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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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스미스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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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3번
최익성(1996~1998)

스미스(1999~2000)

이정호(2001)
LG 트윈스 등번호 66번
최승민(1994~1999)

스미스(2000)

이동철(2001)



파일:attachment/찰스 스미스/Example.jpg
이름
찰스 리 "버바" 스미스[1]
(Charles Lee "Bubba" Smith)
생년월일
1969년 12월 18일 (54세)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신체조건
189cm, 115kg
포지션
1루수, 지명타자, 좌익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1년 26라운드(시애틀 매리너스)
1999년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삼성 라이온즈)
소속팀[2]
삼성 라이온즈 (1999~2000)
LG 트윈스 (2000)

1. 개요
2. 선수 경력
2.1. KBO 리그 데뷔까지
2.4. 이후의 선수 생활
3. 은퇴 이후
4. 총평
5. 연도별 성적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삼성 라이온즈, LG 트윈스를 거친 前 외국인 선수. 포지션은 1루수, 좌익수.


2. 선수 경력[편집]



2.1. KBO 리그 데뷔까지[편집]


1991년 시애틀 매리너스의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이후 신시내티-미네소타-텍사스 산하 마이너 팀을 거쳤는데, 마이너 리그 올스타에 몇 번 선정된 적도 있었지만 성장세가 두드러지는 편은 아니었고, 1997년 더블A에서 나름 좋은 모습을 보여줘서 잘 풀리나 싶었는데 1998년 애리조나 산하 트리플A팀으로 이적한 뒤 부상 때문인지 거의 출전하지 못했다. 당시 트리플A 주전으로 나섰던 마이크 로버트슨이 메이저에도 콜업되어 몇 경기를 치른걸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 결국 끝끝내 메이저 무대는 밟지 못하고 멕시칸리그 몬테레이 술탄스에서 뛰다가 1999년 한국프로야구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

그 해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에서는 1998시즌 타이론 우즈의 대활약에 고무받아 외국인 거포타자를 희망하던 구단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스미스는 3개월짜리 멕시칸리그에서 홈런 14개를 날리며 애초부터 관심을 받았으나 트라이아웃에서는 빌빌대는 모습을 보이며 트라이아웃 캠프에서조차 퇴출 논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에 의해 1라운드 지명되었는데, 삼성이 지명을 위해 1라운드 지명을 약속하고 의도적으로 태업을 지시했다는게 정설이다. 아무튼 삼성에 입단하게 된 스미스는 롯데펠릭스 호세와 함께 가장 기대되는 외국인 타자로 손꼽혔다.

당시 삼성 타선은 이승엽-양준혁의 막강한 3, 4번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삼성은 임창용 트레이드로 양준혁을 해태로 보내고 대신 쌍방울에서 김기태를 데려왔다. 중심 타선이 지나치게 왼손 타자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 자주 단점으로 지적되고 있던 가운데 오른손 거포를 찾고 있었던 삼성에 부합하는 외국인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2.2. 삼성 라이온즈 시절[편집]


당초 기대와 달리 스미스는 1999년 시즌 초반 상당히 헤매는 모습을 보였다. 상당한 덩치를 가진 데다가 카림 가르시아[3] 이전에 '선풍기 스윙'이라는 별명을 선점했듯이 위압적인 스윙폼을 가져서 상대 투수나 중계를 보는 야구팬들에게 상당한 위엄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5월들어 주형광을 상대로 홈런을 기록한 이후, 슬슬 발동이 걸리기 시작하며 이내 정상급 활약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는 외국인치고는 꽤나 겸손했던 그의 성격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 프로야구의 수준은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외국인 선수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노하우에만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고, 구단 입장에서도 외국인 선수라는 존재가 가르치고 성장시켜서 성과를 낸다기보다는 '갖춰져 있는 걸 구입해서 쓴다'라는 인식이 강해서 뭘 가르치고 교정한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못하면 내다버리고 새 거 사서 쓴다는 인식. 현재도 NPB와 다르게 육성형 용병 제도가 없다 보니 외국인 선수는 어느정도 실력이 갖춰진 즉전감으로 데려오는게 당연시되기는 하나, 닉 에반스, 다린 러프, 로저 버나디나 등 초반에 부진을 겪다가 2군행이나 재조정을 거쳐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들도 꽤 있다. 하지만 이 당시는 그런 거 없고 초반에 부진하면 바로 방출하고 새로 데려오는, 사전적 의미의 용병에 부합하는 식으로 외국인 선수를 기용했다.[4] 동시에 외국인 선수도 수준 낮은 한국야구를 깔보거나 쉽게 보고 자신의 프라이드에 사로잡혀 한국 코칭스태프의 조언을 무시하거나 자기 스타일만 고집하다 부진에 빠지기도 했다. 반면에 스미스의 경우 삼성 타격코치진에게 적극적으로 조언을 구했고, 또 코치진이 제시하는 조언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 결과 '선풍기 스윙' 일변도였던 스미스의 스윙은 다소 간결하게 변화하며 컨택을 좀 더 상향시키고자 했는데, 스미스 본인의 타고난 힘이 워낙 좋다보니 컨택으로 적당히 맞춰도 장타를 잘 만들어내면서 좋은 성적을 기록할 수 있었다.

