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경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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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경복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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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 일화 천마
4대



차경복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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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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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 2002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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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대한민국의 前 축구감독

파일:/image/022/2006/10/31/a1101-27-7.jpg
이름
차경복
車敬福 | Cha Kyung-Bok
출생
1937년 1월 10일 /
전라북도 정읍시
사망
2006년 10월 31일 (향년 69세)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호남중 - 중동고 - 경희대
직업
축구선수(공격수 / 은퇴)
축구감독
축구 심판
소속
선수
기업은행 축구단
지도자
포항제철 축구단(1981~1984)
인천대학교
경희대학교 (1985~1993)
전북 다이노스 (1995~1996)
천안-성남 일화 천마 (1998~2004)
국가대표
1경기 / 1골 (대한민국 U-20 / 1960)
3경기 / 0골 (대한민국 / 1964~1966)

1. 개요
2. 지도자 이전 시절
3. 지도자 시절
3.2.2. 전설의 3회 연속 우승 재현
4. 사퇴 그리고 루게릭병
5. 지도 스타일
6. 평가



1. 개요[편집]


대한민국축구선수 출신 감독. 1998년부터 2004년까지 성남 일화 천마 감독을 맡았다.

성남 일화 천마(現 성남 FC)의 레전드.

2. 지도자 이전 시절[편집]


본래 배구 선수였으나, 고향 정읍에 위치한 호남중에서 축구를 시작하며 축구 명문인 중동고로 스카웃되며 축구를 시작했다. 이후 센터포워드로 활약하다가, 경희대에 또래보다 4년 늦게 입학하게 됐다. 그리고 경희대 1학년에 결혼했다. 이후엔 국가대표에 뛸 정도의 선수였지만, 국가대표팀의 기둥이라던가 오래 뛰며 큰 족적을 남겼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은퇴 후 5년 간 기업은행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하다가, 1981년 FIFA 심판 라이센스를 취득하며 축구계에 심판으로 복귀했다. 1984 LA 올림픽 축구 결승 부심을 맡기도 했다. 1985년에도 고베 유니버시아드 심판으로 활약한 바 있다.

3. 지도자 시절[편집]


그러다 1967년부터 모교인 경희대학교 코치로 축구 지도자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친정팀인 기업은행 축구단에서 코치를 맡으며 실업 팀 코치로 데뷔했고, 1973년부턴 기업은행의 감독으로 팀을 10년 간 지휘했다.

1984년 인천대학교 감독 역임 이후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끝난 이후 1985년 9월부터 모교인 경희대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부임해 10년 간 활약했다.

3.1. 전북 다이노스 시절[편집]


고향인 전라북도 연고의 팀 전북 버팔로가 1994년 11월, 전북 다이노스로 재창단할 때 초대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허나 당시의 전북 다이노스의 상황은 다이노스로 재창단 때 가졌던 잡음을 해결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첫 해 전기리그 7위, 후기리그 4위를 기록했고, 2년차인 1996 시즌 전기리그 5위, 후기리그 7위를 기록했다. 2년의 재임 이후 고향 팀에서 물러나고 심판계로 돌아갔다.

3.2. 천안 / 성남 일화 천마 시절[편집]


1997년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장을 역임한 뒤, 야인 생활을 보냈다.

이후 1998년 9월, 유럽식 방임 지도 스타일의 레네 드자이에르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사임하자, 그의 후임으로 천안 일화 천마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부임과 동시에 몇몇 코치진을 데려왔는데, 그중 하나가 자신의 후임 감독이다.

3.2.1. 천안 일화 천마[편집]


1998년 9월 부임했지만, 팀의 부진을 막지 못하며 최하위로 첫 시즌을 마무리했다. 이미 전임 감독 재임 시기에 팀의 분위기가 최악으로 떨어져 있던 것을 막지 못했던 것이다.

2년 차인 1999년, 2군으로 참여한 1999년 대통령배 축구대회 우승을 거뒀지만 1군끼리 참여한 리그에선 역시 꼴찌를 기록했다. 그래도, 대한축구협회 FA컵 우승을 거머쥐며 천안으로 연고 이전 이후 팀에 첫 우승을 선사했다.

FA컵 우승으로 모기업 일화 재단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고, 1999년 12월 경기도 성남시로 연고 이전하며 팀과 함께 연고지를 옮기게 됐다.

3.2.2. 전설의 3회 연속 우승 재현[편집]


2000년 성남으로 갓 이전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된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이상윤을 비롯해 당시 K-리그 최고 수비수 김현수, 재일교포 박강조, 실업리그 최고 공격수 김대의 등 폭풍 영입을 지원받는다. 안양 LG 치타스, 부천 SK와 우승경쟁을 벌였고, 정규 시즌 2위, 플레이오프 기준 3위를 달성한다. 허나 이때의 3위는 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즈음부터 전술적인 부분은 김학범 수석코치에게 일임하고 차경복 감독은 선수관리 및 조직력을 갖추는 매니저형 감독으로 활약했다.

