쩌우타오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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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해외공작위원회 상무 간사
정체
鄒韜奮
간체
邹韬奋
한국식 독음
추도분
영문
Zou Taofen
본명
은륜(恩润)
출생
1895년 11월 5일 청나라 푸젠성 융안현
사망
1944년 7월 24일 중화민국 상하이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학력
상하이 세인트존스 대학교 졸업
직업
잡지 편집인, 정치가
종교
무신론

1. 개요
2. 생애
2.1. 초기 경력
2.2. 잡지 편집인
2.3. 항일구국운동
2.4. 요절
3. 작품
4. 참고 문헌



1. 개요[편집]


중화민국의 잡지 편집인, 정치가. 1922년 황옌페이(黄炎培) 등이 설립한 중화직업교육사 편집부 주임을 맡아 교육과 편집 업무를 담당했고 1926년 <생활주간>의 편집장으로 부임해 '상하이 암흑가'를 비판했다. 또한 구국회에 가입해 공산당과 손을 잡고 일제에 맞서라는 시위를 벌이다가 선쥔루, 스량, 장나이치 등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8개월간 수감되었다가 중일전쟁 발발 직후 석방되었다. 이후 충칭과 한커우, 홍콩을 전전하며 항일 구국운동을 전개했으나 1944년에 귀암이 악화되어 48세에 요절했다.

2. 생애[편집]



2.1. 초기 경력[편집]


쩌우타오펀은 1896년 11월 5일 푸젠성 융안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관료를 맡은 명망높은 지주 가문이었다. 할아버지 추수여(邹舒予)는 푸젠성 영안현, 장락현장을 거쳐 영편지부까지 승진했다. 그리고 아버지 추국진도 관료였고 어머니는 저장 사씨로 15살에 추국진에게 시집와서 3남 3녀를 낳았는데, 쩌우타오펀은 그중 장남이었다.

1899년 추수여가 노령의 나이 떄문에 은퇴한 뒤, 추국진은 가족들과 함께 푸저우시로 가서 말단 관료를 맡았다. 이때 가세가 몰락해 생활이 곤란했다. 이에 추국진은 돈을 벌기 위해 서당을 열어 학도들을 맞이했고, 당시 6살이던 쩌우타오펀도 서당에서 교육받았다. 1909년 봄, 쩌우타오펀은 아버지의 권고에 따라 푸저우 공업학교에 입학했다. 2년 후, 그는 상하이 남양공학 부속 소학교로 보내졌다. 아버지는 그가 엔지니어로서 활동하기를 바랬지만, 쩌우타오펀은 비록 성적은 우수했지만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익혀야 할 수학, 물리 과목에는 흥미가 없어서 결국 엔지니어로의 길을 포기했다.

1918년, 쩌우타오펀은 상하이 세인트존스대학 문과에 응시해 합격하고 이듬해 정식으로 입학하여 서양 문학을 전공했다. 1921년 7월, 그는 세인트존스 대학을 졸업하고 문학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신문계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취업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했다. 그러던 중 상하이의 후생거즈거래소(厚生纱布交易所)에서 영문 비서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본 그는 이곳에 지원에 합격을 받아내면서 산업 및 사업 부문의 직원이 되었다. 또한 그는 상하이 직업교육기관에서도 일하며 글쓰기, 번역 같은 업무를 맡았다.

2.2. 잡지 편집인[편집]


1922년, 쩌우타오펀은 중화직업교육사 편집부장을 맡았고 뒤이어 편집장이 된 뒤 <교육과 직업> 월간지 편집을 맡았다. 그는 이 회사가 시작한 직업지도 운동에 참여하여 동료들과 함께 닝보, 난징, 우한, 제남 등지를 차례로 방문했다. 1926년 10월, <생활> 주간지의 편집국장이 은행계 사무로 전입되자, 쩌우타오펀이 대신 '생활'의 편집 책임을 맡았다. 그는 사회와 독자의 필요에 따라 내용부터 형식까지 생활주간에 대해 대대적인 혁신을 진행하기로 하고 주간지의 취지를 "인생의 수양을 암시하고 서비스 정신을 환기시키며 사회개조를 힘써 도모한다."로 확정했다.