다만 이 시즌 어쩌다가 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의 단초를 제공하는 등 플레이오프에서는 부진했다. 1, 2차전까지는 롯데 상대로 끝내기 안타와 홈런도 치며 맹타를 휘둘렀으나 그 이후 방망이가 차갑게 식어버리며 삼성의 공격력을 깎아먹는 데 일조했다. 안 그래도 투수진이 빈약했던 삼성은 애니콜 임창용을 엄청 굴렸고, 이는 7차전에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5]

최종 성적은 타율 .287에 40홈런 98타점. 100개의 삼진을 당하는 동안 볼넷은 겨우 25개밖에 고르지 못했을 정도로 삼진이 지나치게 많아서 출루율이 불과 .325밖에 안되긴 하나, 장타율은 .635를 기록할 정도로 압도적이었고 OPS .961, wRC+ 130.3으로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당시에야 뭐 세이버메트릭스라는 게 없었다지만, 2할 후반대의 타율과 40홈런을 기록한 선수를 구단이 붙잡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스미스의 재계약은 구단의 깊은 고민 속에서 생각보다 매우 힘들게 이루어졌다.

우선 당시 중심타선이었던 이승엽, 김기태, 스미스가 모두 1루수였다는게 첫번째 문제였다. 지명타자는 한 자리밖에 없는데 셋 모두 타격이 좋다 보니 셋을 모두 기용하려면 다른 방법을 써야 했고, 결국 이승엽 1루수, 김기태 좌익수, 스미스 지명타자 배치로 문제를 해결했다. 다만, 경우에 따라서는 김기태가 지명타자로 나서고 스미스가 좌익수로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스미스에게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엄청난 체중과 그로 인한 매우 느린 주력이었다. 스미스의 체중은 위키 백과 등 공식적인 프로필에는 101kg로 기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지만, 이 시기 비공식적인 그의 체중은 127~129kg으로 이대호최준석 이전 한국 프로야구 선수 중 가장 무거운 체중이었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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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선수가 좌익수를 보러 나가면 당연히 수비범위는 말년의 이영우가네모토 도모아키 못지 않게 처참한 수준이었다. 어깨는 나름 쓸만했지만 애초에 범위가 이래서야... 나지완과 비교되기도 하는데 나지완은 적어도 신체능력이 한창일 때는 덩치에 비해 발은 빨랐다. 수비 센스가 안좋아서 좌익수 수비력이 별로였을 뿐이지.[6][7]

결국 삼성은 2000년 시즌을 앞두고 스미스와 재계약을 했지만, 옵션을 하나 걸었다. 바로 '체중 감량 옵션'. 계속 뛰고 싶다면 살 빼라는 것이다. 여차하면 스미스가 좌익수 수비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미리 옵션 하나를 걸어 둔 셈.

우여곡절 끝에 재계약에 성공한 스미스는 2000 시즌 시범경기~정규리그 개막 후부터 장타를 펑펑 날리며 활약을 펼친다. 하지만 6월 이후 스미스는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하고 슬슬 퇴출 얘기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삼성하면 화끈한 타격 위주의 팀이라는 지역 팬들의 정서 때문에 구단에서 공식적으로 퇴출을 고려한 적이 없다는 대응까지 나왔지만, 결국 7월말 웨이버 공시를 통해 퇴출됐다.

