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호우/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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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0년 7~8월 서울 대폭우[편집]


7월 초부터 강력한 장마전선의 영향 탓인지 7월 1일을 제외한 상순 전체가 비가 내렸으며, 7월 7일에는 110.4mm를 기록하여 누적 일강수량이 세 자릿 수를 기록했다. 나머지 날들도 20~50mm의 꽤 많은 비가 연이어 내렸기 때문에 홍수 피해가 상당했다. 이후 기온이 올라 중순에는 폭염이 나타나기도 했으나 중하순에 접어들면서 다시 서울에 폭우를 뿌려 7월 19일의 일강수량이 104.0mm로 7월 초만큼의 매우 많은 비가 내렸다. 7월 하순은 큰 더위 없고 비도 거의 내리지 않는 평범한 여름 날씨를 보였지만 8월이 시작되는 순간 엄청난 폭우가 내리기 시작, 1일부터 3일까지 535.7mm의 폭우가 집중되었다. 8월 2일에는 서울에서 하루동안 무려 354.7mm가 내려 서울의 일강수량 순위 역대 1위에 올랐으며 공식 기록으로는 무려 100년 이상 깨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2022년 중부권 폭우 사태로 인해 서울 동작구에서 381mm의 강수량을 찍으며 기록을 경신했다. 물론 이는 비공식 기록이다.

2. 1925년 대홍수[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을축년 대홍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1936년 강원권 대홍수[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병자년 포락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1972년 대홍수[편집]


관련글

태풍 베티가 남중국으로 상륙해 소멸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수증기를 공급하여 중부지방 전체에 집중호우를 뿌리게 되었다. 남한강 유역 제천군 일대가 특히 큰 피해를 입었으며 폭우에 의한 사망자는 550명으로 매우 많게 추정되었다.

이 해, 단양에서 생긴 사건이 시루섬 침수 사고이다

5. 1984년 9월 중부권 폭우 사태[편집]




1984년 8월 거대한 비구름을 몰고 한반도에 상륙한 태풍 '준'이 8월 31일부터 9월 2일까지 서울경기도, 강원도 등 중부지역에 시간당 50 mm의 집중호우를 뿌렸다. 9월 1일 하루만에 서울에 268.2 mm의 비가 내려 이 당시 기상 관측 이래 서울 1일 최고 강수량 기록을 경신했다. 또한 속초에도 이 때 3일간 650 mm의 비가 내리는 등 중부지역을 비롯한 전국 대부분 지역에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중부권 곳곳에서 200 mm가 넘는 폭우로 건물, 도로, 지하시설, 농경지 침수와 산사태가 발생했다.

이 당시 홍수는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남한이 홍수 피해를 입자 북한 측에서 적십자사 간 소통을 통해 쌀 5만 석, 천(옷감) 500 km, 시멘트 100 kt[1]과 기타 의약품 등 수해 구호물자를 보내줬고 이후 남북관계가 한층 훈훈해진 사례가 있다. 그 결과 1년 뒤인 1985년 9월에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 상호교환 행사가 서울과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이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였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선 97화에 이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다뤘는데 위의 침수 피해도 피해지만 하마터면 대한민국이 수해로 인해 역사가 안 좋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는 상황이 발생했다고 하며 그것이 소양강댐의 붕괴 위험 상황이라고 한다. 소양강댐은 한계 수위가 198m인데 이때의 폭우 사태로 197.79m까지 수위가 올랐다고 한다. 콘크리트 댐이라면 적어도 물이 넘쳐서 밖으로 나오는 방식으로나마 어찌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소양강댐은 자갈과 모래를 이용해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건설된 사력댐인 탓에 수위가 한계치를 초과하는 순간 댐 전체가 붕괴되며 모든 상류의 물살이 서울로 덮쳐들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의 침수 때문에 서울의 홍수재난센터에서 침수의 수위 때문에 방류 허가를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양강댐의 수위가 고작 0.2m~0.3m 밖에 안남았단 사실을 통보받음과 동시에 끝까지 버티다 댐이 무너져 모든 상류의 급물살이 서울 전역을 덮치는 걸 볼 건지 아니면 방류를 허가할 건지를 택하라는 가불기의 이지선다를 받고 울며 겨자먹기로 방류를 허가할 수 밖에 없었고 소양강댐 쪽에서도 간신히 허가를 받고[2] 5개의 수문을 전부 열었음[3]에도 수위가 잘 안내려가는 데다 발전소가 침수되는 상황까지 발생해서 수문이 도로 닫혀 수위가 올라갈 위험이 발생한 탓에 감전과 익사의 위험성을 무릅쓰고 악착같이 발전소의 수위를 걷어내기 위해 버티면서 그야말로 눈물나는 수위 조절에 총력전을 다해야 했다고 한다.

