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교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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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결과
5. 영향
6. 평가


1. 개요[편집]


陳橋之變

960년에 후주의 장군이었던 송태조 조광윤후주의 공제에게서 선양을 받고 송나라를 건국한 사건. 진교병변(陳橋兵變), 진교군변(陳橋軍變)이라고도 한다.


2. 배경[편집]


959년에 후주세종 시영거란으로부터 연운 16주를 수복하기 위해 북벌에 나서려 했다가 병으로 사망했다. 세종의 아들인 공제 시종훈이 7세의 어린 나이로 제위를 계승하자 군부의 장수들이 조광윤을 추대하기로 한다.


3. 전개[편집]


960년 1월 1일에 후주의 여러 신하들이 정월을 축하하다가 의 군사가 남하해 북한의 군사와 합쳐 후주를 공격하자 귀덕절도사, 검교태위, 전전도점검[1] 조광윤에게 이를 막도록 명령했다고 하는데, 요나라의 기록에는 후주를 침공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조광윤이 군정을 6년 동안 장악해 사졸들의 마음을 얻고 세종을 따라 여러 차례 정벌해 공을 세워 인망을 얻었으며, 또 후주의 주군이 어렸으므로 조광윤의 부하들이 조광윤을 추대하기로 한다.

1월 2일에 전전부점검, 진녕군 절도사 모용연쇠 등이 군을 이끌고 3일에는 그 군사들이 뒤를 따랐는데, 3일 저녁에 진교역에서 묵는 와중에 도압아 이처운, 내전지후공봉관도지 조광의, 귀덕절도사부의 장서기 조보 등에게 조광윤을 추대하는 일에 대해 논의하다가 아대군사 곽연빈을 파견해 전전도지휘사 석수신, 전전도우후 왕심기 등에게 알려 그들도 모의에 동참하게 했다.

조광윤은 이때 술에 취해 자서 살피지 못했고 4일에 조광윤의 장수들이 조광윤의 침실로 들어와 천자로 추대한다는 뜻을 알리자 조광윤이 놀라서 일어나 옷을 걸치고 아직 응대하지도 않았는데, 부하들이 조광윤에게 황포를 입히고 벌려서 절했다가 만세를 부르고 부축해 말에 오르게 하고 남쪽으로 갔다.

조광윤이 면할 수 없음을 알고 장수들에게 너희들이 스스로 부귀하기를 욕심내 나를 세워 천자로 삼았는데 자신이 호령하면 따를 수 있겠냐고 묻자 장수들은 오직 명령만 하라 했으며, 군사를 정돈하고 개봉의 인화문에서부터 들어갔고 5일에 객성사 반미를 파견해 정치를 하는 사람들에게 뜻을 알려주면서 초소보를 파견해 집안 사람들을 위로했다.

이때 천평절도사, 동평장사, 시위마보군부도지휘사 한통이 이를 알고 무리들을 인솔해 조광윤을 막으려 했지만, 산원도지휘사 왕언승과 길에서 마주쳤다가 왕언승이 한통을 쫓아서 한통의 집으로 달려들어가 한통과 그 처자를 죽였다.

조광윤이 후주의 은혜를 받았는데 6군의 압박을 받아 천지에 부끄럽게 죄를 지었다고 말하자 산지휘도우후 나언괴가 우리들은 주군이 없어 반드시 천자를 얻어야 한다고 말하자 후주의 재상인 범질, 왕부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계단에 내려가서 절을 했다.


4. 결과[편집]


선양 의식을 치러 조광윤은 황제를 칭했고 시종훈을 정왕(鄭王), 부태후를 주태후로 해 서궁으로 옮겨 거처하게 했으며, 국호를 송(宋)이라 하고 8일에는 사망한 한통에게 중서령을 증직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5. 영향[편집]


조광윤이 공제에게서 제위를 사실상 찬탈하여 후주를 멸하고 송나라를 세우자 반송봉기가 일어났다.

소의절도사인 이균은 송나라가 건국되자 중서령을 겸하게 되었지만 후주의 공제를 쫓아낸 조광윤에게 반발해 북한과 연합해서 군사를 일으키기로 해 반란을 일으켰으며, 조광윤은 석수신, 고회덕, 절덕의, 마전의 등을 파견해 진압했고 이균은 패하자 불을 질러 자살했다.

검교태위, 회남절도사 이중진은 본래 후주 태조 곽위의 생질로 조광윤과 군권을 관장했고 조광윤이 즉위하면서 한령곤에게 이중진을 대신하게 했는데, 이중진은 들어와서 조현하기를 요청했지만 조광윤이 조서를 내려 이를 중지시키자 이중진은 불안해했다. 이중진이 관리 적수순을 파견해 이균과 연락하려 했지만, 적수순은 몰래 조광윤에게 이를 알리고 돌아와서는 아직 가볍게 움직일 수 없다고 해 서로 연결하지 못하게 했다.

