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로버트 젱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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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후 주일미군 기지로 복귀한 후의 모습.

Charles Robert Jenkins
1940년 2월 18일 ~ 2017년 12월 11일

1. 개요
2. 월북 배경
3. 월북 후 처우
4. 탈북과 처벌, 그 후



1. 개요[편집]


주한미군 육군 보병병장[1]으로, 자진 월북한 이후 탈북한 인물.

2. 월북 배경[편집]


1940년 2월 18일 노스캐롤라이나주 출신으로, 1965년 1월 5일 베트남 전쟁에 투입되는 게 두려워서 10여 캔의 맥주를 마신 이후에 만취하여 휴전선을 돌아보겠다며 핑계를 대고 휴전선을 넘었다. 정작 해당 부대는 베트남에 파병되지 않았다.[2]

냉전 당시 서독에서 소련군과 대치 중이던 미군들 중 일부는 전쟁이 진행 중인 베트남으로 차출되어 죽는 것이 두려워서 탈영하여 동독군에 잡혔고 동독은 이들을 소련에 넘겼다. 소련군은 나중에 이들을 미군에 잡혀있던 소련 스파이와의 교환용 협상물로 사용하였고, 탈영병들은 그렇게 귀국하여 징역형을 받았으나 그래도 전쟁터에서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젱킨스도 그리 생각했고 자신도 탈영하면 북한이 자기를 소련에 넘겨주고 소련에서 다시 미국으로 송환할 줄 알고 국경을 넘었다. 즉 본인과 비슷한 시기에 탈영했던 드레스녹과 달리 애초에 북한은커녕 공산권에서 살 생각 자체가 없던 인물이다. 탈영죄로 좀 썩고 불명예전역이나 하고 고국에 돌아와 조용히 살면 그만이라고 여겼던 것인데 그 대가는 상상을 초월했다.

3. 월북 후 처우[편집]


예상과는 달리 북한에서는 젱킨스를 비롯한 월북 미군들의 이용가치를 알고 있었고 끝내 젱킨스는 원하던 바와는 달리 소련에 보내주지 않아서 평생토록 이를 후회하고 뉘우쳤다고 한다. 게다가 본인이 북한에 정착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아서 한국어도 배우지 않았고 북한 생활을 제일 힘겨워했다.[3] 탈북하는 순간까지도 한국말을 거의 한마디도 못하는 수준이었고 불만도 많아 자주 담당자들에게 불만을 토로해서 월북 미군 선배격인 제임스 조지프 드레스녹의 불만을 샀다.

상당한 노안으로, 드레스녹은 젱킨스가 월북했다는 소식을 듣자 '저런 나이도 많은 하사관이 왜 월북한 거지?'라고 의아해했으나 드레스녹보다 고작 1살 많았다고 한다.

당시 미군제식 소총M14를 들고 월북해 다른 월북자들보다 대우가 좋아[4] 은근히 차별의식이 생겼고, 본인은 부사관인데 다른 월북 미군들은 다 병이다 보니까 본인이 계급을 내세워 대장노릇을 하려 해 주위 다른 미국 출신 월북자들과 자주 티격태격했다.

젱킨스가 계급을 내세워서 드레스녹을 휘어잡으려고 할 때마다 드레스녹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효과는 최고로 뛰어난 방법으로 젱킨스를 제압해왔다. 그 방법이라는 게 바로 현피였다. 거진 2m에 가까운 거한인 드레스녹은 젱킨스에게 힘으로는 꿀릴 일이 없었다. 그래서 특히 드레스녹과 사이가 안 좋은데 드레스녹과 싸운 것을 북한이 자기가 말을 안 들을 경우 폭행하게 시켰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드레즈녹은 그 말에 사실이 아니라고 길길이 날뛰기는 했다. 둘이 같이 사진을 찍은 것을 보면 젱킨스가 은근히 드레스녹의 눈치를 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젱킨스의 말에 의하면 북한은 국가가 아니라 그냥 하나의 커다란 감옥이라고 한다. 팔에 새겨진 U.S.Army라는 문신을 제거하기 위해 마취없이 생살을 칼로 뜯어냈을 때는 정말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당시 북한은 마취약이 적어서 총상자 치료에만 썼다고 한다. 제임스 드레스녹은 그 문신을 북한 당국에서 허락을 받아서 떼냈고 마취를 했다고 주장했다.