사실 스미스가 6월부터 하락세를 보인 건 구단이 조건으로 내건 체중감량이 주요 원인으로 보인다. 120kg가 넘는 거구의 선수가 체중을 줄이려면 일반 체중의 선수보다 두 세배의 노력이 필요하고, 그 노력이라는 건 대부분 좋게 말해 식단 조절, 나쁘게 말해 기존에 섭취하던 열량보다 적은 열량을 섭취해야 한다는 뜻. 물론 이것만이 성적 하락의 요인은 아니겠지만 다이어트를 하는 장기 시즌제 운동선수가 중후반기로 가면서 컨디션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다는 건 상식적인 일. 물론 체계적인 관리를 받았다면 가능도 했겠지만, 그랬을 가능성은 용병 특성 상 적다.

그리고 스미스의 퇴출은 실력 외적인 요인도 있었다. 바로 투수 보강. 퇴출 직전까지 스미스가 내고 있었던 성적은 타율 0.274에 홈런 20개로, 하락세를 타고 있었지만 시즌이 절반 좀 지난걸 생각하면 나쁜 성적은 아니다. 1999년에 비해 홈런만 좀 줄었지 2루타가 꽤 많아서 장타 생산 능력은 여전했고, 결정적으로 전년도에 비해 볼넷을 훨씬 많이 골라나가며 출루율은 오히려 상승했다. 거기에 OPS는 3푼3리만 떨어지고 wRC+는 오히려 상승해 있었다.

물론 세이버메트릭스의 개념 자체가 KBO에 없었고 출루율의 가치를 모르던 시점에서, 2할 7푼에 20홈런이라는 클래식 스탯은 국내 선수도 아니고 외국인 선수에게는 뭔가 어정쩡해 보였던 건 사실이다. 거기에 당시 삼성은 막강한 타선에 비해 투수진이 약했기 때문에 스미스를 방출하고 수준급 외국인 투수를 영입해 투수진을 보강하고 잔여시즌 및 포스트시즌에 대비하겠다는 승부수를 던진 것.

하지만 삼성의 이 선택은 실패로 돌아갔다. 대체 외국인 선수로 투수 마이클 가르시아가 입단했지만 기대만큼은 못하며 시즌 후 재계약을 포기했고, 거기에 팀 역시 준플레이오프에서 롯데를 꺾고 플레이오프에 올라갔지만 현대를 상대로 1승도 거두지 못하고 시리즈 스코어 4:0으로 스윕당하면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3할 5푼에 그치는 출루율과 크게 떨어진 장타율이 흠. 게다가 이 선수는 지명타자이다. 스미스가 재계약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6할이 넘는 장타율도 있었다. 2000년에는 5할 7푼으로 6푼 1리나 떨어졌다는 것. 출루율이야 본래 활약상 배드볼 히터이기 때문에 2푼 7리가 오른 건 큰 차이가 없었다. 애당초 지명타자에게 기대하는 건 높은 수준의 장타율이지, 9할 초반에 걸치는 OPS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부족해보였기 때문. 게다가 삼성은 훌리오 프랑코가 있기도 했다. 이 쪽은 나이 마흔 넘을 때 와서, 우익수를 보며 3/4/5 슬래시라인을 기록했고, wRC+도 스미스 보다 높았다.


2.3. LG 트윈스 시절[편집]


웨이버 공시로 인해 고국으로 돌아갈 스미스를 붙잡은 건 다름 아닌 LG. 때마침 LG는 장타력을 보강하기를 원하고 있었고, 더군다나 오른손 거포를 더더욱 희망하고 있었다. 스미스가 딱 적임자였던 상황.

그리고 LG로 이적한 스미스는 살아나는 모습을 보여주며 팀 타선에 큰 보탬이 되었다. 2000년 최종 성적은 118경기 타율 .288, 35홈런, 100타점이었고, LG 시절 성적만 따지면 42경기 타율 .314, 15홈런을 기록했다. LG 역사에서 최초로 100타점을 넘긴 타자가 된 것은 덤.[8]

더구나 세이버 스탯까지 들여다보면 LG 시절 성적으로 .314/.386/.660 OPS 1.047이라는 파괴적인 슬래시라인에 wRC+도 165.8이라는 훌륭한 기록이 나온다. 시즌 종합 성적으로 봐도 wRC+ 145.9, OPS 0.971을 기록하며 오히려 전년도보다 상승했다. 똑딱이 타선으로 고민하던 LG로서는 준수한 장사였던 셈.

하지만 결국 그는 시즌 후 LG와 재계약에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두산과의 플레이오프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던 점도 있고, 삼성에서와 비슷하게 포지션 중복 문제도 있었다. 본래 LG의 1루수는 서용빈이 보고 있었는데, 1998~1999년 2년간 여러 이유로 서용빈이 이탈하면서 1루 자리는 반쯤 구멍이 뚫렸고 결국 2000년을 앞두고 LG는 서용빈이 복귀했음에도 당시 양준혁을 트레이드로 영입해 1루 자원이 두 명이 되었다. 삼성에서 이승엽-김기태로 인해 벌어진 포지션 중복 문제가 여기서도 벌어진 셈.