6. 1987년 7월 수도권 폭우 사태[편집]


1987년 7월 27일에 서울과 인천을 중심으로 수도권 곳곳에서 200 mm가 넘는 폭우가 쏟아졌는데 서울은 294.6 mm, 인천이 302.5 mm 비가 엄청나게 내려서 결국 수압을 못 이긴 중랑천, 안양천, 탄천 등 인근 지류 하천의 수문과 옹벽이 죄다 터지면서 강물이 범람했다. 서울은 294.6 mm, 인천이 302.5 mm로 비가 엄청나게 내려서 1945년 해방 이후 처음으로 찾아온 가장 강력하고 혹독했던 홍수로 기록돼있다. 그러나 수도권 치수(治水) 시스템의 소홀과 일기예보의 오보 등으로 피해를 키웠기에 대표적인 인재(人災)로도 꼽힌다.

을축년 대홍수 이후 62년 만에 한강 수위가 10 m를 넘었고 그 결과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지역들은 엄청난 비로 인한 흙탕물로 가득찬 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특히 풍납동, 성내동, 망원동 등은 웬만한 집이 대부분 침수됐고 서울의 모든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까지 휴교령이 내려졌다.[4]

실제로 한강이 범람하여 영등포역용산역 일대까지 물이 가득 차올랐었다 당시 잠수교는 13.70 m란 수위를 기록했는데 이 기록은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이 홍수로 20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는데 그 중 서울에서만 10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인명피해는 사망 189명, 실종 150명. 또한 침수된 주택의 수는 2만 채를 훌쩍 넘어섰다. 전국적으로 추산된 재산피해는 2022년 기준 화폐가치로도 막대한 금액인 2502억 원.

1984년 수도권 폭우 당시 정부와 서울시 당국은 '천재'라고 주장했고, 이보다 더 큰 피해가 발생한 이번 폭우에 대해 똑같이 책임을 회피한 탓에 주민들의 혈압을 오르게 만들었다. 특히 가장 큰 피해를 두 번이나 받은 망원동 주민들이 시 당국과 수문 시공사 현대건설 등을 상대로 소송을 벌여 1987년 1심을 비롯해[5] 1990년 3월 2심, 동년 8월 대법원 상고심[6]에 이르기까지 전부 승리를 거머쥐었다.(망원동 수재사건) 이들이 승리하는 데에는 인권변호사 조영래의 도움이 있었다.

이 당시 가장 큰 문제점은 서울의 치수 시스템이 주먹구구식으로 움직였다는 점과 일기예보가 엉터리였다는 점이었다. 특히 7월 27일 5시부터 1시간동안 50 mm에 가까운 폭우가 쏟아졌는데 그때까지 서울에는 어떠한 기상특보도 발효되지 않았고 물폭탄이 왕창 쏟아지고 난 뒤에야 호우경보가 발령돼 논란이 됐다. 한강 개발공사가 1982년부터 진행중이었다가 이때 1987년의 폭우로 더 속도를 내게된다.

1984년의 폭우나 1990년의 폭우도 피해가 컸지만 1987년의 폭우는 도시가 마비가 될 정도로 비가 폭포수처럼 내려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많은 편이다. 모 선생님의 수업 도중, 이 때 경험담을 말씀해 주셨는데 용산역에 내려보니 대합실까지 물이 차올랐고, 집이 한남동이었는데 집 근처에 가보니 일대가 다 잠겨서 동네 아저씨가 배를 타고 다니더라는 믿지 못할 이야기도 했다. 수능 대비 강의에서는 버스 좌석까지 물이 차서 기사 아저씨가 더는 못 가겠다며 전부 하차하자고 말했고, 집에 가는 길을 벽을 짚으며 갔다고 한다. 동네에 갔더니 아저씨들이 배를 타며 자기를 부르고 한강 수위가 홍수 수위와 같아 친구네 약국도 잠긴데다가 자신의 집은 어촌이 되었다고 한다.


