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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저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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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후베이성 남부의 지급시. 장강이 굽어지는 곳의 북안에 시가지가 형성되었으며 운하를 통해 동쪽의 한수이(한강)과 연결되어 있다. 도시명을 한국식으로 읽으면 바로 형주(荊州)인데, 삼국지로 유명한 형주 지방의 중심지였던 강릉이 이곳이며, 여러번 행정구역 변경과 통폐합을 거치다 1996년에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도시 인구는 약 650만 이며(2007), 동쪽으로 150km 가면 우한, 남쪽으로 100km 가면 창더, 서쪽으로 70km 가면 이창, 북쪽으로 150km 가면 샹양이 나오는 교통의 요지이다. 그밖에 동남 방면의 웨양도 멀지 않다.
약 6,000년전 이 곳에는 신석기시대 문화였던 다시 문화(大溪文化)가 일어난 곳으로 추정되며,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수도 영(郢)이 징저우에 위치해 있었다. 진(秦)의 소양왕이 명장 백기를 보내 영을 점령하게 하고 그 자리에 남군을 설치하면서 남군의 치소가 되었다.
후한말 삼국시대에 적벽대전과 형주공방전이 바로 이 징저우시 일대에서 일어났다. 적벽대전 이후 형주가 북형주와 남형주 둘로 갈려 북형주는 위가 남형주는 촉→ 촉오 분할→ 오 순으로 주인이 바뀌었는데 남형주의 중심지가 남군 강릉현 즉 현재의 징저우다. 북형주는 샹양(양양)이 중심지였다.
과거 강릉의 흔적은 현재 '징저우 고성'으로 시내에 남아있다. 길이 9km의 성곽은 관우에 의해 지어졌다고 하며 청대인 17세기 말에 보강되었다. 삼국지를 관광 마케팅으로 미는 도시인데 삼국공원이 있고 유관장 삼형제의 석상이 서 있어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다. 강릉 일대의 역사를 느끼고 싶다면 고대 미라가 전시되어 있기도 한 징저우 박물관을 추천한다. 징저우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장링현 (강릉)이 있는데 과거의 강릉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불분명하다.
이후 남북조 시대 후량의 수도였고 당나라 때에 남도(南都)로 불렸으며 5대 10국 시대 형남의 수도로 번창하기도 하였다.
이후 남송의 요충지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몽송전쟁 시기 강릉은 고달이 지키고 있었는데, 1275년 4월 아릭카야가 이끄는 원나라의 군대가 사마몽구가 지키는 사시진을 도성한 뒤 강릉으로 사절을 보내 항복을 요구하자 고달이 청양몽염, 주사손과 함께 강릉을 바치고 투항한다.
청일전쟁 이후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징저우 남쪽의 사스(沙市)가 개항되어 근대적 항구 도시로 발전하였으며, 중일전쟁 때에는 일본군에게 점령되기도 하였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시기에 들어서서 사스, 장링, 징저우를 합쳐서 징스시(荊沙市)를 만들었다가 1996년에 현 명칭으로 굳어진다. 징저우의 관할구인 인구 60만의 샤스(沙市)[3] 는 고대 초나라 시기에 수도 영의 내륙 항구로 건설되었는데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해 개항되었으며 1994년에 징저우에 시할구로 합병되었다. 비록 흡수되었지만 그 이름은 징저우 시내 동쪽에 있는 사스 공항(沙市机场)에 남아있다.
여담으로 징저우는 대한민국의 강릉시와 자매결연 도시이기도 하다.[4] 후베이성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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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국 후베이성 남부의 지급시. 장강이 굽어지는 곳의 북안에 시가지가 형성되었으며 운하를 통해 동쪽의 한수이(한강)과 연결되어 있다. 도시명을 한국식으로 읽으면 바로 형주(荊州)인데, 삼국지로 유명한 형주 지방의 중심지였던 강릉이 이곳이며, 여러번 행정구역 변경과 통폐합을 거치다 1996년에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도시 인구는 약 650만 이며(2007), 동쪽으로 150km 가면 우한, 남쪽으로 100km 가면 창더, 서쪽으로 70km 가면 이창, 북쪽으로 150km 가면 샹양이 나오는 교통의 요지이다. 그밖에 동남 방면의 웨양도 멀지 않다.
