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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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명주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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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s20.postimg.org/doosan2001.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2001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01~2003 KBO 리그 홀드왕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70번
김진영
(1990)

차명주
(1996~1997)


공필성
(2002~2004)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7번
이종운
(1989~1997)

차명주
(1998)


임재철
(1999~2002.4.28.)
두산 베어스 등번호 17번
박상근
(1993~1998)

차명주
(1999~2004.6.5.)


임재철
(2004.6.6.~2007)
한화 이글스 등번호 17번
강석천
(1989~2003)

차명주
(2004.6.6.~2006)


신주영
(2008~2009)



파일:ToPMRXe.jpg
2005년, 최연소 600경기 출장을 달성한 뒤.[1]
차명주
車明珠 | Cha Myungju

출생
1973년 9월 22일 (50세)
부산광역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대연초 - 대천중 - 경남상고 - 한양대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96년 1차 지명 (롯데)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 (1996~1998)
두산 베어스 (1999~2004)
한화 이글스 (2004~2006)
경력
KBO 육성위원 (2013~2019)
KBO 재능기부위원 (2023~)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2. 프로 경력
3. 은퇴 후
4. 기타
5. 연도별 주요 성적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롯데 자이언츠, 두산 베어스, 한화 이글스의 야구선수. 별명으로는 학창시절에는 독고탁[2]이 있었으며 현역 시절엔 항상 머리를 모두 밀고 나와서 붙여진 별명인 '명주대사', 그리고 두산 베어스 시절 잦은 등판으로 인해 언제나 불펜에서 대기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차대기' 등이 있다. 등번호는 07번(입단 당시) - 70번 - 7번 - 17번(두산)이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아마추어 시절[편집]


73년생 92학번 황금세대 출신. 서울에 임선동, 조성민, 손경수가 있었고 충청도에 박찬호가 있었다면 부산엔 차명주가 있었다. 비록 당대 빅 3에는 못 들었다고 해도, 그 바로 아래로 꼽히는 대어였기에 진작부터 롯데의 1차 지명이 당연시되던 선수였다.

경남상고 3학년이었던 1991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에 기여했고, 특히 청룡기에서는 대회 MVP도 차지했다. 다만 경남상고 때는 키가 160cm밖에 되질 않아, 생각보다 출장이 적었다. 먹을 건 다 먹어보고 철봉에 매달리고, 선배들은 사지를 쭉쭉 잡아 당겨주고 키크는 약이란 약은 다 먹는 눈물나는 노력 끝에 대학 시절까지 13cm가 컸다.(173cm)

이러한 노력으로 1차 지명을 받은 연고팀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한다.


2.2. 프로 경력[편집]



2.2.1. 롯데 자이언츠 시절[편집]


이 명성은 돈 안쓰기로 소문난 롯데 자이언츠가 그를 1차지명하고 5억원이라는 파격적인 계약금[3]을 지르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입단테스트를 준비하던 그를 붙잡은 데서 잘 드러났다.

이 때 차명주에 대한 기대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롯데는 기존의 베테랑 투수들 대신 신인에 불과한 차명주에게 마무리 투수 보직을 맡겼다. 좌완이면서도 빠른 공을 던지고 베짱까지 두둑한 탓에 마무리로서 필요한 조건은 최상이었기도 했다.

다만 입단 과정부터 순탄치 못했는데 졸업반 시절 절정으로 올라간 가치 탓에[4], 롯데와의 첫 협상 때는 해외 진출 동기생들인 박찬호조성민에 준하는 대우를 받아야만 한다며 계약금으로 무려 10억을 요구했다. 정말 10억을 받아낼 생각이었다기보단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대우를 해 달라는 뜻. 계약 협상이 지지부진해 이미 8개구단의 해외 전지훈련이 막바지로 치달을 2월 중순까지도 계약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구단 역사상 최고의 계약금인 5억으로 합의하고 입단했다.[5]

