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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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8379242-641F-4E16-9EC4-4DDE7A61F63B.png 스미스소니언 선정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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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미국 정부가 운영하는 국립 교육재단 스미스소니언 재단의 잡지, 스미스소니언 매거진이 “미국사 가장 중요한 100인의 인물”을 선정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뽑았기 때문에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고 부정적인 인물들도 있다.
개척자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헨리 허드슨 | 아메리고 베스푸치 | 존 스미스 | 조반니 다 베라차노 | 존 뮤어 | 메리웨더 루이스 | 사카자위아 | 키트 카슨 | 존 웨슬리 파월 | 닐 암스트롱
혁명가 & 저항가들
마틴 루터 킹 | 로버트 E. 리 | 토머스 페인 | 존 브라운 | 프레드릭 더글러스 | 수전 B. 앤서니 | W. E. B. 듀보이스 | 테쿰세 | 타탕카 이요탕카 |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 말콤 엑스
대통령들
조지 워싱턴 | 토머스 제퍼슨 | 율리시스 S. 그랜트 | 우드로 윌슨 | 에이브러햄 링컨 | 제임스 매디슨 | 앤드루 잭슨 | 시어도어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로널드 레이건 | 조지 W. 부시
첫 여성들
포카혼타스 | 엘리너 루스벨트 | 힐러리 클린턴 | 마사 워싱턴 | 오프라 윈프리 | 헬렌 켈러 | 소저너 트루스 | 제인 애덤스 | 이디스 워튼 | 베티 데이비스 | 세라 페일린
범법자들
베네딕트 아놀드 | 제시 제임스 | 존 윌크스 부스 | 알 카포네 | 빌리 더 키드 | 윌리엄 M. 트위드 | 찰스 맨슨 | 와일드 빌 히콕 | 리 하비 오즈월드 | 러키 루치아노 | 존 딜린저
예술가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 앤디 워홀 | 프레데릭 로 옴스테드 |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 잭슨 폴록 | 존 제임스 오듀본 | 조지아 오키프 | 토머스 에이킨스 | 토머스 내스트 |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 앤설 애덤스
종교인들
조셉 스미스 | 윌리엄 펜 | 브리검 영 | 로저 윌리엄스 | 앤 허치슨 | 조너선 에드워즈 | 라파예트 로널드 허버드 | 엘런 화이트 | 코튼 매더 | 매리 베이커 에디 | 빌리 그레이엄
팝 아이콘들
마크 트웨인 | 엘비스 프레슬리 | 마돈나 | 밥 딜런 | 마이클 잭슨 | 찰리 채플린 | 지미 헨드릭스 | 마릴린 먼로 | 프랭크 시나트라 | 루이 암스트롱 | 메리 픽포드
제국-건설자들
앤드루 카네기 | 헨리 포드 | 존 D. 록펠러 | J. P. 모건 | 월트 디즈니 | 토머스 에디슨 |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 하워드 휴즈 | 빌 게이츠 |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 스티브 잡스
운동선수들
베이브 루스 | 무하마드 알리 | 재키 로빈슨 | 제임스 네이스미스 | 아널드 슈워제네거 | 타이 콥 | 마이클 조던 | 헐크 호건 | 짐 도프 | 세크리테리엇 | 빌리 진 킹
출처



찰스 맨슨
Charles Ma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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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찰스 마일즈 맨슨
Charles Milles Manson
출생
1934년 11월 12일
미국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
사망
2017년 11월 19일 (향년 83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베이커스필드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직업
前 음악가
신체
147cm[1], 35kg, O형
IQ
109
배우자
로잘리 윌리스 (1955년 ~ 1958년, 이혼)
캔디 스티븐스 (1959년 ~ 1963년, 이혼)
자녀
2명
죄목
모살, 모살 음모 등[2]
형랑
사형(1972년 종신형으로 감형)
수감처
코르코란 캘리포니아 주립교도소
종교
사이언톨로지교[3]
서명
파일:Charles_Manson_signature2.svg

1. 개요
2. 생애와 행적
2.1. 출생 및 성장
2.2. 맨슨 패밀리
2.3. 폴란스키 가 살인 사건
2.4. 이후
2.5. 사망
3. 음악
3.1. 음반
4. 기타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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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찰스 맨슨.jpg

미간에 하켄크로이츠 문신을 하고 있는데, 원래는 X자 모양이었으나 재판 도중에 덧그렸다고 한다.

미국연쇄살인범.