그가 편집을 맡은 이래, <생활> 주간지 구독자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930년, 쩌우타오펀은 날로 커지는 독자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신문대판부'를 설립하여 독자 서비스 업무를 전담했으며 전국에 분점 및 사무처 60여 곳을 설치했다. <생활> 주간지는 7년간 미미한 수준의 잡지에서 중국 전역에 깊숙이 파고든 잡지로 성장했고 최대 발행부수는 15만 5천부에 달했다. 또한 쩌우타오펀은 이 잡지에서 사회비판적인 사설을 자주 실었고, 사람들은 <생활>을 "정의를 집행하는 언론"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그러던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했다. 쩌우타오펀은 이 사건에 분노해 <생활>에 연이어 일본에 맞서자는 내용의 사설을 게재하고 각지의 애국 운동을 적극 지지하며 애국지사를 위한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이로서 <생활>은 항일구국 기치를 높이 든 여론의 중심지로 변모했다. 이후 쩌우타오펀은 1933년 초 쑹칭링, 차이위안페이(蔡元培) 등이 조직한 중국 국민권보장동맹에 가입해 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민중의 자유권을 쟁취하기 위한 민주운동에 적극 활동했다.

그러나 <생활>은 일제와 섣불리 맞서기보다는 일제와 화친하고 공산당 토벌을 우선하고자 하는 국민정부에겐 눈엣가시였다. 이때문에 쩌우타오펀과 <생활>은 당국의 탄압을 받았다. 급기야 1933년 6월 18일, 민주운동가 양싱포(杨杏佛)가 남의사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여기에 쩌우타오펀까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소문이 돌자, 그는 7월 14일 유럽으로 망명했다. 그후 <생활>은 1933년 말에 국민정부에 의해 정간되었다.

2.3. 항일구국운동[편집]


쩌우타오펀은 중국을 떠난 뒤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영국, 독일, 소련과 미국을 연이어 방문해 많은 걸 보고 들으며 점차 마르크스주의에 긍정적인 입장으로 변모했다. 1935년 11월 16일, 그는 중국으로 돌아와 상하이에서 <대중생활> 주간지를 창간했다. 얼마 후 12.9 운동이 발발하자, <대중생활>은 항일 구국운동을 적극 지지하며 대중에게 항일 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쩌우타오펀은 신문에서 잇달아 논평을 발표하여 일제에 협력하는 관료들의 매국 행위를 규탄하고 학생들의 애국운동에 대해 "대중운동의 선봉이자 민족해방의 서광"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이 잡지는 많은 사람들의 열렬한 화녕을 받아 12월에는 판매량이 20만부에 달했다.

1935년 12월, 쩌우타오펀은 선쥔루 등과 함께 상하이 문화계 구국회를 조직해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국민정부가 각지에서 <대중생활>을 판매하거나 우체국에서 운송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 <대중생활>에 대한 억압정책을 실시하면서, 그는 곤궁한 처지에 몰렸다. 그러나 그는 "구국운동에 이미 참가했으니 최선을 다해 최전선에 나가야 하며 개인의 생사 따윈 알 바 아니다."라며 자신의 뜻을 절대로 바뀌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1936년 2월 29일, <대중생활>이 국민정부에 의해 정간되었다. 이에 쩌우타오펀은 상하이를 떠나 홍콩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친한 친구 김중화(金仲华)와 함께 <생활일보> 제작에 착수해 그해 6월 7일에 정식으로 출판했다. 그는 발간사에서 "본지의 두 가지 목적은 민족해방을 촉진하고 대중문화를 적극 보급하기 위한 것"이라고 명시하고 "국민의 입장에서 현 단계에서 국민이 가장 절실히 요구하는 것을 반영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그는 홍콩에서 애국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하다가 홍콩이 한쪽으로 치우쳐 지리적으로 불편하고 홍콩 식민정부의 폐쇄로 인해 정보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점을 고려해 8월 1일부터 본사를 상하이로 옮겼다.

1936년 5월 31일 전국 각계 구국연합회가 성립되었다. 이때 쩌우타오펀은 다시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그해 7월 31일, 쩌우타오펀과 선쥔루, 타오싱즈(陶行知), 장나이치 등 4인이 연명으로 "단결 통합을 위한 몇가지 기본조건 및 최소 요구사항"라는 제목의 국회 요구서를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국내의 형세를 분석하여 국난이 눈 앞에 닥치는 때 전국 각 당과 각 방면에서 분쟁을 중지하고 함께 연합하여 "항일구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특히 공산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 수립 주장에 동조하며 장제스와 국민정부에게 "과거의 선입견을 빨리 없애고 구국연합전선의 수립을 실현하라"고 주장했다.

