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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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의 인물에 대한 내용은 진식(삼국지) 문서
陳寔
(104 ~ 186. 9. 16)
후한 말의 인물로 자는 중궁(仲弓).
예주 영천군 허현 사람으로 한미한 집안 출신이며, 어려서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현리가 되었다가 뜻이 있어 글을 좋아해 현령이 기특하게 여겨 태학에서 공부하게 했으며, 또다시 현리가 되어 양성의 산 중에 숨었다가 살인이 의심되어 고문받았다가 독우가 되자 자신을 고문한 사람을 불렀다. 이후 서문정장이 되었다가 종호의 추천으로 군의 공조가 되었는데, 이 때 후람이 영천태수 고륜에게 어떤 사람을 관리로 삼아달라고 요청해 고륜이 문학연으로 임명했다.
진식은 그가 문학연으로 적당한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고륜에게 찾아갔는데, 고륜이 후람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 해서 진식이 밖에서 임용하겠다고 요청한 것처럼 하면 덕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라 했고 고륜은 이를 따랐다. 이로 인해 향론에서는 그가 천거되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된 것을 괴이하게 여겼지만 진식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후 문희의 현령으로 임명했다가 태구의 현장이 되었으며, 그의 덕풍과 교화가 널리 퍼져 진식을 그리워 해 국경을 넘어 사람들이 모이자 진식은 국경을 넘기 전에 나의 말을 들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향리에서 일처리를 공평히 해 백성들이 송사가 있으면 그에게 판결을 청했고 진식은 시비곡직을 사례를 들어 깨우쳐 주었기 때문에 그를 원망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패상이 위법한 징세를 하자 인수를 풀고 떠났으며, 168년에 두무가 부르자 대장군연이 되었다가 장양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영천의 명사들은 아무도 참배하지 않았지만 진식만은 참배했고 이후 금고되었다가 169년에 당인들이 죽을 때 진식은 살아남았다. 금고가 풀리자 사도 원외가 불렀지만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고 거부했으며, 삼공의 자리가 비울 때마다 진식의 이름이 늘 거론되었다고 한다.
187년에 집에 죽을 때 3만 여명이나 조문하러 왔다고 하며, 그가 죽게 되자 사람들은 형벌을 받을 지언정 진군(陳君)의 지적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탄식했다. 조정에는 그가 죽자 문범선생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양사와 진탐 등은 매번 공경으로 임명될 때마다 동료 관원들이 축하해줬지만 이 둘은 진식이 고위직에 오르지 못한 것을 탄식하면서 자신들이 먼저 요직에 오른 것을 늘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순숙, 종호, 한소 등과 함께 현장을 지낸 적이 있어 가는 곳마다 후덕한 정치를 베풀어 칭송을 들었고 이 네 사람을 영천의 네 현장이라 불렀다.
아들로는 진기, 진심 등으로 이 두 사람의 아들들이 난형난제가 유래된 인물들이다.
또한 진식은 양상군자라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된 인물이다.
세설신어에는 순숙의 집을 찾아갔을 때의 일화와 태구의 현령으로 있을 때 관리를 처벌한 일화, 강도보다 아이를 죽인 자를 먼저 처벌하는 일화가 있다.
세설신어에서 나온 순숙의 집을 찾아간 이 이야기는 속진양추에서도 나온다.
자치통감 신동준 역에는 진실(陳實)이라고 잘못 나왔다.
훗날 진나라를 세우게 되는 진패선은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 KQ 엔터테인먼트 보이그룹 멤버에 대한 내용은 진식(xikers) 문서
참고하십시오.1. 개요[편집]
陳寔
(104 ~ 186. 9. 16)
후한 말의 인물로 자는 중궁(仲弓).
2. 생애[편집]
예주 영천군 허현 사람으로 한미한 집안 출신이며, 어려서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현리가 되었다가 뜻이 있어 글을 좋아해 현령이 기특하게 여겨 태학에서 공부하게 했으며, 또다시 현리가 되어 양성의 산 중에 숨었다가 살인이 의심되어 고문받았다가 독우가 되자 자신을 고문한 사람을 불렀다. 이후 서문정장이 되었다가 종호의 추천으로 군의 공조가 되었는데, 이 때 후람이 영천태수 고륜에게 어떤 사람을 관리로 삼아달라고 요청해 고륜이 문학연으로 임명했다.
진식은 그가 문학연으로 적당한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고륜에게 찾아갔는데, 고륜이 후람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 해서 진식이 밖에서 임용하겠다고 요청한 것처럼 하면 덕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라 했고 고륜은 이를 따랐다. 이로 인해 향론에서는 그가 천거되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된 것을 괴이하게 여겼지만 진식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후 문희의 현령으로 임명했다가 태구의 현장이 되었으며, 그의 덕풍과 교화가 널리 퍼져 진식을 그리워 해 국경을 넘어 사람들이 모이자 진식은 국경을 넘기 전에 나의 말을 들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향리에서 일처리를 공평히 해 백성들이 송사가 있으면 그에게 판결을 청했고 진식은 시비곡직을 사례를 들어 깨우쳐 주었기 때문에 그를 원망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패상이 위법한 징세를 하자 인수를 풀고 떠났으며, 168년에 두무가 부르자 대장군연이 되었다가 장양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영천의 명사들은 아무도 참배하지 않았지만 진식만은 참배했고 이후 금고되었다가 169년에 당인들이 죽을 때 진식은 살아남았다. 금고가 풀리자 사도 원외가 불렀지만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고 거부했으며, 삼공의 자리가 비울 때마다 진식의 이름이 늘 거론되었다고 한다.
187년에 집에 죽을 때 3만 여명이나 조문하러 왔다고 하며, 그가 죽게 되자 사람들은 형벌을 받을 지언정 진군(陳君)의 지적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탄식했다. 조정에는 그가 죽자 문범선생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3. 일화와 여담[편집]
양사와 진탐 등은 매번 공경으로 임명될 때마다 동료 관원들이 축하해줬지만 이 둘은 진식이 고위직에 오르지 못한 것을 탄식하면서 자신들이 먼저 요직에 오른 것을 늘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순숙, 종호, 한소 등과 함께 현장을 지낸 적이 있어 가는 곳마다 후덕한 정치를 베풀어 칭송을 들었고 이 네 사람을 영천의 네 현장이라 불렀다.
아들로는 진기, 진심 등으로 이 두 사람의 아들들이 난형난제가 유래된 인물들이다.
또한 진식은 양상군자라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된 인물이다.
세설신어에는 순숙의 집을 찾아갔을 때의 일화와 태구의 현령으로 있을 때 관리를 처벌한 일화, 강도보다 아이를 죽인 자를 먼저 처벌하는 일화가 있다.
- 순숙의 집을 찾아갈 때의 일화
세설신어에서 나온 순숙의 집을 찾아간 이 이야기는 속진양추에서도 나온다.
- 태구의 현령으로 있을 때 관리를 처벌한 일화
- 강도보다 아이를 죽인 자를 먼저 처벌하는 일화
자치통감 신동준 역에는 진실(陳實)이라고 잘못 나왔다.
훗날 진나라를 세우게 되는 진패선은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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