소위 맨슨 패밀리라고 불리는 범죄 집단을 이끌었으며, 1969년로만 폴란스키의 아내인 샤론 테이트와 그 친구들을 살해하도록 사주한 것으로 악명 높다. 이 사건으로 맨슨은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4]

살인 집단의 리더였지만 본인이 직접 살해한 것도 아니고, 다른 유명 연쇄살인마에 비해 죽인 숫자가 적음에도 거의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연쇄살인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우 유명한 인물을 살해한 데다 당시 희생자의 유족이 아직 활동 중인 로만 폴란스키이고, 히피 문화의 몰락이라는 시대적 흐름의 원인이 되는 등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살인마로 꼽히는 데다 아직도 엄청난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2. 생애와 행적[편집]



2.1. 출생 및 성장[편집]


1934년 11월 12일 오하이오 신시내티 출생으로, 당시 성씨는 매덕스(Maddox)였다. 맨슨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흑인 혈통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인종주의자가 알고 보니 유색인종의 자식이더라' 식의 자극적인 내용 탓에 퍼진 소문일 뿐 별 근거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새아버지인 윌리엄 유진 맨슨(William Eugene Manson, 1909 ~ 1961)의 이름을 따라 개명하여 맨슨(Manson)이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다.

찰스 맨슨은 어린 시절부터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맨슨의 어머니 캐슬린(Kathleen, 1919 ~ 1973)은 알코올 의존증을 앓고 있었고, 맨슨의 주장에 의하면 창녀였다. 그를 기르던 어머니와 삼촌이 강도질을 벌이다 체포되자 찰스 맨슨은 이모 집에 맡겨졌다. 몇 년 후 출소한 캐슬린은 짧은 기간 동안 이곳 저곳을 전전하며 맨슨을 기르려 노력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자 위탁 가정에 맡기려 했지만 그것마저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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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맨슨이 16세였을 때 찍은 사진
결국 캐슬린은 그를 엄격한 규율을 가진 한 가톨릭 수도원에 맡겼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교육의 일환으로 구타와 체벌로 두들겨 맞고 맨슨은 견디지 못하고 그곳을 탈출하여 절도를 저지르다가 붙잡혔다. 경찰 당국은 그를 곧바로 감옥에 보내는 대신 청소년 교화시설에 수용했다. 찰스 맨슨의 주장에 의하면 그는 그런 시설에서 다른 소년들에게 여러 번 성적으로 학대 당했다고 한다. 그는 그 곳에서 도망갔다가 다시 붙잡혔고, 이후로도 맨슨은 여러 교화시설을 거쳤다. 그러나 여러 번의 갱생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맨슨은 끝내 시설에서 탈출해 강도질이나 절도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 결국 맨슨은 소년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맨슨은 그곳에서 모범적인 처신을 하였고, 1954년 가석방되어 이모의 집에서 살다가 1955년 독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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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맨슨의 결혼사진[5]
찰스 맨슨은 20세 때 5살 연하의 소녀 로절리와 결혼했고, 처음 몇 달 간은 평범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궁해지자 그는 또 절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찰스 맨슨은 임신한 아내와 함께 자신이 훔친 를 타고 다른 주로 떠났고, 얼마 안 가 덜미를 잡혀 자동차 절도로 기소되었다. 그는 처음에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으나 결국 1956년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의 아내인 로절리 진 윌리스는 그 해에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아직 맨슨이 수감되어 있을 때였던 1957년에 그녀는 아들을 데리고 트럭 운전사와 함께 도망쳤다. 그러자 찰스 맨슨은 가석방 심사가 2주도 안 남은 시점에서 또 자동차를 훔쳐 빠져나가려다 실패했다. 그는 옥중에서 이혼했고, 1958년 석방되었다. 이후 로절리와 맨슨의 아들인 찰스 맨슨 주니어(1956.4.10 ~ 1993.6.29)는 아버지의 이러한 끔찍한 범죄 행위에 충격을 받아 1993년 37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1958년에 석방된 이후 맨슨은 강도, 강간 등 강력 범죄를 일으키며 교도소를 제 집 드나들듯 했고, 맨슨 패밀리 사건을 일으키기 전까지 장장 17년을 연방 교도소에서 썩게 된다. 비틀즈의 열렬한 팬이던 그는 교도소 시절 기타를 배워 상당한 수준까지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교도소 내에서 다른 수감자들에게 성적으로 학대 당했으며, 이후 맨슨 역시도 다른 수감자들을 성적으로 학대했다. 결국 미국의 교도소는 그를 교화시키는 데 완전히 실패했고, 찰스 맨슨은 1967년 석방되었다. 출소한 맨슨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히피 문화를 추종하는 패거리와 어울리게 되고, 강한 카리스마로 그들을 휘어잡게 되어 이후 미국 전역을 경악에 빠뜨린 맨슨 패밀리를 만들었다.