입단을 확정짓고도 순탄치 못했던 게 등번호 문제. 차명주는 야구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7번만을 달았기에 7번을 받지 못하면 입단을 철회하겠다고까지 말하면서 집요하게 7번을 요구했다. 문제는 이 번호가 이미 베테랑 외야수 이종운이 달고 있는 번호였다는 점. 이종운 또한 역시나 한 고집하던 성격이었는지라 '7번을 뺏으려면 차라리 날 은퇴시켜라'고 버텼고 결국 구단에서 장고 끝에 '07'번을 부여해 줬다.[6] 그러나 영 애매한 번호였던지라 개막하기 전 '70번'으로 변경했다.[7]

위의 두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자존심이나 강한 고집 등 투수로서는 좋은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것이 야구 외적인 부분에서 불거진 바람에 동계 훈련을 충실히 하지 못하고 데뷔 시즌인 1996 시즌을 그르치게 된다. 개막 후 세 게임 연속 세이브를 따내며 아마시절의 활약을 고스란히 이어가는가 했으나, 이후 두 게임 연속으로 블론세이브를 저지른 후 기세가 확 꺾인다. 이후 구원승과 몇 개의 세이브를 더 추가하긴 했지만 내용이 영 좋지 않아 선발투수로 전환. 그러나 승을 따내지 못하고 패전만 쌓아가면서 후반기 즈음에는 사실상 주요 전력에서 배제되었다. 데뷔시즌 성적은 기대치에 한참 못 미치는 정도를 넘어 먹튀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2승 5패 8세이브 7.43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이듬해인 1997 시즌엔 전 시즌의 실패를 거울삼아 아예 보직을 선발투수로 고정하고 충실한 동계훈련으로 시즌 초반 연승행진을 달리며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선발투수로 뛰기 시작한 이 시점에서 그의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나는데, 선천적으로 공을 오래 던지지 못하는 점이었다. 다한증과 일종의 '습진'이 겹친 난치병으로, 손에 굳은살과 물집이 매우 잘 잡혔고, 습기찬 날에는 더욱 심하였다. 그리고 공을 오래 던지면 공을 던지는데 가장 중요한 중지가 해지는 증상을 보였다.[8][9] 이 탓에 시즌 초반의 기세를 끝까지 이어가지 못하고 등판 간격도 들쭉날쭉해지며 컨디션 조절에 애를 먹다가 결국 7승 9패 4.68의 평균자책점이라는 다소 아쉬운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다만 이 시즌 롯데의 성적 자체가 48승 1무 77패에 그치며 압도적인 꼴찌를 한 시즌임을 감안하면 꽤 분전한 셈이다.

3년차인 1998시즌은 이종운이 한화 이글스로 이적한 탓에 염원하던 '7번'을 달고 뛰었다. 그러나 2년 연속으로 꼴지를 기록한 팀 성적과 더불어 차명주 본인으로서도 정말 의아하리만치 승운이 절망적으로 안 따라준 시즌이었다. 선발과 중간을 오가며 33게임에 등판했고 두 차례나 완투를 기록하는 등[10] 나름 고군분투했음에도 이 시즌 차명주가 기록한 성적은 0승 7패 0세이브 4.99의 평균자책점. WHIP는 입단 이후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음에도 단 1승조차 올리지 못했다.

결국 롯데에서의 3년동안 9승 21패 8세이브라는 참담한 성적을 기록하고 시즌 종료 후 포수 최기문의 영입을 위한 트레이드 카드가 되어 두산 베어스로 트레이드 된다.


2.2.2. 두산 베어스 시절[편집]


파일:external/dimg.donga.com/6820915.1.jpg

두산 베어스 시절.

1998년 10월 23일, 두산 베어스로 트레이드 되었으며 트레이드 상대는 포수왕국 두산에서 좀처럼 자리를 못 잡던 최기문이었다.[11] 트레이드에 대한 떡밥은 이미 던져져 있었는데 당시 롯데의 감독대행[12]에서 정식 감독으로 승격한 김명성이 팬들과의 간담회에서 전력 보강에 대한 질문을 받자 '투수를 내주고 포수를 받아오는 트레이드를 구상 중이다'고 답변했던 것. 결국 이 구상중인 트레이드가 그대로 성사된 셈. 그리고 이 트레이드 이후 차명주와 최기문 모두 전성기를 맞이하며 윈-윈 트레이드의 사례로 기록되었다.

