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계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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直系軍閥
Zhili clique

직계군벌
直系軍閥 | Zhili clique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1920년 ~ 1928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중화민국 북양정부
중화민국 국민정부
국가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위치
직예성
수도
베이징
주요 사건
1920년 안직전쟁
1922년 1차 직봉전쟁
1924년 2차 직봉전쟁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
역대 수장
1대
펑궈장
2대
차오쿤

1. 개요
2. 역사
3. 참고문헌
4. 관련문서
4.1. 관련인물
4.2. 단체
4.3. 사건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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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계의 거두인 우페이푸, 차오쿤, 펑궈장

펑궈장, 차오쿤, 우페이푸 등이 영도한 북양군벌의 한 파벌. 직례파, 직계라고도 부른다. 안직전쟁, 1차 직봉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천하를 장악하였으나 2차 직봉전쟁에서 패했고 이후 장제스1차 북벌2차 북벌을 단행하며 봉천군벌과 함께 손 잡고 사이좋게 몰락해버렸다.

1대 수령이었던 펑궈장과 2대 수령이었던 차오쿤이 모두 직예성(허베이성) 출신이었기 때문에 직예군벌(直隸軍閥)이라고도 불린다. 직예는 '수도 베이징에 직접 예속된다'라는 뜻으로, 즉 수도권 군벌이란 말이다.


2. 역사[편집]


1916년 위안스카이 사망 이후 국무총리에 안휘군벌의 수장 돤치루이가, 대리총통에 리위안훙이 취임하였고 리위안훙이 임시 약법과 구국회의 회복을 선포하면서 호국전쟁이 종결되었다. 이 시기에 부총통에 당선된 펑궈장이 직계군벌의 수령이었다. 하지만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 돤치루이는 안휘군벌의 대권을 위해 리위안훙 및 직계군벌, 국회와 충돌을 빚었다. 리위안훙과 돤치루이 사이에서 부원지쟁이라 불리는 격렬한 정쟁이 있었고 1917년 연합국이 중화민국에게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요구하면서 부원지쟁은 최고조에 다다랐다. 돤치루이가 대독선전안을 통과시키지 않는 국회를 해산할 것을 요구하자 리위안훙은 도리어 돤치루이를 면직시켰고 격노한 돤치루이가 반란을 준비하면서 겁에 질린 리위안훙은 안휘독군 장쉰에게 조정을 요구했다. 그리고 베이징에 입성한 장쉰은 국회와 약법을 폐지하고 장훈복벽을 단행, 난데없이 선통제를 복위시키고 청나라의 복고를 선포했다. 리위안훙은 부총통 펑궈장에게 대총통 자리를 물려주고 돤치루이를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에 복직시킨 다음에 달아났고 돤치루이는 직계와 연합, 장훈복벽을 진압했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직계와 환계의 뚜렷한 분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직계와 환계는 북양군벌이라는 큰 틀 안에서 협력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말을 듣지 않던 구국회와 약법 회복을 거부하고 매국적 니시하라 차관을 들이는 등 독재를 하였다. 이에 쑨원 등이 반발하여 광저우로 남하, 서남의 전계군벌 탕지야오, 계계군벌 루룽팅과 연합하여 1차 호법운동을 전개했다. 직계는 평화적 해결을 주장했으나 돤치루이가 강경하게 무력토벌을 주장하면서 1917년 호법전쟁이 일어났다. 여기서 직계는 태업을 하면서 호법전쟁이 흐지부지하게 끝나는데 일조했고 끝내 펑궈장이 정전명령을 내리면서 1918년 호법전쟁은 끝났다. 1918년 쉬스창이 새 대총통에 당선되었고 펑궈장이 사망하면서 직계는 차오쿤과 우페이푸가 영도했는데 강력한 무력을 갖춘 우페이푸가 실세였다. 이 시기에 직예군벌과 안휘군벌의 분화가 분명하게 일어났다.

