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린드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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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린드버그의 주요 수상 및 수훈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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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명예 훈장 수훈자
파일:미국 육군 명예훈장.jpg
날짜
1928년 3월 21일
이름
찰스 린드버그








찰스 린드버그
Charles Lindbergh


파일:lindbergh.helmet.0014.jpg

본명
찰스 오거스터스 린드버그[1]
Charles Augustus Lindbergh
출생
1902년 2월 4일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사망
1974년 8월 26일 (72세)
미국 하와이주 마우이섬 키파훌루
직업
비행사, 작가, 발명가, 탐험가, 사회활동가
신체
191cm
학력
위스콘신 대학교 기계공학(중퇴)
배우자
앤 모로 린드버그 (1929년 결혼)
자녀
9남 4녀[2]
종교
개신교
서명
파일:찰스 린드버그 서명.svg

1. 개요
2. 생애
2.1. 대서양 횡단
2.3. 2차대전 전후의 행보
3. 가족
4. 기타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www.wasco.co.kr/HIS_007_1.jpg
자신의 비행기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와 함께
비행기로 대서양(뉴욕-파리 구간)을 착륙 없이 단독으로 횡단한 세계 최초의 주인공.[3]

기본적으로는 항공사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비행사지만, 정치적으로는 열렬한 대외 고립주의자로서 그 연장선상에서 2차대전을 앞두고 반유대주의 및 친나치 행보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 생애[편집]


파일:chales August.jpg
아버지인 찰스 오거스트 린드버그와 함께 찍은 사진
당시 미네소타 주에서 하원의원을 지낸 찰스 오거스트 린드버그와 이밴절린 로지 랜드 린드버그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디트로이트 출신으로 텍사스의 육군비행학교를 졸업하고[4] 1925년 예비역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harles_Lindbergh_1925.jpg
1925년의 모습

1925년 10월, 우편항공기[5] 조종사로 일했다. 얼마 뒤 33시간동안 미국~프랑스 대서양 무착륙 단독비행을 해서 세계적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로 이주하여 생리학자 알렉시 카렐과 함께 장기를 몸밖에서 산채로 보관하는 카렐-린드버그 펌프를 만들었다.[6] 이렇게 육군 본부에 들어가기도 하고 미국에서 민간인으로 살다가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전쟁에 참가하기도 하고, 미국 예비역 공군 준장이 되기도 하는 등 한 마디로 인생의 절반 이상을 비행에 쏟은 인물.


2.1. 대서양 횡단[편집]


파일:UCLYi39.jpg
1927년, 33시간 무수면 단독 비행을 마치고 파리에 도착한 뒤 린드버그의 비행기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
린드버그는 후술한 명언 인용구에서 보듯 파리 시간으로 밤 10시에 도착했으므로 도착 순간은 아니다.

"날개여, 저것이 파리의 불빛이다."


1927년 5월 21~22일에 걸쳐 약 33시간 동안 미국~프랑스 대서양 무착륙 단독비행을 해서 세계적 영웅이 되었다. 린드버그가 최초로 대서양을 날아서 횡단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 린드버그는 67번째로 대서양 비행에 성공한 사람이며, 정확히 표현하면 무착륙 단독으로서는 최초로 성공한 사람이었다. 참고로 대서양을 비행기로 무착륙 횡단한 것은 린드버그보다 거의 10년 전인 1919년, 존 알콕과 아서 브라운이라는 두 영국인이 영국회사 빅커스 비미의 비행기로 뉴펀들랜드를 출발하여 아일랜드에 도착한 것이 처음이다. 사실 도착지가 파리였던 덕에 유명해져서 앞의 66명이 희미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 탓에 린드버그의 횡단이 최초인 것처럼 알려져버린 탓이 크다. 참고로 도착지가 파리였던 것은 대서양 횡단에 25000달러의 상금을[7] 건 대부호 레몽 오르테그(Raymond Orteig, 1870~1939년 6월 6일, 당시 뉴욕시티 호텔 소유주)가 목적지를 뉴욕-파리 코스로 지정했기 때문이다.[8][9] 웃긴 것은 리플리('믿거나 말거나(Believe it or not)'의 그 리플리 맞는다)가 비행선을 포함해 당시 린드버그의 비행 이전 25명이 대서양을 날아 횡단했다고 하자 미국에서 애국심의 부재를 질타하는 편지 2만 5천통이 쏟아졌다는 것이다. 사실 대서양 최초 무착륙 횡단이 영국인들이 영국제 비행기로 영국 식민지(현 캐나다)에서 영국(현재 아일랜드)까지 비행해 영국인이 건 상금을 받은 것이었고, 린드버그는 미국인으로서 미국제 비행기로 대서양 위의 섬들 따위가 아니라 진짜 북미와 유럽대륙인 미국에서 프랑스까지 날아 미국인이 건 상금을 받은 것임을 고려하면, 이는 국민적 자존심 대결의 성격이 짙었다.