7. 1989년~1991년 한반도 폭우 사태[편집]




1989년 7월 25일에 광주직할시(현 광주광역시)에서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비가 내렸는데 335.6 mm가 되는 비가 쏟아져서 광주직할시는 흙탕물로 도시를 뒤덮었고 도로, 건물, 지하시설 침수는 당연하고 여기에 하천 범람까지 겹치면서 전남의 대도시였던 광주직할시는 이번 폭우로 도시 기능이 마비가 되어서 혼란을 겪었다.[7]

1990년 9월 중국에 상륙한 제17호 태풍 '도트'가 서울 상공을 통과하는 저기압과 연결되면서, 9월 9~12일에 걸쳐 한강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에 집중호우가 내렸다. 이 기간 동안 경기도 수원시에는 529.5 mm, 이천군에는 581.2 mm의 강우량이 기록되었다. 주로 경기 남부를 중심으로 해서 집중호우 피해가 발생했다.

가장 큰 피해는 한강 하류 부근 경기도 고양군 일대에서 발생했다. 원래 고양 일대는 수도권에서도 손꼽히는 저지대라서 여름이 되면 홍수가 잦은 지역이었는데 이 당시 폭우로 한강의 수위가 기록적 수준으로 높아지면서[8] 고양군 지도읍 신평리(現 고양시 덕양구 신평동)의 한강 제방이 무너지는 바람에 평야 지대에 위치한 능곡과 일산(신도시 개발 이전의 옛 일산) 등은 물론 서울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까지 물에 잠겨[9] 5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한강의 일부 지류에서도 홍수가 발생하여[10], 안양천 쪽의 광명시왕숙천 쪽의 구리시 등 수도권 곳곳이 침수 피해를 입었다. 왕숙천에서 많은 양의 부유물이 떠내려와 당시 건설 중이던 강동대교를 덮쳐, 교량 일부가 유실되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 때 고양군 지역의 한강 제방을 견고하게 복구하면서 고양과 파주 등 경기도 서북지역 개발에 대비하고자 제방 위에 간선도로를 지었는데 이것이 현재의 자유로다.

1990년 연강수량은 2,355mm로 무려 서울 기준 1위이다.

1991년에는 강원도 춘천시에서 7월 19일부터 7월 25일까지 비가 내렸는데 특히 마지막 날인 7월 25일에 308.5 mm가 되는 비가 쏟아져서 춘천에서 도로, 건물, 지하시설이 많이 침수가 되었고 영서 지역이 산이 많고 도로가 고개와 커브길로 이루어져 있어서 산사태로 인한 도로 붕괴가 발생하며 교통망이 완전히 마비가 되는 등 피해를 겪었다.


8. 1996년 7월 폭우[편집]


1996년 7월 26~28일[11]에 걸쳐 경기도 북부(파주시, 연천군 등)와 강원도 북부(철원군, 화천군, 춘천시, 인제군 등)에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심지어 북한 지역의 황해남도, 황해북도, 강원도도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철원군의 경우 7월 26~27일 단 2일만에 492.8 mm의 폭우가 쏟아졌다.

아무래도 이 일대가 전방지대라 군부대 쪽에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는데, 특히 군부대가 있는 곳은 대체로 산골짜기 쪽이 많은지라 다수의 군부대 막사가 산사태로 매몰되는 참사가 발생했다. 사망·실종된 군인 수만 60여 명에 달했다.

당시 KBS 2TV에서 방송되었던 병영드라마 신고합니다도 이 수해로 인해 촬영에 차질을 빚었다. 특히 이 드라마의 주요 세트장 중 하나이던 '할머니집'이 수해로 유실되었다. 이 드라마 13회에서 부대가 비 피해를 입는 장면과 할머니집이 유실되어 탁주군단장 할머니(김지영 분)와 고은실(이혜영 분)이 오열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뿐만 아니라 집중호우가 한탄강임진강으로 흘러들었고, 한탄강 하류에 있던 작은 규모의 연천붕괴되면서 임진강 하류의 문산 일대를 직격했다. 저지대에 시가지가 있던 문산은 3 m 깊이로 물에 잠겨버렸고, 시가지 전체가 거의 초토화되는 피해를 입었다.