현재 관점에서 보면 타격 생산성이 가장 떨어지고 2년간 실전 공백이 있었던 서용빈이 벤치로 들어가고 스미스와 양준혁이 적당히 1루와 지명타자 자리를 나눠먹으면 될 상황이었지만, 서용빈은 1994년의 임팩트가 여전히 남아있는 LG의 프랜차이즈 스타였고, 당시에는 OPS의 개념 자체가 없고 타율이 최우선으로 고려되었기 때문에 3할 근처의 타율을 기록하던 서용빈은 가치있는 1루수였다. 물론 당시에도 스미스가 서용빈보다 생산성이 높다은 것은 아는 사실이었지만, 양준혁-서용빈이라는 걸출한 1루수가 둘이나 있는데 굳이 용병마저 1루수를 뽑아야겠냐는 의견이 많았고, 무엇보다 당시 LG 외야는 이병규를 제외하면 전부 수비력이 폭망이라 외야 용병을 구할 필요도 있었다. 우선 양준혁은 삼성-해태 시절 외야수로만 뛰었지만 지명타자로 나온 시즌이 꽤 많은데서 보이듯 외야 수비가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물론 삼성에 수비라 걸출한 외야수들이 많이 거쳐간 탓에 저평가받은 탓도 있지만 타격적 명성에 비하면 아쉬웠던 편. 1루 수비는 포구는 뛰어났지만 본인의 신체 능력을 살려서 본 수비지 수비 스킬이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서용빈이 1루수로 나온 것이고. 그리고 김재현. 그 양준혁이 코너 선 이순철로 보일 정도로 답이 없었다. 2001년까지는 고관절 부상을 당하기 전이었는데도 김재현에 수비에 대해 눈이 썩는다는(...) 증언이 잇따랐을 정도. 양준혁 좌익수 김재현 우익수로 풀 시즌을 치뤘다가는 이병규가 지쳐 이탈하겠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로마이어를 영입하고 한동안 좌익수에 세우기도 했고. 이 문제가 해결된 건 2002년 박용택이 영입되고 매니 마르티네스가 2년간 LG의 외야를 맡아주며 고관절 부상으로 빠진 김재현의 자리를 대신하며 해결된다.

당연히 엘지가 서용빈을 주전으로 돌린 결과는 실패였다. 양준혁은 이 때문에 지명타자로 돌았으며, .313/.415/.495 OPS .911 wRC+ 144.0 WAR 4.03을 찍었다. 참고로 이 거 지명타자와 1루수만 돌면서 맡았고, 나중에는 1루수를 봤다. 그렇게 밀어주던 서용빈의 2000년 성적은 .274/.355/.350 OPS .705 wRC+ 87.2 WAR 0.50으로 폭망했다. 100경기 333타석에 보이듯이 나중엔 정말 벤치로 갔다.[9]

또한 LG 이적 후 반 시즌동안 15홈런을 기록한 점도 아쉬웠다는 말이 있는데, 이건 조금 비약이 심한 게 말이 반 시즌이지 경기수를 보면 42경기였다. 당시 KBO리그가 132경기를 치렀으니 약 ⅓인 셈인데 그동안 15홈런이면 단순 계산으로 풀타임 48~50홈런 페이스다.[10] 페이스가 조금 떨어지는걸 감안해도 40홈런은 기대할 수 있는 성적. 더군다나 대구에 비해 잠실이 훨씬 투수 친화구장이고, LG 시절 42경기에서 스미스의 장타율은 무려 .660이다. 같은 잠실을 썼던 두산의 타이론 우즈가 2000년 39홈런을 기록한걸 생각하면 스미스의 장타력은 우즈와 맞먹었다. 결국 장타력이 문제된건 아니라는 뜻.

다른 이유로 한화와 재계약에 실패하고 2001년에 계약했던 댄 로마이어도 있었다. 당시 로마이어는 1999년 45홈런을 친 적도 있었고, 스미스보다 타율도 조금 더 높았다. 지금 세이버로 보면 로마이어는 에이징 커브로 인해 하락세를 타면서 장타력이 떨어지는게 눈에 선했고, 반면 스미스는 선구안의 개선과 함께 LG 이적 후 우수한 모습을 보여준 데다가 나이도 로마이어보다 4살이나 어렸지만, 당대 시각에서는 타율이 조금 더 높은 로마이어가 더 낫다고 평가[11]한 것. 여기에 포스트시즌에서 스미스가 부진했던 점도 한몫 했다.

