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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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 | Changnyeong Monument


소재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번지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수량/면적
1기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
신라 개국 11년(562)


파일:2016012709020000.jpg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1. 개요
2. 역사
2.1. 해석
3. 국보 제33호



1. 개요[편집]


신라 제24대 임금 진흥왕이 재위 22년(561)에 가야 각국을 물리치고 새로 정복한 창녕군 지역을 직접 순시한 뒤 설치한 비석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진흥왕 순수비 4기 중 하나이다.

다른 순수비 3기와 달리 정식 명칭을 순수비가 아닌 척경비라 하는 이유는 북한산비·황초령비·마운령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제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용을 읽으면 다른 순수비처럼 진흥왕이 직접 행차(=순수)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뿐더러 왕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을 직관, 직위, 소속 순서대로 나열하는 등 다른 순수비와 형식이 매우 비슷하므로, 창녕비도 이름만 '척경비'라고 할 뿐 '순수비'로 분류한다.[1] 이 때문에 한 1990-2000년대에는 '창녕 진흥왕 순수비'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주로 그 당시 출판된 어린이 역사 만화 등에 자주 보이는 표현이다. 현재는 척경비라고 명확히 구분한다.


2. 역사[편집]


경상남도 창녕군 지역을 비롯한 인근 낙동강 유역 일대는 본래 가야비화가야의 영역이었다. 선대 법흥왕에 이어 진흥왕 때 가야 각국을 신라에 병합하기 시작했고, 창녕 비화가야 역시 관산성 전투로 백제의 견제능력이 사라진 554년부터 창녕 척경비를 건설한 561년 사이 어느 때에 신라에게 멸망해 합병되었을 것이다. 창녕 척경비는 신라의 정복사업이 거의 완료되어가던 시기에 만들었고, 이듬해 562년 인근 대가야를 대대적으로 공격해 정복하면서 비로소 신라가 영남 전체를 차지했다.

다른 순수비가 조선 후기에 다시 알려진 것과 달리 창녕 척경비는 존재와 위치가 완전히 잊혔다가 일제강점기던 1914년에야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원래 비석이 있던 위치는 살짝 더 동쪽의 화왕산 아랫자락이었지만, 지금은 창녕 읍내의 만옥정 공원 안으로 위치를 조금 옮겼다.[2] 그리고 원래 척경비 비석이 있었던 위치도 표지판으로 안내한다. 1500년 가까이 야외에서 풍화되다보니 육안으로 글자를 읽기가 어렵지만, 바로 앞 안내판에 해석문이 있다. 주소는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1. 해석[편집]


비문은 오랜 세월이 흐르며 심하게 마모되어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많지만 후반부는 비교적 선명한 편이다. 그 내용은 주로 진흥왕이 창녕 지방을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 왕의 통치이념 및 포부를 간단히 밝히고, 그 뒤 대부분은 진흥왕의 순수(巡狩)를 옆에서 보좌하며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을 직관, 직위, 소속 순서대로 나열하였다. 이는 고대 한국의 지방행정조직, 신분제, 사회조직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 출처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II(1992)

신사년(561년) 2월 1일에 세웠다. 과인은 어려서 왕위에 올라 정사를 보필하는 신하에게 맡겼다. … 일의 끝에 … 사방으로 … 토지가 협소하였으나, … 널리 … 이득을 취하고 수풀을 제거하여 … 토지와 강역과 산림은 … 대등(大等), 군주(軍主)와 당주(幢主), 도사(道使)와 외촌주(外村主)는 살핀다. … 고로 … 우리나라의 논밭▨▨과 산림, 소금, 하천은 … 비록 … 그 나머지 사소한 일들은 … 상대등(上大等)과 고나말전(古奈末典), 법선▨인(法選▨人)과 상(上) … 이로써 … 몸이 벌을 받는다.

이때 ▨▨대등(大等)은 ▨▨▨▨▨지(智) 갈문왕(葛文王)이다. ▨▨▨▨자(者)는 한지벌부(漢只伐部)의 굴진지(屈珎智) 대일벌간(大一伐干), 사탁(沙喙)의 ▨▨지(▨▨智) 일벌간(一伐干), ▨▨의 절부지(折夫智) 일척간(一尺干), ▨▨▨▨지(智) 일척간(一尺干), 탁(喙)의 ▨▨부지(▨▨夫智) 잡간(迊干), 사탁(沙喙)의 모력지(另力智) 잡간(迊干), 탁(喙)의 소리부지(小里夫智) ▨▨간(▨▨干), 사탁(沙喙)의 도설지(都設智) 사척간(沙尺干), 사탁(沙喙)의 벌부지(伐夫智) 일길간(一吉干), 사탁(沙喙)의 홀리지(忽利智) 일▨▨(一▨▨), ▨진리▨차공(▨珍利▨次公) 사척간(沙尺干), 탁(喙)의 이망지(尒亡智) 사척(沙尺), 탁(喙)의 소술지(所述智) 사척간(沙尺干), 탁(喙)의 ▨▨▨▨ 사척간(沙尺干), 탁(喙)의 비질▨▨지(比叱▨▨智) 사척간(沙尺干), 본피(本彼)의 말▨지(末▨智) 급척간(及尺干), 탁(喙)의 ▨▨지(▨▨智) ▨▨▨, 사탁(沙喙)의 도하지(刀下智) 급척간(及尺干), 사탁(沙喙)의 ▨▨지(▨▨智) 급척간(及尺干), 탁(喙)의 봉안지(鳳安智) ▨▨▨이다.