이후 돤치루이가 세계대전이 끝났음에도 세계대전을 구실로 참전군을 조직하여 독재를 강화하자 직계와 환계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환계는 참전군을 변방군으로 개칭하여 외몽골 출병을 단행하면서 변방군의 존재를 정당화했다. 이에 직계는 호법전쟁으로 환계와 틀어진 봉천군벌과 연합, 환계를 견제했고 1920년 3월에 우페이푸가 양호지역에 주둔한 병력을 북상시키면서 직환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쉬스창의 요청에 따라 중재를 위해 방문한 장쭤린쉬수정이 암살하려고 시도하면서 결국 안직전쟁이 발발했고 직계와 봉계는 실전경험이 없던 환계를 손쉽게 격파하고 패권을 차지하여 영미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장쭤린이 우페이푸를 일개 사단장으로 모욕하고 봉천군벌이 탐욕스럽게 전리품을 차지하는 등 곧 직계와 봉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결국 1922년 1차 직봉전쟁이 발발했는데 우페이푸의 우수한 무력을 바탕으로 마적단 출신의 봉계는 순식간에 격퇴되었다. 우페이푸는 이를 믿고 안하무인으로 굴며 1923년 쉬스창의 뒤를 이어 대총통이 된 리위안훙을 축출하고 회선 사건을 통해 차오쿤을 총통으로 옹립하였다. 이로써 중원의 패자가 되었으나, 여기에 친위세력만 편애하는 우페이푸의 행태에 펑위샹을 비롯하여 불만을 품는 세력이 늘게 되었으며 실질적으로는 직계의 수령이면서 명목상으로는 사단장 정도에 불과한 우페이푸와 다른 직계 사이의 갈등도 빚어졌다. 이에 따라 직게군벌도 차오쿤을 중심으로 하는 보정파와 우페이푸를 중심으로 하는 낙양파로 다시 분열되었다.

1924년 강소독군 치셰위안은 차오쿤의 지지 하에 쑨촨팡 등 4개성을 연합하여 절강독군 루융샹을 공격하는 강절전쟁을 일으켜 상하이와 절강성을 점령했다. 하지만 장쭤린이 이를 비난하며 남하, 2차 직봉전쟁이 일어나자 봉천군을 공격하는 척 하던 펑위샹이 북경정변을 일으켜 차오쿤을 축출하고 내친 김에 핍궁사건을 일으켜 선통제 일가도 자금성에서 쫓아내버렸다. 이어 돤치루이의 임시집정 정부가 수립되자 돤치루이는 루융샹을 소환선무사로 임명, 장쭝창과 함께 강소독군 제섭원을 치게 하여 제노전쟁이 일어났는데 제섭원은 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 결국 1차 직봉전쟁 이후 와신상담하여 장교진의 양성, 군 현대화에 주력했던 봉천군벌이 천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직계군벌은 하남, 호남, 호북 지역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장쭤린에 반감을 품은 쑨촨팡이 1925년 손봉전쟁을 일으키고 장쭤린과 펑위샹 관계도 악회되어 반봉사건이 일어나는 등 여전히 혼란이 이어졌고 1926년에는 봉계, 염계, 직계는 펑위샹 토벌을 위해 합작을 결정하여 1926년 직봉풍전쟁을 일으켜 펑위샹을 패퇴시켰고 펑위샹은 소련 외유를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7월에 장제스가 영도하는 중국 국민당국민당의 1차 북벌을 거행하면서 펑위샹 토벌에 매달리던 직계는 국민혁명군에게 신나게 두들겨맞고 박살났다. 호남에서 축출된 탕성즈가 양호 지역을 장악했고 이어 강서성의 쑨촨팡도 국민혁명군의 공세에 난징, 상하이 등을 내주고 패퇴했다. 여기에 장쭤린에 도와주는 척 뒤통수를 치면서 직계군벌들이 앞을 다투어 봉천군벌에게 투항하는 등 직게군벌은 몰락 직전에 몰렸다.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하여 국민당에 내분이 발생하자 잠시 숨을 돌리는 듯 했지만 우한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가 각각 북벌에 나서면서 결국 최후의 영지인 하남성에서도 축출당했다. 우페이푸는 변복하고 맞아죽을 위기에서 벗어나 겨우 사천성으로 달아났고 쑨촨팡은 장쭤린을 대원수로 옹립, 장제스에게 맞섰으나 국공결렬영한합작으로 국민당이 다시 통합하고 장제스가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 복귀, 1928년 옌시산, 펑위샹 등이 장제스 편에 서면서 국민당의 2차 북벌에서 결국 복날 개맞듯이 두들겨 맞고 몰락했다. 우페이푸는 근성 있게 재기를 노리면서 1930년 옌시산이 중원대전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여 사천에서 봉기를 시도했지만 장제스에게 제압당하고 완전히 몰락했다. 이로써 직계군벌도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3. 참고문헌[편집]


  • 군벌, 이건일, 도서출판삼화.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4. 관련문서[편집]



4.1. 관련인물[편집]


  • 펑궈장
  • 차오쿤
  • 우페이푸
  • 쑨촨팡
  • 치셰위안
  • 리춘
  • 진광원
  • 왕잔위안
  • 톈중위
  • 펑위샹
  • 리허우지[1]

4.2. 단체[편집]



4.3. 사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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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직전쟁 이후 안휘군벌에서 전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