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매뉴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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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매뉴얼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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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1978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2008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79년 퍼시픽리그 최우수 선수(MVP)
1978년
야마다 히사시
(한큐 브레이브스)

찰리 매뉴얼
(킨테츠 버팔로즈)

1980년
키다 이사무
(닛폰햄 파이터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79~1980년 퍼시픽리그 최다 홈런
1978년
바비 미첼
(닛폰햄 파이터즈)
36홈런

찰리 매뉴얼
(킨테츠 버팔로즈)
37홈런(1979년)
48홈런(1980년)

1981년
카도타 히로미츠
(난카이 호크스)
토니 솔레이타
(닛폰햄 파이터즈)
44홈런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80년 퍼시픽리그 최다 타점
1979년
카토 히데지
(한큐 브레이브스)
104타점

찰리 매뉴얼
(킨테츠 버팔로즈)
129타점

1981년
토니 솔레이타
(닛폰햄 파이터즈)
108타점







필라델피아 필리스 단장 수석 고문
찰리 퓨콰 매뉴얼 주니어
Charles Fuqua Manuel Jr.

생년월일
1944년 1월 4일 (80세)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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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출신지
웨스트버지니아 주 노스포크
포지션
외야수, 지명타자
투타
우투좌타
신체
193cm, 88kg
프로입단
1963년 미네소타 트윈스 자유계약
소속팀
미네소타 트윈스 (1969~1972)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74~1975)
야쿠르트 스왈로즈 (1976~1978)
킨테츠 버팔로즈 (1979~1980)
야쿠르트 스왈로즈 (1981)
지도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타격코치 (1988~1989)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타격코치 (1994~1999)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감독 (2000~2002)
필라델피아 필리스 감독 (2005~2013)
필라델피아 필리스 타격코치 (2019)

1. 개요
2. 선수 시절
2.1. 그저 그랬던 메이저리그 생활
2.2. 야쿠르트, 킨테츠의 첫 우승을 이끈 일본 시절
3. 지도자 시절
3.1.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시절
3.2. 필라델피아 필리스 시절
4. 이모저모
5. 감독 성적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일본프로야구에서 활동했던 선수이자 前 메이저리그 감독. 2000년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대표적인 덕장으로, 선수생활 초창기에 그리 주목받지 못하다가 일본 리그에서 기량이 만개했다.

일어 가타카나로 チャーリー・マニエル이라 표기하는데, 2000년대 들어서 일본 언론에서는 마니엘(マニエル) 대신 영어발음에 가까운 마뉴엘(マニュエル)로 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워낙에 일본에서 임팩트가 있었던 인물이라 경력이 좀 오래된 기자들은 아직도 마니엘을 선호한다고.[1] 한편, 한국에서도 매뉴얼 감독의 일본시절 활약을 알고있는 팬들은 '매뉴얼' 대신 'C.마니엘'로 표기한다.


2. 선수 시절[편집]



2.1. 그저 그랬던 메이저리그 생활[편집]


매뉴얼은 고교시절 야구, 미식축구, 농구, 육상을 병행했을 정도로 만능스포츠맨이었다. 본인은 농구에 흥미가 더 있어 장학생으로 대학에 입학할 계획이었지만 그의 아버지가 당뇨·심장 합병증 투병 중에 자살을 하는 바람에 대학 입학을 포기하고 야구선수가 되길 결심했다. 그리고 그는 미네소타 트윈스에 입단하게 된다.

6년 간의 마이너리그 생활을 보내고 1969년에 메이저리그에 콜업됐지만 외야 백업과 대타요원으로 활약, 그 당시 트윈스는 1969 시즌과 1970 시즌에 가을야구에 나갈 만큼 나름 괜찮았던 시절이었던지라 매뉴얼은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자리를 잡기가 어려웠다. 이후 1974년에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이적하게 된다. 이 당시 다저스는 미네소타 트윈스보다도 더한 1970년대 내셔널리그의 깡패팀이라 그에게 기회가 별로 많이 주어지지 않았다. 다저스에서도 대타요원으로만 활약했다. 메이저리그 6년 간 홈런 4개가 고작 전부였던, 별볼일 없던 타자였다. 그런데...


2.2. 야쿠르트, 킨테츠의 첫 우승을 이끈 일본 시절[편집]


1976년, 매뉴얼은 32세라는 나이에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입단하게 되면서 일본프로야구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뛰게 되었다. 첫 해에 새로운 리그에 적응을 하느라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치지 못했지만 2년차인 1977년부터 리그 적응을 완료하며 타율 .316, 42홈런 97타점의 뛰어난 성적으로 야쿠르트의 주포로써 맹활약했고, 이 해 야쿠르트도 창단 이래 최초로 리그 2위를 기록했다.

