이닝동안 탈삼진 5개, 단 1피안타로 삼성 타선을 틀어막았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그의 호투 덕에 더이상의 실점 없이 1:1의 스코어를 유지, 연장 승부로 끌고 갈 수 있었고[6] 15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1:1 무승부로 5시간 15분의 혈투를 마치게 된다. 통산 10승만을 기록했던 비운의 투수가 마지막 중 마지막에 가서야 최고로 빛나는 이 모습은 한화 팬들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시리즈를 관전했던 야구팬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3. 지도자 경력[편집]



3.1. 한화 이글스, 북일고 코치 시절[편집]


2006 시즌 종료 후 완전히 은퇴를 선언하고 한화의 2군 투수코치로 있다가 2009년부터는 모교인 천안북일고 코치로 옮겼다. 북일고 코치 시절에는 이정훈 감독의 라이센스 문제로 대신 벤치에서 선수들을 지휘하는 모습[7]이 보이기도 했다.

이후 2011년 NC 다이노스가 창단 준비를 하면서 스카우트로 선임되었는데 고교야구 코치 경험을 살려 재목을 선발하는데 역할을 하기 위함이었던걸로 보인다. 이후 스카우트의 연장선상에서 NC 다이노스의 코치로 선임되었다.


3.2. NC 다이노스 코치 시절[편집]


2013년부터 2016년까지는 NC 2군 투수코치를 맡았다.

2017 시즌부터는 1군 불펜코치를 맡았으며 2018 시즌 때는 김경문 감독 사임 이후 코치진이 대거 교체되면서 6월 초부터 1군 투수코치를 맡게 되었다.

메인 투수코치를 맡게 된 이후에는 나름대로 무난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나 전임자인 최일언 코치에 비해 그다지 나은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투수들에게 더 많은 이닝을 소화시키기 위해서 인지 최일언 때보다 조금 더 투수 교체를 늦게 가져가고 있는데, 교체 시점은 결과론이라고 치더라도 선수 운용을 지독하게 못하고 있다. 강윤구최성영 같은 자원을 굴리는 경향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못 믿겠다고 생각하는 투수들은 무의미 하게 1군에 두는 상황이 가장 문제. 신인급인 이우석은 20일 가까이 1군에 데리고 있는 동안 등판 기록은 단 ⅓이닝에 불과하고 이형범은 시즌 중간마다 2주씩 실종이 되고 있다. 7월 말부터 갑자기 안보이던 유원상은 이형범과 함께 2주 만에 얼굴을 비추더니 9월 들어서는 엔트리에 이름만 올리고 한 달 가까이가 되도록 등판이 없다. 본인이 못 믿는 선수는 철저하게 배제하다보니 박진우경찰 야구단에서 전역하자마자 굴려지고 있다.

9월 21일 KIA 타이거즈전에서는 원종현, 이민호 놔두고 1점차 리드 상황에서 정수민을 등판시키더니 기어코 박진우강윤구에게 3연투를 시켰다. 결국 나란히 안타를 맞으며 동점 허용.

9월 22일 두산 베어스전에서는 완전히 흔들리고 있는 구창모를 계속해서 밀고 가다가 결국 만루 홈런을 맞았고, 이후 두 점차 리드에서 정수민을 올리는 미친 짓을 하더니 결국 역전 홈런을 허용했다. 9월부터는 막무가내로 구르고 있는 최성영은 42구나 던지게 하더니 10일 만에 등판한 이민호는 9회 동점 상황에서 안타 4개를 맞고 3실점을 했다. 결국 팀은 13:10으로 패배. 9월 들어서는 아예 1군에서 던질 상태가 안되는 이민호를 꿋꿋이 밀더니 결국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 버렸다. 9월 들어서는 나름 괜찮은 이형범이나 아니면 9월 들어서는 단 한 번도 등판을 안한 유원상이라는 선택지도 있었으나 이민호를 선택했고, 그 결과는 참혹한 역전패가 되었다. 어차피 순위 싸움은 끝났으니 순리대로만 운영하면 지더라도 욕은 안 먹을 상황인데, 이런 부담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운영 미스로 팬들의 스트레스를 양산하고 있다.

