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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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到
?~230년 이전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미디어 믹스



1. 개요[편집]


삼국시대 촉한의 인물이며 는 숙지(叔至)로 예주 여남군 출신이다. 공적과 실력에 비해 기록이 적어서 인지도가 매우 낮아 거의 투명인간 취급을 받고 있다. 심지어 <삼국지연의>에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2. 생애[편집]


정사의 계한보신찬에서 조운과 함께 언급된다.

정남장군(조운)은 성정이 후덕하고, 정서장군(진도)은 충성스럽고 강직하다. 당시 선발된 병사를 지휘하여 맹장으로써 공훈을 날렸다.

계한보신찬


주석에서 아주 약간 더 소개되어 있다.

자는 숙지(叔至). 여남 사람이며 예주에서부터 유비를 수행하였다. 용맹하고 충직한 맹장으로, 명성과 관위는 조운 바로 다음이었다. 후에 영안도독과 정서장군에 올랐으며, 정후에 봉해졌다.

계한보신찬 주석


이외의 정사 및 제갈량제갈근에게 보낸 서신에 약간의 기록이 더 전해진다.

제갈량은 한중으로 출병하려고 하면서 이엄이 반드시 뒷일을 맡아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강주로 옮겨 주둔시키고, 호군 진도를 남겨 영안에 주둔시켜 모두 이엄의 통솔하에 두었다.

이엄전


제갈량이 본격적으로 북벌을 추진하던 226년에는 이엄 휘하에서 대오전선에 종군했다.

형장(제갈근)께서 백제성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가 비정예병일까 봐 근심하셨는데, 사실 진도가 영솔하는 군사는 선제의 군사들 중에서도 백이로써 촉나라의 정예부대입니다. 만약 군사가 적은 것이 근심되신다면 강주의 군사를 이동시켜 병력을 강화할 것입니다.

태평어람


이 서신은 제갈량이 북벌에 나서기 직전 형 제갈근에게 서쪽의 요충지인 백제성의 방비에 대해 걱정하는 서신을 받고 답한 것인데 진도가 이끄는 병력이 선제(유비) 때부터 내려오는 촉에서도 손꼽히는 정예부대라고 적고 있다.

촉한의 또 다른 정예부대로 4차 북벌때 무당감 왕평의 지휘 아래 장합을 패퇴시킨 비군(飛軍)은 화양국지에서 남만정벌 이후 촉으로 이주시킨 오부(五部) 1만가를 기반으로 했다고 명확하게 기원과 구성원을 밝힌 반면 이 백이병은 제갈량의 서신에 짤막하게 정예병이라고 언급된 것을 제외하면 일절 기록이 없어 정체가 베일에 쌓여 있다. 사천성 일대에 거주하는 소수민족 중에 이족(彛族)이 있는데 이족 남자들은 흰 모전으로 지은 옷을 입어서 이 백이(白彛)의 병사들을 유비 시절 편성한 이민족 군단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단순한 정예부대의 별칭으로 보는 추정도 있다.

최종 관직은 정서장군인데, 『화양국지』에 의하면 강유가 230년에 정서장군이 되었으므로 226 ~ 230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3. 평가[편집]


종합하면 유비가 제대로 된 기반을 갖추지 못하고 있던 시절부터 수행해 신야 -> 형주 -> 입촉의 과정을 모두 거쳤으며, 대오 전선에서 상당한 비중을 가졌고 자국내에서 정예로 꼽히는 강병을 이끈 숙장으로 그 기량이나 신임이 상당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그러나 기록이 없다. 활동 기간이 대충 30여 년 정도이고 정서장군까지 올라간 숙장인데도 없다.[1] 촉은 진짜 기록이 좀 부족한 듯 싶다.[3] 유비 사후 관계가 회복된 대오전선을 맡았던 것에 주목해 중요하지만 티 안 나고 수수한 임무에만 우직하게 전념해서 기록이 안남은게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으나 그렇지 않다. 진도가 유비에게 사관한 시기 유비는 여러 세력을 전전하는 객장이었고, 유비군은 최전선에 우선적으로 투입되는 용병단에 가까웠다. 당연히 후방 관리같은 보직은 둘 수가 없었고 교전이 잦고, 위기도 많았다. 무엇보다 계한보신찬에선 분명히 병사를 지휘하여 맹장으로써 공훈을 날렸다고 적고 있다. 군사를 끌고 일선에서 싸웠다는 소리다.

계한보신찬에선 진도의 위상이 조운에 버금갔다고 했는데, 기병대장 출신으로 황충과 함께 유비의 조아(爪牙)로 평가 받은 조운의 일생을 감안하면 진도 역시 일선에서 무용을 많이 발휘했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관우, 장비처럼 독립적인 군을 지휘하는 입장이었다면, 설령 촉한의 기록은 실전되었다 하더라도, 위서나 오서에 교차기록이라도 남는 것이 일반적임에도 기록이 없다. 맹장이었다는 기록과 조운과 함께 거론된 점에 주목해 조운과 같은 직속 돌격대장, 친위대 지휘관을 거친 게 아닌가 하는 추론이 현재로선 가장 타당해 보인다. 유비 생전의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그나마 남아있는 기록이 유비 사후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뒷받침할 기록이 없으니 추정일 뿐 증명이 불가능하다.

나관중이 진도를 삼국지연의에 등장시키지 않았던 이유는 상기한 것 외에는 자료가 전혀 없어서였을 것이다.[4] 조운이랑 포지션이 겹쳐 보이는 탓도 있을 것이고..


4. 미디어 믹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진도(삼국지)/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사정장군은 동서남북 각 방면 최고의 사령관들이다. 가령 정서장군의 경우 서쪽 방면 무관 권력의 실질적인 정점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한 계급만 상승해도 유비가 명분과 관직으로 유용하게 사용한 사방장군이다. 그런데도 기록이 아예 없다시피 한 것이다.[2] 유비가 독자기반을 마련하기 전부터 만인지적이란 평가를 받은 관우, 장비조차 그들이 만인지적 소리 듣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기록이 없다.[3] 일단 후한말 인물이라 세월이 상당히 지난탓에 자연스럽게 실전되었고[2] + 성도에서 강유가 종회를 꼬드겨 벌인 난리 당시 수많은 촉의 기록들이 훼손되고 파괴된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된 것으로 보인다.[4] 촉장 중에 정사에서 기록이 거의 없음에도 연의에서 꽤나 비중있게 등장하는 케이스로 마대가 있지만, 마대는 마초의 사촌 아우라 마초와 조조의 싸움, 입촉과정을 다룰때 마초를 보좌할 조역으로 적합했고, 정사의 몇 줄 안되는 기록이 다름 아닌 위연을 참한 기록이라 보다 자연스러운 전개를 위해서 어느정도 나와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 연의에서 위연의 비중이 커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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