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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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조선
3. 중국
3.1. 진사 출신의 폐해
3.1.1. 붕당(朋黨)
3.1.2. 팔고문(八股文)
3.2. 진사 출신 인물(중국)


1. 개요[편집]


진사()는 과거 제도에서 해당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말한다. 고려조선, 중국에서 모두 사용된 단어지만 의미는 다르다. 조선의 진사는 소과 합격자에 불과하다면 중국의 진사는 최종합격자이며 엘리트 관료 집단의 일원으로 신분 자체가 큰 차이가 난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중국사에 웬만한 관심이 없는 이상, 인터넷글 뿐만 아니라 출판물에서조차 조선의 진사와 고려 및 중국의 진사를 혼동하거나 동급으로 놓는 잘못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고려의 진사는 제술업 합격자를 진사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문장을 중요시하여 문벌 귀족들에게 유리했고, 무엇보다 조선과 달리 고려는 문벌귀족들의 영향력이 큰 사회라 과거 합격자들보다 음서직으로 출세하는 것이 유리했기에 중국의 진사에 비할 바는 아니다.


2. 조선[편집]


고려시대 과거 대과는 두 종류로 나뉘어 제술업(製述業)과 명경업(明經業)으로 양대업(兩大業) 나뉘었다. 그 중 제술과를 진사과라고도 부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고려 중기 무신의난 이후로 지위가 떨어지고, 고려 후기로 올수록 성리학이 뿌리내려 차차 경학이 중시되었고, 조선에서는 문장을 다루는 제술(진사)과를 대과에서 폐지한다. 그러므로 고려의 진사는 조선의 진사과와 다르다.

과거 시험 중에서 초시 중에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으로, 벼슬은 아니나 성균관에 입학하거나 하급관리로 임용될수 있는 자격이 있다. 당연히 대과에 응시 할 자격도 주어진다.

조선 사대의 신분제도는 4대 내에 벼슬도 아닌 말단 품급 (이를테면, 종 9품 품계)이라도 한 적이 없으면, 양반으로서의 위치가 위태로워지는데, 양반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군역과 요역이 나와 군대에 가야 한다. 대대로 벼슬 없이 유생 신분을 유지해도 양반의 지위는 박탈 당하지 않으나 가문의 체통과 신분유지를 위해 생원 진사시에 응시하는게 일반적 이었다. 4대안에 급제가 없으면 양반 지위가 박탈된다고 아는 사람이 많은데 아무리 조선 인구가 현재보다 적고 양반수가 소수여도 당시 평균수명도 짧고 요절해서 양자도 들이는 경우가 빈번한데다가 조선 후기에는 조선 인구가 1500만에 신분제의 붕괴로 오히려 양반 계층이 폭증하는데 모든양반 가문에 4대안에 급제가 계속 나오는건 역사적으로 사실이 아니며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했다. 원칙적으론 양반이라고 군역 요역이 면제 받는게 아니라 지방 향교에 학생으로 생원-진사시 수험생으로 이름을 올리면 사실상 면제된다. (따라서 양반에게도 원칙적으론 군역을 질 의무가 있다.)

조선후기에는 공명첩으로 쌀 몇십섬으로 당상관 품계도 사고, 무과로 뽑는 인원이 어쩔때는 1만명씩으로 늘었기 때문에 사정이 좀 안된다 싶으면 무과합격을 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문과 급제를 가장 높이 쳐준게 사실이며. 지방 사족 뿐만아니라 중앙정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지만 산림으로 자처하며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던 학자들도, 체면치레상 진사나 생원은 따놓고 은거했다.

실제로 조선 중기 이후 중앙정계에서 밀려난 지방 양반들은, 진사시험에 합격한걸로 고장에서 수령을 제외하고는 상당한 권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사실 수령도 든든한 백이 없으면, 향반들이 떼로 몰려서 위세부리는거에 꼬리를 마는 수 밖에 없었다. 수틀리면 상소하고 관에 협조 안하고 그랬던지라...[1]

이러한 성격 때문에 진사라는 호칭은, 중기 이후엔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 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학식과 재산이 있는 지역 유지 인사들을 가리키는 호칭으로도 발전하였다. 비슷한 이유로 초시 중 생원시에 합격한 '생원'이나, 본래 지방 수령을 보좌하는 향청의 수장인 '좌수'라는 호칭도 이렇게 지역 인사들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바뀌었다.