같은 해 8월, 상해로 옮겨간 《생활일보》는 국민당 정부의 각종 간섭으로 복간되지 못했다.추도는 상황에 따라, 이 간행물 '요일 증간'을 복간하고 확장하여, '생활성 저널'로 이름을 바꾸고, 상해에서 항일 구망의 깃발을 계속 들고 각지의 항일 애국 운동을 지원했다. 이렇듯 연공, 항일 운동을 전개하며 압박을 가하는 쩌우타오펀을 제지할 필요성을 느낀 국민정부는 1936년 11월 22일 심야에 쩌우타오펀을 비롯한 구국회 인사 7명을 체포했다. 이에 각지에서 국민당의 처사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7군자' 석방을 강력히 요구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진 직후, 국민정부는 7월 31일에 쩌우타오펀 등 7명을 석방했다. 쩌우타오펀은 국민들의 지지에 감동해 "우리가 국민들에게 보답할 길은 구국운동보다 대중의 복지를 도모하는 일에 더 힘쓰는 것 뿐이다."라고 말했다. 같은해 8월 19일, 쩌우타오펀은 상하이에서 <항전> 잡지를 창간했고 이듬해 7월에는 류식(柳湜)의 <전민(全民)> 주간지와 합병하여 명칭을 <전민항전>으로 변경했다. 그후 .전국의 각계 친구들의 애국적 민주적인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전민항전'의 5일간지와 '전민항전'의 대중판 주간지를 잇달아 발간하고, 상하이에서는 '항전 화보'를 발간했다. 이 간행물들은 모두 항전구국을 선전하고, 민주제도 도입을 호소했다. '항전'의 판매량은 30만부에 달했고, 많은 중국인들은 이 잡지를 읽고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나라를 구하겠다는 열의를 불태웠다.

1939년 4월, 국민정부는 '생활' 서점의 폐쇄나 영업정지를 실시했다. '생활'의 도서출판은 일률적으로 금지되었고 심사를 거쳐 정식으로 출간된 것도 예외가 업섰다. 1941년 2월, 당국은 충칭점을 제외한 50여 개의 서점을 모두 폐쇄하고 그곳에 일하던 직원들을 체포하거나 해산시켰다. 쩌우타오펀은 당국의 처사에 분노해 연이어 항의했고 1941년 2월 23일 제2차 국민참정회 1차 회의에 불참하고 참정원 직을 사퇴하고 홍통으로 떠났다. 홍콩에 도착한 그는 매국자들에 대해 "끝까지, 끝까지, 끝까지 맞서야 한다"며 국민들의 항전 의지를 촉구했다.

1941년 5월 17일, 쩌우타오펀은 홍콩에서 <대중생활>을 재창간했다. 그는 복간사에서 "국민 앞에 놓여 있는 긴급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분단의 위기를 근본적으로 소멸하고 통합을 공고히 하며 민주정치를 수립하고, 그로 인해 항전을 끝까지 견지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두느냐다."라고 밝혔다. 이 간행문이 발행된 후, 국내외 독자들의 열렬한 환영으로 판매 부수가 곧 10만 부에 이르렀다.

같은해 6월 7일, 쩌우타오펀은 국국회의 대표인 마오둔(茅盾), 창장(长江), 김중화 등 9인과 함께 '국사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주장'이라는 글을 발표해 민주적인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뜻을 표명했다. 또한 그는 기고인 자격으로 《중국대동맹》 영문 반월간과 구국회 동인이 쓴 《구국총서》에 글을 발표하여 자신의 정치 관점을 진술했다.

2.4. 요절[편집]


1941년 12월 25일, 홍콩이 일본에게 공략당하면서 쩌우타오펀은 다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중국 공산당의 도움으로 둥장(东江)의 공산당 항일 근거지로 향했다. 그는 그곳의 많은 학교를 방문했고 현지의 군민들과 함께 노동하며 "지난 10년 동안 민주운동만 했는데, 오늘에 와서야 진정한 민주정치를 보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 시기 귀암에 걸려 어쩔 수 없이 상하이로 돌아가 치료를 받았다. 그는 치료를 받는 와중에도 공산당 근거지를 답사한 것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공산당이 세운 항일민주의 근거지에서 민주정치가 인민의 향상정신을 고취시키고 항전력을 발휘해 가장 혹독한 적후(敵後) 투쟁을 견지하고 있다. 나는 위대한 조국의 미래가 더욱 밝기를 희망하며 용기와 자신감을 백배 늘리고 용기를 북돋아 위대한 조국과 위대한 인민을 위해 계속 분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병세에서 회복되지 못했다. 1944년 7월 24일, 쩌우타오펀은 귀암이 악화되면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8세.

3. 작품[편집]


  • <쩌우타오펀 문집>
  • <경력>
  • <소언론(小言論)> 3회
  • <풍운억언>
  • <풍운기언>
  • <항전이래>
  • <환난여생기>

4. 참고 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