2.2. 맨슨 패밀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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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되기 전의 맨슨 패밀리
찰스 맨슨은 히피 문화의 화두였던 사랑을 적절히 이용하여 자신을 신격화했으며, 머리카락수염을 길러 자기 자신을 예수처럼 보이게 했다. 당시 맨슨 패밀리는 마약인 LSD를 상시 복용하며 난교 파티를 했는데, 맨슨은 그들에게 이나 다름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남녀 가릴 것 없이 맨슨과의 성교를 원했다고 한다.

이후 맨슨 패밀리는 거리를 떠돌아다니며 살게 되는데, 이때 거처를 제공 받는 대가로 맨슨 패밀리 소속의 여자들을 성적 상대로 제공했다고 한다. 맨슨은 비틀즈와 같은 음악인이 되고자 음반을 내는 등의 시도를 했으나 별 신통한 반응은 없었다고 한다. 이 와중에 비치 보이즈 멤버들하고 안면을 트기도 했다. 당시 비치 보이즈 멤버들은 맨슨 패밀리가 인간 쓰레기들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비치 보이스의 멤버이자 윌슨 가의 차남인 데니스 윌슨이 비치 보이스의 중기 즈음 해서 히피 생활을 하던 중에 맨슨을 만나게 되어 그를 레코드 회사에 소개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 당시 데니스는 맨슨을 썩 좋게 보지는 않았다고 한다. 비치 보이스의 조력자인 반 다이크 파크스의 회상에 따르면 몇 번의 협업 이후 다툼이 벌어졌다.[6] 맨슨이 데니스의 가족을 상대로 패드립을 치자[7] 데니스가 맨슨을 개 패듯이 팼고, 이후 맨슨과의 관계는 끝났다고 한다. 맨슨은 계속 데니스에게 집착했지만 데니스 밑에서 일하던 가정부에게 총알을 건네 보여주는 방식으로 거부했고 범행 직후 맨슨의 협박 역시 거절했다.

데니스는 이후 인터뷰에서도 맨슨을 비난했으며[8], 일부 전기 작가들은 데니스가 마약과 술에 빠진 계기가 맨슨을 끌어들였다는 죄책감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하필이면 샤론 테이트의 지인이었던 테리 멜처가 데니스의 지인이기도 했고, 이로 인해 연결고리가 생겼기 때문.

참고로 비치 보이스의 '20/20' 앨범에 실린 'Never Learn Not to Love'라는 곡이 바로 찰스 맨슨의 'Cease to Exist'라는 곡을 고친 것이다.

2.3. 폴란스키 가 살인 사건[편집]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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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되는 찰스 맨슨
Tate-LaBianca murders.

맨슨 패밀리가 저지른 범죄는 수없이 많아서 언급조차 힘들 정도지만, 가장 유명한 사건은 역시 폴란스키 가 살인 사건이다. 그가 좋아하던 비틀즈의 유명한 곡 '헬터 스켈터'의 날이 왔다는 이름 아래 자신을 열렬히 추종하는 맨슨 패밀리의 일원인 찰리 왓슨, 수전 앳킨스, 패트리샤 크렌빈켈, 린다 카사비앙 등 4인과 함께 LSD에 취한 채로 로만 폴란스키 감독에 쳐들어가 그의 아내와 집에 찾아온 손님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1969년 8월 8일 밤과 9일 새벽 사이에 일어난 범죄였다.

피해자들에 대해 상세히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 샤론 테이트(1943 ~ 1969): 폴란스키의 아내. 배우. 당시 임신 8개월의 임산부였으나 가해자들에겐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가장 마지막에 살해당했는데 "죽고 싶지 않다. 아기를 낳고 싶다."라고 빌었지만 맨슨의 열렬한 추종자인 수전 앳킨스는 "야, 이 개 같은 년아. 난 네 사정은 관심 없어.[원문]"라고 말하면서 16번의 칼질로 잔혹하게 살해했다고 한다.

  • 스티븐 패런트(당시 18세, 1951년생): 당시 대학으로 진학하는 데 필요한 학비를 벌기 위해 투잡을 뛰는 중이었다. 다른 피해자들과 달리 집의 손님이 아니라 당시 따로 떨어진 관리인 숙소에 거주하고 있던 윌리엄 개러슨[9]에게 스테레오를 팔러 왔다가 거절 당하고 돌아가는 길이었을 뿐인데 불운하게도 이런 강도들에게 걸리고 만 것. 권총 4방과 칼질 1방에 맞아 즉사했다.