다음 해인 1978년에도 타율 .312, 39홈런 103타점으로 활약을 이어갔고, 이 해 야쿠르트는 와카마츠 츠토무-오오스기 카츠오-찰리 매뉴얼-스기우라 토오루로 이어지는 강력한 클린업을 구축하며 구단 사상 처음으로 센트럴리그 우승을 거둔 데 이어 일본시리즈 우승까지 달성하는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그러나 당시 야쿠르트의 감독을 역임했던 히로오카 타츠로 감독은 매뉴얼의 느린 발과 엉성한 수비실력을 지적하며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당시 좌완투수가 필요했던 야쿠르트의 사정에 따라 매뉴얼을 킨테츠 버팔로즈칸베 토시오와 맞바꿨다. 그 결과 야쿠르트는 이듬해인 1979년 공격력 악화로 인해 히로오카 감독이 시즌 도중 사퇴하는 내홍 끝에 최하위로 추락하며 노무라 카츠야 부임 전까지 암흑기에 빠지고, 반대로 킨테츠는 리그를 대표하는 거포를 얻으며 기나긴 암흑기를 깨고 퍼시픽리그의 강팀으로 거듭나게 된다.

1979~80년에 매뉴얼은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줬는데, 특히 1979년 시즌에는 97시합 타율 .324 37홈런 94타점, OPS 1.149[2]를 기록하며 양대리그제 이후 외국인 선수로써는 역대 최초 MVP 수상을 달성했고 같은 해 킨테츠를 창단 이래 첫 퍼시픽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3] 시합수가 적은 이유에 대해 일본 시절 매뉴얼의 승부근성이 나타난 에피소드가 있는데, 1979년 시즌 도중 롯데 오리온즈야기사와 소로쿠[4] 던진 빈볼을 맞아 당시 수술 시간만 5시간 반이나 걸리는 심각한 턱뼈 골절상을 당해서[5] 복귀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생겼고 가족들도 부상을 염려하여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가는 것에 반대했지만[6], 결국 킨테츠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말과 함께 부상이 완치되지 않았음에도 출장을 강행했고, 97시합 출장에 그치긴 했지만 상술한 호성적과 함께 팀의 첫 우승을 이끌어냈다. 여기서 다시 주목해야 하는 점은 97경기만 출장했음에도 홈런왕은 물론이요 리그 MVP까지 따냈다는 점인데, 지금보다 외국인 선수에게 평가가 박했던 당시 시대상에다 부상으로 인해 출장 수가 적었음에도 이러한 핸디캡을 극복하고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음을 세간에서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부상을 당한 후 매뉴얼은 야구 헬멧에 미식축구 페이스마스크를 붙인 특수 헬멧을 쓰고 경기에 나섰는데, 이 때 많은 일본 야구팬들이 그 모습에 놀라 아카오니라는 별칭을 붙여주기도 했다.
파일:external/blogimg.goo.ne.jp/2bcddd5e3f8f49ecf7c4a0ed992f29ad.jpg

다음 해인 1980년엔 타율 .325 48홈런 129타점, OPS 1.075을 기록, 홈런-타점 2관왕을 수상하며 퍼시픽리그를 제패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성적으로 킨테츠 버팔로즈의 2년 연속 퍼시픽리그 제패에 공헌했다. 다만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당해 리그 MVP는 아쉽게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신인 투수 키다 이사무에게 돌아가며 2년 연속 수상엔 실패했는데, 외국인 선수에 대한 텃세라기보단 이 해 키다가 22승 225탈삼진 승률 .733, ERA 2.28으로 4관왕을 찍으며 신인으로썬 10년 후의 노모 히데오와 비견할 만한 엄청난 성적을 기록했기 때문에 키다의 임팩트에 밀려 수상에 실패한 것에 가까웠다.[7]

그렇게 킨테츠를 2년 연속으로 일본시리즈로 이끌었지만, 2번 모두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3승 4패로 아쉽게 패퇴하면서 끝내 일본시리즈 제패는 이뤄내지 못했다. 특히 당시 일본시리즈지명타자 제도가 없었던 것이 뼈아팠는데 지명타자가 없는 것 때문에 공격력은 뛰어났지만 수비력이 약했던 매뉴얼을 주포로써 써먹기 위해 킨테츠는 어쩔 수 없이 우익수로 기용해야 했고, 결국 매뉴얼은 타석에서의 활약을 안 좋은 수비로 번번히 까먹으며 팀의 우승 실패의 한 원인이 되고 말았다.