시즌 종료 후 2018년 11월 23일에는 코치진 개편을 통해 잔류군 투수코치로 보직을 변경했다.

2021 시즌 종료 후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으며 팀을 떠나게 되었다.

3.3. 개성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시절[편집]


2022년 정원욱 감독의 후임으로 지휘봉을 잡았다. 3월에 펼쳐진 신세계 이마트배 전국고교야구대회 1회전에 백송고에 12-5 콜드게임승을 거두며 스타트를 잘 끊었다. 2회전 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와의 경기에서 8회초 2득점하며 3-3 동점을 만들었으나 8회말에 상원고에 1실점(결승점)을 내주며 3-4로 아쉽게 패했다.


4.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1992
빙그레-한화
9
28⅔
2
0
0
0
1.000
5.97
39
4
12
12
20
19
1993
6
24
0
2
0
0
0.000
3.38
24
1
8
8
10
9
1994
4
4
0
0
0
0
0.000
11.25
3
1
6
2
5
5
1995
9
28
1
2
0
0
0.333
5.14
33
1
23
8
21
16
1996
9
10⅔
0
0
0
0
0.000
3.38
10
0
3
5
4
4
1997
1군 기록 없음
1998
2001
3
3
0
0
0
0
0.000
9.00
7
0
2
1
3
3
2002
20
77⅓
4
9
0
0
0.308
5.35
92
6
33
48
49
46
2003
12
45
2
3
0
0
0.400
5.20
51
6
18
8
32
26
2004
20
32⅓
0
4
3
3
0.000
5.57
36
4
19
17
23
20
2005
33
38
0
1
20
0
0.000
2.84
30
3
20
32
13
12
2006
7
8
1
1
0
1
0.500
2.25
6
1
3
3
2
2
KBO 통산
(13시즌)

132
299
10
22
23
4
0.313
4.88
331
27
147
144
182
162


5. 여담[편집]


  • 1992년과 2006년에 2번의 준우승을 경험한 콩라인멤버 중의 한 명이다.[8]

  • 외모가 송진우와 약간 닮아 리틀 송진우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 자가용은 대우자동차에서 출시했던 에스페로였는데, 신인 시절인 1992년, 빙그레 입단 당시 받은 계약금으로 구입해서 2006년까지 15년 동안 타다가 처분했다고 한다. 지연규의 차를 얻어탄 사람들에 의하면 차가 연식에 비해 깨끗하고 상태가 좋았다고 하는 걸 봐서는 차 관리를 꼼꼼하게 잘한 듯.

6. 관련 문서[편집]


[1] ~6월 3일[2] 6월 4일~[3] 7년만의 선발승을 따낸 02년 5월 1일 경기[4] 이 때의 결과로 정병희는 SK에 김민재의 보상 선수로 건너간 후 다시는 1군에 올라오지 못하고 군 복무를 마치자마자 방출당했으며, 윤규진도 수술만 두 차례나 받는 등 기나긴 재활의 시간을 거쳐야 했다.[5] 당시 한화 최고의 투수는 누가 뭐래도 류현진이었지만, 아무래도 신인인지라 준플레이오프 1차전을 문동환으로 시작, 거기에 류현진과 송진우를 이어 준플레이오프를 넘겼다. 플레이오프 역시 문동환을 1선발로 기용했다. 이 날 문동환이 선발로 좋지 않은 투구를 보여주자 곧바로 조기강판시킨 뒤 3차전부터는 구원으로 전환, 비어버린 선발 자리는 최영필, 안영명 등을 투입해 간신히 메웠다.[6] 같은 경기에서 삼성은 무려 9명의 투수를 동원하는 물량공세를 펼쳤다. 한화는 정민철-지연규-구대성-김해님 단 4명... 지연규가 아니었다면 한국시리즈도 그날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다.[7] 같이 북일고 코치를 맡은 임수민이 관중석에 있는 이정훈 감독으로부터 작전 지시를 전달받기 위해 무전기와 이어폰을 이용하기도 했다.[8] 1999년 한화가 우승하였을 때는 상술하였지만, 은퇴 후 대전고 코치를 하고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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