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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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Porte de l'Enfer

1. 개요
2. 제작의뢰
3. 작가의 의도
4. 주조 역사
5. 대한민국에 있는 진품
6. 구성


1. 개요[편집]


로댕은 수백 점의 인물 군상에 인간의 정념, 쾌락의 절정과 여러가지 악의 무거운 짐을 표현하였다. 다닥 다닥 붙어서 동물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서로의 몸을 깨물면서 뒤엉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육체들을 만들었다.

지옥의 문육체의 사슬이 화환과 덩굴손처럼 뻗어 나가고, 무언가에 귀 기울이는 얼굴, 무언가를 집어 던지려는 팔들과 군상들은 악의 즙에서 솟아나는 고통의 뿌리를 보여준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으로, ‘지옥의 문 Porte de l`Enfer’ 은 단테 알리기에리신곡(지옥편)을 주제로 하였으며, 로댕의 작품 대부분을 총망라한 불후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로댕이라고 하면 ‘생각하는 사람’이나 ‘키스’ 등을 떠올리지만, 미술사가들은 ‘지옥의 문’을 로댕의 전 예술세계를 집대성한 작품이라 평가하곤 한다. ‘지옥의 문’은 단테의 시 ‘신곡’을 테마로 제작되었다. 작품 안에는 단테의 모습을 형상화했다는 ‘생각하는 사람’을 필두로 190여 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생각하는 사람’이 전체 구성의 중심이 되기는 하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로댕은 이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30년 넘게 구상하고 많은 고뇌를 했던 모양이다. 그 과정 중에 탄생한 작품들이 ‘생각하는 사람’을 필두로 ‘추락하는 사람’, ‘세 망령’, ‘웅크린 여인’, ‘입맞춤(Kiss)’, ‘아담’, ‘이브’ 등이다. 한마디로 ‘지옥의 문’은 로댕의 전 작품들을 한데 모아놓은 미술관과 같다 할 수 있다. 문 위에 있는 세 명의 인물은 지옥에 거주하는 ‘세 어둠 Trois Ombres’을 묘사하였는데, 세 형상 모두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을 표현한 작품을 변형한 것이다. 인간의 정념과 야수성 및 잔인한 본성에 대한 질문을 수많은 육체의 엉킴 속에서 보여주고 있으며, 이런 인간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이 있다.


2. 제작의뢰[편집]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7년간 생활할 때 무렵, 로댕은 파리의 살롱전에 출품하기 위해 ‘청동의 시대’라는 작품을 만들었지만, 모델에 석고를 씌워서 만들었다는 모함을 받으며 고초를 겪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미술부 차관 에드몽 투르케(Edmont Tourquet)가 로댕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투르케는 로댕에게 단테신곡을 주제로 당시 건축 중이던 ‘장식미술 박물관(Musée des Arts décoratifs)’의 입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1]


3. 작가의 의도[편집]


로댕은 조각적 효과를 예상할 수 있도록 검은 먹을 바탕으로 하고, 갈색 잉크로 농담을 나타낸 수백 점의 데생을 통하여 새롭게 주관적으로 해석을 하면서, ‘지옥의 문’에서 수 많은 군상들을 통하여 우주를 창조하고자 하였으며 인간의 모든 감정과 정념을 묘사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지옥의 문’은 그가 담고자 했던 조각품들을 모두 담아낼 수 없었고, 오히려 그의 영감이 변화하는 단계를 보여주는 조각가로서의 삶을 기록한 일기에 가까운 작품으로 남았다.


4. 주조 역사[편집]