3. 중국[편집]


중국의 진사는 조선과 달리 과거시험 최종합격자를 의미한다. 조선의 대과 합격자는 상위 3명을 제외하면 직접 임용이 되지 않았던 것과 달리, 중국 진사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합격과 동시에 고위 관료로 임용이 되지 않더라도 경대부 (卿大夫)신분이 보장된 엘리트 신분이다. 조선 처럼 급제>>>벼슬인데, 예를들어 진사출신이 아닌 거인이나 무관 출신 벼슬 아치들도 직책이 없는 진사출신보다 신분이 앞선다고 볼수 없다.

중국의 과거제도는 수나라 때 시작되어[2] 당, 송을 거쳐 그 절차에 있어 엄격한 체계를 완성하여 원대를 거쳐 명대에 이르러서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복잡다난하고 엄격한 시험이 되었다.

과거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는 황제가 친히 주관하는 전시제도가 없었고, 수험자의 이름을 가리는 호봉법이나 시험지를 그대로 필사하여 사본만 보고 채점하는 등록제도 없었다. 그러나 당 송대를 거쳐 전시제도, 호봉법, 등록제가 완비되었고, 명대에 이르러서는 6단계에 거친 단계가 확립되었다. 진사시라는 시험 자체는 당나라때도 있었지만 당나라 때에는 진사과를 제외 하고도 수재, 명경, 준사, 명법, 명자, 명산, 일사(一史), 삼사(三史), 개원례(開元禮),도거(道擧), 동자(童子)라는 여러 과거 제가 있었다. 그마저도 수재과는 너무 어려워서 응시자가 없다가 폐지하는등 전혀 체계가 없었으며 진사시가 가장 명예롭게 여겨지긴 했으나 주된 과거 시험은 명경과 였다. 북송대 왕안석의 개혁으로 진사시를 제외한 명경과를 비롯한 다른 시험은 없애버리고 진사시로 일원화 했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이 때부터 진사를 최종시험 합격자로 여기게 된다.

특히나 북송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인 발전 그리고 국가 정책으로 문인을 우대하는 관료 임용이 정착되면서 과거 응시자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는데 북송 진종 연간에 3만명에서 남송 시대에는 50만명이나 응시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서 과거에 합격하는 것은 영광이나 합격과 출세가 목적이라기 보다 과거 공부 시험을 준비하는 상태 즉 과거를 볼수 있는 신분사대부 계층이 탄생한다. 이들은 몽고 지배기를 거쳐 명청 시대에도 향촌 질서를 주도하면서 경제적으로는 과거를 볼 여유가 있는 향신(신사) 계층으로도 불리게 된다.