  • 아비게일 폴저(당시 26세, 1943년생): 폴저 커피 회사의 상속녀. 28차례의 칼 난도질을 당했다.

  • 보이첵 프라이코스키: 폴저의 애인인 영화 제작자라고 소개하긴 하지만 부잣집 제트족이었다. 2번의 총탄과 13번의 칼질을 머리에 맞고 51차례의 칼질을 몸에 당해 즉사했다.

  • 제이 세브링(당시 36세, 1933년생): 유명 헤어 디자이너. 가해자들에게 돈을 줄 테니 살려 달라고 빌었으나 1번의 총탄과 7번의 칼질을 당한 후 샤론과 함께 시체가 거실에 목 매달렸다.

여담으로 이 사건 이후 맥퀸의 전처에 의해 밝혀진 이야기인데, 원래 이 모임에는 스티브 맥퀸[10]도 참석할 예정이었다고 한다.[11] 하지만 스티브 맥퀸이 이 모임에 참석하기 전 다른 여자를 만났고, 이 여자와 같이 있기로 결정하면서 참극을 피하게 된 것이다. 관련 기사. 게다가 조사 과정에서 경찰은 찰스 맨슨 일당의 암살 목표 리스트(hit list)를 발견했는데, 여기에 맥퀸의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우연히 휘말린 것도 아니고 실제 살해 목표 중 하나였던 셈. 아이러니한 건 맥퀸은 당시 유부남이었는데, 바람을 피운 덕분에 살아남은 셈. 전 부인 닐 아담스에 따르면 사건 이후 매그넘 권총을 항상 들고 다녔다고 한다.[12]

범인들은 그들이 죽인 사람들이 유명인인 줄도 모르고 찰스 맨슨의 지시로 보복 살인만을 위하여 들어간 것이었고, 나중에 조사 과정에서 유명인을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되자 더 주목 받을 수 있다기뻐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원래 폴란스키가 범행의 표적이 아니라 그 집의 전 주인이었던 음반 제작자 테리 맬처[13]가 찰스 맨슨의 데모 테이프를 듣고 혹평했다는 이유로 살해하려 든 것이었는데, 이들은 그 음반 제작자가 이사를 간 사실을 모르고 습격했다.

로만 폴란스키 본인은 일 때문에 잠시 런던에 가 있었는데[14], 그 덕분에 화를 피할 수 있었지만 그가 받았을 충격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는 1년 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영화로 만드는데, 매우 폭력성 넘치고 잔혹한 씬들이 많아 그에 대해 "지나친 거 아니냐"는 평론가들의 지적이 들어오자 "당신들은 작년 8월의 내 집을 보지 못했다. 난 '유혈이 낭자하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고 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참고로 맨슨 패밀리는 악마의 씨의 엄청난 추종자였다고 한다.

본래 범행 목적 대상이었다가 우연히 화를 피한 테리 멜처는 사실을 안 뒤 엄청난 충격을 받아 한동안 은둔했다. 그리고 경호원을 고용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관련 증언대에 서는 것도 두려워했다고 한다.

이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집은 <로미오와 줄리엣>(1968)으로 유명한 올리비아 허시의 에이전트였던 루디 앨터벨리(Rudi Altobelli)의 소유였다. 폴란스키 부부는 앨터벨리가 갖고 있던 집 여러 채 중 하나를 잠시 빌렸던 것에 불과했다. 허시도 이 저택에 딸린 손님용 별채에서 지낼 예정이 있었는데, 단 몇 주 상관으로 화를 면했다. 허시는 그래도 예정대로 이 집으로 이사해 한동안 거주했는데, 허시가 집에 있을 때 검찰이 현장검증을 위해 범인을 데리고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또한 상습적으로 데이트 폭력을 저질러 헤어졌던 전 남자친구가 무단 침입하는 바람에 성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루디 앨터벨리의 인터뷰에 따르면 앨터벨리는 이 집을 1960년 초 86,000 달러(2023년 가치로 약 880,000 달러)에 사들였는데, 사건이 벌어지고 얼마 안 있어 부동산 시장에 내놓자 18배인 1,600,000 달러(2023년 가치로 약 13,000,000 달러)에 팔렸다고 한다.

이후 나인 인치 네일스의 리더인 트렌트 레즈너가 사들여 스튜디오로 사용했는데, 마릴린 맨슨도 이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러나 레즈너도 앨범 작업 중 흉흉한 경험을 겪고 난 뒤 집을 철거했기 때문에 없어졌다.