‘지옥의 문’의 높이는 6.35미터이고 폭은 3.98미터, 두께는 0.85미터며 무게는 7톤이 넘는다. 이처럼 거대하고 복잡한 형태의 청동 조형물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숙련된 전문가들의 고도의 주조 기술과 자금이 필요하다. 그래서 세계 각지에 있는 7개의 ‘지옥의 문’은 긴 시간차를 두고 제작되었다. 로댕 자신도 30년에 걸쳐 작품을 구상하고 석고형까지는 제작했지만, 실제 청동 주조물은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로댕은 1880년대부터 ‘지옥의 문’을 주제로 한 구상을 석고형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작품의 인물군을 가감하거나 변형시키는 작업 끝에 로댕이 운명한 해이기도 한 1917년 초에야 완전한 형태의 석고형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 석고상은 1986년 이후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 중이다. 하지만 실제 청동 ‘지옥의 문’은 로댕 사후 10주년이 되는 1926년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요청 이후에야 탄생했다. 그 후 1928년 프랑스 파리의 로댕 미술관을 위해 두 번째 지옥의 문이 탄생했다. 연이어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일본 마츠카타 컬렉션과 스위스 취리히(1949년)를 위해 지옥의 문이 주조되었다. 이 ‘지옥의 문’ 네 점은 루디에라는 당대 모래주형법 대가가 주조를 맡았다. 이후 쿠베르탱 주조소는 로댕 미술관의 요청에 따라 ‘지옥의 문’ 석고상을 대여받아 스탠포드 대학(1978년), 시즈오카현립 미술관(1992년), 서울삼성문화재단(1997년) 등 3개(5번째~7번째)의 청동 '지옥의 문'을 밀랍 주조법으로 제작하였다.[2]


5. 대한민국에 있는 진품 [편집]


서울 태평로에 전체가 유리로 된 로댕 갤러리가 있었고 이 갤러리의 중심에 로댕의 역작인 ‘지옥의 문’과 ‘칼레의 시민’이 놓여 있다. 로댕 갤러리에 있는 '지옥의 문'이 파리 로댕미술관 앞마당에 있는 ‘지옥의 문’의 복사품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이는 청동 조각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서 생겨난 오해이다. 전 세계적으로 ‘지옥의 문’은 서울 작품을 포함해서 총 7개나 된다. 모두 진품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마치 판화가가 동판 위에 드로잉을 하고 부식시킨 후 이것으로 여러 장의 판화를 만드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판화를 위해 제작한 동판은 원판으로서의 역할은 하지만 작가의 작품이 되지는 않는다. 잉크로 찍어낸 결과물, 즉 여러 장의 판화들이 작가가 의도한 작품인 것이다. 청동 조각도 석고상을 토대로 수없이 많은 작품을 만들 수 있지만, 프랑스에서는 법으로 제작할 수 있는 작품의 수를 공공기관이 주문할 경우 8개, 개인이 주문할 경우 4개로 제한했다. 서울의 ‘지옥의 문’의 좌측면에는 작가의 서명과 함께 주조소 이름과 No7/8이라는 이 작품의 에디션 번호가 새겨져 있다. 이 번호의 의미는 ‘지옥의 문’ 8개를 만들 수 있는데. 그중 7번째 작품이라는 의미이다. 향후 어느 미술관에서 새로운 ‘지옥의 문’을 주문한다면 그 작품 에디션 번호는 8/8이 될 것이다. 판화의 경우 단번에 여러 장 찍을 수 있지만 청동 조각의 경우는 막대한 주조 비용이 들기 때문에 주문생산 방식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판화와는 에디션 개념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생길 수 있다.

현재는 플라토 미술관(구 로댕갤러리)이 2016년 8월부로 운영을 종료하는 바람에 해당작품들은 호암미술관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6. 구성[편집]


파일:지옥의문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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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테의 신곡은 당시 프랑스 문학과 미술계의 단골 메뉴였다. 들라크루아 역시 <저승길을 건너는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를 그린 바 있다. 조각가 까르포는 배가 고파서 아들들을 잡아먹는 우골리노를 조각했었는데, 로댕은 여기에도 영향을 받았다.[2] 청동 조각품에 주조소의 이름이나 로고를 새겨 넣는 것은 청동 조각 작품에서 조각가의 예술성 못지않게 주조소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지옥의 문’처럼 크고 복잡한 작품의 경우 시간도 오래 걸린다. 서울의 ‘지옥의 문’은 제작하는 데만 무려 2년 6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주물 과정에 1년 6개월이 걸렸고, 용접과 연마, 청동 표면에 색을 입히는 파티나 작업 등에 다시 1년이 소요되었다. 더욱이 실패할 확률도 매우 높아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조 작업들은 작가의 명성에 가려져 조명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