아무튼 대단한 모험이기는 한데, 린드버그가 탔던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Spirit of St.Louis)"[10]는 굉장히 작고 가벼운 비행기였기 때문에 2명 이상이 탑승할 크고 엔진이 여러 개 달린 비행기를 준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경쟁자들에 비해서 더욱 돋보였다.[11] 린드버그의 전기를 보면 그가 출발하기 전에 시도한 르네 퐁크가 4명이나 탑승할 수 있고 침대까지 탑재한 비행기를 사용했다가 중량이 너무 무거워 이륙하지 못하고 불길에 휩싸인 사례가 나오는데, 린드버그는 그래선 안 되고 1그램이라도 무게를 줄여야 한다고 계속 생각했다.

이렇게 작은 비행기를 선택한 건 교대할 수 있는 예비 조종사가 타거나 엔진이 추가로 달려 비행기가 크면 클수록 연료 소비량이 오히려 더 커진다는 판단 때문. 실제로 린드버그는 육분의, 조명탄, 무전기, 전등, 심지어 위험에 대비한 낙하산조차 챙기지 않았다고 한다. 자기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짐을 모두 버리고 지도조차도 필요 없는 부분은 잘라내버리는 철두철미함을 보여줬다. 이렇게 해서 그 작은 비행기에 1703리터(2750갤런)의 연료를 실었고 항속거리는 7200km가 되었다. 필요한 비행거리는 5760km이므로 비행기의 능력은 충분했다.[12] 이때 어찌나 연료를 많이 실었는지 연료통이 시야를 가려 잠망경을 개조해서 앞에 단 뒤 그것에 비행을 의존해야 했다고 한다.[13] 게다가 훗날 알려진 사실이지만 비행 전날 정비공이 연료를 넣던 도중 실수로 호스를 놓쳐 연료관이 호스로 막혔고, 이에 정비공은 몰래 그 부분을 절단한 뒤 다시 납땜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납땜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 하마터면 비행 중에 비행기 연료가 샐 뻔 했다.

린드버그의 비행에서 가장 큰 난관은 혼자 있으면서도 33시간 동안 을 자지 않아야 했던 것이다. 조종간 잡고 있는 사람이 린드버그 뿐이고 특별히 자동 조종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니, 깜빡 잠들기라도 하면 그 즉시 대서양으로 다이빙 하게 된다. 말 그대로 "잠자지 마! 잠들면 죽어!" 무게를 줄이려고 음식물도 샌드위치 다섯 조각과 물 1리터밖에 싣지 않았기 때문에 배고픔과 갈증에도 시달려야 했다. 화장실변기도 없는 만큼 나올 게 있어서도 곤란했고.

비행 도중에 각성제를 좀 쓰기도 했는데 크게 도움은 안 되었던 듯.[14]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비행장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인사만 하고 일단 호텔에 가서 잠부터 푹 자고 나왔다. 이래서 린드버그 위인전을 읽으면 "잠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어쨌든 이 업적으로 1928년 3월 21일, 의회의 동의를 얻어 캘빈 쿨리지 대통령에게 의회 명예훈장을 수여받았다#.

2.2. 아들 유괴사건[편집]


여기까지는 인터넷 백과사전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린드버그에게는 끔찍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파일:external/3.bp.blogspot.com/charles-lindbergh-son-kidnapped.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찰스 린드버그 주니어 유괴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3. 2차대전 전후의 행보[편집]


파일:1937.jpg
1937년, 독일을 방문한 찰스 린드버그[15]

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미국에서 가장 열렬히 고립주의, 참전 반대를 주장했고, 히틀러나치를 편들었으며 우생학에 바탕을 둔 인종차별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이를 흡족해한 나치가 제국 훈장을 수여할 정도. 반면 본국에서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 린드버그의 행실을 비판하였고, 당시 육군 항공대 대령이던 린드버그는 군을 떠났다.

파일:external/www.charleslindbergh.com/medal.gif
“나치 포장, 참 잘했어요
삽화 왼쪽의 '인류를 위하여' 문구가 압권이다.

