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드라 쿠마리 구룽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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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사건 과정
2.1. 이 사건의 문제점
3. 사건 이후
3.1. 소송
3.2. 네팔에서
4. 기타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네팔 노동자인 찬드라 쿠마리 구룽이 한국어를 못 한다는 이유로 행려병자[1]로 오인받아 무려 6년 4개월 동안이나 정신병원[2]에 갇혔던 사건. 더불어 당시 통번역 인프라의 부재와 인권 의식의 부재,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 결여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준 사건이다.


2. 사건 과정[편집]


1992년 당시 36세[3]였던 여성 이주노동자 찬드라는 합법적인 단기 근로용 비자를 받고 한국에 온 외국인 노동자로, 서울특별시 광진구의 한 섬유공장에서 재봉틀 보조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찬드라는 1993년 어느 날 친구와 싸우고 기숙사를 나와 걷다가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사이 찬드라의 주머니에 들어 있던 돈이 떨어졌고 찬드라는 이를 모른 채 배가 고파져 근처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동네 분식점에서 라면을 먹은 후 찬드라는 주머니에서 돈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갑을 가지러 다녀오겠다고 주인에게 설명했는데 주인은 한국어가 서툴고 행색이 꾀죄죄하다는 이유로 찬드라를 무전취식 행려병자로 경찰에 신고했다.

서울동부경찰서로 연행된 찬드라는 서툰 한국어로 어떻게든 상황을 설명하려 노력했지만 경찰도 단순히 꾀죄죄한 용모와 어눌한 말투만 보고는 그녀를 행려병자인 줄 알고 청량리의 한 정신병원으로 보내 버렸다. 외국인이라 한국어를 제대로 못 하는 것이었을 뿐인데 말이다. 여기서도 그녀는 '자신이 네팔인이며 일하던 공장에 가면 여권과 비자가 있다'고 열심히 항변했으나 그 누구도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그녀의 이름마저 '선미아'라는 임시로 지은 이름으로 제멋대로 바꿔 불렀고 손까지 묶인 채 강제로 약물치료와 심리치료를 병행하는 생활을 했다고 한다. 정신병원이라는 특성상, 심지어 1990년대였으니 말 그대로 이미 병원에 들어간 사람은 무슨 말을 해도 정신병자의 헛소리라는 낙인이 찍혔다. 아무리 집에 가게 해 달라고 울며 매달려도 의료진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제 이름을 부르기가 어려워서, 간호사들은 저를 부를 때 이름을 부르지 않고 팔을 잡아 끌고 의사에게 데려가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며칠이 지난 후부터 저를 '선미아'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그것이 제 이름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엿새를 의사와 상담했고, 하루 세 번씩 스무 개도 넘는 약을 먹어야 했습니다. 제가 아프지 않다고 약을 먹지 않으려고 하면, 간호사들은 야단을 치면서 약을 억지로 먹게 했습니다. 약을 먹기 전에는 괜찮다가도, 약을 먹으면 어지럽고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매일같이 '나는 네팔 사람이다. 집에 가고 싶으니 네팔로 보내달라'고 의사와 간호사에게 얘기하고, 어떤 때는 울면서 붙들고 사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의사와 간호사는 아무런 대답도 조치도 취해주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저는 정신병원에서 8개월 가량 있으면서 너무나 힘들고 괴로워 죽고 싶은 심정뿐이었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찬드라의 진술서 일부


찬드라는 한 곳에서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병원 두 곳과 부녀자 보호소 한 곳을 거쳤다. 그 긴 세월을 눈물로 보내는 동안 사실 병원에서도 외국인 노동자일지 모른다고 생각해 다른 외국인 노동자를 통해 대화를 시도한 적이 있긴 있었는데 문제는 그 외국인 노동자가 방글라데시 국적이었다는 것이다. 네팔은 네팔어를 쓰는 나라이고 방글라데시는 벵골어를 쓰는 나라니 당연히 말이 통할 리 없었다.[4] 차라리 힌디어 쓰는 인도 사람이나 우르두어 쓰는 파키스탄[5] 사람으로라도 시도했으면 이 언어들은 벵골어에 비하면 네팔어하고 조금이나마 더 비슷한 데다 이 나라 사람들도 한국에서 많이 일하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나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한번 시도한 뒤로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방치해 버렸다. 그 여러 곳에서, 그 누구도, 더 이상 알아보거나 가족을 찾아 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심지어 기숙사와 섬유공장에서도 실종된 찬드라를 찾을 생각조차 전혀 하지 않았다.