여하튼 자신을 필요로 하는 팀에게 어떻게든 첫 우승을 안기고 싶었던 매뉴얼이었지만 1980년을 끝으로 킨테츠에서 퇴단하게 되는데, 당시 엄청난 자금력으로 좋은 선수들을 싹쓸이하던 세이부 라이온즈시카고 컵스의 강타자 스티브 온티베로스[8]를 3년 100만 달러 계약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입단시켰다는 소식을 듣자 매뉴얼도 킨테츠에게 일본 최고의 외국인 선수에 걸맞게 다년 계약을 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자금 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킨테츠는 단년 계약을 제시하며 매뉴얼의 제안을 거절했고, 결국 구단과의 관계가 틀어지며 매뉴얼은 히로오카 타츠로 감독이 사임한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돌아왔다. 그리고 킨테츠는 이듬해인 1981년에 매뉴얼이 떠난 직후의 야쿠르트처럼 리그 최하위로 추락하며 1989년 다시 퍼시픽리그 우승을 달성할 때까지 9년 간 우승 없이 중상위권~하위권을 오가는 부진을 겪어야 했고, 매뉴얼 역시 이전보다 부진한 성적으로 1981년을 끝마친 채 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3. 지도자 시절[편집]



3.1.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시절[편집]


은퇴 뒤 매뉴얼은 바로 미네소타 트윈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의 타격코치를 맡아 커비 퍼켓을 2년 만에 빅리그로 승격시키며 능력을 인정받았고, 이 후 트윈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 감독을 거쳐 클리블랜드 산하 마이너리그 팀 감독을 맡는 등 차근차근 지도자 경력을 쌓아갔다. 이 시기에 영화 메이저리그가 생각날 정도로 부진했던 인디언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을 재정비하여 좋은 타자를 발굴했고, 성실성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1994년부터 인디언스의 정식 타격코치로 승격된다. 이 당시 알버트 벨, 짐 토미, 매니 라미레스 등의 무시무시한 빅 뱃을 키워냈고 리그에서 가공할만한 타격진을 구축하며 두 차례의 월드시리즈(1995, 1997)를 경험했다.

이후 1999 시즌이 끝나고 은퇴한 마이크 하그로브 감독의 뒤를 이어 감독으로 승격됐다. 2000 시즌에는 갑툭튀한 시카고 화이트삭스에게 밀려 지구 2위를 기록했지만, 2001 시즌에 다시 중부지구 패권을 차지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2002년 마크 샤파이로 단장 취임 후 시작된 팀의 리빌딩과 맞물려 성적추락을 막을 수 없었고, 결국 시즌 중에 자진 사임을 하게 된다.


3.2. 필라델피아 필리스 시절[편집]


2004년 중 사퇴한 래리 보와 감독 이후 임시감독 체제를 거쳐 2005년 필리스는 매뉴얼 감독을 임명했는데, 이는 에드 웨이드 단장의 보기드문 치적으로 평가받는다. 2005년 필리스를 처음 맡아 와일드카드 레이스에서 휴스턴 애스트로스에 한게임차까지 추격했으며, 팻 길릭 단장이 취임하면서 자신의 애제자 짐 토미와 주전 우익수 바비 아브레유 등의 베테랑들을 팔아넘기고 체이스 어틀리, 라이언 하워드, 콜 해멀스, 셰인 빅토리노, 제이슨 워스 등의 프랜차이즈 스타와 타팀에서 주워온 쩌리들을 중용하기 시작한 마당에 팀의 구심점으로 자리잡아 필리스의 5년 연속 디비전 우승과 월드시리즈 제패 등 필리스 역사상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다만 루벤 아마로 주니어 단장이 취임한 이후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9] 매년 은퇴 떡밥이 나오기도 했다.