▨대등(▨大等)은 탁(喙)의 거칠부지(居七夫智) 일척간(一尺干), ▨▨부지(▨▨夫智) 일척간(一尺干), 사탁(沙喙)의 감력지(甘力智) ▨▨간(▨▨干)이다. ▨대등(▨大等)은 탁(喙)의 말득지(末得智) ▨척간(▨尺干), 사탁(沙喙)의 칠총지(七聰智) 급척간(及尺干)이다.

사방군주(四方軍主)로서 비자벌군주(比子伐軍主)는 사탁(沙喙)의 등▨▨지(登▨▨智) 사척간(沙尺干)이고, 한성군주(漢城軍主)는 탁(喙)의 죽부지(竹夫智) 사척간(沙尺干)이고, 비리성군주(碑利城軍主)는 탁(喙)의 복등지(福登智) 사척간(沙尺干)이고, 감문군주(甘文軍主)는 사탁(沙喙)의 심맥부지(心麥夫智) 급척간(及尺干)이다. 상주(上州) 행사대등(行使大等)은 사탁(沙喙)의 숙흔지(宿欣智) 급척간(及尺干), 탁(喙)의 차질지(次叱智) 나말(奈末)이다. 하주(下州) 행사대등(行使大等)은 사탁(沙喙)의 춘부지(春夫智) 대나말(大奈末), 탁(喙)의 취순지(就舜智) 대사(大舍)이다. 우추·실지·하서아군(于抽悉支河西阿郡) 사대등(使大等)은 탁(喙)의 북시지(北尸智) 대나말(大奈末), 사탁(沙喙)의 수정부지(須仃夫智) 나말(奈末)이다. ▨위인(▨爲人)은 탁(喙)의 덕문형(德文兄) 나말(奈末)이다. 비자벌정(比子伐停) 조인(助人)은 탁(喙)의 멱살지(覓薩智) 대나말(大奈末)이다. 서인(書人)은 사탁(沙喙)의 도지(導智) 대사(大舍)이다. 촌주(村主)는 혁총지(奕聰智) 술간(述干), 마질지(麻叱智) 술간(述干)이다.



3. 국보 제33호[편집]


문화재청 홈페이지 :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

빛벌가야(지금의 창녕군)를 신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이 이곳을 순시하면서 민심을 살핀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당시 창녕군은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마치 부채살의 꼭지와 같은 중요한 길목이었는데, 진흥왕 16년(555) 신라에 병합되었고, 565년에는 대야주(지금의 합천군)와 합쳐져 비사벌군(比斯伐郡) 또는 비자화군(比自化郡)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비는 목마산성 기슭에 있던 것을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비각안에 모셔 둔 것으로, 자연석의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비문을 새기고, 그 둘레에 선으로 윤곽을 돌려놓은 모습이다.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 일컫고 있으나,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있어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나, 후반부는 명확히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선명하다. 다른 순수비의 내용을 참고할 때 대략 진흥왕이 빛벌가야를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과 왕의 통치이념, 포부 등이 실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반부에 당시 왕을 수행하던 신하들의 명단이 직관, 직위, 소속의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어 당시 지방행정조직, 신분제 및 사회조직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대가야가 멸망하기 1년 전인 신라 진흥왕 22년(561)으로, 이 지역을 가야진출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 왕의 정치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또한 진흥왕 당시의 사실을 기록해 놓아『삼국사기』의 내용을 보완해줌으로써, 이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이해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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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면, 진흥왕 시대에 세운 또다른 대표적 비석인 단양 신라 적성비는 내용상 순수와 전혀 관계가 없다. 단양 적성비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조.[2] 만옥정공원은 창녕군의 이런저런 문화재를 모아놓은 곳이다. 이곳에 창녕 객사, 척화비, 창녕 퇴천리 삼층석탑, 역대 창녕군수 선정비, 6.25 전쟁 창녕지구 전승비 등을 모아두어서 작은 야외 박물관 같다.