결국 6년이 흐르고 나서야 문제가 해결되었다. 마지막 병원 재활병동에서 만난 담당의사 이화여대병원 신경정신과 이근후 교수는 찬드라가 정신병자가 아니라 네팔 노동자라는 사실을 믿어 주었고 가족을 찾아 주려고 노력했으며 찬드라가 자신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할 수 있도록 따로 시간을 내서 한국어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 의사가 노력한 덕에 네팔 공동체까지 찬드라의 소식이 닿게 되었고[6] 마침내 찬드라는 2000년 3월 용인정신병원에서 퇴원했다. 이후 1년 동안은 석왕사라는 절에서 지내며 소송을 준비하다가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갔다.


2.1. 이 사건의 문제점[편집]


첫째로, 무전취식 혐의로 찬드라를 파출소로 연행한 담당 경찰관이 엄청난 업무상 실수를 저질렀다. 경찰은 피의자가 외국인일 경우 적절한 통역을 통해서 신원 확인을 한 후 필요조치를 했어야 했는데 한국어를 못 한다고 해서 무조건 정신질환자로 단정해 버렸다.

둘째로 친척들과 외국인노동자 상담소에서 분명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고 그 지역 곳곳에 찬드라를 찾는 포스터까지 붙였음에도 찬드라를 병원으로 인계한 그 관할 파출소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셋째로 출입국사무소는 찬드라가 마지막으로 입원했던 정신병원에서 그녀가 외국인임을 확신하고 조회를 요청했으나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신원불명이라고 답변했다. Chandra Kumari Gorum이라는 이름으로 문의했는데 관리소에 등록된 이름은 ‘Chandra Kumari Gurung’인 아주 사소한 차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권 번호를 말했음에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더 줄어들 수도 있었던 찬드라가 억울하게 병원에 갇혀 고통받은 기간은 이 때문에 더 늘어나고 말았다. 이것이 후술할 소송에서 대한민국이 상대가 된 이유다. 대한민국 공무원이 업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탓이니 그 사용자인 국가에 배상할 책임이 있다.

넷째로 찬드라를 파출소에서 인계받아 정신질환자라는 진단을 처음 내리고 입원시켰던 병원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본인이 외국인이라고 계속 주장했는데도 정신질환 때문이라고 오진하였으며 본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정신질환 치료약을 먹이는 등 강제로 의료행위를 하여 그 후에도 계속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나중에 추궁을 받자 그들은 '진짜 정신병이 있다고 생각하고 찬드라의 말을 들으면, 네팔 말이 한국어랑 비슷하다'느니 '겉모습을 봤을 때, 시골에서 온 아주머니 같았다'느니 하는 변명으로 일관했고 사과는 없었다.

담당 경찰관과 출입국사무소 관계공무원, 담당 의사와 간호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저지른 수많은 부주의와 무관심이 쌓이고 쌓여 멀쩡한 사람을 6년 4개월이나 정신병원에 가두는 엄청난 사고를 일으키며 한 사람의 인생을 끔찍하게 망가뜨렸던 것이다. 사건의 전말이 밝혀진 후에도 국가나 병원에서는 그 어떤 반성이나 사과도 없었다. 법무부에서 귀국 항공권을 제공하겠다고 나섰으나 그나마도 결국 취소해 버리는 한 차례의 해프닝이 있었을 뿐이다.


3. 사건 이후[편집]



3.1. 소송[편집]


2000년 5월, 찬드라를 돕던 인권단체들은 경찰과 정신병원과 한국 정부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인권단체들은 '외국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으로 넘쳐나는 우리나라, 반성할 줄 모르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에 뭔가 반성할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이 사건을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네팔 공동체에서도 네팔인 176명의 서명을 받아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찬드라를 돕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우리는 찬드라에게 정신질환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비슷한 경험을 자주 하는 우리로서는 찬드라가 겪었던 그 수난이 바로 나 자신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움이 짧아 영어도 모르고 한국어도 모르는데 신분증까지도 사업주에게 빼앗긴 상태라면 무엇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정은 외국에 여행을 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이가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후, 누이를 만났던 우리들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누이에게서 아무런 이상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놀라고 당혹스러워하는 우리를 따뜻하게 위로하는 누이를 보고 어찌 정신질환이 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다시 한번 말씀드리건대 우리 누이 찬드라는 정신질환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 누이는 한국어를 모르는 다소 수줍어하는 외국인이었을 뿐입니다.