필리스에서도 인디언스 시절처럼 작전야구나 수비 강화 등 MLB 전체에 비하면 스몰볼로 분류되는, 그런 형태의 동양적인 야구 색채에 큰 관심을 기울였는데, 대표적인 예가 리드오프 지미 롤린스의 뒤에 배치할 2번타자로서 작전야구 구사에 능한 2루수 플라시도 폴랑코[10]를 기용하기 위해 짐 토미팻 버렐이 부상 중이거나 인터리그를 뛸 때 체이스 어틀리를 1루로 돌리거나 폴랑코를 좌익수 3루수로 옮기는 등의 (미쿡 야빠들은 상상도 못할) 갖가지 괴상한 선수기용을 벌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론 라이언 하워드의 신인왕모드 갑툭튀까지 맞물리고 팻 버렐도 돌아오자 폴랑코는 끝내 자리가 없어져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로 떠나게 되었지만, 매뉴얼 감독은 5년 뒤 폴랑코를 다시 3루로 돌려 쓰겠다는 의지를 발휘하며 아마로 단장에게 폴랑코를 다시 데려올 것을 요청하였고, 2010년부터 2012년까지 폴랑코는 필리스의 3루수 겸 2번타자로 활약했다.[11]

2011년 종료 후에는 통산 600홈런을 넘어선 애제자 짐 토미가 대타/1루 백업으로 필리스에 다시 입단하는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

2012년부터 굉장히 많이 까였다. 기본적으로 투수교체 타이밍이나 불펜 운용 등이 썩 좋지는 않다는 평이었지만 타격코치 시절부터 타자 조련에는 일가견이 있는 감독이었기 때문에 까이지 않았는데 투수진의 상태가 점점 막장화하며 아마로 단장과 함께 까임을 양분했다. 그나마 2013년을 끝으로 계약이 만료되고 은퇴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아마로를 더 많이 까곤 하지만, 기자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아서 예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한 기자가 좋지 않은 성적으로 어그로를 끌자 분기탱천하여 "어느 천년에 10득점 경기를 하겠어요?" 하는 빈정거림에 "내가 널 때려눕히고 나면 될걸?" 하는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 사건이 벌어진 2013년 6월 24일 경기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원정에서 경기 후반부로 갈수록 얻어맞아나가면서 불안한 모습을 보이던 클리프 리를 완봉하게 해준답시고 9회초 2사 3루 득점권에서 대타로 교체하지도 않고 놔뒀다가 연속안타 허용한 후 뒤늦게 조나단 파펠본으로 교체했지만 동점 허용하고 연장에서 끝내기 패배까지 당한 날이라서 매뉴얼 감독이 안 까일 수는 없는 날이었다는 것. 팬들은 그저 건강도 안 좋은데 괜히 열불내지 말고 말년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라며 예전같이 실드를 쳐주지 않는, 진절머리가 난 반응을 보였다.

결국 8월 16일자로 해임되었다. 감독대행으로는 코치를 맡던 라인 샌버그. 그 후 필라델피아 구단 프런트 자문 역할을 맡아왔다. 그렇게 끝일 줄 알았는데... 2019년 8월 13일 78세의 나이로 필리스의 신임 타격코치로 부임하였다. 장기적인 이동은 아니고, 남은 시즌경기만 타격코치를 맡을 예정이다.

4. 이모저모[편집]


  • 일본-미국 양국 리그에서 선수-감독으로 가장 성공한 케이스로 손꼽힌다. 그와 비슷한 케이스로는 데이비 존슨 감독(워싱턴 내셔널스)이 있다. 다만, 데이비 존슨은 일본에 가기 전에 메이저리그에서도 괜찮은 내야수였지만 일본에서는 '교진군 최초의 외국인 선수'라는 타이틀만 남았을 정도로 활약이 미미했다.

  • 그의 팀 운영 스타일은 동양 야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2001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감독 재직시절 로베르토 알로마를 3번 타자로 기용하여 당시 미국 야구계에 충격을 선사했다.[12] 이후 2010년 H2O와 2011년 PHantastic 4가 등장하기 전에는 불펜에 중점을 두는 투수진 운영과 빠른 발에 작전 수행능력이 좋은 선수를 상위타선에 배치하는 등의 타선 운영이 그 예다. 이런 타선운영은 2012년 어틀리와 하워드가 모두 부상으로 이탈한 때에도 보였는데, 나이가 들며 장타력이 많이 떨어진 지미 롤린스를 3번에 배치하기도 했다.

  • 2008년 10월 10일 모친상을 당했다. 문제는 그 기간이 필라델피아의 플레이오프 기간이었던 것. 다행히 필리스가 LA 다저스를 상대로 5경기만에 승리를 거두며 월드시리즈에 진출, 우승기념 사진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 감독으로써의 뛰어난 실적에 걸맞지 않게 '올해의 감독상' 수상경력이 없다. 팀의 비밀번호를 끊은 2007년에는 득실차 -를 기록하고도 NL 통합승률 1위를 달성한 디백스의 밥 멜빈 감독에게 밀렸고, 월드 시리즈 우승을 달성한 2008년에는 디비전시리즈에서 광탈한 컵스의 루 피넬라 감독에게 밀렸다. 사실 2008년은 컵스가 1945년 이후로 최초로 6할 승률을 기록했고 NL 전체 승률 1위까지 했으며, 감독상은 정규시즌만 보고 주니까 당연한 결과이다. 97승 팀이 84승 팀한테 3대떡으로 발릴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5. 감독 성적[편집]