1990년대에 촬영된 찰스 맨슨의 인터뷰
시작부터 기자가 스스로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하자 여러 우스꽝스러운 표정들을 지으며 '나는 아무도 아니야'라고 대답했다.

기자: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대답해 줄 수 있나요?"

찰스 맨슨: "아무도 아니야. 난 그 누구도 아니야. 부랑자, 거지, 떠돌이 일꾼, 박스 카[15]

, 와인 통. 네가 나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온다면 날카로운 면도칼이 될 수도 있지(Nobody. I am Nobody. I'm a tramp, a bum, a hobo. I'm a boxcar, I'm a jug of wine. And a straight razor if you get too close to me)."[16]


이후 범인들은 린다 카사비앙만 불구속 입건 되었으며 나머지는 전원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 찰스 맨슨: 2017년 교도소에서 사망.
  • 수전 앳킨슨: 2009년 교도소에서 사망.
  • 찰스 왓슨: 현재 복역중.
  • 패트리샤 크렌빈켈: 현재 복역중.
  • 레슬리 반 호튼: 2023년 가석방.
  • 린다 카사비앙: 불구속 입건. 이후 워싱턴 주 타코마에서 살았는데 1996년 마약 밀매 혐의로 딸과 같이 체포당하기도 하고 잦은 교통사고를 일으켜 장애인이 되기도 하는 등 절대 조용하지 않은 여생을 보내다가 2023년 사망.

2.4. 이후[편집]


결국 맨슨 패밀리는 폴란스키가 살인 사건을 포함한 여러 차례의 연쇄살인으로 체포되었다. 린다 카사비앙은 증언을 조건으로 기소가 면제되는 사법거래를 통해서 살아남았다. 찰스 맨슨, 찰리 왓슨, 수전 앳킨스, 패트리샤 크렌빈켈은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1972년 사형이 전격 폐지되면서 무기징역으로 형이 감형되었다. 사회 영구 격리가 필요한 흉악범을 생명줄만 붙여 놓은 것이므로 2012년에 78세의 나이로 신청한 가석방도 실패했고, 다음 가석방 심사는 83세가 되는 해인 2027년에 열릴 예정이었지만 그러기 전인 2017년 11월 19일에 사망했다.

2012년까지 13번의 가석방을 신청했으며[17] 매번 기각되었다.

수십 년째 가석방이 거부되는 패트리샤 크렌빈켈과 찰리 왓슨의 경우를 봐도 주동자가 살아서 사회로 돌아갈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본인도 잘 알고 있었기에 가석방 신청은 하되 심사위에 출석조차 하지 않는 등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휴대폰을 소지하다가 적발 당하기도 했다. 부하들은 최소한 자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며 교정 당국의 교화 프로그램에도 제대로 참여 중인 데 반해, 맨슨은 결국 교화되지 않았다. 그가 저질렀던 범죄의 잔혹성만이 가석방 거절의 유일한 이유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위도식하며 가만히 지낸 것은 아니며, 팬(...)들에게 지원을 받아 교도소 내에서 음반 작업을 하고 도 출판하는 등 외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또 다른 논란을 일으켰다. 교도소 재소자가 책을 쓰거나 음반을 만든다고 해서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범죄와 관련된 서적을 출판했다면 그 수익은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돌아가는 식으로 실질적인 이익은 보지 못하게 막을 뿐인데 어차피 교도소 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무기징역을 선고 받아 복역하는 사람들에게 돈은 큰 의미가 없으니 이런 데 크게 신경 쓰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2012년 9월 5일, 팬들의 지원에 힘입어 곧 앨범이 발매될 것이란 뉴스가 나왔다. 제작비 모금이 진행된 웹사이트에 따르면 27명의 지지자가 미화 4,099달러(2015년 기준으로 약 461만 원)를 기부했으며, 1,000명 가까운 인원페이스북좋아요를 찍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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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턴 일레인 버튼과 찰스 맨슨
2014년 11월, 위 사진 속의 애프턴 일레인 버튼(Afton Elaine Burton)이라는 26세의 여성과 옥중에서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버튼은 찰스 맨슨의 열렬한 추종자였으며, 오직 그를 위해 살던 주까지 옮겨가면서 통화와 면회 등의 옥바라지를 하였다고 한다. 이번 결혼의 목적이 단지 애정을 넘어서 맨슨의 결백을 입증할 만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라고. 결혼으로 가족관계를 맺은 후 가족만이 열람할 수 있는 자료를 분석하여 무죄를 입증할 생각이라고 했다. 캘리포니아 주(州) 킹스카운티가 지난 7일 맨슨과 예비 신부 애프턴 일레인 버튼의 결혼 허가증을 발급했으며, 이들은 90일 이내에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 (물론 옥중결혼이므로 면회실에서) 당시 피해자인 샤론 테이트의 여동생 데브라 테이트는 이 소식을 듣고 '말도 안 된다'며 충격을 금치 못했다.