동생으로 출발하여 동시 (현시, 부시) 과시(세시, 원시)를 거치면 생원이나 수재(秀才) 혹은 거자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상당히 인정받게 된다. 생원이 되면 지방학교에서 추천으로 국자감에 입학하여 관직이나 봉록을 누릴 수도 있고 더 상위 과정 시험에 도전 할 수도 있다. 그 뒤에 드디어 각 성에서 실시하는 향시에 응시, 합격하게 되면 거인(擧人)이 되는데, 이 거인의 희귀함은 가히 압도적이어서, 성 내에서도 드물 정도였다. 사실 거인 이전에 수재(秀才)만으로도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동생에서 10년이상의 수험 공부를 거친데다가 명청시대 수재의 거인 합격자 비율은 매우 희귀했고 양계초에 의하면 청대에는 겨우 1%에 불과하기에 평생 향시에 낙방한 수재들도 상당한 존중을 받았다. 그러므로 수재들은 관원에게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되는 특권이 있고 사실상 불체포 특권을 지녔으며[3] 장형이 면제되는 사대부 취급을 받았다.[4] 거인은 지방 관청의 낮은 관직으로 임용될 수 있었는데, 사실상 지방 행정실무는 거인이나 수재 또는 그 밑의 현지 출신들이 담당했다. 왜냐하면 상피제가 적용되어 지방관들은 연고가 전혀 없었기 때문. 사실 명청 시대에는 '3품관 미만 4품관 이하'는 총독이나 순무, 장군들이 직접 임명이 가능했다. 구한말에 조선 고종을 협박하고, 조선 조정을 무시한 정여창 원세개 마건충은 과거 문턱에도 간적이 없고 조선책략을 지은 황준헌은 진사 밑 단계의 '거인'출신이다.[5] 이들은 직예총독 겸 북양통상대신 이홍장의 막우들이지 조정관리(3품관) 미만의 직위였다. 명청교체기 같은 혼란기에 관료집단의 인력이 부족하면 조정에서 일종의 특채 형식으로 진사에 준하는 자격으로 정식 임용하기도 했다.[6] 또한 평시에도 합법적으로 '납연'이라고 불리는 매관매직을 통해서 조정관리로 임용될 수도 있었다.[7] 아큐정전에서 나오는 거인이 바로 이 단계를 통과한 사람을 이른다. 거인신분도 경제적으로 어느정도 뒷받침이 되어야 몇십년간 과거 공부를 할수가 있기에, 지방 향신층으로 분류되는 지배 계층이 독점했다. 지방 시험부터 동생-수재-거인 테크를 타는데도 보통 20년은 족히 걸렸다고.

그 살인적인 경쟁률을 뚫고 (성마다 거인의 경쟁률은 달랐으나, 어림잡아 1만대 1의 경쟁을 뚫은 사람들이다.) 나면 거인들끼리 진검승부를 펼치는데, 이것이 바로 회시이다. (통상 회시, 전시는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사법시험 2차와 3차와 유사하다. 2차를 합격하면 3차는 합격으로 치는 것) 이는 대개 30대 1의 경쟁률이었으나, 거인들끼리의 경쟁이었기에 그 치열함은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렵다. 회시는 합격이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에 전시에 진출하는 정규 합격자(정방)은 물론 부방(副榜) 이라는 준 합격자도 공고하게 된다. 부방 합격자는 국자감[8]에 입학 할 수도 있고 지방학교 관원이나 여타 실무부서 하위 관원으로 임용될 수도 있다. 국자감 학생 즉 감생 혹은 공생(貢生)은 거인 합격자가 아니더라도 지방학교에서 추천으로 입학하고 거인 자격도 필요 없고 생원에 불과하기에 거인보다 낮았지만 감생들은 조정으로 부터 봉록이 나오고 관료 후보생으로 이름이 올라간다는 점에서 어느정도 이득이 있었다. 그리고 거인 출신 국자감생은 거감(擧監)이라 하여 그 중에서도 특별히 우대받았다. 조선과 달리 굳이 학교에 다닐 필요는 없이 다른 거인에 비해 혜택이 많아 즉시 임용되어 지현 지부 같은 관직도 제수되기도 했다. 그래도 이에 만족 하지 않으면 다시 회시에 도전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회시에 합격하면 진사가 되어 전시에서 합격자 중 순위만을 가리는 시험을 보게 된다., 보통 갑과(장원,방안, 탐화)에게는 진사급제, 을과에게는 진사출신제, 병과에게는 동진사출신제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실로 몇만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최소 6번(옹정 이후부터는 7번 이상)의 살인적인 시험 과정을 거친다.

명청시대 과거제도를 정리해 보면, 동생(수험생)부터 현시 부시 원시를 거치면 수재가 되며, 수재에서 향시를 거치면 거인이 되고(거인부터는 신사층의 초 엘리트이다), 회시에 급제하면 자동적으로 등수만 정하는 전시를 치르고 진사가 된다.

동생- 생원(공생,감생) - 수재(거자) - 거인 - 진사[9]


실제 진사가 되더라도 관운이 트이지 못하면 제독, 순무, 학정, 안찰사, 포정사 따위의 지방 고위직에도 오르기 힘들었으나, 세간의 인식은 최고의 엘리트 대접이었으며, 각 지역에서 진사 배출은 그 지역의 자랑이었고, 특히 장원배출은 지역민들이 갹출하여 장원방(狀元坊)[10]을 세울 정도였다.