탄원서 내용 일부

찬드라는 소송에 필요한 자료를 준비하기 위해 까다로운 정신감정도 받고 경찰서와 병원에서의 괴로운 기억들도 다시 상세히 떠올려내야 했다. 당연하지만 큰 상처를 받은 상태였던 그녀는 회상을 할 때마다 무척 고통스러워했다. 간단한 진술서를 쓰면서도 몇 번이나 눈시울을 적시고 후들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느라 애먹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이 소송은 2년이 넘도록 지루하고 더디게 이어졌다. 재판부는 2001년 7월경 판결을 내리려 했으나 국가배상법에 '외국인이 피해자일 경우 그 외국인이 속한 나라와 상호 보증이 있는 경우에만 국가가 배상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는 게 문제였다. 한국과 네팔 사이에 그런 보증은 없었기에 재판부는 네팔 정부에 이 소송에 대해서 설명하고 '만약 네팔 공무원에 의해 한국인이 피해를 입었을 경우 책임을 지겠느냐'는 질의서를 보냈다. 그 질의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이 와야만 찬드라도 배상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 답변이 올 때까지 결론은 기약없이 미뤄졌다. 네팔 정부로부터 답변이 온 것은 이듬해 1월이 되어서였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재판부는 다시 '찬드라가 외국인이라 국내 임금 수준으로 일실(逸失)수입[7]을 계산할 수 없으니 네팔 노동자 평균임금을 자료로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근로를 위해 입국한 외국인이 피해를 입어 배상액을 계산할 때 체류기간 동안은 한국 임금으로, 그 후 가동기간까지는 본국 임금 수준으로 계산한다. 그리고 당시 네팔 노동부는 네팔 미숙련 노동자의 평균 수입은 3만 6천 원, 숙련노동자는 4만 2천 원 정도라고 답변했다.[8]

이에 대해 '찬드라가 6년 4개월 내내 한국에 있었으니 당연히 그 동안 노동을 못해 잃은 수익에 대한 배상은 한국 임금 수준으로 계산해야 마땅하고 생사람을 6년 4개월이나 가둬둔 주제에 배상도 형편없이 하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질타가 이어졌으며 결국 판결에서도 끝끝내 네팔 노동자의 한 달 월급인 4만 5천 원으로 임금을 계산해 장장 6년 4개월(80달) 동안 벌지 못한 수입이 저 쥐꼬리만한 돈이 다였을 것이라고 결론냈다'면서 판결을 선고한 재판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이란주, 말해요 찬드라, 삶이보이는창, 2003)

2년여의 심리 끝에 약 2860만 원을 지급하라는 1심 판결이 선고되었다. 이에 대해 위 이란주는 "원고가 지급하라고 요구한 배상액은 위자료와 임금손실을 합쳐 1억이었는데, 판결은 그 3분의 1도 안 되는 2860만 원만을 인정했고(위자료 2500만 원+일실수입 360만 원), 찬드라에 대한 미안함이나 반성의 표현은 한 마디도 없었다"고 전했다.

그나마 항소심에서는 원고의 한국 체류 예상 기간이 좀 더 길게 평가되어 일실수입이 증액되었다.