붕괴된 연천댐은 철거하고, 현재는 그보다 약간 상류에 훨씬 더 큰 규모의 한탄강댐을 건설하였다.(2016년 완공). 다만 댐이 완공될 때가 되니 이번엔 몇 년째 극심한 가뭄이 이어지고 있어서 본래 홍수 조절만을 위해 건설되는 댐의 용도를 가뭄 대비도 가능한 다목적댐으로 바꾸어 달라는 요구가 있다.

여담으로 이 폭우 당시 코미디언 조정현이 자원봉사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 폭우로 북한 역시 큰 피해를 입었는데 공식 사망자만 116명에 달하며 이재민은 327만 명에 달했다. 특히 황해도 일대의 경작지들이 폭우로 침수되어서 북한의 곡식 생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안그래도 고난의 행군으로 악화되던 북한의 식량사정에 일격을 가하게 되었다.

9. 1997년~2000년 수도권 폭우 사태[편집]


1997년 8월 4일에 인천광역시 일대를 중심으로 최대 260.8 mm에 달하는 기습적인 폭우가 내려 산사태와 홍수가 발생, 인천광역시에서 도로, 건물, 지하시설에 침수가 많이 발생했다. 하지만 이 피해는 시작에 불과했다.[12]

이듬해인 1998년 수도권에선 7월 31일부터 이후 8월 한 달 내내 집중호우는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200 mm이상 비가 쏟아져서 수도권에 엄청난 비 피해가 발생했다. 특히 그 중에서 서울의 경우, 8월 8일에는 무려 332.8 mm의 강우량을 기록하는 등[13] 거의 13일간 매일같이 비가 쏟아졌다. 특히 8월 8일에는 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져서 1987년 이후 11년만에 서울의 3대 하천인 중랑천, 안양천, 탄천이 범람하였고 한강이 범람 위기에 놓이는 등 서울을 비롯해서 수도권 도시내에 침수와 산사태 피해가 잇달았다. 특히 엄청난 폭우가 쏟아진 강화군 양도면 진강산에서는 산사태가 일어나서 당시 개교 3년차에 불과했던 인천가톨릭대학교 강화캠퍼스(신학대학)가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 해 8월 서울의 누적 강수량은 1237.8 mm이며 평년값으로 서울의 1년 강수량과 맞먹는 수준이다. 또한 그 밖의 달도 비가 잦으며 일조시간도 적어 이 해 서울의 연 강수량은 2349.1 mm이다. 한국 전체에 대략 20일까지 구름이 엄청 발달하는 모습이 담겨있으며, 1998년의 폭우 피해는 태풍 예니의 피해를 합쳐서 사망 및 실종 324명, 재산피해 1조 2487억 원을 기록했다.] 또한 1998년 여름의 잦은 폭우로 서울에서 폭염일수도 없었다.

1999년에는 수도권에서 7월 21일부터 8월 3일까지 비가 내렸는데 여기에 태풍 올가의 영향을 받으면서 200 mm 이상을 넘는 비가 내렸다. 특히 경기 북부 및 강원 영서 중북부 지방은 폭우로 초토화가 되었고 문산 시가지는 이번에도 홍수로 물바다가 되었으며, 결국 견디다 못하여 파주시는 2002년에 문산역과 시가지 일부를 5 m 높이로 올려버렸다. 또한 인천에서 255.6 mm라는 강우량과 서울에서 261.6 mm라는 장대비가 쏟아져서 역시 도로, 건물, 지하시설 침수와 산사태가 연이어 발생했다. 심지어 이때 태풍 1999년 제7호 태풍 올가가 북상하면서 설상가상이 되는 사태가 되어버렸는데, 당시 영서 북부 지방인 경기도 가평군, 강원도 춘천시, 화천군, 철원군 일대 또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2000년에는 7월 22일에 수원에서 333.2 mm가 되는 강수량이 쏟아져서 수원 지역 곳곳에서 침수 사례가 많이 발생했고 도로, 건물, 지하시설의 상당수가 물바다가 되었고 다른 경기 남부지역들도 엄청난 비로 인해 하천 범람이나 농경지 침수, 산사태가 많이 발생해서 초토화가 된 곳이 많았다.