두산 베어스에서는 중간계투로 자리잡아 첫 해부터 무려 83경기에 출전하며 중용되었다. 2000년부터 신설된 홀드 부문에서 3년 연속 홀드 1위(2001년 ~ 2003년)[13]를 기록하며 비로소 꽃을 피운다. 그 시절, 생소하던 너클커브를 던지던 몇 안 되는 투수기도 하였다.[14]

그러나 이 영광의 실상에는 혹사라는 그늘이 자리잡고 있었다. 두산의 김인식 감독은 그가 앞서 서술했던 다한증 때문에 연투가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일 2이닝씩 먹어줄 수도 있는 투수"라고 칭찬하며 좌타자가 나오면 2경기에 1번 꼴로 차명주를 등판시켰고, 1999년에는 83경기, 2001년에는 84경기에 등판하는 등 엔간한 대타 전문 요원보다도 자주 TV 브라운관에서 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이때 '차대기'라는 별명도 얻었다. 의미는 짐작하는 대로 언제나 불펜에서 항상 대기한다고 해서 '차대기'였다.

보직은 그때 그 시절 불펜투수들이 대부분 그랬지만 특별히 정해진 보직이 없는 마당쇠였다. 적당한 시점에 나와서 막고 들어가는 마당쇠와 동시에 좌투였기에 좌타자 저격용 원 포인트 릴리프, 마무리 투수까지 이어주는 셋업맨중간계투 보직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봐야한다. 8개 구단 133경기 시절 무려 80경기를 넘게 출장하는 살인적인 스케쥴을 소화한 끝에 구위가 떨어져, 두산에서의 마지막 해에는 거의 원 포인트 릴리프로만 나왔다.


2.2.3. 한화 이글스 시절[편집]


파일:/image/001/2006/10/29/kp1_2061029p2591.jpg

한화 이글스 시절.

김인식 감독이 물러난 후 김경문 감독과의 불화가 있었다.[15] 2004년 시즌 중 임재철(+ 5000만원)을 상대로 한화 이글스트레이드되었다.

한화 이적 후에는 두산 시절 말년과 마찬가지로 주로 원 포인트 릴리프로 나왔다. 하지만 한화에서는 두산 시절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고, 한 점 차 박빙인 상황에서 등장해 동점주자를 홈인시킨 뒤 그 다음에 잘 막아서 구원승을 무려 7번이나 기록했다. 더구나 소화하는 이닝도 해마다 줄어들어서 한화 이글스 팬들 사이에서 그의 별명은 0⅓이닝의 신화였다. 매일같이 등판하지만 올라올 때마다 한 타자만 잡고 내려가서 생긴 별명이다. 그 예로 2005년에는 1군에서 77경기에나 마운드에 올라왔지만 소화한 이닝은 33이닝에 불과했다.

그나마 유승안 감독 시기에는 관리를 받기라도 했지 2005년에는 김인식이 다시 감독으로 오면서 등판경기수가 많아졌고, 결국 평균자책점 5점대를 찍으면서 하락세를 보여주었다. 은퇴하던 해에도 50경기 이상을 등판했지만 주로 좌완 스페셜리스트로 나와서 이닝 수는 적었다. 2006 시즌 후 FA를 선언했으나 소속팀 우선협상 기간에 한화 이글스재계약을 거부했고 이후에도 불러 주는 팀도 없자 자신도 현역 생활에 대한 욕심이 더 이상 없어서, 아직 선수 생활을 더 이어나갈 수 있었음에도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3. 은퇴 후[편집]


야구계를 떠나 재활 트레이너로 전업하였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에 아버지와 형이 운영하고 있는 횟집 바로 옆 건물에 Gem Fitness라는 유소년 전문 회원제 재활 트레이닝 센터를 개장, 운영하고 있다.