그러다가 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이전의 태도와는 달리 참전하겠다고 나섰다. 나치가 옳다는 견해는 그대로고 나치와 싸우려는 것은 미국의 실수지만, 자기는 미국인이므로 어쩔 수 없이 미국의 참전을 지지한다고 천명했다. 군 출신이긴 하지만 나름 나이도 40대고 유명인물이고 해서 입대는 거부당했는데, 그 대신 조종교관과 기술고문 역할을 맡았다. 민간 기술고문으로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 초기형의 개량을 담당하기도 했다. 종전 무렵에는 꾸준히 군부를 설득해서 민간인 신분이었지만 태평양 전선의 전투기와 폭격기 조종을 맡아서 50여 차례 임무를 수행했으며, P-38으로 정찰기 1기도 격추한다.

민간인이 어떻게 전투 임무에 참가했는지 의아할 수도 있는데, 린드버그는 대서양 횡단을 성공시킨 만큼 비행기 연료절약과 항속거리 증가에는 전문가 취급을 받았고 항속거리 문제가 중요한 대서양 전장에서 이 관련 연구와 교육을 위해 비행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물론 실제 상황에서 어떻게 되는가를 봐야 하니 전투임무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적기와 마주치면 당연히 자기방어도 할 수 있어야 했으니 격추도 할 수 있었던 것.

종전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추천으로 예비역 공군 준장이 되기도 했다. 이후 말년에는 당시 미국플래그 캐리어였던 팬 아메리칸 항공[16]자문도 하고[17] 자서전도 집필하는 등 노년을 보내다가 1974년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3. 가족[편집]


  • 린드버그의 장인은 부호에 외교관이자 미국 상원의원을 지낸 고위 정치인 드와이트 모로 (1873~1931)이며 1927년 모로의 딸인 앤 모로와 결혼하면서 정치적으로 꽤 유명인이 되었다. 다행인지 몰라도 장인 모로는 손자인 찰스 린드버그 주니어가 죽기 1년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 손자의 비참한 죽음을 못 보았다.

  • 린드버그의 가족 역시 나름 탄탄한 집안이었는데 아버지는 미국의 1차대전 참전을 반대한 하원의원 찰스 린드버그(1859~1924)다.
좀 웃긴 일화가 있는데 원래 아들이 조종사가 되는 걸 반대했지만 아들이 조종하는 비행기를 생전 처음 타보곤 이렇게 기분 좋은 적이 없었다며 이후로도 아들에게 비행기 태워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 아내 앤 모로와의 사이에서 찰스(1930 ~ 1932) , 존(1932 ~ 2021) , 랜드 모로(1937 ~ ) , 앤(1940 ~ 1993) , 스콧(1942 ~ ) , 리브(1945 ~ ) 등 4남 2녀를 두었는데, 2003년에 그가 1950년대 후반부터 유럽에서 세 명이나 되는 정부들을 두고 아이들까지 낳았단 사실이 밝혀졌다. 모자제작자 브리짓 헤스헤이머(Brigitte Hesshaimer)와의 사이에서 2남(데이비드David, 더크Dyrk) 1녀(아스트리드Astrid), 그녀의 여동생인 화가 마리에트에게서 바고(Vago)와 크리스토프(Christoph) 2남, 개인비서 발레스카(Valeska)에게서 이름 불명인 1남 1녀를 두었던 것. 심지어 죽기 열흘 전에 세 여성에게 보낸 편지로 자신이 죽은 후에도 자신들의 관계를 비밀로 하라고 했다. 이 아이들은 2년에 한 번이나 며칠 정도만 아버지를 만났다고 하며, 한동안 자신들의 아버지의 이름이 린드버그가 쓰던 가명인 커로 켄트(Careau Kent)라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막내딸 리브가 이들을 만나기도 했다.[18]

  • 그의 차남인 존은 형의 유괴로 실질적인 장남으로 자랐고, 아버지처럼 모험가 기질이 있는지 해군이자 잠수부로 활동해 잠수기록을 세웠다. 이후 심해 잠수부로 활동하다 은퇴하고 신장암에 걸려 투병하다 2021년 8월 8일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4. 기타[편집]


  • 타임지가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의 초대 선정자다. 1927년 타임지에서 한가한 주에 뉴스거리가 될만한 이야기를 선정하려고 했었는데 마침 그 해에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 비행을 커버 스토리로 싣지 않기로 결정했던 상황이었고 이러한 편집국장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연말에 린드버그를 올해의 인물로 수상한 것이 그 시초였다.