수도권이 연이은 폭우로 흙탕물로 난장판이 될 동안에 지방에선 20 0 mm 이상 폭우가 쏟아진 곳이 많지 않아서 피해가 덜했지만 98년 지리산 야영객과 주민 등 103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지리산 폭우 참사가 있었고 1999년에 마산과 창원에서 7월 30일에 268.0 mm이라는 비와 2000년에 군산에서 8월 26일에 310.0 mm가 되는 비가 쏟아져서 마산, 창원, 군산, 서천 곳곳에서 도로, 건물, 지하시설이 침수되고, 하천 범람과 농경지 침수, 산사태가 연이어 발생하면서 지방이라고 해서 피해가 적은 것은 아니었다.

이때의 집중호우는 특히 좁은 지역에 시간당 100 mm에 가까운 엄청난 폭우가 단시간 쏟아지는 특징을 보여 게릴라성 집중호우라는 신조어를 낳기도 했다. 참고 사망자 중에는 한국일보 편집부 기자 김석진도 있었다. 동일한 시기에 중국 양쯔강 일대도 기록적인 폭우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쪽에 폭우를 쏟아낸 비구름대가 편서풍을 타고 한반도까지 이동하며 한국에도 폭우를 뿌린 것이다. 다행히도 98~99년과 달리 서울은 비가 심하지는 않았다. 2000년 7월도 서울은 비가 매우 적었다.

10. 2002년 8월 강원권 폭우[편집]


8월 3일부터 8월 8일까지 중부 지역에 기록적인 폭우가 내려 수많은 피해가 발생했는데 그 중에서 8월 폭우는 강원도의 피해가 심각했다. 원주305.0 mm라는 기록적인 수치의 폭우가 내려 가장 막대했으며 영서 지역에서 도로, 건물, 지하시설, 농경지에 대한 침수가 많이 발생했다. 더군다나 영서 지역은 산이 높고 험준할 뿐더러 많은 편이라서 이에 따른 산사태도 발생해서 도로가 산에서 내려온 흙과 나무, 바위 덩어리가 덮치며 막히는 바람에 교통망이 마비가 되었다. 이후 태풍 루사로 인해 대관령에 721.5mm, 강릉에 870.5mm[14]의 비가 내려서 영동 지역에 피해 주는 등 강원도에서 집중호우로 피해를 입은 지역이 많았다.


11. 2006년 7월 폭우[편집]


2006년 7월은 매일같이 비가 내렸는데 12일에 고양시에서 400mm에 가까운 비가 내렸다. 일조시간도 매우 적다 보니 2020년 8월보다도 더 심각하다.


12. 2010년 9월 폭우 사태[편집]


2010년 9월 추석 무렵에는 앞서 서술한 1990년 수준의 폭우가 내렸는데, 2010년은 시작부터 심상치 않은 기록을 나타냈다. 이는 바로 엘니뇨 모도키라는 변종 엘니뇨로 이 때문에 2010년 1월 이후 5월까지 심한 이상 저온이 이어지고 잦은 비로 일조시간이 부족했다. 2010년 3월 133시간 2010년 4월 160시간을 보이면서 초이상저온에 냉해가 심각했다. 그래도 6월은 맑고 더웠으며 7월은 비교적 마른장마로 강수량이 적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흐린 날만 지속적으로 이어지면서 일조시간이 90시간 안팎으로 매우 짧았다. 남부지방의 경우 7월 초중순에 폭우가 쏟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시작에 불과한 듯 하다. 2010년 8월 한 달 동안 서울특별시는 거의 매일같이 비가 내려 강수일수가 무려 24일로 1,3,8,9,17,19,21일을 제외하고 모두 강수가 기록되었으며 다른 지역과 달리 폭염이 덜하고 선선한 등 집중호우만 내리는 8월을 맞이했다. 서울 기준 8월 7일, 12일, 15일, 25일, 27~29일에 유난히 심각했다. 8월 23일, 처서를 기점으로 가을장마가 제대로 오면서 집중호우가 매우 잦았고 일조시간도 96시간으로 매우 적었다. 마치 10년 뒤의 폭우 사태를 연상시켰다. 또한 폭우가 아니라도 소나기가 잦았다. 그나마 9월 2일 곤파스와 9월 6~7일 말로 태풍은 비는 거의 안 뿌리긴 했다.

