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저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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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3호 창경궁
창경궁 저승전
昌慶宮 儲承殿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건축시기
1487년 (창건)
1608년 (중건)
1647년 (중건)
1764년 (소실)

파일:저승전 터로 추정되는 곳.png}}}
저승전 터로 추정하는 곳[1]
1. 개요
2. 위치
3. 이름
4. 역사
4.1. 재건하지 않은 이유
5. 구조
6. 여담
7. 대중 매체에서



1. 개요[편집]


창경궁동궁으로, 왕세자처소였다. 현대에는 남아있지 않다.


2. 위치[편집]


정확한 위치 역시 모른다. 다만 기록을 통하여 유추할 수는 있다. 《궁궐지》[2]에는 ‘건양문 밖에 있는 옛 구현전(求賢殿), 광연정(廣延亭)의 터에 위치했다.’고 적혀있다. 건양문은 창덕궁창경궁의 경계에 있는 으로, 원래 창덕궁의 동쪽 문이었다가 창경궁이 생기면서 두 궁을 잇는 문이 되었다. 그러니까 건양문 밖은 창경궁 영역이다.

또한 시민당의 북쪽에 있었다하는데, 《동궐도》를 보면 시민당의 위치는 현재 낙선재 권역의 동남쪽이다. 낙선재 영역은 지금은 창덕궁이지만, 원래는 창경궁이었다.

이를 종합했을 때, 저승전은 낙선재 일곽의 일부 언저리에 자리했던 듯 하다. 현재 기준으로 보면 창덕궁 영역에 있었던 것이다.

사실, 저승전이 창덕궁인지 창경궁인지는 조선시대 당시에도 애매모호했다. 《명종실록》에서는 저승전을 창덕궁 소속으로 적어두었고#, 후술할 1647년(인조 25년)에 저승전을 다시 지을 때에는 창덕궁수리도감에서 일을 맡았다. 그러나 인조 시기 저승전 재건 기록인 《저승전의궤》에서는 어느 곳도 아닌 그냥 동궁으로만 언급했으며, 《궁궐지》와 《동국여지비고》에서는 창경궁으로 적었다. 사실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 자체가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기 때문에 혼동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이 문서에서는 일단 《궁궐지》에 적힌대로 창경궁으로 분류했다.


3. 이름[편집]


건물 이름이 '저승'이라(...)[3] 이름을 듣고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런 뜻으로 이름지은 건 아니고(...) 세자를 상징하는 글자인 '儲'(버금 저)[4]에 계승한다는 뜻의 '承(이을 승)'을 넣어 지었다. 즉, '다음 왕위를 이을(承) 세자(儲)의 집'이라는 뜻이다.


4. 역사[편집]


창덕궁을 창건한 것은 1405년(태종 5년)이지만, 처음부터 동궁(세자궁)을 세우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성종 시기 원자 이융세자로 책봉하여 창덕궁에 세자가 머물 공간이 필요하자[5], 1485년(성종 16년) 1월에 창덕궁의 동문 인 건양문 밖에 동궁을 짓기로 했다. 그러나 추위가 너무 심해 공사 시작을 미룬 끝에 1487년(성종 18년) 7월에야 완공했다. 이 때 동궁의 처소로 건립한 것이 저승전이다. 마침 시기적으로 창경궁을 창건한 지 얼마 안지났을 때이므로, 대부분의 자재는 창경궁 공사 후 남은 것들을 활용했다. 창덕궁에 딸린 동궁으로 세웠으나, 위치때문에[6] 창경궁 영역으로 들어갔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후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복구했고 한 때 소성대비(인목왕후)가 머물렀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다시 불탔다.

1647년(인조 25년) 8월에 당시 세자[7]가 머물던 임시 처소에 흉물이 묻혀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마침 창경궁을 재건하던 터라 동궁을 제대로 다시 지었는데, 이 때 인경궁동궁인 승화전(承華殿)을 옮겨다 세웠다.[8] 공사는 9월에 시작했으나 추위 때문에 잠시 멈췄다가 다음 해 2월에 다시 시작하여 4월에 완공했다. 공사 중에 실제로 흉물들을 발견했는데 이걸 강빈의 옥사와 관련한 증거물조작하기도 했다.#[9]

이후 숙종 초부터는 왕세자의 부재 시 임금이나 왕비, 대비가 아프거나 재변이 일어날 때# 간간히 머무르는 용도로 사용했다. 왜냐하면 동궁궁궐의 핵심부와는 따로 떨어져서 조용히 머물기 좋았고, 규모도 나름 있어서 생활하는데에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이 안좋아지자 저승전으로 거처를 옮기고 이 곳의 서쪽 별당에서 승하했으며#, 인경왕후도 아플 때 잠시 여기서 머물렀다.#[10] 이후 경종이 이 곳에서 세자 시절을 보냈고, 영조 연간엔 경종의 왕비경순대비(선의왕후)가 머물다가# 후에 사도세자가 거처했다.