2001 시즌을 앞두고 이미 K-리그를 평정했던 사샤 드라쿨리치와 용병 이리네를 영입하며 지난 시즌 아쉬웠던 최전방을 보강했다. 주장 신태용을 중심으로 차경복 감독 특유의 카리스마 있는 지도력으로 팀을 단합시켰고, 안양을 누르고 성남 이전 최초이자 팀의 6년 만에 리그 우승을 만들어낸다. 기존 신태용, 김대의, 김현수, 김상식, 김영철, 박남열, 김해운 등의 호화 멤버들을 비롯해 김용희와 같은 신인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며 세대교체도 준비하는 등, 지도력을 인정받아 개인 커리어 첫 감독상을 수상했다.

2002 시즌에도 기존에 압도적인 전력에 2002 한일 월드컵에 성남 선수들이 차출되지 않아 조직적으로 큰 문제 없이 리그를 보낼 수 있었고, 박충균이나 전재호 같은 선수들의 기량을 찾아주며 팀을 효율적으로 이끌었다. 결국, K-리그와 함께 K리그 슈퍼컵, 아디다스컵트레블을 기록하며 구단의 리그 2연패와 자신의 감독상 2연패를 모두 달성하게 됐다.

2003 시즌을 앞두고는 이전보다 더욱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김도훈, 싸빅 이성남, 윤정환, 이기형 등 K-리그 최고의 멤버를 끌어모았다. 이러한 스타 선수들을 모두 장악할 수 있는 특유의 장악력으로 최고의 조직력을 뽐내도록 했다. 결국 2003년 당시 2위 울산과 승점 18점차를 보이며 역사상 최다 승점인 91점리그 3연패감독상 3연패를 달성한다. 또한, AFC 올해의 감독상도 수상하는 쾌거를 보인다. 팀이 K리그 사상 최초의 6회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는데 기여했다. 이 시기 안양, 울산, 수원 등이 차경복의 성남의 독주를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역부족이었다.

2004 시즌을 앞두고, 성남의 3회 연속 우승을 견제하고자 플레이오프제가 부활하게 된다.# 또한 김대의, 김현수, 샤샤, 윤정환, 박충균 등 핵심 멤버들이 이탈하며 눈에 띄는 전력 약화가 보이며 리그에서 부진을 면치 못함에도 리그컵에선 우승을 거머쥔다. 그리고 당시 AFC 챔피언스 리그로 개편된 대륙컵 조별 리그에서 15-0 경기를 만드는 등 선전했다. 결승전까지 올랐으며, 알 이티하드 FC와의 1차전 제다 원정에서 3:1로 승리하며 9년 만에 우승에 한발자국 다가섰다. 그러나, 홈 성남종합운동장 에서 열린 ACL 결승 2차전에서 알 이티하드 FC에게 충격의 0:5 대패를 당하고 만다. 이에 충격을 받은 차경복 감독은 그만 2004년 12월에 사임하고 만다.

시즌



1998
2
1
5
1999
12
7
18
2000
19
12
10
2001
16
13
7
2002
19
12
7
2003
27
10
7
2004
13
12
11


4. 사퇴 그리고 루게릭병[편집]


결국 ACL 우승을 알 이티하드 FC에 내준 후 성남 일화 천마의 감독직에서 사퇴했다. 성남 일화 천마김학범 수석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아 FA컵을 마무리했다. 사퇴 후 한국축구지도자협의회 공동 의장을 맡았다. 2006년 5월, 루게릭 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투병하던 10월 31일, 향년 69세를 일기로 그라운드를 영원히 떠나게 되었다.


5. 지도 스타일[편집]


모기업의 빵빵한 지원과 더불어 선수단을 조련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불같은 성격으로 스타 선수들을 제압하며 감독의 카리스마를 보여주다가 경기가 끝나면 친근하게 대하는 등, 밀당을 잘하는 감독이었다.

긴패스와 짧은 패스를 병행하는 빌드업 방식을 보여줬으며 좌우 윙에 이상윤, 이성남, 이리네 등의 빠른 선수들을 배치하고 최전방에 김도훈, 샤샤 등이 마무리하는 방식의 스타일이었다.

알렉스 퍼거슨과 같은 매니저형 감독.


6. 평가[편집]


선수 생활에서는 그다지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K리그 3회 연속 우승이라는 대업을 이룬 것은 지도자로서 자질이 우수했음을 증명한다. 오죽했으면 유럽형 리그제를 표방하고 K리그를 홈앤어웨이 체제로 굳히려고 하는 찰나, 성남이 3회 연속으로 우승해 버리니 리그의 재미를 위해(=성남의 독주를 막기위해) 룰을 변경해 버렸을 정도.

그의 커리어에 있어 오점이라 할 수 있다면 알 이티하드와의 5:0 관광 정도인데, 당시 알 이티하드를 이길 수 있는 아시아 팀은 없었다는 걸 고려하면(...)

또한 AFC에서도 상당히 높게 평가했던 듯 하다.#

여담으로, K리그 홈페이지에서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2014년 11월 16일 기준, 차경복 감독의 승무패 기록이 사라져 있다가 다시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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