북한 영화 <이름 없는 영웅들>에서 '출처를 밝힐 수 없는 미국의 방첩기관[5]'의 의장으로 미국의 침략계획을 담당하는 켈튼 박사로 유명했다. 역에 출현 당시에는 앞대머리 분장을 했으며 드레스녹은 비열한 역할임을 설명하면서 젱킨스에게 딱 어울리는 배역이라고 씹어대기도 했다.

북한에서 불임여성들을 성욕 해소용으로 주었으나, 문제의 여성이 굉장한 반미주의자에 젱킨스를 싫어해서 젱킨스도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납북 일본인 여성, 소가 히토미[6]의 영어교사로 배치가 되었는데, 북한 측에서 그에게 소가와 결혼할 것을 종용하였다. 젱킨스는 그 요구에 황당한 소리를 한다고 화를 냈지만 의지할 것 없던 두 사람은 나이 차이와 전혀 다른 성장배경에도 불구하고 결혼하게 됐다.[7]

4. 탈북과 처벌, 그 후[편집]


그 후 20여 년이 지나서 부인의 일시적 방일이 허용되었는데 당시 일본 사회는 그동안 도시전설 취급을 받던 납북 일본인들이 정말로 있었단 사실에 분노와 경악으로 들끓고 있었다. 일본 매체는 연일 귀국한 일본인들이 북한화된 모습을 집중하면서 지금까지 일본을 속여온 북한에 일본인들을 내줄 수 없다고 목청을 높였고 시민사회도 동조했다. 이에 고이즈미 총리는 일시귀국이라는 합의를 번복하고 이들의 영구귀국을 결정하게 된다.

북한 측은 발칵 뒤집혔고 젱킨스에게 일본 정부가 아내를 납치했다고 비난하라고 시켰다. 금슬이 좋았던 젱킨스는 정말로 고이즈미를 마구 비난했는데, 해가 지나도 아내와 재회하질 못하자 술에 취해서 김정일에게 쌍욕을 뱉는 엄청난 짓까지 저질렀다고 한다. 다행히 동석한 북한 간부들이 모두 젱킨스와 친한 사이라서 그 일을 눈감아주었다고 한다. 결국 양국의 줄다리기 끝에 미국과 범죄자 인도 협정이 되지 않은 인도네시아에서 부인과 재회할 수 있게 되었다. 북한 측은 젱킨스의 배급을 늘려주면서 아내를 다시 데리고 북에 돌아오라고 그를 구슬렀지만 동행한 두 딸과 함께 그대로 돌아오지 않고 일본으로 갔다.[8] 드레스녹은, 북한 당국이 젱킨스가 북한을 떠나는 것을 허용해줬다고 주장했다. 사실 거짓말은 아니고 2002년 북일 합의를 깨고 영구귀국하게 된 5명의 일본인의 잔류 가족 8명에 대해 일본 측은 강력하게 송환을 요구했고 이에 김정일이 수락하면서 2004년 5월 고이즈미, 김정일 간에 개최된 2차 북일 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는 일본인 가족 5명을 즉석에서 비행기에 태워서 같이 귀국했으며 2개월 후에 북한에서 소가 히토미 가족도 돌려보내기로 합의하면서 인도네시아를 경유해서 송환된 것. 그가 일본행을 결정하자 북한 관영매체는 "인간의 초보적인 리성마저 저버린 비렬한", "정신병자", "추악한 탈주병", "가롯 유다"라고 갖은 인신공격을 퍼부어댔다.

이때 북한에서 세뇌가 철저히 됐던 두 딸들은 자신들이 자본주의 일본에 갔다는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9] 주일미군 기지에 딸려있는 상점에서 입을 다물지를 못하더니 다시는 북한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걸 보던 젱킨스의 담당 육군 검사가 북한의 주체사상도 겨우 달러 조금이면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웃었다고 한다. 한편 젱킨스는 일본에 입국하자마자 주일미군의 한 육군 기지에 수감되었다.