흉악범에게 이성적인 매력을 느껴 구애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일은 딱히 드문 현상은 아니다. # 이런 현상을 정신적 증후군으로 정의 내리는 용어도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일레인 버튼의 진짜 목적은 맨슨과의 사랑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단순히 돈을 노린 것으로 밝혀졌다. 맨슨의 나이를 보아 길어도 5~10년 내에는 교도소에서 병사할 텐데, 그때는 그의 시신이 배우자가 된 버튼에게 넘겨질 예정이었다고 한다. 일레인 버튼은 그 시신을 방부 처리한 뒤 전시해서 돈을 벌려는 속셈이 있었다.

실제로 비슷한 선례가 있는데, 살인범이라는 걸 알고 행한 것은 아니고 인형이라고 생각했던 거라 이 사건과는 다르다. 젊은 여성이 찰스 맨슨과 굳이 결혼까지 하는 이유를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의 조사로 결국 들통났고, 이를 알게 된 맨슨은 파혼한 후에 자신이 "불사신"이라며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사례는 2015년 3월 20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소개되었다. 결국 허가 기간이 만료될 때까지 식을 못 올려 결혼이 무산되면서 일레인 버튼의 돈벌이는 수포로 돌아갔는데, 정확히 3년 뒤 맨슨이 죽어 버렸다.


2.5. 사망[편집]


샤론 테이트의 자매인 데브라 테이트[18]는 맨슨이 복역한 교도소로부터 그가 현지 시각 2017년 11월 19일 일요일 오후 8시 13분에 인근 병원에서 사망했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언론사 TMZ에 전했다. #

사인은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였다. 유언은 "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3. 음악[편집]


맨슨은 음악 활동도 해 왔으며, 그가 만든 노래들은 노래 자체보다는 저작자인 찰스 맨슨의 유명세에 따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맨슨 패밀리를 결성한 이후에도 음악작업을 해왔다. 그가 열성적으로 좋아했던 밴드는 비틀즈, 비치 보이즈, 나인 인치 네일스 등이 있다. 1969년 종신형을 선고받기 전까지 녹음 작업을 계속했고 수감된 뒤에도 계속 미공개 곡을 발표했다. 그렇게 낸 음반은 총 9장이다.



Look At Your Game Girl
찰스 맨슨의 데뷔 앨범 'Lie: The Love and Terror Cult'에 수록된 'Look At Your Game Girl'. 이 곡은 유명 록 밴드 건즈 앤 로지스에 의해 커버되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래는 좋다"는 반응을 보인다. 유튜브 등지에 찰스 맨슨의 다른 노래들도 많이 업로드되어 있는 상태이다. 비틀어서 보면 이런 재능을 갖고도 본인의 인성 자체가 바닥까지 썩어 문드러진 나머지, 어리석게도 자신의 삶도 사회에 도움이 될 음악적 재능도 감옥에 묻어 버린 셈.[19]

3.1. 음반[편집]


  • Lie: The Love and Terror Cult(1970) - 데뷔 음반. 1967년부터 1968년까지 LA에 있는 골든 스타 스튜디오에서 녹음했으며 이 중 는 그 유명한 비치 보이즈와의 콜라보 곡이다. 맨슨이 살인사건으로 교도소에 들어간 뒤에는 비치보이즈가 맨슨의 목소리를 제거한 단독 버전을 내놓기도 했다. 음반작업 자체는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에 끝내놓았지만, 앨범은 맨슨이 수감된 뒤에 발매됐다. 맨슨의 앨범 중 스튜디오의 깔끔한 음향이 녹음된 유일한 앨범인데, 이유는 당연히도 1집 이후 앨범들은 전부 교도소 내에서 테이프 레코더를 가지고 녹음한 것이기 때문이다.

  • Poor Old Prisoner Boy(1989) - 2집 정규 앨범으로, 사이드 A와 B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16곡이 들어가있다. 이 때부터는 교도소 안에서 녹음했기 때문에 음질도 조약하고, 교도소 내의 소음까지 다 들린다. 이 중 9번 트랙의 는 행크 윌리엄스를 기리는 곡이다.