파일:/image/003/2010/02/07/NISI20100207_0002277715_web.jpg

2009년 MBC ESPN에서 방영한 '날려라 홈런왕'이라는 리틀야구 프로그램에서 투수코치로 오랜만에 방송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는 자신이 설립한 SSL 연구소라는 과학적 및 데이터 분석 위주로 교육을 진행하는 일종의 야구 연구소의 원장 및 국민대학교 생체역학실 연구원이자 차의과학대학교 스포츠의학대학원 시간 강사로 지내고 있다. 시간강사 신분으로 제 1기 KBO 코치 아카데미에서 강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4. 기타[편집]


  • 두산 베어스에서 워낙 많은 등판 횟수를 기록하다보니 최연소 600경기 출장(32세 11개월) 기록을 갖고 있었다.[16]

  • 선수생활 중반부터 원 포인트 릴리프를 맡기 시작해서 후반부까지 거의 5년가량을 원포인트 전문으로 활약하다 보니 통산 613경기 출장 612이닝으로 류택현, 김민범 등과 더불어 출장 이닝수가 경기수보다 적은 특이한 통산기록을 가진 투수. 원포인트는 본질적으로 비정규 보직으로 보통 좌완 릴리버가 알바 차원에서 겸업하는 경우가 많고, 잘 던지는 좌완불펜은 아예 1이닝 릴리버를 맡기고 못하면 그냥 2군을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1군급 실력이면서 1이닝 릴리버급까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쯤의, 원포인트만 전문으로 몇년씩 맡아가며 선수생활을 오래 하는 투수가 드물다 보니 KBO에서 원 포인트 릴리프 하면 상술한 류택현, 김민범 등과 함께 팬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투수 중 하나이다.

  • 아버지가 부산 송정에서 횟집을 운영하고 어선도 여러 척 가지고 있는 지역 유지였다. 이 때문에 은퇴 후 부촌인 서초동에서 활동했다는 행적도 이해가 간다. 청소년 대표 시절 친해진 친구이자 한양대학교 동기인 박찬호의 자서전을 보면, 청소년 야구선수권 대회가 끝난 뒤 차명주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차명주가 혼자 방을 썼고 방 안에는 침대와 VTR, 24인치 텔레비전이 있었다고 한다. 박찬호는 한양대 입학을 앞둔 공주고 3학년 당시 프로야구팀들의 러브콜을 받고 있었는데 스카우터들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박찬호를 한 달간 부산 차명주의 집으로 내려보냈고 보호자로 한양대 4학년 졸업반인 정민태를 같이 보냈다. 정민태가 잠에서 깼는데 박찬호가 보이지 않자 허겁지겁 찾으러 다녔는데 차명주의 집 옥상에서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 상당한 노안으로 신인 시절의 사진을 보면 이미 탈모의 조짐과 함께 20대 초중반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액면가를 자랑했다. 바로 위 날아라 홈런왕 사진도 2009년 사진으로 당시 나이는 만 35세였다.


5.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6
롯데
27
46
2
5
8
-
0.286
7.43
57
4
34
29
43
38
1.935
1997
25
107⅔
7
9
0
-
0.438
4.68
124
8
58
64
65
56
1.663
1998
33
92
0
7
0
-
0.000
4.99
95
13
40
41
61
51
1.457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9
두산
83
(1위)
76⅓
1
2
1
-
0.333
4.01
84
4
37
60
38
34
1.572
2000
57
40
1
1
1
2
0.500
4.50
44
5
32
33
30
20
1.825
2001
84
(1위)
97⅓
6
2
1
18
(1위)
0.750
3.42
86
6
49
73
42
37
1.356
2002
67
(5위)
51⅓
1
2
1
17
(1위)
0.333
3.86
46
4
19
37
23
22
1.247
2003
77
(4위)
31
1
1
0
16
(공동 1위)[17]
0.500
4.35
28
0
17
14
18
15
1.419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4
한화
32
14⅔
0
1
0
11
0.000
2.45
14
0
8
11
5
4
1.364
2005
77
(1위)
33⅔
4
1
0
12
0.800
5.88
46
3
13
17
23
22
1.634
2006
51
22
3
0
0
4
1.000
3.27
20
1
7
11
11
8
1.136
KBO 통산
(11시즌)
613
612
26
31
12
80
0.456
4.51
644
48
314
390
359
307
1.528

6. 관련 문서[편집]