그러나 태풍 므란티가 소멸된 온대저기압의 영향으로 2010년 9월 9일부터 12일까지 장장 목, 금, 토, 일 4일동안 쉬지 않고 특히 야행성으로 강한 폭우가 왔다. 9~11일에는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폭우가 왔는데 2020년 7~8월처럼 거의 밤중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고 물난리가 나고 침수되었다. 물론 열흘 뒤쯤에 일어난 폭우에 묻히지만 200~350mm 가까운 폭우가 났고 한강이 다 잠겨서 잠수교도 통제되고 밤마다 집중호우가 내려 특히 강화도는 9월 9일에 250mm가 내렸다. 12일에는 남부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남부 지방에 가을 폭우로 농사 피해를 주었다.

다행히도 13~18일에는 건조하더니 19일부터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후 2010년 9월 21일 수도권 지역에 갑작스런 폭우가 내려 큰 피해가 발생했다. 주로 서울, 인천, 경기도 부천 등 수도권 남서부 지역에서 집중호우가 시작되어 수도권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광화문 광장, 강남역 등 주요 도심지에서도 큰 피해가 속출하였다. 서울 전 지역에서 시간당 100mm가 넘는 비를 뿌리며 이날 하루 259.2mm의 집중호우가 내렸고 강남과 강서에 293mm, 마포에 280mm 등을 기록하며 위력적인 장대비가 내렸다. 당시 기준 9월 강수량으로는 1907년 관측 시작 이래 가장 많은 비가 내린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 폭우 사태는 2010년 추석 연휴 첫날 발생하여 연휴 분위기에 그야말로 찬물을 끼얹었는데, 서울 양천구 신월동, 목동 등 일부 저지대의 주택 1만 6천여 세대가 침수되어 추석 연휴를 준비하던 많은 가정에 큰 피해를 입혔다. 또한 2010년 추석은 수요일이어서 월요일과 금요일에 휴가를 내면 최장 8일을 쉴 수 있는 황금연휴 기간이었기 때문에[15] 아예 해외로 떠나 있는 상태에서 발생한 공실 피해도 많았다. 피해가 발생하여 급하게 귀국하거나 귀국하고 보니 집이 풍비박산이 나 있는 경우도 발생했다고.

특히 2010년 폭우 사태는 2011년 폭우 사태의 전조와도 같았는데, 도심지 침수가 본격적으로 문제시되어 하수 시설 확충이 지적된 첫 집중호우였다. 특히 강남 지역이 개발된 이래로 이렇게 광범위한 지역이 처참하게 침수된 건 1987년과 1998년에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인터넷이나 포털사이트가 없었던 시절로 볼 때 네티즌들 사이에 강남도 폭우 앞에 처참히 침수된다는 것을 보여주어 많은 충격을 안겨준 케이스가 되었다. 이 해부터 포털 사이트에는 매해 여름 폭우 때마다 강남역 침수가 키워드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폭우 앞에는 강남 고가 아파트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신분당선 공사 및 삼성타운 건설로 인한 기존 하수도 구조변경이 문제로 지적되며 시민단체들의 비판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강남 지역에서는 강남역 일대 이외에도 양재IC 인근의 염곡지하차도가 침수되어 일시적으로 교통이 통제되었고, 도심지역이 아닌 헌릉로 구간 비도심 지역의 저지대도 일부 침수되어 교통에 불편을 겪었으며, 대표적인 부촌으로 꼽히는 대치역 인근이 전면 침수되었다. # 그리고 다음 해인 2011년 우면산 산사태가 발생하게 되는 남부순환로 인근도 이 때 크게 침수되면서 # 사당역 사거리에서 교육연수원 인근 저지대 구간 교통이 한동안 통제되었고, 사당역, 방배역 등은 우면산 능선에서 흘러내려온 물로 큰 피해를 입어 2호선이 무정차 통과하기도 하였다.#

또한 광화문광장, 강서구청 사거리, 오류동역, 홍대입구역, 신용산역#, 군자역, 상일동 등# 1987년과 1998년에 집중호우로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서울 주요 도심지역들이 잇따라 침수되며 큰 피해를 입은 이후로 포털사이트가 발전한 시기에 네티즌들은 이 때의 폭우를 역대급 폭우라는 말을 붙이기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이렇게 서울의 주요 번화가 지하철역이 물에 잠기는 초유의 사태로 인해 지하철역의 폭우 대응이 미흡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면서, 이후 대부분의 서울 지하철역 출입구 주변에 홍수용 물막이 설비를 확충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뒤이어 2011년 발생한 더욱 큰 폭우와 역대급 재해로 인해 이슈의 크기로는 약간 묻힌 감이 있으나, 어쨌든 2010년대의 시작을 장식한 심각한 폭우 사태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큰 사건이었다.