1746년(영조 24년)엔 월랑#, 1764년(영조 40년)에는 건물 전체가 불에 타 사라졌다. 이후 신하들이 다시 지을 것을 청했으나, 영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재건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른다.

4.1. 재건하지 않은 이유[편집]


영조는 '조종의 검소하신 덕을 본받아야한다'며 저승전 재건 공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건 명목상이고 실제로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영조 재위기간에 저승전에 머물던 사람경순대비(선의왕후)사도세자이다. 그런데 선의왕후는 영조의 가장 강력한 정적 중 한 명이었으며[11], 사도세자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할 인물이다. 영조 입장에서는 가장 불편한 관계의 사람들이 거주했던 저승전을 다시 짓는 게 아마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5. 구조[편집]


  • 1647년(인조 25년)에 새로 지을 때 제작된 《저승전의궤(儲承殿儀軌)》에 따르면, 총 28칸이며 온돌방이 동, 서에 각각 6칸 씩 있고 대청이 16칸이었다. 그리고 익각[12], , 북쪽에 각각 1칸 씩 딸려 있었다. 월랑은 동쪽에 9칸이었으며 남쪽에도 있었으나 정확한 칸 수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동행각은 2칸, 남행각이 1칸이었다.

이 외에는 어떠한 정보도 남아있지 않다. 그림도 없다.[13]


6. 여담[편집]


  • 혜경궁 홍씨사도세자정신 질환을 앓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선의왕후의 안 좋은 기운이 서린) 불길한 저승전에서 자라고 취선당에서 지은 을 먹은 탓이라 했다.[14]


7. 대중 매체에서[편집]


  • KBS 드라마 스페셜붉은 달》에서는 극의 중심 공간으로 나온다. 영조(김명곤 분)는 경종 독살설을 주장하던 역적들에게 습격당한 후 자신은 관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차원에서, 경종이 세자 시절 살았던 저승전에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김대명 분)를 살게 한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저승전에 첫날부터 장희빈(조미령 분)의 귀신을 보고, 이로 인해 점점 정신이 혼란해지면서 미쳐간다. 아마 이 설정[15]은 위에 언급한 혜경궁 홍씨가 남긴 기록에서 모티브를 얻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로 이 드라마노론 음모론을 전면 부정하고 임오화변의 원인이 사도세자정신 질환광기에 있다고 묘사한[16] 거의 유일한 드라마이다.[17]
[1] 사진 출처 - 카카오맵.[2] 宮闕志. 조선시대 궁궐위치 · 이름 · 연혁 등에 관한 사실기록.[3] 참고로 사후세계를 가리키는 저승은 원래 고유어한자어의 조합으로 지금은 고유어로 분류되어있다. 정확히는 저(이, 그, 저 등의 지칭) + 생(生) = 저생이었는데 발음 변화로 저승이 된 것.[4] '임금에 버금가는 존재 = 세자'라는 뜻이다. '쌓다'라는 뜻도 있다.[5] 당시 성종창덕궁에 거주했다.[6] 위에 언급했듯, 창덕궁 건양문 밖에 지었는데, 창경궁이 생기면서 건양문 밖은 창경궁 영역이 된다.[7] 여기서 말하는 세자소현세자가 아니라 봉림대군이었던 훗날의 효종이다. 소현세자는 1년 전에 사망.[8] 이 무렵 창덕궁창경궁을 재건할 때 다른 건물들도 저승전과 마찬가지로 인경궁의 건물들을 대거 옮겨 지었다. 대표적으로 경훈각(景薰閣)이 된 정전 홍정전(弘政殿)과 선정전(宣政殿)이 된 편전 광정전(光政殿), 그리고 창경궁 통명전(通明殿)이 된, 침전 중 하나인 청와전(靑瓦殿) 등이 있다.[9] 당시 강빈은 ‘역강(逆姜, 역적 강씨)’이란 멸칭으로 불렸다.[10] 이들이 머물던 때는 숙종세자경종이 태어나기 훨씬 전이다.[11] 영조의 왕위 계승을 극렬하게 반대했고, 효장세자가 요절했을 때는 독살의 배후로 지목받을 정도였다.[12] 가장 메인이 되는 집채에 날개(翼)처럼 딸려 있는 전각(閣).[13] 창덕궁창경궁의 모습을 담은 《동궐도》는 영조의 증손자 순조가 재위하던 기간에 그렸다.[14] 취선당은 희빈 장씨처소였던 곳이며 사도세자가 저승전에 머물 당시 주방으로 개조되었다.[15] 사도세자정신 질환과 저승전을 연관지은 것.[16] 사실 이게 정사에 가깝다. 사도세자의 정신질환은 《한중록》에도 자세히 적혀있는 사실이기 때문.[17] 영화 중에선 《사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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