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턴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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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대륙군-프랑스 연합군
3.2. 영국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편집]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인 1780년 3월 29일 ~ 5월 12일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찰스턴에서 영국군과 대륙군+프랑스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 영국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조지아 주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지배권을 확보한다.


2. 배경[편집]


1779년 10월 9일. 대륙군-프랑스 연합군이 서배너 공방전에서 패배한 뒤 데스탱 제독의 프랑스 함대가 서인도 제도로 철수하자, 영국군 총사령관 헨리 클린턴 소장은 남부 식민지에 대대적인 군사 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1779년 12월 26일 찰스 콘월리스 소장과 함께 8개의 영국 연대와 5개의 헤센 연대, 포병과 기병대 등 총합 8,5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뉴욕을 떠나 찰스턴을 향해 진군했다. 이 군대는 14척의 수송선과 5척의 전열함, 그리고 9척의 프리깃 함에 의해 수송되었다.

1779년 12월에서 1780년 1월 까지의 기간 동안 북미 대륙 해안의 날씨는 배들이 항해하기에 매우 험난했다. 해밀턴의 함대는 헤테라스 곶 앞바다에서 심한 강풍에 시달렸다. 대부분의 군마가 폭풍으로 죽었고, 배들은 뿔뿔이 흩어졌따. 헤센 용병대를 태운 배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영국 남서부의 코니시 해안에 표류했고, 대포를 실은 배 몇 척은 침몰하거나 해안에 표류한 뒤 대륙군에 의해 포획되었다. 가까스로 폭풍우를 뚫은 영국 함대는 1780년 1월 말 서배너 강 입구의 타이비 섬 앞바다에서 휴식을 취한 뒤 2월 10일 찰스턴으로 출항해 다음날 에디스토 강의 존스 아일랜드에 도착했다.

한편 찰스턴 항구 입구 북부는 설리번 섬의 몰트리 요새에 의해, 남쪽은 제임스 섬의 존슨 요새에 의해 방어되었다. 이곳에 주둔한 수비대는 1776년 페터 파커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의 설리번 섬에 대한 공격을 격퇴한 바 있었다. 그러나 요새들은 이후로 방치되어서 더이상 수비할 수 없게 되었다. 찰스턴 시는 서쪽에서 흐르는 애슐리 강과 동쪽에서 흐르는 쿠퍼 강의 교차 지점에 위치했다. 두 강은 찰스턴의 남쪽 끝에 있는 하구에서 만났다.

클린턴은 제임스 섬에 병력을 상륙시킨 뒤 1780년 3월 7일 와푸 크릭을 건너 찰스턴 맞은 편의 애슐리 강 서쪽 둑에 포대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대륙군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를 맡는 동시에 찰스턴 수비대 지휘관이었던 몰트리 장군의 지휘하에 인근 농장에서 징발된 600명의 흑인 노예를 동원해 도시의 방어망을 구축했다. 그들은 참호를 파고 목책을 건설했으며, 방어선 중앙에 시타델 요새를 설치하고 방어선 전역에 대포 66문을 배치했다.

바다로 향하는 찰스턴의 남쪽 끝에는 대포 16문이 설치된 요새를 세웠고, 애슐리 강둑을 따라 6개의 소규모 요새가 세워졌으며, 쿠퍼 강을 따라 7개의 소규모 요새도 설치되었다. 그리고 수비대는 존슨 요새와 몰트리 요새를 급히 수리해 방어에 동원했다. 그리고 찰스턴 앞바다에 전함을 동원할 수 있는 만큼 모아서 적이 상륙 작전을 감행하는 걸 저지하게 했다. 이 배들 중 몇 척은 프랑스 함대가 철수하기 전에 대륙군이 임의로 구입한 것이었다. 그 후 영국군이 존스 아일랜드에서 출발해 찰스턴 공략전에 착수하면서 찰스턴 공방전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편집]



3.1. 대륙군-프랑스 연합군[편집]


  • 대륙군 지휘관: 벤자민 링컨 소장
  • 프랑스군 지휘관: 루이 뒤포르테 제독
  • 병력: 6,500명, 프리깃 3척, 범선 5척, 스쿠너 1척, 쌍돛대 범선 1척, 갤리선 3척


3.2. 영국군[편집]


  • 지휘관: 헨리 클린턴 소장
  • 병력: 12,800명, 선원 4,500명, 전열함 8척, 프리깃 8척, 갤리선 4척, 수송선 90척


4. 전투 경과[편집]


1780년 3월 초, 링컨 소장은 영국군이 찰스턴에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하자 조지 워싱턴이 일찍이 급파한 이삭 후게르 장군에게 여러 연대와 500명의 기병대를 맡기고 찰스턴에서 쿠퍼 강 상류로 30마일 떨어전 몽크스 코너로 가서 적이 북쪽에서 찰스턴으로 내려오는 경로를 차단하게 했다. 후게르의 나머지 병력 2,600명은 2,500명의 민병대와 함께 약 3마일의 전선 및 요새를 방어했다. 이윽고 3월 말, 영국 군함이 찰스턴 하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륙군은 쿠퍼 강 하구로 이동했고, 몇 척의 군함과 민간 선박들이 강 입구를 가로질러 침몰했으며, 찰스턴에서 슈트 폴리 아일랜드까지 이어지는 로프를 설치해 적 함대가 강을 거슬러 올라오지 못하게 했다. 또한 미군 군함 다수는 대포를 육지로 보내 영국군이 상륙시 화력을 집중하게 했다.