조광윤이 이균을 진압하고 이중진을 옮겨 평로절도사로 삼고 육택사 진사회를 파견해 철권을 싸가지고 하사해 위로하려 했는데, 이중진은 후주 황실의 친척이라 온전할 수 없을 것을 걱정해 진사회를 가두고 군사를 일으켰다.

조광윤은 석수신, 왕심기, 이처운, 송연악 등을 먼저 파견했다가 직접 친정을 해 조광의, 오정조, 여경여 등과 함께 출진했으며, 이중진은 양주의 성이 함락되자 불을 질러 자살했고 진사회는 이중진의 무리들에게 살해당했다.


6. 평가[편집]


현대에 조광윤이 부하들의 간청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서 황제가 되었다는 설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진한 사람은 거의 없다. 거란(요나라)의 공격으로 조광윤이 출동했다는 것은 송나라 측 송사의 기록이고, 요나라 측 기록에는 당시 송나라를 공격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다. 요사에 따르면 당시 거란의 황제 요목종은 959년 12월에 자국 내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느라 바빴을 뿐이다. 즉 거란의 공격 자체가 조광윤이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기 위한 거짓 정보에 불과했다. 더구나 부하들이 억지로 황포를 입혔다고 했는데, 황포는 황제의 옷이고 군중에 굴러다닐 리가 없다. 사전에 준비하지 않았으면 황포가 갑자기 등장할 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조광윤은 출동하기 전에 자기 가족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았다. 이를 종합해보면 조광윤은 처음부터 반란을 일으킬 목적으로 거란의 공격이라는 거짓 보고를 이용해서 군사를 이끌고 출동했던 것이다.

사마광의 명저 자치통감은 959년 12월까지만 서술되고 거기서 딱 단호하게(...) 끊어버리고 끝나기 때문에 960년 정월의 진교정변에 대해선 단 한줄도 나오지 않는다. 진교정변이 요나라와 북한 연합군이 공격할 때 일어났다고 쓰는 것은 자치통감의 뒤를 이어 960년부터 서술하기 시작한 청나라 시대의 속자치통감.

다만 제위를 빼앗았어도 드물게도 개봉 입성 후 휘하 군사들이 곽위 때와 달리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았고, 전임왕조를 잘 대해주었다. 중국 역사 내내 선양으로 제위에 오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실상은 남북조 시대부터 군대가 성 안에 들어오면 민가를 약탈하고 반항하는 백성들을 죽였고, 전 황족은 그 자리에서 족치거나 적당히 대접하다가 몰래 암살하는 일이 빈번했다[2].

하지만 조광윤은 이런 선례와 달리 미리 휘하 군대에게 철저히 민가 약탈과 살육을 금했고, 전임황제인 시종훈와 후주 황족들을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정왕에 봉한 시종훈을 일족과 함께 방주(房州)에서 살게 하면서 방주 태수이자 자기 스승이기도 한 신문열로 하여금 잘 보호하게 하여 우대했다.[3] 아울러 단서철권(丹書鐵券)[4]을 내려 시씨 문중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시씨 문중은 북송이 금나라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갈 때도 송나라 황실이 함께 데리고 갔고, 남송이 멸망할 때까지 양송 3백 년간 줄곧 보호받았다. 그리고 선양한 공제 시종훈이 973년에 20세의 나이로 요절했을 때에도 황제에 준하는 예우로 장사까지 지냈다. 이러한 후대는 이후 송나라 내내 이어졌고, 그래서였는지 후에 송나라가 최후의 전투인 애산 전투를 끝으로 멸망할 때 많은 시씨 일족이 끝까지 송나라 황실과 명운을 같이 했다.[5] 시씨 이외에도 5대 10국의 군주나 장수들도 죽이지 않고 관용을 베풀었고[6] 이렇게 조광윤은 정복한 지역의 백성들의 약탈을 엄금하면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후주에게서 미묘한 병변을 일으켜 양위를 받은 송태조 또한 천고의 수수께끼(千古之謎)라 일컫는 의문스러운 급사를 당하여 황위가 동생 송태종 조광의에게 넘어가게 된다. 송태조와 송태조 문서의 촉영부성(燭影斧聲)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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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점검'은 예컨대 가스 점검처럼 한국어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그 점검과 같은 한자(點檢)이다.[2] 이게 420년 동진이 멸망한 이래로 540년 동안 징크스처럼 자리잡았다(...)[3] 단 조광윤의 사부인 신문열이 후환을 우려하여 시종훈의 아내를 희롱한 후 자살하게 만들어 시종훈도 화병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야사도 있다.[4] 면사금패(免死金牌)라고도 하며,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는 일종의 증명서 역할을 하는 문서였다.[5] 이런 시씨 일족 중 한 명이 수호전에도 등장하는데 바로 시진이다.[6] 조광윤이 특별한 건 아니고 황족만 바뀌고 지배층은 그대로 유지한 게 5대 10국 전체의 특징이다. 풍도가 대표적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