13. 2011년 중부권 폭우 사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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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2014년 동남권 폭우 사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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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2016년 두만강 유역 대홍수[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2016년 두만강 유역 대홍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6. 2017년 중부권 폭우 사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2017년 중부권 폭우 사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7. 2017년 동남권 폭우 사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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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2018년 5월 중부권 국지성 폭우 사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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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2018년 강원 영동권 폭우 사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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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018년 한반도 폭우 사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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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전의 강원 영동권 폭우 사태랑 바로 이어서 일어나고, 태풍 솔릭이 지나간지 얼마 되지 않고 발생한 폭우라 피해가 상대적으로 더 크게 느껴졌다.

21. 2020년 한반도 폭우 사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2020년 한반도 폭우 사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2. 2022년 중부권 폭우 사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2022년 중부권 폭우 사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2.1. 2022년 8월 수도권 홍수[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2022년 중부권 폭우 사태/수도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3. 2023년 한반도 폭우 사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2023년 한반도 폭우 사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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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0 Gg[2] 처음에는 초당 700톤 까지 허가했다고 한다[3] 이때는 초당 5500톤을 방류했다고 한다[4] 김양수 작가의 웹툰 생활의 참견에 당시 홍수가 묘사된 것으로 보인다.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25613&no=154&week=mon&listSortOrder=ASC&listPage=6 김양수 작가의 나이, 당시 풍납동에 거주했던 사실로 보면 거의 이때의 홍수가 에피소드의 소재가 맞아보인다.[5] 판례 84가합5010 참고.[6] 선고 90다카10527.[7] 이후에는 한동안 잠잠해지다가 2004년 태풍 메기의 영향으로 광주광역시는 322.5 mm 라는 비가 쏟아져서 또 다시 1989년과 같은 피해를 겪었고, 광주광역시는 하수도와 하천, 제방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게 된다.[8] 을축년 대홍수 이후 무려 65년 만에 최고 기록을 경신하였고, 침수된 지역은 을축년 대홍수 당시와 정확히 일치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을축년 당시는 일제강점기라 제방 시설이 잘 안되어 있던 시기였는데도 이를 뛰어넘는 수위가 나왔으니 1990년의 홍수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참고로 한강 잠수교에 기록된 역대 최고 홍수위(13.7m)도 이때의 기록이다. 잠수교는 수위 5.5m에서 보행자와 자전거 통행을, 6.2m에서 차량 통행을 통제하고 심각 단계는 수위 6.5m인데 그보다도 7-8m나 높이 물이 찬 것.[9] 제방 붕괴 위치부터 구파발역까지의 거리는 직선으로 약 10km 정도 된다. 고양군의 거의 전 지역이 침수된 상황에서 지류인 창릉천까지 범람하면서 구파발역까지 물이 들어간 것이다.[10] 한강 본류가 불어나면서 지류의 흐름이 본류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범람하였다.[11] 당시 미국에서 1996 애틀랜타 올림픽이 열리고 있었지만 각 방송사의 메인뉴스에서 올림픽 소식보다 이 홍수 소식을 먼저 보도할 정도로 피해가 컸다.[12] 정작 이 해 8월 서울 강수량은 113.5mm로 매우 적었다.[13] 이 당시 서울과 2시간 거리인 강화군 일대에 8월 5일 11시~6일 11시 24시간 동안 무려 619.5 mm의 비가 내렸다. 서울은 그나마 내륙이였지만, 8월 8일의 폭우로 인해 엄청난 비 피해가 발생했다.[14] 역대 일강수량 1위이다.[15] 현재에 있었다면 9일 연휴이다. 대표적으로 2017년이며 이 때는 한글날이 연휴 다음 월요일이라 10일 연휴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