3월 29일, 클린턴 장군의 영국군이 애슐리 강 남쪽 둑에서 건너서 목진지로 진군했고, 대륙군 요새에서 약 1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찰스턴을 에워싸기 위한 참호 공사를 개시했다. 그리고 4월 8일, 영국 함대는 몰트리 요새를 지나 제임스 섬과 찰스턴 사이의 하구에 정박했다. 4월 10일, 포대 설치가 완료되자, 클린턴은 링컨에게 항복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이에 4월 13일, 영국군 포대는 도시를 향해 대포를 발사했다. 영국군의 포격은 자정까지 계쏙되었고 마을 곳곳에 화염에 휩싸였다.

다음날, 링컨은 고위 장교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상황이 절박하다고 보고 찰스턴을 포기하는 걸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맥킨토시 장군은 군대를 이끌고 찰스턴을 떠나 쿠퍼 강 동쪽 방면으로 이동시킬 것을 촉구했지만, 링컨은 떠날지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리길 꺼렸다. 그사이 배내스터 탈턴 대령이 지휘하는 영국군 기병대는 몽크 코너에 주둔한 대륙군을 향해 이동했다. 영국 말들은 수송 도중 헤테라스 곶에서 불어닥친 폭풍으로 대부분 죽었지만, 타레톤은 현지 말로 대체했다. 4월 14일 새벽 3시, 타레톤은 몽크 코너에 자리잡은 대륙군 숙영지를 야습해 적을 단숨에 패주시키고 적의 마차와 보급품과 함께 부하들이 제대로 탈 수 있는 말들을 충분히 포획했다.

이후 영국군은 쿠퍼 강의 동쪽 둑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여 찰스턴에서 6마일 이내까지 내려가 대륙군의 탈출로를 차단했다. 그리고 영국군의 참호는 4월 19일까지 대륙군 방어선에서 250야드 이내 거리까지 나아갔다. 이에 링컨은 다시 전쟁 위원회를 소집했다. 그는 찰스턴을 버리고 후퇴하거나 적에게 항복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자 게즈덴 중령은 주민들이 대륙군에 의지할 거라면서 두 가지 제안 모두 강하게 반대했다. 링컨은 위원회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접었지만 독자적으로 영국에게 항복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나 클린턴은 찰스턴을 떠나게 해달라는 조건에 대해 단호히 거부했다. 이튿날 밤 대륙군은 영국군의 포위선에 기습 공격을 가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영국군은 역습을 가해 몰트리 요새를 공략했다.

5월 8일, 영국군 참호는 대륙군 방어선에 매우 근집했고, 대륙군이 파놓은 도랑은 때마침 장대비가 내리면서 금방 메워졌다. 클린턴은 전면적인 총공격에 앞서 대륙군에게 항복을 요구했고, 링컨 소장은 영국군이 쿠퍼 강의 동쪽 둑과 애슐리 강의 서쪽 둑을 점령하고 영국 해군이 찰스턴 하구를 장악한 상황에서 저항해 봐야 별 도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링컨은 장교들을 설득해야 하니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고, 링컨은 5월 9일까지 기다리겠다고 대답했다. 이후 링컨은 민병대가 석방되고 대륙군 정규병들이 명예롭게 항복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구했지만, 클린턴은 이 제안 역시 거부했다.

이튿날 밤, 양측은 대포로 서로의 진영을 포격했다. 찰스턴 주민들은 갈수록 마을의 피해가 커지자 링컨에게 항복할 것을 청원했다. 결국 링컨은 민병대가 그들의 무기를 포기하고 더잇아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맺고 귀가할 것과 대륙군 정규병 전체가 영국군의 포로가 되는 것을 명시한 영국 측의 항복 조건을 받아들였다. 5월 12일, 대륙군은 그들의 무기를 버린 후 영국군에게 정식으로 항복했다. 민병대는 뒤따라 총기를 넘겨주고 다시는 조지 3세를 상대로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귀가했다. 이리하여 찰스턴 공방전은 영국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5. 결과[편집]


대륙군은 89명이 전사하고 138명이 부상당했으며 5,460명이 포로로 잡혔다. 영국군은 76명이 전사하고 189명이 부상당했으며 찰스턴에 보관되어 있던 머스킷총 5916정, 대포 391문, 부대기 15개, 총탄 33000발, 포탄 8000개 등을 노획했으나 5월 14일 무기 창고 폭발 사고로 상당수를 상실했다. 이 사고로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인근 건물, 감옥, 막사, 교정소 등이 파괴되었으며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들 다수가 사망했다. 영국군은 찰스턴 주민들과 노예들을 동원해 간신히 화재를 진압했다.

어쨌든 영국은 찰스턴을 장악하고 북미 대륙의 남부 일대에서 대륙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으며, 조지아와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이에 대륙 의회는 반격에 나서기로 결정하고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을 파견해 남부 일대의 대륙군을 집결시켜 영국군을 격퇴하게 했다. 이리하여 1780년 8월, 양측은 캠던 전투에서 격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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