역대 감독 전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승률
정규시즌
포스트시즌
2000
CLE
162
90
72
.556
지구 2위
-
2001
162
91
71
.562
지구 1위
DS 탈락
2002
86
39
47
.453
지구 3위
중도 사임
연도
소속팀
경기수


승률
정규시즌
포스트시즌
2005
PHI
162
88
74
.543
지구 2위
-
2006
162
85
77
.525
지구 2위
-
2007
162
89
73
.549
지구 1위
DS 탈락
2008
162
92
70
.568
지구 1위
WS 우승
2009
162
93
69
.574
지구 1위
WS 준우승
2010
162
97
65
.599
지구 1위
DS 탈락
2011
162
102
60
.630
지구 1위
DS 탈락
2012
162
81
81
.500
지구 3위
-
2013
120
53
67
.442
지구 4위
중도 경질
총계
1826
1000
826
.548
WS 1승1패 4DS ­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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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최고의 외국인선수인 워렌 크로마티의 이름을 딴 만화 돌격 크로마티 고교에서 '마니엘 고교'라는 이름으로 차용당하기도 했다.[2] 당시 장타율이 무려 .712에 달했다. 적은 출장수를 생각해도 놀라운 기록.[3] 오 사다하루, 장훈 같은 경우는 외국 국적이긴 하나 일본에서 태어나 성장 및 학교 진학까지 모두 거쳤기 때문에 일본인 선수와 동등하게 간주된다.[4] 은퇴 후 카와사키에서 치바연고지 이전을 한 치바 롯데 마린즈의 초대 감독을 1992~1994시즌 도중까지 역임했다.[5] 사실 일본에 오기 2년 전인 1975년에 강속구에 턱을 맞아 턱벼가 산산조각난 적이 있어서 안 그래도 조심해야 하는 부위였는데 이미 망가진 턱에 또다시 공을 맞는 바람에 턱뼈가 부서져 나가다시피 했고 안면이 심하게 망가져 못쓰게 될 뻔했다. 이 때문에 굉장히 화가 나서 병원으로 찾아와 사죄를 구하려던 야기사와 소로쿠와 롯데 구단 관계자들의 사과를 단호히 거부했을 정도였다.[6] 본인도 부상이 심했던 탓에 처음엔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고려하긴 했다고 한다.[7] 다만 키다는 이 시즌 후엔 기대치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채 부상 및 부진에 헤메다 통산 60승 71패의 성적을 남기고 1990년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은퇴했다.[8] 홈런은 적었지만 메이저리그에서 8년 간 주전 및 백업으로 뛰면서 2193타수를 기록할 동안 1이 넘는 볼삼비를 기록할 만큼 준수한 선구안으로 OPS 8할대를 찍기도 했고, 일본에서도 성공적으로 안착하며 6년 동안 홈런은 적었지만(6년 통산 82홈런, 커리어하이 20홈런) 4년 연속 규정타석 3할을 찍을 정도로 준수한 컨택과 볼넷이 삼진보다 많을 정도의 미친 선구안을 보여주며 6년 평균 OPS가 .876에 OPS 9할 대를 3번이나 찍었다.[9] 인디언스 시절부터 결장 막힘 증세로 인공항문을 달기도 했다고.[10] 작전구사에 있어 필수요소인 밀어치기와 일반적인 당겨치기에 모두 능하여 타구를 모든 방향으로 날려보내면서 3할을 칠 수 있고, 삼진도 잘 당하지 않으면서 내야 수비도 전천후로 뛰는등 여러모로 쓸모가 많아서 좋은 중심타선을 보유한 MLB 감독들이 2번타자로서 가장 선호하는 선수 중 하나다. 역대 두번째로 두개의 포지션에서 골드글러브를 수상하는 기록을 세운 선수기도 하다. 항목 참조.[11] 폴랑코가 없던 시절에는 빅토리노가 2번을 쳤다.[12] 일반적으로 3번 타자는 거포가 자리하는 타순인데, 작전야구를 중시하는 일본에서는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타율 좋은 작전형 똑딱이 3번타자가 유행했고, 이후로도 프론트라인급 강타자가 없는 팀에서 특히 간간히 교타-작전형 3번 타자가 기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