2. 역사[편집]
약 6,000년전 이 곳에는 신석기시대 문화였던 다시 문화(大溪文化)가 일어난 곳으로 추정되며,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수도 영(郢)이 징저우에 위치해 있었다. 진(秦)의 소양왕이 명장 백기를 보내 영을 점령하게 하고 그 자리에 남군을 설치하면서 남군의 치소가 되었다.
후한말 삼국시대에 적벽대전과 형주공방전이 바로 이 징저우시 일대에서 일어났다. 적벽대전 이후 형주가 북형주와 남형주 둘로 갈려 북형주는 위가 남형주는 촉→ 촉오 분할→ 오 순으로 주인이 바뀌었는데 남형주의 중심지가 남군 강릉현 즉 현재의 징저우다. 북형주는 샹양(양양)이 중심지였다.
과거 강릉의 흔적은 현재 '징저우 고성'으로 시내에 남아있다. 길이 9km의 성곽은 관우에 의해 지어졌다고 하며 청대인 17세기 말에 보강되었다. 삼국지를 관광 마케팅으로 미는 도시인데 삼국공원이 있고 유관장 삼형제의 석상이 서 있어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다. 강릉 일대의 역사를 느끼고 싶다면 고대 미라가 전시되어 있기도 한 징저우 박물관을 추천한다. 징저우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장링현 (강릉)이 있는데 과거의 강릉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불분명하다.
이후 남북조 시대 후량의 수도였고 당나라 때에 남도(南都)로 불렸으며 5대 10국 시대 형남의 수도로 번창하기도 하였다.
이후 남송의 요충지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몽송전쟁 시기 강릉은 고달이 지키고 있었는데, 1275년 4월 아릭카야가 이끄는 원나라의 군대가 사마몽구가 지키는 사시진을 도성한 뒤 강릉으로 사절을 보내 항복을 요구하자 고달이 청양몽염, 주사손과 함께 강릉을 바치고 투항한다.
청일전쟁 이후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징저우 남쪽의 사스(沙市)가 개항되어 근대적 항구 도시로 발전하였으며, 중일전쟁 때에는 일본군에게 점령되기도 하였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시기에 들어서서 사스, 장링, 징저우를 합쳐서 징스시(荊沙市)를 만들었다가 1996년에 현 명칭으로 굳어진다. 징저우의 관할구인 인구 60만의 샤스(沙市)[3] 는 고대 초나라 시기에 수도 영의 내륙 항구로 건설되었는데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해 개항되었으며 1994년에 징저우에 시할구로 합병되었다. 비록 흡수되었지만 그 이름은 징저우 시내 동쪽에 있는 사스 공항(沙市机场)에 남아있다.
3. 여담[편집]
여담으로 징저우는 대한민국의 강릉시와 자매결연 도시이기도 하다.[4] 후베이성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피해를 입었다.
[1] 2016년에 완성했으며 이곳에선 중국 최대의 관우상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이 동상의 디자인을 맡은 사람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마스코트 디자인을 맡은 한메이린(韓美林)이다.[2] 그러나 300억원을 들여 건립한 이 동상은 도시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2021년 280억원의 철거비를 들여 철거된 뒤 근처로 이전되었다. 해체 결정 전에도 관우상의 크기 및 부실공사 때문에 지반이 불안정했다고 한다. 기사&기사 2[3] 사시진은 사마몽구가 지키고 있었는데, 장강 수위가 내려간 틈을 타 아릭카야가 이끄는 원나라의 군대가 사시진을 공격한 뒤 정문량은 투항하고, 사마몽구는 자결한다. 원나라의 군대는 사시진을 도성한다.[4] 한국의 강릉은 징저우의 옛 이름인 강릉에서 따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