이 복잡다난하고 지옥같은 시험일정을 모두 1등으로 통과한 장원은 원나라때 1명, 명청시대 6번의 과정을 모두 장원 으로 통과한 급제자는, 명나라에서 한 명, 청나라에서 한 명 있었다고 한다. (통상 향시, 회시, 전시 장원을 삼시장원이라 하며, 명청 600년 역사 동안 단 17명 밖에 없었다.) 명나라에서는 황관(黃觀)이란 사람인데,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때 등용되어, 다음 황제인 건문제 주윤문 아래에서 일하다, 정난의 변으로 연왕 주체가 영락제가 되자 끝까지 배신하기를 거부, 본인은 물에 몸을 던지고, 일가는 몰살되었다고 한다[11]. 청나라 시절에는 전계(錢棨)라는 사람이 건륭제 시절 6개의 시험에서 장원을 차지하는 두 번째 사람이 된다.[12]

중국 명청 왕조 시절에 끝판 엘리트인 셈. 보통 3년마다 한번 볼 때 고작 300~400명[13] 정도만을 뽑았다고 하니, 가히 그 어마어마한 난이도를 짐작할수 있다. 참고로 건륭제 연간 중국의 인구가 무려 3억명이었다.

중국은 남쪽, 특히 절강성, 강소성(안휘성과 합쳐 남직예성일 때도 있었다), 강서성이 부유하다 보니 문인들이 많이 배출돼서 진사 자리를 싹쓸이 하자, 남과 북에서 관할을 나누고 지역별로 쿼터를 두어서 반씩 뽑았다.예를 들어 (명나라 인종때 북 40: 남 60 쿼터)이렇게 일종의 할당제로 남경과 북경에서 나눠서 열리는 '회시'에 합격하면 진사가 되게 되었는데, 몇 달 후 북경의 황제 앞에서 등수만 가리는 시험인 '전시'를 볼 자격이 있는 신분인 것이다.

전시에서 1등 합격자를 장원(壯元), 2등 합격자는 방안(榜眼), 3등은 탐화(探花) 라고 지칭하며 특히 더 우대했다. 이들은 등수는 관례적으로 황제가 뽑으나, 전시과가 끝나고 나서 입궁시에는 황제만 사용하는 전용 문으로 입궁을 하고[14] 잔치에서 1, 2, 3등 합격자는 친히 황제가 따라주는 술잔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친왕(親王)이라도 할지라도 받지 못하는 대접이었다. 진사를 이만큼 나라에서 예우한다는 의미이며, 당연히 술잔을 받은 합격자는 평생 잊을수 없는 자랑거리이고, 몇대에 걸칠 가문의 영광이다. 을(乙) 1갑(一甲)과 수십명의 2갑 상위권 중에서 상위권은 한림원으로 천거되고, 2갑 나머지는 육부(이호예병형공)에 배치, 대부분의 3갑은 보통 지방 수령직부터 시작하는데, 한림원에서 황제의 칙서나 외교문서 같은 공문서를 작성하다 연차가 쌓이면 지방급 향시 시험감독관으로 인맥을 쌓고, 이후 요직에 등용되는 것이 전형적인 출세 테크였다.


3.1. 진사 출신의 폐해[편집]



3.1.1. 붕당(朋黨)[편집]