  • ~버그라는 성 때문에 유대인으로 아는 경우가 있다. 국내에 나온 유대인 관련 책자에서도 유태인 유명인물 목록으로 그도 유대인이라고 엉터리로 나왔는데 이 책자가 성씨만 보고 무작정 유대인이라고 소개한 게 허다했다. 덕분에 글래드스턴이나 찰턴 헤스턴, 그리고 스티븐 소더버그도 유대인이라고 엉터리로 나왔었다. 소더버그처럼 성씨를 보면 알겠지만 유대인들이 많이 쓰는 성씨인 Berg가 아니다.
북유럽계들이 많이 쓰는 성씨인 Bergh처럼 유태인이 아닌 성씨로 린드버그 또한 북유럽 이민자 후손이다. 북유럽뿐만 아니라 독일, 오스트리아 등 게르만계 국가에서도 Berg는 산을 뜻하는 흔한 성씨로 과거에는 배수시설이 좋지 않아 고지대에는 귀족이나 부유층들이 살았는데 평민들도 고지대 출신으로 인정 받고 싶은 마음에 근대에 이르자 성에 너도나도 Berg를 붙여 썼다. 2차대전 이전까지 미국에서는 오히려 독일계 성씨로 인식했다가 이후 독일식 성을 가진 독일계 유대인들이 대거 이주하면서 유대계 성씨라는 오해를 받는 흔한 성씨.
린드버그는 1956년 제2차 중동전쟁 당시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을 전쟁 도발국가로 비난하여 반유대주의자라는 비난을 들었고 이러한 비난에 격분한 린드버그는 "이스라엘을 비난하면 무조건 히틀러의 졸개냐!" 라고 반론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고조되는 가운데 유대인과 영국, 루스벨트 행정부가 미국을 전쟁으로 내몰기 위해 음모를 획책하고 있다며 반유대주의와 고립주의를 역설하고 다녔다. 물론 비난도 있었으나 워낙에 영웅으로 추앙받았고, 막상 전쟁이 터지자 비록 나치는 아니라도 스스로 공군에 자원하여 일본군에게 손수 폭격하며 활약하며 훈장도 받고 공군 준장에 올라 전쟁영웅으로서도 추앙받았으니 비난은 적었다.

  •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오리엔트 특급살인에서 사건의 발단이 되는 유괴살인 사건이 바로 위에 있는 린드버그 유괴사건을 모티브로 삼있다. 린드버그 일가는 나름대로 추스리고 살았지만 소설 속에선 일가족이 비참하게 무너진다.

독일 함부르크의 어떤 생쥐[19]가 인간들의 쥐덫을 피해 미국뉴욕으로 도망간 다른 생쥐 친구들을 찾기 위해 배를 타려다가 고양이 때문에 실패한다. 이후 하수도에 숨은 생쥐는 어둠 속에서 나타난 박쥐를 보고 영감을 얻어 글라이더를 만들고, 글라이더가 실패하자 수제 증기 엔진을 단 글라이더를 만들고, 너무 무거운 증기 글라이더를 개량해서 가볍게 날아갈 수 있는 비행기를 만들어서 함부르크를 탈출해 대서양을 횡단해 뉴욕에 착륙한다는 놀라운 이야기.


  • 유희왕에서는 린드버그의 이름과 고블린으로 말장난을 한 고블린드버그라는 카드가 있다. 일러스트에도 비행기가 그려져 있다.

  • 미키마우스의 데뷔작인 미친 비행기에서는 찰스 린드버그가 미키마우스의 우상이라는 설정이 존재하였다. 미키는 우상인 린드버그처럼 멋진 비행을 하기 위해 비행기를 제작하지만 추락하는 걸로 엔딩난다.


  • 위 게임의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 휴이 롱을 지지하며 그에게 기업가들과 연줄을 만들어 준다. 2차 미국 내전에서 휴이 롱의 미 연합국이 승리하면 기업들이 휴이 롱을 제거하고 반 혼 모즐리를 내세워 미국을 기업 국가로 만들 수 있다.