3.2. 네팔에서[편집]


찬드라가 실종된 줄로만 알고 있었던[9] 가족들은 그녀가 다행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딸이 '실종'된 뒤 병을 얻어 몸져 누웠던 찬드라의 어머니는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2001년 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박찬욱 감독은 2003년에 이 사건을 영화화했다. '여섯 개의 시선'이라는 옴니버스 영화의 '평화와 사랑이 끝나지 않는 곳, 네팔로의 여행.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Never Ending Peace And Love)' 파트가 그것이며 마지막에 실제 찬드라를 찾아가 촬영했다. 이후 이 사건을 다룬 '말해요, 찬드라'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사건 이후 한국인들이 위에서 설명한 소송 끝에 2861만 원을 받아내 찬드라에게 전해줬고(기사) 성금으로도 다시 1800여만 원을 모아 찬드라에게 전달하고 미안하다는 뜻을 전하자 찬드라 본인은 "내가 못 배워서 일어난 일"이라면서 대인배스럽게 넘겼다. 한국과 한국인을 미워하지 않으며 자신을 병원에 보내 버린 그 경찰만 미울 뿐이라면서. 찬드라의 아버지도 딸을 데리러 오던 날 "아무도 울지 마라. 우리 딸 찾은 것만도 감사하다. 아무도 울지 마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네팔에서도 이 사건이 화제가 되었던 건 당연하지만 그녀의 고통은 고향에 돌아간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그녀가 보상금으로 받은 돈이 네팔 기준으로 아주 큰 돈이었던지라 보상금이 더 화제가 되었던 것이 화근이었는데 심지어 어머니를 잃었음에도 마을 사람들에게 '너 때문에 네 엄마가 죽었다'고 시달리며 2차 가해까지 당했다고 한다. 전술한 영화 제작진이 한국인 인권운동가와 함께 찬드라를 찾아갔을 때[10]는 겨우 그 수군거림이 간신히 가라앉고 있는 참이었는데 '한국인들이 찾아왔으니 보상금 전달하러 왔나보다' 하고 네팔이 시끌벅적해져 찬드라가 또다시 입방아에 올라야 했다. 네팔 언론에서는 한국인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에서 보상금 많이 받아서 그 돈으로 큰 도시에 가서 집 짓고 잘 살게 되었다더라'는 제대로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황당한 소문을 대서특필했으며 이 탓에 찬드라는 또다시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이후에도 별별 사기꾼에 친척들이 보상금 좀 나누자고 찾아오거나 심지어 마오주의 반군까지 그녀의 집으로 쳐들어와 보상금 반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 사실은 네팔에서 한국 식당 '소풍'을 운영하던 한국인 내외[11]가 그녀의 지인들을 통하여 들었던 이야기로, 이에 따르면 지인들은 한숨 쉬면서 "그 돈을 거저 얻은 줄 아는 바보들이 참 많아요... 무려 6년이나 정신병원에 갇혀서 말도 안 통하는 생활 끝에 받아낸 작은 보상을 그저 탐만 내든가, 뭘 그리도 가만히 있는 그녀를 온갖 헐뜯는 소리나 하는지 듣기만 해도 화가 나는데 그 당사자는 대체 어떨지.", "아니? 그녀가 피해자인데 왜 그녀를 탓하는지 모르겠어요. 정말이지 얼마나 속상할까."라고 한국인 사장에게 한탄했다고 한다.

받았던 돈이 성금 1800만 원, 보상금 2860만 원씩 총합 4660만 원이었다. 2020년 기준으로 쳐도 네팔에서 수십년 어치 급여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으로 중산층으로 넉넉하게 먹고 살 돈이고 찬드라 쿠마리 구룽이 한창 귀국했을 때는 네팔의 1인당 국민소득이 230달러에 불과했을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잘 사는 부유층으로 등극하고도 남을 돈이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오히려 그 돈으로 인해서 마오주의 반군까지 와서 행패를 부리고 충격으로 어머니마저 사망했는데도 이웃들은 위로는커녕 되려 돈 많다면서 뒷담화까지 하는 등 삶이 완전히 망가진 걸 생각하면 돈만 줘서 다 해결되었다고 보긴 어렵다.

결국 이런 사람들로 인해 그녀는 큰 상처를 입고 잠적해 네팔에서도 도무지 행적을 알 수 없다고 한다.


4. 기타[편집]


21세기에는 번역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으니 다행이지만 20세기까지는 번역 인프라가 거의 없다시피했다. 사실 21세기에도 관광지가 아닌 곳을 중심으로 영어마저 통하지 않는 일이 수두룩하다. 때문에 '말이 통하지 않아 사건 사고로까지 이어지는' 사례는 이전에도 발생했을 것이고 지금도 후술하듯 전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실제로 비슷한 사건으로 러시아 정신병원에 갇힌 헝가리 남자 토머 언드라시 사건을 꼽을 수 있는데 이 쪽은 갇힐 당시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고 있었던 데다 장장 53년이나 갇혀 있었으니 더욱 끔찍하다.