LG는 스미스를 포기하고 로마이어를 영입했으나, 결과적으로 로마이어는 노쇠화+잠실크리를 동시에 맞으며 성적이 더 추락했고 당시 LG 감독대행이던 김성근과 마찰을 빚으며 중도 퇴출되는 바람에 실패한 카드가 됐다.

여튼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렇게 스미스는 한국무대를 떠나게 되었다.


2.4. 이후의 선수 생활[편집]


그래도 늦지 않은 나이에 한국에 왔어서 그런지 KBO 무대를 떠나고도 야구를 오래 이어갔다. 멕시칸리그에서 재기를 노린 스미스는 2001년 플로리다 말린스 산하 마이너팀에 입단했으나 부진 끝에 방출되었고, 이후 2006년까지 멕시칸리그와 독립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2006년 수폴스 캐너리스(Sioux Falls Canaries)를 끝으로 은퇴했다.


3. 은퇴 이후[편집]


2008년 기사에 따르면 고향인 노스캐롤라이나의 커너스빌에서 살고 있고, 가전제품 매장에서 일하면서 지역 야구팀의 코치도 겸하고 있다고 한다.


4. 총평[편집]


40홈런을 기대할 수 있는 훌륭한 장타력을 보여줬으나, 수비 포지션의 한계와 이런저런 애매한 상황으로 인해 한국 생활을 오래 이어가지 못한 선수. 나날이 발전하던 KBO의 질적 수준을 감안했을 때 어느 순간 급격한 몰락을 겪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기에, 당시 구단 입장에서는 계륵같이 느꼈을 법 한 선수였다.

세이버메트릭스가 좀 더 대중화된 최근에 뛰었다면 더 좋은 평가를 받았을지도 모르는데, 표면적으로 1999년보다 성적이 하락한 듯 보이는 2000년의 기록을 좀 더 파고들어보면 1999년에 비해 월등히 좋아진 선구안 덕분에 출루율이 크게 상승했고, LG 이적 후 잠실구장을 썼음에도 42경기 15홈런을 기록할 정도로 장타력도 여전해 OPS는 오히려 0.01정도 더 올랐다. 덕분에 wRC+, WAR 등 기타 스탯들도 1999년보다 2000년이 높다. 좀 더 쉬운 이해를 위해 비교하자면 삼성의 역대급 타자용병으로 불리는 다린 러프가 3년 통산 wRC+ 147.2를 기록했는데, 2000년 스미스가 145.9였으니 최근 추세였다면 수비력이고 뭐고 일단 그 타격 생산성 하나만으로 붙잡을 가치가 있었다. 나이도 러프가 만 30세때 와서 3시즌을 뛰었는데, 스미스는 만 29살때 한국에 왔으니 나이 경쟁력도 있었다. 여기에 스미스 본인이 한국 코치진을의 조언을 잘 수용하고 겸손한 성격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생각보다 롱 런 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야만없이라 의미없는 가정이지만.[12]

아직도 삼성 올드팬층에서는 회자되는 용병 선수이다. 이미 현역 시절에도 나름대로 대구 지역 중심으로 팬층이 형성되었는데, 실력도 실력이지만 외국인치고는 푸근해보이는 인상에다가 덩치 좋고 둥글둥글한 외모의 거포에 대한 지역의 전통적 선호 분위기도 있었고, 여기에 선풍기 스윙으로 대표되는 화끈한 플레이 스타일, 그리고 거대한 체구 및 체중에 의해 가끔 발생하는 몸개그로 인해 다소 컬트적인 팬층이 형성되었다. 팬들 입장에서는 곰팅이 같이 생긴 넘이 타석에서 헛스윙하다가 휘청대며 넘어지거나 좌익수 넘어가는 타구에 2루에서 아웃당하는 모습이 상당히 웃겼던 모양. 물론 이러한 반응은 평상시 실력이 받쳐주지 못하면 그냥 까이겠지만. 여담으로 양준혁은 유튜브 생방송에서 LG시절 스미스와 팀 동료였을 때를 언급하며 덩치 크고 순한, 착한 선수였다고 추억하기도 했다.