  • Live at San Quentin(1993) - 3집 정규 앨범으로, 당시 수감되어 있는 샌퀀틴 교도소 독방에서 녹음했다.

  • Commemoration(1995) - 찰스 맨슨의 첫번째 베스트 앨범으로, 역대 앨범의 수록곡과 미공개 녹음본이 수록됐다.

  • All The Way Alive(2003) - 1967년 녹음한 그의 미발매곡들을 모은 앨범으로, All The Way Alive(줄여서 ATWA)는 맨슨 패밀리의 구호이다.

  • One Mind(2005) - 4집 정규 앨범이자 맨슨 생전 마지막 정규앨범. 역시 샌퀜틴 교도소 독방에서 테이프 레코더로 녹음했으며 16곡이 수록되어 있다.

  • Air(2010) - 1967년 녹음된 미공개 녹음본.

  • Trees(2011) - 미공개 녹음본 3번째.

  • 1967(2023) - 1967년 9월 11일 녹음된 미공개 곡들을 모은 사후 발매 앨범. 여전히 추종자들이 있는 듯 하다

4. 기타[편집]



  • 가수 마릴린 맨슨의 이름은 배우 마릴린 먼로와 이 사람에게서 따온 것이다. 마릴린 맨슨의 유명곡 중 하나인 'The Beautiful People'은 전주 부분에 맨슨 패밀리의 일원이었던 텍스 왓슨(Charles "Tex" Watson)의 발언[20]을 녹음한 것을 음성변조해 집어넣었다. 샘플링을 워낙 심하게 변조해 놔서 얼핏 들으면 사람 말을 녹음한 것인지도 모르고 넘어갈 수 있다.

  • 건즈 앤 로지스는 'The Spaghetti Incident?' 앨범히든 트랙으로 이들의 노래커버해 물의를 일으켰던 적이 있었다. 댓글엔 액슬 로즈에 대한 욕설이 베스트 댓글에 올라와 있었다. 찰스 맨슨이 그동안 녹음했던 음반은 소규모로 풀리긴 했다. 2009년에 'Manson My Name Is Evil'이란 이름의 DVD를, 2010년에 'Air'란 이름의 앨범을 낸 것 같다. 음악적 재능 자체는 상당한 듯하며, 교도소 내에서 이익이 안 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작업을 했던 걸 보면 나름 이 분야에 자부심이 있는 모양.

  • 대배우 안젤라 랜스버리가 1971년 화려한 할리우드 생활을 버리고 가족들을 데리고 아일랜드로 돌아간 이유였다. 하필 딸이 찰스 맨슨이 감옥에 들어간 이후에도 맨슨 패밀리와 엮여있었다.


  • 사우스 파크 시즌 2 16화에서도 등장했는데, 여기서는 맨슨이 탈옥하고 나서 정상적으로 사회에 교화된다. 그리고 오히려 맨슨이 스탠 마시에게 교훈을 준다. 이 에피소드는 꽤 오래 전의 에피소드이며, 당시 제작진들은 자유의지주의에 근거하여 맨슨이 사회에 교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 것 같다. 물론 현실의 맨슨은 죽기 직전까지 추호도 갱생하지 않은 인간 말종이었다.

  •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가 이 사람에 대한 영화라고 알려져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그 시대의 영화계를 다룬 영화로서 맨슨 사건이 나오기는 하지만 영화의 중심 내용은 아니다. 여기서는 찰스 맨슨의 사주를 받은 찰스 텍스 왓슨이라는 자가 패밀리를 이끌고 살인을 시도하려는 모습으로 각색되어 연출되었다.[스포일러]


  • 데스 그립스의 데뷔 믹스테잎 "Exmilitary"의 첫 트랙인 'Beware'의 전주로 찰스 맨슨의 인터뷰의 일부가 나온다. 세계 종말을 외치는 익스페리멘탈 힙합 밴드답게 파격적인 첫 인사를 건넨 셈이다.