물론 찬드라가 '외국인'이 아닌 '한국인 정신병자'로 오해받은 것은 공교롭게도 티베트계 민족이라서 동아시아인과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컸다. 네팔에는 흑인 혼혈이나 백인 아리아계도 살지만 티베트계 민족들도 섞여 사는 나름대로 다인종 국가인데 차라리 동아시아인과 완전 딴판인 외모였다면 이 정도의 비극이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찬드라에게 가해진 인권침해는 이러한 총체적 상황의 합작품이었다. 그 일은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상상력의 결핍이 만들어낸 사건이었다. 어느 누구도 우리와 닮은 외모를 한 그녀가 우리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또한 그것은 한국 사회에 내면화하고 있는 위계적 언어관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녀가 ‘좀 모자라는 사람’, 어린애 취급을 당한 건 단지 한국말이 서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를 대한 사람들은 그녀가 구사하는 네팔어를, ‘우리보다 못한 나라’인 네팔어를 우리말과 동등한 위상을 가진 한 나라의 언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네팔어를 사용하는 그녀를 우리와 동등한 인간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출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위와 같은 주장도 있다.

조금 늦었긴 하지만 정신병원과 요양시설 등 수용시설에 억울하게 수용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인신보호관 제도가 2013년에 법무부에 의해 도입되었으니 이런 억울한 사례가 좀 더 예방되고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찬드라 본인도 자신과 같은 사람이 생겨나지 않길 바란다고 전한 적이 있으니 위안거리가 되어 준 셈이다. # ##

찬드라가 강제 수용되었던 서울특별시 청량리에 위치한 청량리정신병원은 2018년 3월 말에 폐업하였다. 해당 사건 외에도 이미 혐오시설 논란, 인력난, 경영난 등 온갖 문제점들이 산재한 부실스러운 시설이었으니 그저 자업자득.

2013년에 중국을 여행하던 한국인 정신질환자를 중국 공무원이 중국 정신병원에 강제입원시켰다가 2020년에야 한국인임이 확인되어 귀국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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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떠돌아다니다 병이 들어 치료·간호할 이가 없는 사람.[2] 청량리정신병원이다. 현재는 폐업.[3]1956년생. 근황은 불명이지만 살아 있다고 치면 68세다.[4] 둘 다 인도유럽어족 인도아리아어군에 속하기는 한다. 단어도 비슷하고 대화도 약간은 가능하지만 문법(특히 시제 표현)이 상당히 다르며 사용되는 문자도 벵골 문자데바나가리 문자로 전혀 다르다.[5] 이쪽은 문자는 다르지만 입말은 비슷하다.[6] 처음 소식을 듣고 찬드라를 면회하려 갔던 네팔인 공동체의 총무인 '케이피 시토우라'(이후 시선 시리즈의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에도 출연하여 당시 상황을 재현했다.)은 너무 조심스러워 한국어로 얘기하다가 비로소 네팔어로 '나마스떼'라고 인사했는데 오랜 세월 잃었던 세상을 순식간에 다시 만난 찬드라는 무척 당황하며 진땀을 흘렸다고 한다. 잊다시피했던 네팔어가 너무 하고 싶어 매일매일 전화를 했다고.[7] 사고가 발생한 경우 그 피해자가 잃어버린 장래의 소득.[8] 당시 대한민국의 일용노임 월액은 50만 원 남짓이었다.[9] 몇 년 동안이나 행방이 묘연하고 소식이 없자 네팔 공동체는 고심 끝에 사망자 명단에 올려 놓은 상태였다고.[10] 마침 1심이 끝나 항소를 하자고 제안할 겸 찾아갔다고 한다.[11] 독실한 불자인 내외가 운영하던 식당으로 네팔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좋고 네팔인들이랑 사이가 좋아 잘 지내면서 네팔에서 겪는 관련 책자를 여럿 냈다. 하지만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남편은 가게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