여기서 진사를 뽑는, 즉 중국 과거제도에 있어 고질적인 문제점이 일어나는데, 중국의 선비들은 조선과 달리 자신에게 어릴 때 글을 가르쳐 주거나 서당에서 가르쳐준 사람을 스승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돈을 받고 가르쳤으니 지식을 사고 판 것이고, 장사꾼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었다. 이들은 낙방자라 하여 경멸을 받는것은 사실과 다르다. 글을 배우고 공부하는 신분으로 자기 수양을 하고 성인의 도리를 펴야 할 사대부의 신분을 망각하고 돈을 받고 사교육에 투신하는것을 경멸한 것이다. 송대 이후 과거 응시자가 많아졌지만 어디까지나 이들은 상위 1% 지주들이었고, 어렸을때는 집안에서 가정교사 같은 서생들을 불러 글을 배우지만, 지금의 중학생 쯤 나이가 되면 학교에 가야 했다. 왜냐하면 명,청은 과거시험을 보려면 반드시 학교를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향시에 참가하는 사인은 반드시 관립학교의 생원이어야 했다. 여기서 우수한 생원들은 선발되어 중앙의 국자감에 입학을 했는데 명청 황제독재체제에서 관학은 유명무실했다. 주원장 치하에선 사대부들이 트집 잡혀 참수당하거나 전가족이 몰살당하질 않나 청나라땐 이민족의 한족의 화이사상을 극심하게 탄압하였고, 어차피 국자감을 다녀봤자 진사는 커녕 거인 시험 합격자보다 대우가 못했고, 국자감 이 이럴진데 지방학교는 유명무실했으며, 교관은 말직으로 간주되어 상피제도에 해당하지도 못하였다. 그래서 사대부들은 명나라때 동림서원 백록동 서원 , 청나라때 악록서원 처럼 뼈대있는 사립 연구 기관을 선호하게 되었다.

진사들에게 진정한 스승이란, 과거시험에서 아무 대가 없이 글 하나만 보고서 자신을 과거에서 합격시켜 준 사람이었다.[15] 고정관과 부정관은 수험인의 이름도 알 수 없었으며, 필체 또한 알 길이 없으므로[16] 수천 수만 장의 답안지 중에서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는 문장력을 보인 것을 뽑을 수밖에 없었다. 달리 말하면, 글만 보고 그 사람의 진가를 알아본 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진가를 알아주고 발탁한 사람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평생 스승으로 여기며 떠받들다 보니, 자연히 이들을 중심으로 한 파당이 형성되었다. [17]

이를테면 몇 년도 북경 시험 감독관이 뽑은 200명의 진사는 평생 그 사람의 문하생이 되는 것이고, 몇 년도 남경 시험에서 뽑은 진사들은 역시 그 사람의 제자가 되는 것... 이러한 사제관계 문화는 지방시험인 향시에서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 이것이 스승과 제자, 동문, 스승의 스승, 제자의 제자까지 헤쳐모여서 서로 끌어 당겨주고 반대파는 막고 하는 등의 붕당정치를 고착화했다. 오랜 과거시험을 위해 몇십 년동안 책을 몇 수레씩 읽은 사람들이 하는 짓이 이랬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명나라를 망하게 하는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과거제에선 한족 지식인을 우대하는 특혜가 있었는데 한족 지식인층에 대한 회유를 위한 것이었다. 팔기군 출신 수험생들은 기외의 민인들이 치는 과거 시험에 참여하지 않았고 자신들만의 시험을 치르곤 했다. 순치 연간에 한인/만인 나뉘어 따로 과거를 두 차례 치른 이후로 팔기인들은 따로 전형을 치러 임용했지만, 기인들만의 특별 시험을 과거라고 부르진 않았다. 다만 장원이라고 해서 특별히 좋은 시책을 써서 급제한 것도 아니었는데, 청나라 시절 전시 등수는 상당히 의례적인 것으로, 내용보다는 필체를 매우 중요시했기 때문에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필체가 평범하면 좋은 등수를 받긴 어려웠다. 실제로 황제가 진사의 필체가 마음에 안든다는 이유로 등수를 강등시킨 사례가 적지 않다. 왜냐하면 상위등수진사들은 관례적으로 한림원에서 황제나 내각, 대신들 명의의 문서를 필사해야 하는데 필체가 떨어지면 조정의 체통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3.1.2. 팔고문(八股文)[편집]


또 다른 폐해는 팔고문(八股文) 을 들 수 있는데, 송나라 시절부터 만들어진 문형으로, 어릴적부터 과거 시험을 준비하다보니 경전을 외우는 것은 기본이요, 모든 글을 팔고문식으로 연습하는 게 우선순위였다. 경학은 당연히 뒷전이었고, 중국문학 발전에도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20세기 들어 중국의 문호 루쉰신문화운동 당시 척결 1순위로 꼽을정도... 명청 시대 당시에도 나라 다스리는데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은 모두가 인식하고 있었지만, 과거제도를 유지하는데 다른 대안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하던대로 계속 썼다.