  • 2023년 7월 찰스 맨슨의 추종자였던 여성 레슬리 벤 하우턴이 50년 만에 석방되어 출소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가석방을 거부했으나 법원이 허가했다고 한다.#
[1] 본인은 170cm라고 했다.[2] 찰스 맨슨의 죄목은 수도 없이 많은데 그 중에서 <폴란스키 가 살인 사건>의 모살이 유명하다.[3] 수감 생활을 하던 시절에 연구한 바 있다. 1961년 7월엔 자신의 종교를 사이언톨로지교로 작성하기도 했다. 이후 석방되자 직접 접촉하기에 이른다.[4] 위에 서술된 것처럼 원래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1972년 캘리포니아 주가 사형제도를 폐지하면서 가석방 없는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5] 좌측은 20세의 맨슨, 우측은 15세의 로절리(1939 ~ 2009).[6] 하술할 'Never Learn Not to Love' 녹음 도중 작곡자 명의를 가지고 싸웠다고 한다. 데니스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충분한 돈을 줬는데도 더 원했다고 한다.[7] 총알을 꺼내서 니 애들(데니스의 가족)이 안전하다는 걸 다행이라고 여기라고 협박했다.[8] 다만 증언대에 서는 건 거부했는데, 어떤 식으로도 얽히기 싫다는 뜻일 가능성이 높다.[원문] Look, bitch. I don't care about you.[9] 초동수사에서 중요 용의자로 몰리지만 거짓말 탐지기 검사를 통과했고, 중요 동기와 증거가 없고 맨슨 패밀리가 용의선상에 오르면서 용의자에서 제외되었다. 당시 음반을 들으면서 밤새 편지를 쓰고 있느라고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진술했다.[10] 1980년 심장마비로 타계.[11] 제이 세브링과 샤론 테이트와도 친분이 있었다.[12] 맥퀸 본인이 성깔이 워낙 대단한 인물이라 더욱 그랬는데, 한 번은 맥퀸의 바람끼를 두고 아담스와 부부싸움 도중에 아내에게 총을 겨눈 적도 있다고 한다. 결국 둘은 사건이 일어난 지 3년 뒤인 1972년에 이혼했다.[13] 버즈 프로듀서로 유명했던 인물. 비치 보이스 멤버들하고 친분이 있고 프로듀싱해 주기도 했다. 도리스 데이의 아들이기도 한데 2004년 향년 62세로 사망하면서 어머니보다 단명했다.[14] <돌고래 알파>란 영화의 각본을 적는 것 때문에 런던에 잠시 갔던 거였다고 했는데, 마이크 니콜스 감독한테 넘어갔다.[15] 컨테이너용 화물차. 한국어로는 '유개차'라는 용어로 번역된다.[16] 이 말의 의미는 해석이 분분하지만, 대부분은 맨슨이 대략 다음과 같은 의도로 자신을 낭만화하기 위해 궤변을 늘어놓은 것으로 해석한다. '가만히만 내버려 둔다면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존재감 없는 배경이자 떠돌이일 뿐이다. 하지만 나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온다면, 나는 너를 죽일 수도 있다.'[17] 찰스 맨슨이 사형 선고를 받을 당시 미국의 형벌 제도는 지나친 장기형이 드물고, 사형과 수십 년 정도를 복역한 뒤 가석방이 가능한 일반적인 무기징역, 다소 긴 유기징역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수백 년, 수천 년 등의 장기형이 일반화된 것은 1970년대 이후 엄벌주의 여론에 의한 것이다.[18] 1952년생으로 샤론보다 9년 늦게 태어났으며, 2017년 유방암 판정을 받아 투병에 들어갔다.[19] 이 영상의 유튜브 댓글 중에서 가장 압권인 것''어느 세상에서는 찰스 맨슨이 비틀즈 뺨치는 음악인일 것이고, 존 레논이 맨슨에 버금가는 연쇄살인범일 것이고, 아돌프 히틀러독일의 평범한 화가로서 먹고 살고 있을 것이며, 피카소스페인의 악명 높은 공산주의 독재자가 되었을 것이고,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의 야구선수가 되었을 것이고, 간디인도에서 전쟁범죄자이자 시민 학살을 일으킨 최악의 독재자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고, 이오시프 스탈린조지아의 평범한 수도자이며 인권운동가로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이다.[20] "...swoop down on the town... ...kill everyone that wasn't beautiful(마을을 덮쳐서... (중략)... 아름답지 않은 자는 모조리 죽인다)".[스포일러] 영화 결말부에선 맨슨 패밀리가 폴란스키 가를 덮치려 했으나 노선을 바꿔 주인공 일행을 죽이려다 오히려 클리프(브래드 피트)와 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역관광 당하여 맨슨 패밀리 전원이 몰살당하고 샤론 테이트가 살아남는 대체역사가 되었다. 실행범 3명 중 2명은 LSD에 취해있던 클리프에게 끔살당하고, 그나마 살아있던 나머지 1명도 통조림에 얼굴을 맞아 안면부가 함몰되고 개에게 물린 고통으로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릭이 휴식을 취하고 있던 수영장으로 난입하여 발악하다 릭에게 화염방사기로 태워지며 확인사살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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