참고로, KBO 역대 한시즌 40홈런 이상 기록자 중 최저 타석인 442타석 기록(1999)을 가지고 있다. 30홈런 이상 기록에서도 최저 타석기록이었으나, 2017년 SK 와이번스제이미 로맥이 416타석을 기록하며, 사상 최초로 규정타석 미만 30홈런 기록자가 되어 경신하였다. 다만 스미스가 30홈런을 기록했을 당시의 타석수와 로맥이 30홈런을 기록했을 당시의 타석수를 비교해보면 스미스가 압도적으로 빠르다.


5.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기록[13]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출루율
장타율
OPS
wRC+
1999
삼성 라이온즈
123
408
.287
117
20
1
40
(3위)
98
70
1
.327
.635
.961
130.3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출루율
장타율
OPS
wRC+
2000
삼성 / LG
118
423
.288
122
27
1
35
(5위)
100
(5위)
71
0
.366
.605
.971
145.9
KBO 통산(2시즌)
241
831
.288
239
47
2
75
198
141
1
.347
.620
.967
138.3


6. 관련 문서[편집]



[1] 미국에서는 '버바 스미스'라는 등록명으로 뛰었다. 다른 예로는 2000년 현대 유니콘스에서 뛰었던 찰스 카펜터도 미국에서 등록명이 버바 카펜터였다.[2] 마이너리그에서만 뛰다가 와서 메이저리그 활동 기록이 없다.[3] 재밌게도 둘은 1998년 같은 마이너리그 팀에서 뛴 적이 있다.[4] 더군다나 이때는 외국인 선수 교체 제한도 없어서 부진하거나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언제든지 웨이버 공시해버린 뒤 새로운 선수를 데려오는 게 가능했다. 2002년부터 시즌 도중 외국인 선수 교체 시 최대 2회로 한정한다는 제도가 신설되었다.[5] 사실 롯데도 임창용 만큼이나 에밀리아노 기론을 엄청나게 굴렸지만, 롯데엔 말 그대로 날아다니던 펠릭스 호세가 있었다.[6] 야구에 만약이란 없지만 원래 당시 삼성 감독 서정환의 계획은 데이비스를 영입할 계획이었다. 공수주 3박자가 모두 완벽했던 데이비스였기에 좌익수의 구멍을 어느 정도는 만회할 수 있었을 것이다.[7] 첨언하자면 1998년까지만 해도 수준급 중견수 최익성, 강동우 둘 중 누굴 쓸까 고민했었는데, 1999년을 앞두고 최익성은 노장진과의 트레이드로 팀을 떠났고 강동우는 98년 플레이오프 때 입었던 큰 부상으로 이탈해 동시에 가용불가한 상황이 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막판에 이 센터 내야수 출신에 중견수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홀을 선택하게 된다. 물론 홀은 초반 반짝 후 공수 양면에서 망하며 도루 하나만 도움이 되었다.[8] 중간 이적 없이 LG 유니폼을 입고 풀타임을 뛰어 100타점을 기록한 선수는 9년 뒤인 2009년 로베르토 페타지니가 처음이었고, 이듬해인 2010년 조인성이 107타점을 기록하며 우타자/국내선수 최초의 100타점을 기록함과 동시에 LG 한시즌 최다타점을 경신했다. 현재 LG의 한 시즌 최다 타점은 채은성김현수의 119타점.[9] 서용빈은 복귀한 해인 2000년부터 은퇴할 때까지 단 한 번도 WAR 1, OPS 800, wRC+ 100을 기록하지 못했다.[10] 참고로 2015년의 박병호가 전반기가 끝나기도 전에 30홈런을 기록했을 때 6~7월 장타율이 무려 8할이다.[11] 로마이어가 주루플레이가 스미스보다 낫다는 것도 작용했다. 영입 초 LG는 로마이어를 좌익수로 기용했다.[12] 조금 다르면서 비슷한 사례로 1999년 해태에서 뛰었던 트레이시 샌더스가 있다. 샌더스는 40홈런을 치고 OPS .983 wRC+ 145.0을 기록할 정도로 활약했지만, 지극해 애덤 던이 생각나게 하는 OPS 히터였던 탓에 투승타타 성향이 강했던 당시에는 .247의 낮은 타율만 보고 공갈포라고 저평가받았다. 때문에 40홈런을 기록하고도 해태의 영 좋지 않은 재정과 맞물리며 금액 이견으로 재계약을 하지 못했다.[13] KBO에서의 성적만 기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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