팔고문은 유례는 찾기 어려우나 과거제도의 발달과 연관이있다. 과거 제도가 정착되면서 응시자 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는데 채점자는 기껏해야 출제자와 부시험관 한 두 명에 불과하고, 채점 기간은 길어봐야 십수일에 불과한데다가[18] 수험생들의 답안지를 일일이 읽으며 채점하기 어렵기 때문에 여러 문제중에 앞페이지 한장 정도를 보고, 심한 경우에는 늦게 도착한 답안은 아예 보지도 않고 낙방시키는 지경에 이르자 수험생들은 자신의 답안지가 시험관의 눈에 띄고 채점 기준에 맞추려 규격화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채점자가 읽고 채점하기 편하도록 만들어놓은 정형화된 답안이 팔고문으로 문학성이나 내용생 시책은 별 볼일 없고 장원 급제자의 답안지라도 그리 좋은글이 매우 드물어 문인들은 보통 자신의 팔고문은 자신의 문집에서 제외하는게 보통이었다.

즉, 팔고문은 어떤 형태의 문체나 문학 형태가 아니라 좋은 답안지 작성 모범사례에 가까운 것이었다. 8단계로 나누어서 글을 쓰는데, 오늘날 글을 쓸 때 기-승-전-결, 서론-본론-결론으로 쓰라고 하는 것처럼, 팔고문 역시 "과거 시험에서 답안을 작성할 때 이렇게 작성하면 고득점을 받을 수 있다"는 하나의 틀인 것이다. 먼저 1)시험 문제를 해석하고, 2)문제에 담긴 출제자의 의도를 분석하며, 3)출제자의 의도를 자신의 주장과 연결시키고, 4)자신의 주장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지극히 논리적인 글쓰기 방법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다음에 오는 5, 6, 7, 8 단계가 문제가 되는데, 이걸 오늘날로 치면 권위있는 텍스트를 각주로 인용해서 나의 주장을 뒷받침한다가 된다. 고전에서는 이를 두고 성인이 대신 말하게 한다고 하는데, 과거시험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텍스트라고 하면 사서오경뿐이고, 여기에서 시험문제와 관련이 있을만한 텍스트를 골라 뽑을 수 있는 양도 한정되어 있었다.[19] 게다가 오늘날 논술학원 등에서도 강조하는 것처럼, 글의 전체 분량이 알맞게 배분되어 있어야 고득점을 받기 때문에, 앞에 나온 1,2,3,4 단계와 5,6,7,8 단계를 적절한 분량으로 맞추는 것이 문제였다. 따라서 주장을 뒷받침하는 텍스트를 선정하기보다는 알맞은 분량의 텍스트를 완성하는 것이 훨씬 중요해졌고, 결국 이 단계의 답안을 작성할 때는 서로 대구를 이루어 고정된 형식으로 고착되었다. 이게 마치 8개의 다리를 늘어세운 것 같다고 하여 팔고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결국 과거시험에서 고득점을 받기 위해선 양질의 텍스트를 고르기 위한 책읽기<<<<<답안지의 분량을 맞출 수 있는 글쓰기 연습이 되어버렸다. 팔고문으로 인해 공부를 위한 학문이 아니라 시험을 위한 학문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3.2. 진사 출신 인물(중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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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또가 담이 약해 귀신에게 놀라 죽었다.'라는 전설의 실체가, 향반이 맘에 안드는 수령을 제거하고 올린 변명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2] 수나라 시대에 고려-조선이나 명청시대 형태의 과거가 실제로 실시 된적이 없다. 구품 중정제의 단점을 보완하려 천거후 책시(策試)라고 불리는 일종의 시험을 실시한것일 뿐 한나라때 있던 찰거 제도를 다시 도입한 것이다.