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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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상해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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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前 축구선수

파일:차상해-02.jpg
이름
차상해
車相海 | Cha Sang-Hae

출생
1965년 10월 20일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신체
191cm
포지션
스트라이커
학력
이천남초-중동중-중동고
소속팀
할렐루야 축구단 (1984~1988)
럭키 금성/안양 LG 치타스 (1989)
대우 로얄즈 (1991~1992)
포항제철 아톰즈 (1992~1994)
대우 로얄즈 (1995)
유공 코끼리 (1995~1996)
안양 LG 치타스 (1996)
국가대표
파일: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2경기 (대한민국 / 1993)

1. 개요
2. 럭키금성 입단
3. 대우 로얄즈 시절
4. 포항에서 연 전성기
5. J리그 진출 무산, 부산으로 컴백
6. 유공 시절
7. 은퇴
8. 지도자 생활




1. 개요[편집]


차상해는 대한민국 출신의 전직 축구 선수이자 현직 지도자이다.


2. 럭키금성 입단[편집]


실업구단이었던 할렐루야 축구단에서 활동하던 차상해는 럭키금성과 포철의 관심을 받았고, 친형인 차상광이 뛰고 있던 럭키금성을 택했다. 하지만 당시 할렐루야 감독이었던 황재만과 럭금의 감독이었던 고재욱의 합의로 입단이 1년 늦춰졌는데, 이를 몰랐던 차상해는 이미 구단에 사표를 낸 상황이었고, 1988년에는 무적신세가 되어 결국 연습생 신분으로 럭키금성 황소에 입단하고 말았다. 하지만 1989년 곧바로 핵심선수로 뛰었고, 고정운과 신인왕 경쟁을 펼칠 정도로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이 해에 22경기에 출전하여 6골 4도움을 기록하여 팀의 준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89시즌이 끝나고 럭키금성과 또다시 계약문제가 발생했고 FA로 팀을 떠나, 대우 로얄즈에 입단했지만 연맹의 이상한 FA 규정으로 인해 16개월동안 무적신세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3. 대우 로얄즈 시절[편집]


1991시즌을 앞두고 우여곡절 끝에 대우의 유니폼을 입고 새출발을 했으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동계훈련을 하지 않고 개막을 바로 앞두고 팀에 합류했기 때문에 5월이 돼서야 1군에 합류할 수 있었다. 로테이션 멤버로서 로얄즈의 우승에 기여했다.


4. 포항에서 연 전성기[편집]


1992년 차상해를 오랫동안 눈여겨 보던 이회택 감독의 적극적인 러브콜을 날렸는데 차상해를 키우려던 로얄즈는 억대의 이적료를 요구했고 포철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이적이 성사되었다. 오랜 무적 생활로 인해 그동안 대우에서 뚜렷한 할약을 보이지 못하며 자리를 잡지 못하던 그에게도 반전의 기회가 필요했다.
이회택의 지도를 받으며 서서히 출전시간을 늘려가던 차상해는 자신을 버린 LG를 상대로 포항에서의 데뷔골을 기록하며 적응에 성공했고, 그 해에 입단한 홍명보와 함께 의지하며 부담감을 이겨냈다고 한다. 시즌 중반 입단한 라데와도 좋은 호흡을 보였고, 마지막 경기였던 LG전에서 골을 성공시키며 포철의 극적인 우승을 이끌었다. 1992 시즌 11경기 출전 3골 1도움 기록.

그동안 많은 심리적 부담감을 받으며 게임에 임했던 그였지만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그 부담감을 안벽하게 떨쳐버릴 수 있었다. 또한 2년 연속 팀을 옮겨가며 우승을 차지한 그는 이제 명실상부한 포항의 주전으로 자리매김했다. 우승 이후 이회택 감독 대신 부임한 허정무 감독 체제에서도 그는 주전 경쟁에서 다른 선수들을 제치고 경기에 출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차상해가 처음으로 동계훈련을 완벽하게 한 1993 시즌, 체력적으로 준비가 된 그는 9골을 기록한 라데와 함께 포항 공격을 이끌었고, 10골을 기록하며 정규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그러나 허정무가 이끈 포철의 성적은 이회택호와 달리 좋지 않았고, 시즌 중에 했던 인터뷰가 빌미가 되어 미국 월드컵 엔트리에서 탈락하기도 하여 절반의 성공만을 거두었다.

1994 시즌에는 동계훈련 중에 입은 부상 여파로 황선홍라데에게 주전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5. J리그 진출 무산, 부산으로 컴백[편집]


94시즌을 마치고 산프레체 히로시마, 가시마 앤틀러스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지만, 구단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2:1 트레이드로 대우 로얄즈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1] . 그러나 그를 데려온 김희태 감독이 프런트와의 마찰로 물러나게 되면서 그의 입지도 애매해져 버렸으며, 샤샤 드라쿨리치 때문에 설 자리를 잃게 되자 결국 95시즌 전반기 6경기 1골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받고 말았다.


6. 유공 시절[편집]


대우에서 초라한 활약을 펼쳤지만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이 이끄는 유공에서 그는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95시즌 후반기 12경기 1골을 기록했으며 96시즌에도 팀을 이끌어줄 선수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구단과의 마찰이 문제가 되었다. 니폼니쉬가 차상해와의 면담 중에 선수 처우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해결하고자 했는데, 이 과정에서 유공의 미운 털이 박히고 만 것이다. 결국 1996년 입단한 세르게이 부르딘 때문에 설 자리를 잃었고 급기야 같은 해 아디다스컵 우승 후 전기리그를 끝으로 유공에서도 방출되었다.


7. 은퇴[편집]


96시즌 후기리그 때 애증의 친정팀 안양 LG로 다시 돌아왔으나, 3경기를 뛰는데 그쳤으며 결국 1997년 1월 방출되어 은퇴했다.


8. 지도자 생활[편집]


오사카에서 대학팀 코치로 지도자를 시작했으며, 감독으로 오사카 지역 1부리그 준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조총련 중학교를 거쳐 홍명보 축구교실에서 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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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트레이드 상대였던 함상헌 노주섭은 1996년 후반기 때 LG에서 한솥밥을 먹기도 했는데 함상헌은 1995년 전기 중반 박지호와의 트레이드, 노주섭은 1996년 후기 때 LG 유니폼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