파일:aviator-charles-lindbergh-1902-1974-famed-for-making-the-first-solo-BN684R.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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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른 이름은 찰스 A. 린드버그 2세. 이름과 이니셜이 같기 때문인데, 아버지 이름을 물려받은 건 아니다. 중간이름이 다르기 때문. 이 문서의 인물은 Augustus이고 아버지 쪽은 August이다.[2] 4남 2녀는 배우자와의 사이에서 얻었다. 5남 2녀는 사생아.[3] 사실 이전에도 대서양을 비행하여 횡단한 사람은 몇 명 있었다. 린드버그는 현상금이 걸려 있던 뉴욕-파리(이 경우 뉴펀들랜드-아일랜드보다 훨씬 길어진다) 구간을 정복한 최초의 비행사다. 후술 참조.[4] 당시 미국에는 아직 공군이 독립 군종이 아니었다.[5] 처음에는 우편사업을 정부에서 진행했으나, 점점 오고가는 우편물이 증가하고 잦은 실수로 인한 배송사고도 많았던지라 민간 항공기업에게 면허제로 맡기는 '항공 우편법'이 제정되었다. 린드버그야 불세출의 비행사였던 만큼 실수는 별로 없었지만 시야를 확보하기 힘든 야간 비행, 수도 규모도 시원찮은 비행장들, 어긋나기 일쑤인 기상예보 등 꽤나 열악한 비행 환경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6] 다만 당시에는 장기 이식이 별로 발달하지 못했다.[7] 1919년에 대서양을 무착륙 횡단한 2명의 영국인들 역시 데일리 메일지가 건 1만 파운드의 현상금을 노리고 참가했었다.[8] 오르테그 상은 1919년에 선언됐으며, 무착륙으로 뉴욕과 파리를 연결하기만 하면 그 외에는 어떤 제한도 두지 않았다. 그래서 린드버그 1인승 비행기를 준비하고 다른 사람들은 대형기를 준비한 것이다.[9] 여담으로 린드버그가 오르테그 상에 도전하려고 한 동기는 큰 비행기를 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 비행기가 매우 비쌌으므로. 헌데 사실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 호도 그 대형기에 비해 싸다 뿐이지 엔진과 부분품 없이 1만 달러 견적이 나오는 비행기였다. 딱 소형기에 걸맞은 가격인 셈.[10] 린드버그의 비행을 후원하고 비용을 대 준 사람들이 세인트루이스의 기업가들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했다. 린드버그는 본래 당대의 최고 비행기 제작사였던 드라이모터나 벨란카의 후원을 받으려고 했지만 "이름도 없는 놈이 지원은 무슨"이라는 냉대만 받았다고 한다. 린드버그가 이 상에 도전한 이유도 벨란카의 항공기를 살 돈이 필요해서였는데. 이 비행기의 값은 무려 2만 9천 달러였다. 결과적으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득을 보았지만.. 린드버그의 경쟁자였던 버드 중령은 백화점 재벌 워너메이커의 지원을 받아 린드버그가 갖고 싶어했던 바로 그 비행기를 이용해 도전하려고 했는데, 린드버그가 출발하기 전까지 비행기가 준비되지 않아 출발도 못하고 패했다.[11] 당장 린드버그 바로 다음에 시도한 체임벌린도 엔진이 2개인 크고 아름다운 비행기를 사용했다. 린드버그 직전에 도전한 프랑스 비행사들인 샤를 뇡제세(Charles Nungesser), 프랑수아 콜리(François Coli)도 이인조 팀으로 시도했으나 이들은 대서양 어딘가에서 행방불명되었다. 다른 설로는 대서양은 건넜는데 메인주쯤에 추락한 거 같다는 설도 있다. 추측으로는 연료가 바닥나 추락했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앞의 4인승 비행기와 더불어 린드버그가 연료의 탑재량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계기가 되었다.[12] 다만 린드버그보다 1주일 뒤에 시도한 2인승의 컬럼비아호도 성공했다. 이쪽은 조종사 1명에 승객 1명이었으므로 교대를 할 수 없었기에 사실상 이 조종사도 혼자 대서양을 건넌 셈이다.[13] 정확히는 린드버그 본인의 요청으로 주연료통이 좌석 앞에 설치되었다. 다른 도전자가 좌석 뒤에 있던 연료통이 앞쪽으로 쏠려 압사당하는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의 사진을 보면 좌석문과 프로펠러까지 상당한 거리가 있는데 이 부분에 연료통이 들어가있는 구조였다.[14] 이 시절에는 각성제가 전혀 금지품목이 아니었다. 심지어 2차대전 때는 추축국이건 연합국이건 병사들에게 마구 때려부었다. 심지어 구 동독군에서는 1988년까지 지급했다. 히로뽕 또한 일본 제약사의 상품명이며 자세한 것은 히로뽕 참조.[15] 시대상을 반영한 듯, 뒤쪽에 하켄크로이츠가 찍혔다.[16] '팬암'이라는 약칭으로 더 유명하며, 1991년에 경영난으로 파산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이용하는 거의 모든 항공 루트와 보잉 747의 개발에 참여하는 등 항공 역사에 엄청난 발자취를 남겼으며, 전성기에는 코카콜라와 비견될 정도로 국제적인 인지도를 가진 항공사였다.[17] 팬암이 최초로 발주한 최초의 현대식 제트 여객기인 보잉 707의 개발에도 직접적으로 관여했다고 한다.[18] 린드버그의 독일 사생아들 사진. 거의 붕어빵인 듯... #[19] 도서관에서 인간들의 책을 읽을 정도로 호기심이 많은 생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