[3] 관원이 수재, 거인을 체포하려면 지방 향시를 관리하는 학정(學政)에게 미리 동의를 받아야 했다. 사실상 그보다 낮은 관헌은 거의 무시당할 수 있다. 특히나 학정은 한림학사를 지낸 진사 출신 중에서도 상위 엘리트들이 임명되는게 관례라 당연히 대부분들의 지방관들이 간섭 할 수 없다.[4] 예는 아래로 미치지 못하고 형은 위로 미치지 않는다. 예법은 일반 평민이 지킬 필요가 없고, 사대부들은 평민들이 받는 형벌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 관원들은 마땅히 수재 거인에게 예를 갖춰야 했고 무례할 경우 수재 거인들이 관원의 상관에게 탄원할수 있고 처벌 받을수 있었다.[5] 당시 주일본 대청국 공사는 진사 출신 하여장(何如璋)이고, 황준헌은 진사 출신이 아니기에 부사(副使) 였다.[6] 대표적으로 명나라 유신(遺臣)들을 대상으로 박학홍유과(博學鴻儒科)[7] 명나라 시절엔 고위직에 오르는 것 까진 어려웠지만, 청나라에선 옹정제시절, 전문경이라는 거인 출신 납연관이 종1품 하남총독직에 임용되었는데, 워커홀릭 옹정제에게 성실함으로 점수를 따서 가능했다. 옹정제는 진사 출신 한인 문관들이 과거 시험관의 문하생이랍시고 뭉쳐다니는 패거리 문화를 경멸했기 때문에, 이들을 까는 용도로 전문경을 밀어줬다는 분석도 있다.[8] 고려 조선으로 치면 성균관[9] 거인이 회시에 급제하면 회시와 전시 1개월 사이에 '공자'신분이지만 실제론 진사와 같다.[10] 명승고적이나 국가의 중요시설, 훌륭한 업적 등을 기리기 위하여 세우는 문을 패방(牌坊)이라 한다. 파일:패루.png
남송(南宋)의 장진손(張鎮孫, 1238~1279)은 송대(宋代) 유일의 광둥성 남해(南海) 출신 장원(壯元)으로 그의 패방이 있던 진통리(泰通里)라는 지명이 패방의 이름을 따 장원방(狀元坊)으로 바뀌어 버렸다.
파일:장원방.jpg
안타깝게도 당시의 장원방은 남아있지 않다.승리의 홍위병
[11] 중국어 위키 참조[12] 바이두 백과사전 참조. [13] '명나라 초기는 90여명에서 450여명까지 매시험 마다 달랐으나 명나라 성화 연간부터 300~400여명.[14] 황후가 시집올때 입궁시에도 사용한다. 그외에는 대전 정문은 황제 전용[15]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에 '도통'을 따지는게 중요해지면서 과거 합격 이전, 또는 아예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서도 산림으로써 사문을 중시하게 된 것이지 고려시대에는 과거를 담당한 '지공거'를 진짜 스승으로 모시고 지공거를 중심으로 학맥이 형성되는 방식이었다. 태종대에 좌주문생 제도의 폐단이 누차 지적되어 폐지되면서 바뀌어간 것.[16] 시험 당일 제출받은 답안지는 토씨 하나 안 바꾸고 전문 필사인력의 정형화한 필체로 통일하였으며 필사 작업에만도 몇날 몇일이 들었다.[17] 고려 시대 문생과 좌주의 관계인 지공거를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전시제도가 생겨난 이유도 군주를 좌주의 위치로 만들어서 붕당의 폐해를 줄여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로 인해 군주의 전제권은 강화되었지만. 붕당의 폐해까지는 막지 못했다.[18] 명청시대에는 약 15일을 주었는데 답안지는 필체를 알아보는걸 방지하기 위해 필사과정을 거치므로 시험관들은 대략 7~8일 정도를 허송세월 하며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19]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경전에 대한 주자의 견해만이 인정되었다.[20] 두 형제의 아버지 소순은 두 아들이 합격 했음에도 끝내 일생 동안 불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