젱킨스의 아내가 일본인이란 점이 일본에서 엄청난 화제가 되었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가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에게 선처를 부탁할 정도로 일본인들에게 동정을 샀다. 부시는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서 수많은 장병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탈영병을 관대하게 처벌하는 것에 난색을 표했으나 부시가 재선에 성공하면서 젱킨스는 30일 징역형을 받았다. 그래도 부대에 있을 때 누릴 것은 누리면서 부대 내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젱킨스는 법적으로 육군 부사관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육군 피복류 일체와 근속 기간 중 받을 수 있는 훈장 등을 재지급 받았으며, 부대 내 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보직도 배당받아서 월급과 수당도 받았다고 한다. 선고된 30일 중 모범수로서 5일 감형되어 총 25일간의 영내 감금 겸 근무를 마쳤다. 탈영 전과 및 고령으로 인한 현역 복무 부적합 사유와 육군에서 이병으로 강등 및 군인연금 등 각종 전역 장병 혜택 대상에서 제외되는 불명예 퇴역 처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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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미육군 기지에서 퇴역 전 그간 밀린 급여 등에 대한 수령 확인서에 서명하는 젱킨스 병장.

석방 이후 부인의 고향인 일본 사도 섬에 정착해 아내와 함께 기념품 가게를 운영하였으며, 금슬 좋은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나름 유명인사다 보니 그를 보러 오는 관광객들이 제법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지자체에서 관광 진흥에 도움을 준 공로를 인정하여 감사패를 전달하기도 했다.

2005년에는 부인과 두 딸을 데리고 미국을 방문했다. 탈영해서 월북한지 40년 만에 처음 방문하는 미국 방문이었으며, 자신의 고향 버지니아를 방문하여 90세가 넘은 나이로 살아있던 어머니와 형제 등 가족들과 재회했다.


미국 방문 당시의 영상.

이후 <고백>이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출판했다. 위에 언급된 문신을 칼로 떼냈다거나, 드레스녹에게 30여차례 두들겨 맞았다거나 하는 내용은 여기서 나왔다. 한국에도 출판, 번역되어 시중에서 구해 읽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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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의 모습으로, 당시에는 정정했다.

2017년 12월 11일, 자택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부정맥으로 사망했다. 기사 노환이 원인인 것으로 보이며 동료였던 드레스녹은 2년 전 흡연비만 등이 원인으로 보이는 성인병중풍으로 투병하다가 1년 전 평양에서 사망했다.

사람에 따라 그의 일생을 다르게 평가할 수 있겠으나, 미국 정부 입장에서 볼 땐 탈영병일 뿐이다. cold war defector list[10]에도 이름이 올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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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의 계급은 Sergeant로, 대한민국 국군병장에 해당한다.#[2]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베트남 전쟁에서의 계속되는 실전에 염증을 느끼던 국민들의 여론을 씹고 계속해서 군사를 파병한데다, 이에 대한 비난을 피하고자 나중에는 파병 사실을 일부 숨기거나 축소해서 밝히는 병크까지 벌인 탓에, 군인들 사이에서 언제든 자신들도 파병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다. 젱킨스가 괜한 걱정을 한 게 아니다.[3] 위에도 언급된 대로, 처음부터 북한에서 살려는 작정으로 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4] 귀순이나 투항시 아군의 무기를 가저가면 아군의 전력손실이자 적성무기를 온전히 획득하여 연구할수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삐라 등으로 유혹하곤 했다. 실제로 겨울전쟁 당시 소련군도 핀란드군을 상대로 탱크는 얼마, 전투기는 얼마 하는 내용의 삐라를 날린 적이 있다.[5] 영화 속의 정식 명칭이다.[6] 납북될 당시 19세의 간호조무사로 어머니와 함께 시장에 다녀오다가 어머니도 함께 납치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북한이 일본인 납치를 시인하고 일본 귀국을 허용할 때 소가의 어머니는 그 명단에 없었다. 소가 히토미 본인도 북한에서 단 한번도 어머니를 보지 못했고, 납북 일본인 가운데에서도 그를 봤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으로 보아 일본에서 납치해서 북한으로 건너오는 도중 사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이 있다.[7] 북한 측에서 소가와 결혼하라고 하면서 했던 말은 그냥 확 덮쳐버리라는 얘기였다. 그 때문에 젱킨스가 심하게 화를 냈었다. 그런데 나중에 젱킨스가 소가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북한 당국자들은 경악해서 무슨 짓 한거냐고 물었다고 한다.[8] 냉전기에 소련에 납치되거나 소련망명한 미국인들이 다시 자유세계로 합법적으로 넘어오는 고전적인 수법이다. 물론 그 와중에 높으신 분들의 막후합의가 있지만.[9] 젱킨스가 90년대에 중국에서 밀수된 할리우드 영화 비디오 테이프 몇편을 보여줬지만 학교에서 배운 미국과 다르다고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10] 미국이 냉전기간 중 전선에서 이탈한 자국민들을 정리한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