[1] 이 기록은 이후 2013년 강영식에 의해 갱신되었다.[2] 작은 키로 거대한 강타자들을 사정없이 돌려세운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3] 당시 국민소득이 1만 달러도 안 되던 시절의 5억원이니 지금과는 그 위상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거액이다. 게다가 롯데는 연봉협상 때마다 상습적으로 짠돌이짓을 벌인 구단이었으니...역시 같은 구단에 1년 후 입단한 손민한문동환에게도 나란히 계약금 5억 원씩을 안겨줬으니, 당시 차명주에게 롯데 구단이 건 기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4] 이건 1994년 말에 창단된 현대 피닉스의 영향이 컸다. 피닉스는 프로도 아닌 실업팀이면서 기존 프로팀들이 책정한 계약금 시세보다 억 단위가 높은 계약금을 뿌려대는 바람에 문동환, 김재걸 등의 선수들이 지명을 거부하고 피닉스로 가버리는 사태가 일어났다. 게다가 한양대 재학 중 LA 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와 고려대 졸업과 함께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간 조성민, 다이에 호크스와 가계약까지 맺은 임선동까지 겹치면서 차명주의 가치는 더욱 폭등했다.[5] 롯데가 1993년말에 주형광에게 준 계약금이 9200만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무려 5배나 넘는 돈을 안겨준 것이다. 신인 계약금 인플레가 극에 달한 때였긴 했으나 그 짠돌이 롯데가 지금 시점에서도 굉장히 큰 금액을 안긴 셈이니 이례적인 일은 분명하다. 롯데는 이듬해에 입단하는 문동환(95년에 입단했어야 하나 현대 피닉스 때문에 2년 늦어짐)과 손민한에게도 5억을 안긴다.[6] 이 07번은 2010년대나 돼서야 100번대와 더불어 신고선수들이 다는 등번호로 다시 등장하게 된다.[7]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에디슨 러셀이 있었으나, 러셀은 원래 5번을 달고 싶어 했는데 정현민이 달고 있어 고사하고 05번을 선택했으나 바로 다음 날 05번은 사용 불가라고 50번으로 바꿨다. 단, 차이점을 꼽자면 정현민은 원래 러셀에 5번을 넘겨주려 했으나 러셀이 거절한 것이다.[8] 이를 고치기 위해 1997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조직 검사도 받았고, 주사를 수도 없이 맞아봤으며, 온갖 약을 가리지 않고 썼으나, 난치병이라 소용이 별로 없었다.[9] 비슷한 문제로 크게 고생했던 선수가 바로 2016년도 신인왕 신재영. 신재영 역시 16시즌 풀타임 선발로 15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하는 듯 했으나, 17-18년 2년동안 차명주와 비슷하게 다한증+물집+굳은살이 떨어지는 증상으로 인해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진을 거듭했다. 결국 18시즌이 끝난 이후 오른팔의 묶는 다한증 수술을 받고 나서야 19년에 다시 임시선발로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었고 끝내 프로에서 롱런하지 못 했다.[10] 커리어 통산 2완투가 모두 이 시즌에 기록한 것이었다.[11] 최기문은 1995년 11월에 1차 지명으로 OB에 입단하지만 정작 김태형 - 이도형으로 이어지는 포수진 사이에서 인상깊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 했다. 이후 1997년 1월에 2차 1라운드로 지명을 받은 포수 유망주 진갑용이 3억 8천만원에 계약하면서 입지는 더 좁아졌고 결국 1군과 2군을 오가면서 부진하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두산은 1999년 1차 지명으로 경희대 포수 홍성흔까지 지명하면서 최기문이 설 곳은 아예 없었다.[12] 1998년 6월에 김용희 감독이 해임되고 투수코치 겸 감독대행으로 팀을 이끌고 있었다.[13] 홀드 집계 이후 3년 연속 홀드 1위를 기록한 선수는 현재까지도 차명주 뿐이다.[14] 차명주 외에는 진필중, 마일영 등이 있었다.[15] 김인식과 김경문은 스타일 차이가 컸는데 김인식은 전반적으로 인화력으로 팀을 이끌고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크게 터치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김경문은 그런 자유로운 분위기를 부정적으로 보고 심재학, 정수근 등을 차례로 정리했다.[16] 이는 이후 2013년 8월 15일 강영식에 의해 갱신되었다.[17] 좌완 이상열과 공동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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